한양 동쪽 벌! 명당 따라 왕릉과 유적을 순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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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24. 오전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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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고을학교는 <남양주고을> [프레시안 알림]
 

*강의 마감됐습니다^^

싱그러운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6강은 경기도 <남양주고을>입니다. 한양의 동쪽으로 100리 안에 위치하여 왕릉이 많이 조성된 남양주에서 왕릉을 비롯, 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유적을 순례하며 그곳에 묻힌 이들의 삶과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 고졸한 자태로 서 있다.Ⓒ남양주시

고을학교 제56강은 2018년 6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6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덕흥대원군묘-흥국사-순강원-영빈묘-봉영사-광릉-휘경원-봉선사-점심식사 겸 뒤풀이-사릉-광해군묘/성묘/안빈묘-홍유릉-흥선대원군묘-다산유적지(여유당/다산문화관/다산묘/실학박물관)-남양주역사박물관-수석리토성-서울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남양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6강 답사지인 <남양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한양 동쪽 100리 고을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쳐 분수치서 서쪽으로 그 방향을 틀어 한북정맥을 이루며 대성산, 적근산, 광덕산,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 주엽산으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이어오다가 포천의 축석고개 넘습니다. 그 으뜸줄기는 북서쪽으로 불곡산, 흥복산, 도봉산, 노고산을 지나 장명산서 서해로 숨어들고, 버금줄기는 광릉을 감싸고 돌아 서원천과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주엽산, 천보산, 송산, 깃대봉, 숫돌고개를 거쳐 마침내 수락산에서 힘차게 솟구쳤다가 불암산, 검암산, 망우산, 아차산으로 이어져 광나루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남양주의 산줄기는 한북정맥의 버금줄기의 끝자락을 이루고 있으며 지형은 동북부의 산지와 서남부의 분지로 구분되는데, 중앙에는 천마산과 묘적산이 솟아 있고 북쪽으로 용암산과 운악산이 포천과, 축령산과 서리산이 가평과 각각 경계를 이룹니다. 동남쪽으로는 송라산, 문안산, 운길산이 양평과, 남쪽으로는 조조봉, 적갑산, 봉산이 하남과, 서쪽으로는 불암산, 수락산이 서울과 경계를 이루며 평야는 한강과 왕숙천 하류에 형성된 유역이 전부입니다.

물줄기는 북한강이 남으로 흐르다가 조안면 능내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을 이루고 미음나루에서 왕숙천을 받아 안고 서해로 흘러듭니다.

남양주는 한양으로부터 가까이 있어 도읍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고을로 특징 지워지는데
조선시대 왕릉이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하게 되어 있어 주로 그 역할을 하였기에 고을로서의 특색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강과 왕숙천이 만나는 요충지에 수성리토성이 있고 불암산 정상부에는 석성인 불암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은 '토미재'라고 불리는 구릉의 정상부를 깎아서 만든 반월형의 토성으로서 축성법이 백제의 성터와 유사합니다. 길이 145m의 반달형 토성 안에는 봉화터로 추정되는 높은 터가 있습니다. 성터 주변에서 회흑색의 연질 토기조각과 어골문 계통의 기와조각 등 고구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삼국시대에 백제가 쌓은 토성을 백제가 한강유역을 빼앗긴 후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점령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아차산, 남쪽으로 이성산과 남한산, 동쪽으로 천마산, 북쪽으로 수락산이, 그리고 앞으로는 한강의 미음나루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점령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봉수를 올리는 등 관측과 통신기능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보입니다.

불암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불암산의 남쪽 제2봉인 해발 420.3m 봉의 정상부에 자연지형을 따라 석축을 쌓았으며 성벽의 전체 둘레는 221m입니다. 성벽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나 남쪽과 동쪽의 일부 성벽에는 면석(面石)이 남아 있습니다.

남양주의 진접, 진건 지역은 고구려시대에 골의노(骨衣奴), 통일신라시대에는 황양(荒壤), 고려시대에는 풍양(豊壤)으로 양주와는 별도의 지명으로 불렸습니다.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 936년(태조 19) “후백제왕 견훤에게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입니다.

▲남양주시의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다.Ⓒ문화재청

한양의 선진문화 함께 누려

남양주는 한성백제시대 도성과 접하고 있어 일찍이 수도의 선진문화를 누렸을 것으로 짐작되며 광개토대왕의 한성백제 침공 이후에는 고구려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삼국 간의 본격적인 대립지역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남양주의 진접읍, 진건면 일대는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주(漢州)에 속했으며 759년에는 중앙 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남양주는 이때 한주 한양군 황양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성종 2)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양주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승격하였습니다.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으로 승격되는데 남경은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경 체제의 하나였습니다.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로 격하된 양주는 공민왕 대에 일련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다시 남경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를 단행하여 1395년 양주 일부지역을 한성부로 정하였고 양주는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지양주사로 강등되었다가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고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면서 양주군이라 하였습니다. 1397년에는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466년(세조 12) 목으로 승격되어 군제 편제에 따라 진(鎭)이 설치되었고 연산군 대에는 양주목이 폐지되고 일부가 사냥터로 사용되었다가 1511년(중종 6)에 다시 양주로 복원되었습니다.

왕릉, 왕족 무덤들과 원찰, 사대부 묘들이 즐비

남양주에는 왕릉뿐 만 아니라 후궁, 대원군, 대군 등 왕족들의 무덤과 그 원찰이 있고 사대부의 묘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왕릉으로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단종 비정순왕후의 사릉,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의 유릉 그리고 폐위된 왕인 광해군의 묘와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의 성묘,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묘인 휘경원이 있습니다.

광릉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입니다. 이전까지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에는 쌍분이나 합장 형식으로 하였습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사대석(병풍석)을 쓰지 말라”고 유명하여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었으며 병풍석을 없애고 능을 수호하는 십이지신상도 난간의 동자 석주에 옮겨 새겼습니다. 이렇듯 왕릉이 검약하게 조성됨에 따라 산역에 동원되는 시간과 인력이 6천여 명에서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석재 작업 시 발생되는 인명 피해 및 비용 등이 절감되어 국가재정 및 민폐를 덜게 되었습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종이 승하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친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시킨 다음 스스로 영의정 겸 병조판서까지 맡아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유약한 단종을 밀어내고 선위교서를 내리게 하여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조는 재위기간 동안 왕권 강화와 군제 정비로 국방을 강화하고 서적편찬, 토지제도 및 관제 개혁 등 치적이 많았으며, 만년에는 왕위 찬탈에 대한 깊은 고뇌로 불교를 깊이 믿어서 원각사를 창건했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했으며 1468년 9월 병세가 악화되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정희왕후는 1424년(세종 6) 수양대군과 가례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세조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예종이 어린 나이(14세)에 즉위한지 14개월 만에 단명하자 세조의 맏아들 덕종(예종의 형)의 2남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켰으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7년 동안 하였고 1483년(성종 14) 온양행궁에서 66세로 승하하였습니다.

봉선사는 969년(광종 20) 법인국사 탄문(坦文)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운악사라 하였는데 1469년(예종 1)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로 절 이름을 봉선사라 지어 사액하였습니다. 김수온의 <봉선사기>에 의하면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능을 마련하고 세조의 능침 사찰로서 절을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1551년(명종 6)에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 봉선사는 교종 수사찰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이 일어나면서 비롯된 결과이며 승과를 부활하여 선교 양종의 인재를 시험으로 뽑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551년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 봉은사 주지로, 수진을 판교종사도대사 봉선사의 주지로 임명하여 전국의 선종과 교종사찰을 관장하도록 하였고 식년시와 증광시에서 모두 승과를 보게 하였습니다.

▲흥국사는 신라 원광법사가 창건할 때 수락사라 하였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원당이 되었다.Ⓒ흥국사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

홍릉(洪陵)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입니다. 고종은 1852년(철종 3)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궐 내의 어른인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세에 즉위하였으나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고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총괄케 하여 10여 년간 섭정하게 하였습니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고종은 친정을 하자 대원군과 달리 개방정책을 취해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은 후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또한 재위 44년 동안 왕조의 쇠퇴기에서 내부의 세도정치와 밀려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가 되었고 연호를 ‘광무’로 정했습니다.

1905년(광무 8)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고, 강압에 의한 보호조약의 무효를 선언한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실정을 알려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일제와 영국의 방해로 무산되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으로 친일세력과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였고 67세로 승하하였습니다.

명성황후는 1866년(고종 3)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고종이 친정한 후 정치에 깊이 참여해 실권을 갖고 왕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으로 피신하는 등 역경을 겪다가 1895년 8월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당했습니다. 1897년(광무 1)에 명성황후로 추봉되었으며 고종이 승하하자 청량리 홍릉에서 지금의 남양주시 홍릉으로 천장하였습니다.

홍릉은 기존의 왕릉제도와 달리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에 등극한 관계로 명나라 태조 효릉(孝陵)을 본받아 황제의 능으로 조성했는데 기존의 丁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一’자형 침전(寢殿)을 세웠으며 그 앞에 신도 양쪽으로 거대한 문, 무인석을 비롯해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순으로 동물의 석상을 배치하였습니다.

유릉은 순종황제와 원후 순명효황후 민씨, 계후 순정효황후 윤씨의 동릉 3실의 능입니다.
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고, 1897년(광무 1) 황태자로 책봉, 1907년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었고 창덕궁에 있다가 1926년 53세로 승하하여 유릉에 안치되었습니다.

순명효황후는 1882년(고종 19)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897년 황태자비에 책봉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인 1904년(광무 8) 33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지금의 어린이대공원에 묻히고 유강원(裕康園)이라 하였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유릉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광무 10) 13세에 황태자비에 책봉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강점 이후 왕비로 강등되었고, 만년에 불교에 귀의해 대지월(大地月)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9년 승하하였습니다.

사릉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으로, 군부인의 예로 조성되어 난간석과 무인석이 생략되었으며 복위 후 왕릉으로 승격되면서 모든 석물들을 능제에 따라 다시 조성해야 하나, 당시 가뭄과 기근으로 일부만을 이전대로 증수하여 석양과 석호 1쌍을 추가 배치하였습니다.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 2)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면서 의덕대비로 봉해졌습니다. 1456년 상왕복위사건이 일어나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되었습니다. 1521년(중종 16)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였습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고 숙종이 향사를 행하였습니다.

“나를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 달라”

광해군 묘역은 곡장 안으로 문성군부인 류씨와 쌍분으로 남향하고 있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김씨의 소생으로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이 없자, 선조는 세자책봉을 미루고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피신하면서 평양성에 머무를 때 분조(비상사태로 임시로 조정을 분리하는 일)해야 할 상황에 이르러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1592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습니다.

본래는 맏아들인 임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해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둘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후에 인목왕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지병이 악화돼 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은 재위 중에는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회복하는데 힘썼고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명나라와 협력하는 체하면서 후금에게는 명의 강요 때문에 출병했다며 그들과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계책을 쓰는 등거리 실리외교를 펼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대포를 주조하고 국방을 강화하였습니다.

민생안정을 위해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서적간행에 박차를 가하는 등 문화면에서도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습니다만 왕권 강화를 위해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등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가 빌미가 되어 서인세력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폐위되었습니다.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인조 19) 67세로 서거하였는데, 묘역이 이곳 송능리에 안치된 것은 광해군이 죽기 전에 자신을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 달라”고 유명하여 조정에서 공빈김씨가 묻힌 성묘 아래쪽 오른편 능선에 안장했습니다.

성묘(成墓)는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의 묘인데 공빈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으며 광해군이 세 살 되던 해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능은 성릉(成陵)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다시 성묘로 바뀌었습니다.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묘인데 수빈박씨는 숙선옹주를 낳고 빈으로 봉해져 가순궁에 거처하였으며 근검절약하는 성품으로 칭송을 받다가 창덕궁 보경당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동대문 밖 배봉산 자락에 묘를 쓰고 휘경원이라 하였다가 1855년(철종 6) 인릉(순조의 능)의 천장지를 구하면서 휘경원도 옮기기로 하여 진접읍 순강원 뒤로 옮겼다가 1863년(철종 14)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습니다. 신위는 칠궁 내의 경우궁(景祐宮)에 봉안되었습니다.

대원군으로는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묘가 있습니다.

덕흥대원군 묘역은 쌍분이며 묘역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1573년(선조 6)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영의정 홍섬이 지었으며, 송인(중종의 부마)이 썼습니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제7남이며 선조의 아버지로 9세 때 덕흥군에 책봉되었으며 중형들인 인종과 명종이 왕이 되었습니다. 명종의 세자가 병약하여 후사 없이 일찍 사망하여 1567년 그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왕(선조)으로 즉위한 후 2년 뒤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흥국사는 599년(진평왕 21) 원광법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창건하였고 처음에는 수락사라고 하였습니다. 1568년(선조 1) 선조가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이곳에 건립하면서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고 1626년(인조 4) 흥국사로 바꾸었습니다. 1790년에는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백련사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가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사격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흥선대원군 묘는 원래 1898년 고양군 공덕리에 장사지냈다가 1906년에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되었으며 다시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과감한 국정개혁에 착수하여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외척 세도를 일소하였고 서원을 철폐하여 당쟁의 폐를 없앴습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을 무리하게 펼치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천주교 탄압과 서양의 통상 요청을 거부하는 척화정책을 폈습니다. 명성황후와의 대립으로 1873년에 물러난 후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다시 집권하였으나, 청나라에 강제 납치되어 천진에 4년간 유배를 갔다가 귀국하여 지금의 공덕동에 있었던 아소정(我笑亭)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

대군으로는 이성계의 형제 의안대군 사당과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묘가 있습니다.

의안대군 사당은 조선 개국공신인 의안대군 이화와 그의 아들 완천군, 손자 하령군 등 세 분의 위패를 함께 모셔 후손들이 제향하고 있습니다. 이화는 환조(桓祖)의 아들로 이성계와는 형제간입니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방원)의 난’ 때 정도전 추종 세력을 평정하였고 ‘2차 왕자(방간)의 난’ 때에도 박포 일파를 평정하였으며 1407년(태종 7) 영의정과 대군이 되어 태조의 사당에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능원대군 이보는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원종 추존)의 둘째 아들이며 인조의 동생으로 1632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항전 중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국난극복에 힘썼고,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습니다. 병란 후 청나라가 세자를 인질로 요구 할 때 자신이 대신 갈 것을 주청하기도 했는데 인질로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을 극진히 보살펴 준 것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후궁으로는 태종의 후궁 신빈신씨,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효종의 후궁 안빈이씨, 숙종의 후궁 영빈김씨의 묘가 있습니다.

신빈 묘는 태종의 후궁인 신빈신씨의 묘로 신빈신씨는 1414년(태종 14)에 신령옹주로, 이후 빈으로 봉해졌습니다. 원경왕후가 돌아가자 궁궐의 내명부를 책임지게 되었고,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여승이 되어 정업원에 은둔하면서 태종의 명목을 빌었고 이후 모든 태종의 후궁들이 따라서 여승이 되었다고 하며 태종과 사이에 왕자 셋과 7옹주를 낳았습니다.

순강원은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의 묘소로 인빈김씨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을 낳았으며 1613년(광해군 5) 59세로 승하하였습니다. 1755년(영조31)에 위패를 원종의 잠저인 송현궁에 봉안하고 궁호를 저경궁이라 고쳤으나 1908년(순종 2)에 칠궁으로 옮겼습니다.

봉영사는 599년(진평왕 21) 창건하였고 처음에는 봉인암(奉仁庵)이라 하였는데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1755년 선조의 후궁 인빈 등의 묘가 있던 순강묘소가 순강원으로 승격되면서 이 절을 인빈의 원찰로 삼고 절 이름을 봉영사라고 고쳐 부르고 토지 10결을 내려 설날과 추석에 제사를 모시게 했습니다.

안빈 묘는 효종의 후궁 안빈이씨의 묘인데 묘표는 1694년(숙종 20)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사위인 금평위 박필성이 글씨를 썼습니다. 안빈이씨는 숙령옹주를 낳았으며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갈 때 같이 갔다가 1645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영빈 묘는 숙종의 후궁 영빈김씨의 묘인데 영빈김씨는 김상헌의 현손녀로 숙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인현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되었습니다. 장희빈의 모략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영빈도 함께 호를 깎이고 본가로 돌아왔으며 1735년(영조 11)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 같이 복위되었으며 영빈김씨가 사망하자 어렸을 때 영빈김씨를 어머니로 따랐던 영조는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사대부로는 태종 대의 조말생, 세종 대의 이순지, 세조 대의 한확, 인조 대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묘가 있습니다.

조말생의 묘는 본래 금곡동 묘적산 끝자락에 있었으나 고종의 홍릉이 이곳으로 천장하여 수석동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조말생은 1401년(태종 1) 태종의 총애를 받아 항상 측근에서 보좌했고 1433년(세종 15) 함길도관찰사 겸 함흥부윤으로 여진족의 누루하치를 막아 싸웠으며 예문관 대제학,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도순문사로서 축성을 감독했습니다. 143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44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순지 묘는 부인 영월신씨와 합장한 묘로 한 봉분 앞에 각각 묘비와 상석이 따로 놓여 있으며 신도비는 근래에 건립하였는데 거북 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갖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순지는 조선 초기의 천문학자로 세종의 명으로 역법을 연구하며 정인지, 김담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을 저술하여 조선의 역법을 정비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김담, 장영실 등과 함께 양부일구(해시계)와 자격루(물시계)를 제작하였습니다.

한확 신도비는 비문은 어세겸이 찬(撰)한 것으로서, 비문에 '홍치팔년팔월(弘治八年八月)'이라 적혀 있어 비의 건립연대가 1495년(연산군 1)으로 타계한 지 39년 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확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누이가 명나라 성조(城祖)의 비로 뽑히자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광록시소경을 제수 받았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명의 책봉정사가 되어 귀국하였고 1453년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을 도왔으며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어 1456년 사은사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고, 귀국하는 길에 사하포에서 숨졌는데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습니다.

김상용 묘역은 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묘로 신도비는 비문은 아우인 김상헌이 짓고 대사간 김광현이 전액하였으며 의금부도사 류시정이 썼습니다. 김상용은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옮겨 화를 피했습니다. 인조반정 뒤 판동녕부사에 기용되고 이어 병조, 예조,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하였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빈궁,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문에서 자결하였습니다.

김상헌 묘역의 묘비는 전면에는 김수증이 묘명을 쓰고, 뒷면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1671년(현종 12)에 건립한 것입니다. 김상헌은 1590년(선조 23)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조참의, 대사간, 도승지, 부제학, 육조의 판서, 예문관과 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으며 1636년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은퇴하였습니다. 청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청에 압송되었다가 6년 후에 귀국하고 좌의정에 올랐으며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는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노(大老)라고 존경을 받았고, 165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광해군은 죽기 전에 “나를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명하여 어머니 공빈김씨가 묻힌 성묘 아래쪽 오른편 능선에 묻혔다.Ⓒ남양주시

다산이 태어나고 세상을 뜬 곳

다산유적지에는 생가인 여유당, 다산의 묘, 다산문화관이 있습니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산은 여기서 세상을 떠났고 부인 풍산홍씨와 함께 집 뒷산에 묻혔습니다.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영향을 받아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의 학문에 뜻을 두고 당시의 새로운 학문인 서학(천주학)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1789년(정조 13)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 공서파의 탄핵으로 충청도 해미로 귀양을 갔다가 10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1792년(정조 16) 다시 정언, 지평이 되어 <시경의팔백조(詩經義八百條)>를 바쳤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어 축조계획 중이던 수원 화성의 성제(城制)를 작성해 올렸으며 거중기를 제작하였고 활차 및 녹로(도르레)를 만들어 작은 힘으로 무거운 짐을 움직일 수 있게 하여 화성을 쌓는 역사의 공정을 단축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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