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회와 질병이 더 간섭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육체가 나를 배반하여 내가 나를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전에 삶을 끝냈다. 죽음의 순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 기사를 읽고 나는 너무나 통쾌해 박수를 쳤다. 죽음의 체면이 구겨졌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인간의 굴종을 즐기는 오만한 죽음에게 통곡과 음울한 장송곡 대신 환희의 송가라니!
이길 수 없는 죽음을 이기는 법, 이 역설의 가능성을 구달 박사에게서 보았다. 인생을 마치 야구 선수가 은퇴하듯 그만뒀다. 2군을 전전하며 구차하게 선수 생명을 유지하다 등 떠밀려 유니폼 벗은 게 아니고, 아직 근사할 때 자신의 마지막을 직접 결정했다. 죽음이 인간을 무릎 꿇려 데려가기 전에 인간이 먼저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간 것이다. 죽음의 외적 현상일 뿐인 부재와 소멸에 겁먹지 않는 의연함이 없으면 못할 일이다. 나는 죽음보다 ‘산송장’이 되는 일이 더 두렵다. 살아 있어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게 됐을 때 죽음을 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호흡만 겨우 유지하는 억지 장수까지 평균 수명에 포함시킨 ‘100세 시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우리 인생만 해도 죽음이라는 바윗돌을 등에 짊어지느라 불안하고 초조한데, 사회마저 죽음으로 인한 피로도가 높다. 연명치료에 들어가는 의료비와 인력은 물론이고 과도한 장례 비용과 절차, 묘역이나 납골당 등 시설에 소비되는 제반까지 다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또 무겁게 여기는 풍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와 엄숙함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꾸 외면하고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삶 안으로 불러들여 친해져야 한다.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빈 도심 중앙묘지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느꼈던 청량감과 편안한 휴식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죽음의 슬픔과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을 때,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하는 건강한 생명력도 생겨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데이비드 구달 같은 사례가 생길 수 있을까. 작년부터 시행된 존엄사법이 ‘웰다잉’ 문화 확산의 첫걸음일 것이다. 나는 요즘 한국판 ‘환희의 송가’를 즐겨 듣는다. 인디 뮤지션인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요양원 블루스’라는 곡인데, 경쾌해 어깨가 들썩거린다. 요양원 환자인 한 할머니가 무시로 흥얼거리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편곡한 것이다. “다 살았네. 다 살았어. 나이는 많고 다 살았네. 죽을 날만 기다리니 얼쑤. 어서어서 죽어 저승으로 가서 우리 아들딸 훨훨 날게 해주시어 주여.” 죽음도 환희와 희망이 될 수 있다.
<이병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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