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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

기안84

“[패션왕] 연재가 끝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기안84 1

들어가며

전 패션왕이 될 남자입니다. 소년은 말했다. 하지만 소년에겐 매력매력 열매도, 간지간지 열매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교내 패션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재능은 있었지만 거친 패션의 바다를 항해할 능력도 좋은 배경도 없었다. 욕망의 크기와 가질 수 있는 현실 사이의 거리. 기안84 작가의 웹툰 [패션왕]은 그래서 패션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년 우기명의 상상 속을 밝게 채우던 왕좌의 빛은, 하지만 오히려 그가 서있는 일상의 비루함을 더 선명하게 비출 뿐이다. ‘멋이라는 것이 폭발’했던 [패션왕]의 강렬한 만화적 임팩트와 [노병가], [기안84 단편선]에서 꿈 없는 세상의 민낯을 그려냈던 기안84의 리얼리티는 그렇게 조우한다. 꿈이 있었지만 그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래서 더 허우적대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 과연 그 허우적거림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미처 잃지 않고 있던 꿈에 대한 불씨는 유의미한 결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한 건, 그만큼 우기명이라는 청춘에 우리가 꿈꾸고 또 단념했던 많은 것들이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패션왕]을 연재하며 소년 우기명처럼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었던 기안84 작가와의 대화에서 이 시대 보통의 청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패션왕]을 연재한지 거의 2년이 다됐다. 이 정도의 장편 연재는 처음이지 않나.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전체 스토리의 얼개를 짜고 시작한 게 아니다 보니 아이들 성장에 맞춰 이야기가 전개됐고 그러다 여기까지 흘러왔다. 사실 타이틀이 [패션왕]인만큼 패션을 주제로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나는 내 고집대로 하면서 애들이 수능 보는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우기명이 대학생까지 됐다. 그런데 내가 계획을 짜고 그대로 진행했으면 구성은 탄탄했을지언정 재미가 없었을 수도 있고. 계속 옆길로 돌아 왔는데 그래도 마무리는 만화 타이틀에 맞게 끝내고 싶다.

[드래곤볼]처럼 주인공이 계속 이겨나가는 걸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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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이들이 ‘패션왕’ 토너먼트를 따라 스토리가 진행되고 마무리될 거라 예상했다.
연재를 하며 이쯤에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게 수학여행 에피소드다. 좋아했던 여자애에게 고백했다가 차이고 다른 학교 애들에게 두들겨 맞아 이빨까지 빠지며 나락에서 끝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패션왕]에서는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래서 ‘패션왕’ 대회를 열었는데 내가 그런 방식을 잘 진행 못하더라. 64강에서 우기명이 늑대인간이 되는데 그땐 정말 정신이 나갔던 거 같다. 이게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내 감 따라 한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왜 그랬을까 싶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8강에서 우기명이 동정표를 구하는 대신 토너먼트를 포기했는데 거기서도 완결을 고민했을 거 같다.
거기서 감동을 주고 끝내면 좋은데 막상 그려보니 완결로서의 임팩트가 약했다. 그래서 박혜진과의 연애 이야기를 시작한 거다. 어쨌든 우기명은 박혜진 때문에 패션에 대한 길을 시작한 거니까. 그 동기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박혜진과 관계를 맺는 것까지 가야 한다고 봤다.

완결의 임팩트에 대해 말했는데, 사실 전작 [노병가]나 [기안84 단편선]은 임팩트 있는 마무리와는 거리가 먼 편이다.
극적인 걸 잘 못 그린다. 솔직히 작품의 마무리를 잘 낸 적이 없다. 기술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성향 자체가 그런 면이 있다. 그냥 이 삶이 계속 될 거 같아서 그렇게 완결이 나온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영광스러운 삶을 살진 못하지 않나. 고등학교 때 일진이라고 잘 나가봐야 미래가 막막한데. [드래곤볼]처럼 주인공이 계속 이겨나가는 걸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보니 만화도 그렇게 된 거 같다.

[패션왕] 전에 [신도시 고등학생]이라는 작품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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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볼] 이야기를 했지만, [패션왕]의 토너먼트야말로 천하제일무도대회처럼 주인공이 우승까지 치고 올라가기 좋은 방식 아닌가.
말하자면 거기선 공감이 잘 안 되더라도 좀 거짓말을 해도 괜찮은데, 그걸 잘 못한다. 그래서 그랬던 거 같다. 여전히 [기안84 단편선]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욕구불만에 열등감 있는 캐릭터가 나오는.

하지만 초반의 [패션왕]은 훨씬 경쾌하고 코믹한 분위기였다.
원래 [패션왕] 전에 [신도시 고등학생]이라는 작품을 준비해서 연재 제안을 했는데 안 됐다. 큰일 났네, 돈도 없고 학벌도 없고 뭐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 번만 더 넣어보고 안 되면 공장에서 돈을 벌자고 생각했다. 마침 딱 4회까지 완결된 [패션왕]이 있어서 그걸 제안했는데 이게 받아들여진 거다. 솔직히 오케이가 떨어졌을 때 좋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우기명이 교내 패션왕이 되는 깔끔한 단편인데, 이제 이 뒷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패션왕]이라는 타이틀 밑에 ‘신도시 고등학생’이라는 부제를 달고서 매회 타이틀의 폰트를 줄여서 나중엔 부제만 남게 하는 건 어떨까, 이런 생각.

패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어느새 우기명이라는 고등학생 이야기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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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리려 했던 [신도시 고등학생]은 어떤 내용인 건가.
주인공은 우기명과 달리 못되고 마초다.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던 캐릭터인데 술 먹고 공부도 못하고 집은 어렵고 그런 아이다. 그 또래 못된 남자애의 경우 여자친구가 있어도 자기 욕심 채우고 나서는 마음이 변해서 너 싫으니까 꺼지라고 말하지 않나. 그런 변화의 과정을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경쾌하던 [패션왕]에도 그런 답답한 현실의 무게가 얹힌 걸까.
하다보니까 두 가지가 섞여버렸다. 패션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어느새 우기명이라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실 ‘패션왕’ 대회도 지금 보면 나쁘지 않은 설정이었는데 그걸 쭉 잇질 못하고 엎어버리고서 우기명을 소풍 보내버렸다. 이 나이 주인공의 지금 기분이나 상황에선 놀이공원을 가야 하는 거다. 놀이기구를 타야 하고. 스토리를 짜는 방식이 이상한 것 같다.

전체 구성보다는 캐릭터에 맞춰서 이야기를 짜는 것 같다.
가령 두치는 체대 입시생이니까 얘를 통해 공부 못하는 애가 수능 준비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면 우기명과 엄마 이야기. 여기서 우기명이 방송에 감정 팔이 안 하는 설정으로 에피소드를 끝냈는데 생각보다 깔끔하지 않아서 완결은 못 내고 애들이 졸업할 때 됐으니 졸업식을 그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기명과 박혜진 관계를 매듭짓자 해서 커플로 맺어주니 그 다음에는 대학생이 된 우기명을 보여줘야겠더라. 그런 식으로 일종의 성장 만화가 된 거다.

고등학교는 독자들이 가장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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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 단편선] 때도 그렇고 왜 그렇게 고등학생의 일상에 관심이 많나.
우선 독자들이 가장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지 않나. 사회 나오면 직업 따라 살림살이 따라 다 경험하는 게 달라지니까. 군대 이야기라고 해도 벌써 여자 다수가 빠져나가고. 그에 반해 고등학교는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시기고, 또 성장기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자극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거 같다. 나이 먹고 겪는 일은 재미없지 않나.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도 이벤트가 많았나.
나는 우기명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조용히 반에서 그림 그리고 애들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학교가 공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잘 노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뭔가 어정쩡했다. 바지도 어정쩡하게 줄이고 학교 축제 때 싸움 잘하는 다른 학교 애들이 오면 도망가고. (웃음) 나는 용기가 없어서 별다른 일탈도 못했다. 여자애한테 말도 못 걸었다.

당시 제일 큰 관심사는 뭐였나.
장래 문제랑 이성, 그 두 개지. 아주 먼 미래는 아니고 적당히 먼 미래까지만 궁금했던 거 같다. 이십대 중반의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일단 군대는 가야하겠지. 다녀오면 뭘 해야 잘될까.

웹툰이 가장 좋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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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없었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당시에 [에반게리온] 보고 미술학원 다니는 애들 많았는데, 나도 애니메이션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술학원에 갔더니 만화는 안 가르쳐주고 석고 소묘를 가르쳐주더라. 그걸 하다 보니 서양화과로 진로를 선택하게 된 거고. 뭔가를 딱 정해놓고 시작한 게 아니라 그냥 그때그때 얼추 맞춰서 움직였던 거 같다.

그때그때 얼추 맞추던 중 웹툰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한 것 같나.
군대에 있을 땐 사회에 나가기만 하면 다 씹어 먹을 거 같았는데 (웃음) 나오니 개뿔도 없더라. 당장 학교 적응도 어려운데. 밥 혼자 안 먹으려 열심히 적응하려 했다. 그러다 애들이랑 친해지니 매일 술 먹고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이런 일상이 반복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88만원 세대가 이슈가 되던 시기기도 했고. 그때 딱 웹툰이 눈에 띄었다. 원래는 영상 관련 일을 해보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니까 웹툰이 가장 좋아보였다. 그래서 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으로 38만 원 짜리 태블릿을 사서 그리기 시작했다. 뭘 그릴까 궁리하다가 군대 얘기하면 재밌을 거 같아서 만든 게 [노병가]다.

웹툰을 그리는 건 재밌는 작업이었나.
그릴 때는 재밌게 그렸는데 열어보면 아무 것도 안 되어 있어서 괴로웠다. [노병가]나 [기안84 단편선]은 망한 만화다. 아무 것도 된 게 없다. 별 관심도 못 받고 판권이 팔린 것도 아니고 책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내세울 게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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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더더욱 [패션왕]이라는 작품에 대한 마음이 남다를 거 같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던 인생에 그래도 남들에게 내세울 게 하나 생겼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가. 만화가로 잘 되고 싶었는데 어쨌든 이 일로 밥 먹고 살고 있고. 굉장히 복 받은 거 같다. 정말 옛날 생각하면 악플이 싫다느니 조회수가 어떻다느니 하는 건 배부른 소리 같다. 정작 그걸 누릴 때는 고마운 걸 잘 모르지만.

그런 고마움만큼 마감이 자주 늦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을 것 같은데.
게을렀던 거 같다. 놀았던 건 아니지만 더 쥐어짜면 나왔을 텐데 그걸 안 했다. 그러면서 악순환이 계속됐다. 소재는 안 나오고 마감 늦고 욕먹고 또 소재는 안 나오고. 어릴 때도 만날 지각해서 맞고, 전경에서 복무할 때도 이경(이등병) 주제에 외박 나가서 늦게 복귀했다가 소대 전체가 단체 얼차려를 받은 적도 있다. 정말 안 좋은 습관인데 고쳐야지. 마지막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잘 준비해서 완결 잘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패션보다는 우기명이라는 캐릭터가 중요했던 작품인데 그 아이를 위한 엔딩을 준비한 게 있나.
내 나름으로는 이 아이에게 책임을 져야지. 그래야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테니까. 거짓말을 안 하면서도 행복한 결말을 주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에피소드 마지막에 종종 ‘힘내라 우기명’이라고 말하는데 2년 동안 함께 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거 같다.
애정이 있는데, 그게 없어졌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림을 그려도 우기명을 그리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눈을 그리고 있는 거다. 선이나 신경 쓰고 있고. 다른 만화를 봐도 작가가 캐릭터에 몰입해서 그린 게 있고, 그냥 선만 따는 그림이 있는데 그 중 전자만이 진짜고 후자는 가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느새 그러고 있더라. 마지막에는 좀 더 예전 같은 기분으로, 마치 어딘가 진짜 살고 있을 것 같은 인물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싶다.

진짜 꿈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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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명이 성장한 만큼 본인도 많은 걸 배운 2년이었을 것 같다.
게으르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걸 배웠지. 정말 많이 배웠다. 덕분에 사람 구실도 하고. 만날 집에서 돈 타다 쓰다가 이제는 그래도 어머니 운동화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리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전보단 더 사람 됐다.

즐겁기도 했나.
진짜 꿈같은 시간이었다. 상도 받아보고 TV에 나가기도 하고 길에서 사람들이 알아봐주기도 하고. 너무 과분한 일이다.

이 즐거움을 앞으로도 누리고 싶나.
[패션왕] 연재가 끝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의 과분한 인기와 관심은 연재가 끝나고 한 달이면 사라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네이버에서 당연히 후속작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고, 네이버에서 보기에도 재밌어서 연재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


작가프로필

  • 이름
    기안84 (김희민)
    출생
    1984년 10월 22일
    데뷔
    2008년 웹툰 '노병가'
    데뷔
    네이버 웹툰 '패션왕', 기안84 단편선

발행일

발행일 : 2013. 04. 18.

출처

제공처 정보

  • 위근우 웹 매거진 'ize' 취재팀장

    <드래곤볼>과 <북두신권>을 보면 문제아가 될 거라는 어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만화책을 보며 그럭저럭 멀쩡하게 성장. 동네 글 좀 쓰는 형으로 지내다가 웹 매거진 〈ize〉 취재팀장으로 신분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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