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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신스틸러 이주영 "성별 따로없는 연기 보여줄게요"



[나는 조연배우다-16] "혹시 '몸 값' 봤어요? 진짜 죽여줘요. 롱테이크로 한 번에 찍었다니깐. 그리고 말야, 반전이 기가 막혀요. 감독도 끝내주고, 배우도 끝내주고."

아마도 작년 10월 즈음이었을 것이다. 임승용 용필름 대표와 서울 종로구 서촌의 어느 술집에서 마주 앉은 것은. 타 신문사 선배와 동석한 오붓한(?) 저녁 자리였는데, 그날 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영화가 하나 있었다. 15분짜리 단편 '몸 값'(감독 이충현·2015).

기능 불량이기 일쑤인 전두엽에 잠시 안간힘을 써보자면, "이충현 감독이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절세미남이다" "거기 주인공 이주영 씨 연기가 대박이다" 등등의 칭찬이 그의 입가로 발화하며 테이블 어귀로, 그 위로 어질러진 오색찬란한 술병들 사이로 이리저리 윤무를 췄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몸값'을 볼 수 있는 링크를 손수 휴대폰 문자로 보내주었던 것까지도.

배우 이주영 / 사진=양유창 기자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꼭 챙겨보겠다"는 그날 밤 다짐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렀으니…. 자연히 '몸 값'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바래어갔다. 전두엽 깊은 어둠 속 저편으로 자취를 쏙 감춰버린 채로. 그러다 해는 저물었고, 봄내음 일렁이는 4월이 왔고, 여느 때처럼 인터뷰할 배우를 찾느라 헤매이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 한 후배에게서 이런 조언(?)을 듣게 된다.

"선배, 이주영 배우 만나보는 거 어때요?" "이주영이 누군데?" "아니, 정말 몰라요? '몸 값' 안 봤어요?" '몸' 뭐? 몰라…." 어디서 들어본 작품인가 싶어 짐짓 뜸을 들이던 차, 재차 밀려드는 힐난 아닌 힐난. "아니, 영화 기자가 '몸 값'도 여태 안 봤어요?"

'욱' 하고 발끈하려니 괜스레 민망해지고 그래서 연신 정수리만 긁적이는데, 때마침 아스라한 기억 하나,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아, 맞다, 그 영화!'

그렇게 '몸 값'을 보게 됐다. 소개받은 지 장장 6개월 만. 소문대로 놀랍고도 섬뜩한 영화였다. 화면이 불을 밝히면 정중앙 창가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고생 주영(이주영)의 뒷모습이 나타난다. 배경은 어느 비좁은 모텔룸. 그러다 검은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약속이나 한 듯 들어선다. 아마도 교복인 듯한, 흰 셔츠에 붉은 넥타이, 붉은 치마를 입은 주영이 그를 반갑게 맞는다. 그렇다. 이들은 지금 조건만남, 그러니까 성매매를 하려던 참이다.

카메라가 미세하게 떨리는 가운데 둘의 대화는 수분간 이어진다. 주영은 화면 왼쪽 쇼파에 비스듬히 앉아 앞서 태우던 담배를 이어 태우고, 오른쪽 쇼파에 꾸부정히 앉은 남자는 주영의 '처녀성'을 끊임없이 캐묻는다. 그러다 100만원에서 시작한 '몸 값'은 7만원으로 급전직하하는데, 이상하게도 주영은 괘념하지 않는다. 되레 '몸 값'을 흥정하는 상대의 비루하고도 천박한 모습을 내내 능글맞은 미소로 받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극은 후반부로 접어든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반전과 함께.

단편 영화 `몸 값`(감독 이충현)은 배우 이주영을 영화계 화제의 신인으로 떠오르게 한 그의 데뷔작이다. 15분 롱테이크 원신 촬영과 파격적인 결말이 압권이다. /사진 제공=용필름

'몸 값'에서 이주영이 안겨준 인상은 강렬했다. 외꺼풀에 다소 중성적인 느낌의 얼굴, 단발머리에 심드렁하고도 나른한 무채색 표정, 웅얼대듯 말하는 일상조의 힘을 뺀 연기, 174㎝의 장신이 자아내는 기기묘묘한 프레임 속 움직임. 단연 눈길을 잡아끄는 캐릭터였다. 이날 '몸 값'을 함께 본 어느 시인은 결말부 충격을 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상당히 불쾌한데"라며 이 같은 촌평을 제출한 바다.

"처녀성을 돈으로 사려 하고 처녀성이 아님을 알게 되자 깎으려는 여성성의 몸값, 가해-피해가 역전되면서 산출되는 남성성의 몸값, 그 중의적 의미가 깃든 제목에 탄복했다. 근데 너무 쇼킹한 것 아니냐."

이주영은 과연 미지의 배우였다. 오랜 기간 프로 모델이었고, 일단의 계기로 배우 길에 뛰어들었으며, '몸 값'이 생애 첫 영화라는 게 주어진 정보의 전부라면 전부. 과거 배두나의 신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를 알려면 최소한 장편 필모그래피 하나쯤은 더 추가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러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회는 왔다. 이해영 감독의 '독전'에 그가 조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것도 불가해한 락(류준열)의 친구 농아 남매로.

최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독전`(감독 이해영)에서 이주영은 불법 마약 제조자인 농아 주영을 열연해 호평받았다. /사진 제공=NEW

기대는 엇나가지 않았다.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4)을 리메이크한 '독전'에서 그는 '신스틸러'로 손색이 없었다. 짧디짧은 민머리에 낡고 허름한 구멍 뚫린 셔츠, 무심하고도 냉혹해 보이는, 그 속을 좀체 알 길 없는 표정, 가늘게 뜬 실눈으로 목전의 대상을 금세 파악해버릴 듯한 아우라, 근자에 그 어떤 여배우에게서도 볼 수 없던 강렬한 총격신. 놀라웠다. '몸 값'에서와는 또 다른 그 신선함이.

그런 그를 만난 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어느 찻집에서였다.

최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독전`(감독 이해영)에서 이주영은 불법 마약 제조자인 농아 주영을 열연해 호평받았다. /사진 제공=NEW

-'독전' 얘기부터 할까요. 올해 화제작이죠. 반응이 뜨거워요(5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기준, 365만명을 모아 박스오피스 1위다). 각각의 캐릭터마다 개성이 물씬한데, 그중 주영(이주영)이 압권이에요. 마초남들로 득실대는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카리스마를 지녔달까. 뭔가 중성적인 느낌이 있죠. 배역이 배역인 만큼 부담감도 없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전혀 없었어요. 일단 '마약전쟁'을 오디션 전에 미리 봤어요. 거기 농아 형제가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이걸 리메이크하면 형제 역에 누가 캐스팅될까 궁금했는데, 남매로 바뀔 줄은 몰랐어요. 처음 오디션 본 건 여형사랑 여고생 수정이었어요. 근데 남매 역할이 주어지니 정말 놀랐고 기뻤어요. 부담은 캐릭터 준비하면서 시작됐어요. 아무래도 제 연기 스타일이 그렇거든요. 뭐랄까, 한 듯 안 한 듯한 연기랄까요. 그런데 보셨다시피 극 중 농아는 표현이 커요. 말을 할 수 없으니 몸을 섞어가며 소통해요. 아, 평소 연기 스타일, 말하는 스타일과 반대구나라는 생각이 들고부터 이거 만만치 않겠다, 매력적인 만큼 어렵겠다 싶었어요.

-시작이 반이라고, 차에서 내린 락과 만나는 첫 등장부터 시선을 확 잡아끌더군요.

▷거리낌 없는 느낌을 줘야 했어요. 락과 농아 남매 간에 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려면 약간은 함부로 대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 포인트이지 싶었는데, 그런 게 잘 산 것 같아요. 그리고 이들 대화를 형사들한테 통역해주는 여자가 나오잖아요. 그분이 아주 맛깔나게 잘 해주셔서 더 재밌게 봐주신 게 아닐까 해요.

배우 이주영 / 사진=양유창 기자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예상으로는, '몸 값'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

▷'독전'을 제작하신 용필름 임 대표님께서 재작년에 '몸 값'을 극장에서 트신 걸로 알아요. '용필름의 밤'이라는 송년회에서. 거기 참석하신 감독님 중 이해영 감독님도 계셨고요. 그때 받은 저에 대한 인상이 좋으셨는지 오디션 기회를 주신 거죠. 애초 염두에 둔 거랑 달리 농아 역에 더 잘 어울리겠다며 형제를 남매로 아예 바꾸셨어요.

-본인 연기에는 만족하세요? 몇 회차를 찍었고,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궁금하고요.

▷고생했던 것만큼 잘 나온 것 같아요. 15회차에서 18회차 정도 찍었어요. 처음 준비할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날 봤을 때 완전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조금 궁금증이 드는 아리송한 느낌으로 가자, 남자와 여자의 중간 느낌이면 좋겠다 하고요. 제가 머리도 짧고 키도 큰 데다 볼륨감도 없고 옷도 헐렁하게 입으니 그런 걸 살리면 되겠다 싶었어요.

-최종 버전에서 빠진 장면이 있나요?

▷있죠. 극의 흐름상 군더더기일 수 있으니 뺀 것 같아요. 오빠(김동영)가 손이 잘려 나가요. 선창(박해준)이란 인물한테요. 선창이 저희 작업실(마약 제조 공장)에 찾아왔을 때 화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최종 편집된 거죠. 그리고 제가 '독전'에서 제사 신을 참 좋아하는데, 뒷부분 얘기가 사실 조금 더 있어요. 남매에게 무언가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죠.

-아, 저도 남매의 과거가 궁금해지더라고요.

▷락과 남매의 제사 신을 보면서 홀로 상상해보곤 했어요. 이들의 전사는 과연 어땠을까, 어떤 삶을 함께 견뎌왔을까 하고요. 범죄 집단에 속해 그걸 업으로 사는데, 이들은 가족처럼, 제일 친한 친구처럼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고 의지하면서 살아갔을 것 같더군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끈끈한 버팀목이었을까, 이토록 무서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추측해보게 되고요.

-수화 얘기로 가보죠. 상당히 자연스럽더군요. 연습을 열심히 하셨구나, 그런데 어떻게 연습했을까, 내심 궁금했어요.

▷3~4개월 연습했어요. 동영이(이주영 배우가 한 살 위다)랑 같이 충정로에 있는 수화센터를 1~2개월 다녔어요. 이걸 연극처럼 딱 맞춰 가지 않으면 촬영장에서 아무래도 헤맬 것 같았거든요. 처음엔 손이 움직이는 모양 위주로 습득을 했어요. 그런 걸 하면서 나머지는 각자 다큐멘터리를 찾아본다든지, 청각장애인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그랬죠. '트라이브'(2015·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작)라는 영화를 많이 참고했어요. 청각장애인들이 나오는데, 자막 없이 수화로만 대화를 하거든요. 그리고 '나는 귀머거리다'라는 웹툰도 봤죠. 그분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배우 이주영 / 사진=양유창 기자

-극 중 수화를 하면서도 소리를 내시더군요.

▷제가 배우기로, 청각장애인들 중 사회성이 있는 분들은 대체로 소리를 잘 안 낸데요. 아시다시피 일반 청인들한텐 이상하게 다가올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는 분들은 소리를 거의 안 낸다 하고요. 반면 옛날 분이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면 소리를 많이 낸다고 해요. '독전'의 농아 남매는 폐쇄적인 곳에서 거칠게 남 신경 안 쓰고 사는, 어떤 면에서 사회 부적응자잖아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소리 디렉션을 받고 그런 방향으로 연습했죠.

-마약 제조 신도 흥미롭게 찍혔어요. 극 중 형사들이 "우리는 박카스인데 쟤네들은 약빨았잖아"라고 말할 때 객석에서 다들 폭소하더군요. 그런 대사도 재밌는데, 신나게 음악을 틀어놓고 30시간 내리 마약을 제조한다는 설정 자체도 눈길을 끌더라고요.

▷일단은 농인들이 음악을 듣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상상이 잘 안 갔어요. 그것도 수화를 공부할 때 많이 물어봤는데, 그들은 진동으로 음악을 느낀데요. 그래서 엄청 크게 틀고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하는 설정이 들어간 거죠. 사전에 유튜브로 청각장애인 분들이 춤추시는 영상을 참고했어요. 제가 춤을 잘 추는 편은 아니지만 평소 추는 대로 해야겠다 싶었어요. 약 제조는 제가 아무것도 모르니 '브레이킹 배드'(2012~2013)라는 미국 드라마를 참고했고요. 거기에 약을 제조하는 게 디테일하게 나오거든요. 그러면서 아, 얘네들은 이렇게 만들겠지 혼자 상상하며 놀이하는 느낌으로 했어요.

'독전'에는 매우 인상적인 신이 있다. 시점은 이미 습격당한 공장에 형사들이 들어선 직후. 내부는 이미 한바탕 파고가 휩쓸고 가버려 그야말로 난장이다. 비릿한 죽음의 냄새가 음습한 폐허를 감싸고 흐르던 찰나. 농아 남매가 돌연히 기습한다. 마치 유령처럼, 공간을 자유자재로 미끄러지듯 오가면서. 그렇게 형사들과 총격을 주고받는다. 쾌속으로 숏이 교차하는 가운데 저 멀리 화면 후경에서 주영의 모습이 잠시 드러난다. 어딘가 무심히 노려보는 듯한 서늘한 표정. 일말의 긴장과 두려움 따위는 서려 있지 않다. 그런 그가 전면을 향해 쌍권총을 수차례 난사하더니 프레임 왼쪽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그렇다. 바로 이 신을 말하려던 것이었다. 강렬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지는, 더 나아가 귀기까지 느껴지는 신. 더욱이 놀라운 건 이것이 NG 없이 한 번에 찍혔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독전'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신 중 하나예요. 마지막에 쌍권총을 쏘며 사라지는 그 찰나적 순간 말이죠.

▷(웃으며) 제가 총을 한 번도 쏴본 적이 없어요. 매일 사격장에 가고 액션스쿨에 다녔어요. 이렇게도 움직여 보고, 저렇게도 움직여 보면서. 제가 여자이고 동영이랑 달리 총을 쏴본 경험이 없으니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사실 걱정이 많았던 신이에요.

-리허설은 얼마나 했어요?

▷한 시간 정도요. 양평에 있는 세트장에서 공포탄 장전된 실제 권총으로 서너 번 정도 했어요. 한 번 찍고 나면 다시 세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라 NG를 최소화해야 했죠. 제가 옆으로 쓱 움직이며 사라지잖아요. 밑에는 유리파편이 어질러져 있고 아주 난리가 나 있죠. 그 가운데 제가 양손에 쥔 총을 쏘면서 옆으로 이동해요. 사실 리허설 때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밑을 바라봤어요. 땅땅땅, 총을 쏘면서 밑을 자꾸 보게 되더라고요. 감독님이 처음엔 그게 흡족스럽지 않으셨나봐요. 센 캐릭터인데 아래를 보니까요. 그러다 결국엔 내려놓으셨는지, 아 안되겠다 그냥 가보자 하셔서 간 게 그 신이에요.

-NG 없이 한 번이라. 총이 굉장히 무거웠을 텐데요. 더군다나 양손으로 쏴야 하고, 반동도 심했을 테고요.

▷맞아요, 무겁기도 무거운데 소리도 크고 반동도 굉장했어요. 귀마개를 껴야 했죠. 주영이 왼쪽으로 사라지기 전에 세 발 정도 쏘는데요. 다행히 집중하면서 바닥을 안 봤나봐요. 그리고 그 순간 햇볕이 유리창을 지나 쫙 바닥으로 쏟아졌어요. 그림이 예쁘게 나왔던지 감독님이 흡족해 하셨어요.

-모델 출신이시잖아요. 유유히 프레임 왼쪽으로 사라지는 자태가 뭐랄까, 서늘하면서도 우아했다고 해야 하나. 워킹에 워낙 단련돼 있어서 한 번에 갈 수 있었던 건 아닌지.

▷(폭소하며) 아, 그런가요? 게처럼 옆으로 막….

-그런데, '독전' 결말을 두고서도 말이 많죠. 설경이 넓게 펼쳐진 노르웨이 산장 내부에서 원호(조진웅)와 락이 마주 앉아요. 그러다 대화가 이어지고, 산장 정경을 바라보는 숏으로 화면이 바뀌며 카메라가 저 멀리 천천히 물러나요. 그러다 총성이 한 차례 들려오죠. 모호하면서도 열린 결말이기에 갖은 추측과 해석이 나오고 있어요.

▷'독전'이 오락성이 짙고 재밌잖아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드센 캐릭터들이 계속 충돌하는데 도대체 저들은 어떠한 삶들을 살아왔을까 . 마지막에 "넌 행복한 적 있냐"라는 대사가 있잖아요. 정말 저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행복이란 것을 생각하며 살아왔을까, 그냥 살아지니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어요. 그러다보니 결국엔 누가 죽고 죽지 않고를 떠나 '새드엔딩'처럼 다가오더라고요.

그는 1987년 부산 태생이다. 1년이 안 돼 상경하고선 도봉구 창동에서 쭉 자랐다. 또래들에 비해 키가 큰 데다 빼빼 마른 소녀였다. "어림잡아 스물다섯 살까지도 자라더라"고 했다. "콤플렉스였죠. 귀여움 받고 싶어도 나이에 비해 조숙했으니까." 그러다보니 소녀의 곁엔 늘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이 따라붙곤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어릴 때부터 패션잡지라는 패션잡지는 모조리 탐독했다. 보그걸, 엘르걸, 신 디 더 파키 등 안 본 것이 없다. 예쁜 옷이 좋았고, 사이사이 활자들이 좋았다. 그러다 10대 소녀는 서서히 패션 모델이라는 꿈을 머금게 된다.

배우 이주영 / 사진=양유창 기자

-모델 일은 언제부터 했어요?

▷고 2 때부터요.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자연스레 에이전시를 알아보게 됐어요. 모델은 고교생도 하잖아요. 아빠랑 회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봤어요. 그러곤 3개월 수료 과정을 밟았죠. 아, 근데 모델 업계가 굉장히 치열하더라고요. 힘들었어요. 쇼마다 오디션을 봐야 해요. 일단 전속이 돼 마음이 처음엔 붕 떴는데, 현실은 잔인하더라고요. 그때그때 탈락 여부가 가려지니까요. 번번이 떨어졌어요. 그렇게 고배를 계속 마시다 보니 마치 제 존재가 부인당한다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전속모델이 된다고 다가 아니군요.

▷그럼요. 달리기를 한다면 출발선에 이제 막 선 상태에 불과해요. 제가 워킹연습만 3년가량 미친 듯이 했어요. 정말 인생의 쓴맛은 그때 다 본 것 같아요. 제가 목표 지향적인 성격이다보니 안 풀리는 것이 있으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목표 지향적 성격이라….

▷이런 거죠. 3개월 정도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만 한 적이 있어요. 욕심이 많았어요. 쉬어야 하는데 일이 들어오면 절대 거절 안 하고 계속했죠. 그러다 '번아웃 증후군'이 와요. 왜, 사람이 휴식을 취해야 계속 뭔가를 할 수 있잖아요. 일과 휴식의 밸런스랄까, 그런 것에 그땐 정말 무지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꿈의 노예가 돼버리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겠다라는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대학은 동덕여대 모델과로 진학하셨죠. 프로 모델로 일한 건 2학년 때부터라고 들었어요. 프로 모델로 무대에 오르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처음에는 너무 떨리죠, 뭘 하고 온 건지도 모르겠고, 사진이 찍힌다는 것에 대해 이해도가 부족했고요. 그런 상태로 지속하다 보니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조금씩 나아지려고 줄곧 노력을 했죠. 잘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그럼에도 노력에 대한 보상은 적었어요. 20대 초반은 더더욱 좌절의 연속이었고요. 애초 마음먹은 게 이 길이 맞나, 회의가 왔죠. 처음에는 화려하고 예쁘고 대단해 보였는데, 날이 갈수록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반면에 이번에 같이 출연한 강승현 배우도 모델 출신이죠. 실례되는 얘기이지만 강 배우는 모델로서 크게 성공한 드문 케이스인데.

▷승현이는 같은 학교 같은 학번이에요. 스무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좋아하는 친구예요. 대단한 친구예요. 2008년에 '포드 슈퍼모델 오브 더 월드' 1위를 했죠. 아시아인 최초로. 사실 그 대회를 제가 먼저 나가자고 권했던 거였어요. 지원 마지막 날 승현이가 지원했고 1위까지 했고요. 그런 승현이랑 이번에 '독전'에 함께 캐스팅되니 참 신기하더라고요. 서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와, 너랑 인연인가봐, 우리가 전생에 부부였나봐' (웃음).

친구만큼은 아니었으나, 모델 일이 꼭 안 풀리기만 했던 건 아니다. 이십대 중후반 무렵. 뉴욕과 밀라노, 싱가포르 등 세계무대에도 여러 번 섰다. 대부분 현지 에이전시를 손수 찾아가 오른 값진 무대들이다. 일단 기회만 생기면 지원 메일부터 넣었다. 그러다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회신이 오면 짐 싸서 곧바로 출국했다. 영어 한 줄 내뱉을 줄 몰라도 구애될 건 없었다. 그렇게 선 무대 중 하나가 세계적 브랜드 캐롤리나 헬이 주최한 싱가포르 패션쇼. "영어는 하루 7~8시간씩 단기로 연습해 기초회화만 갖춰 갔죠. 마침 결혼한 친구가 살고 있어서 신세를 좀 졌고요."

-슬슬 궁금해지네요. 배우라는 길에 대한 관심이 언제부터 싹튼 건지.

▷어릴 때 패션잡지만 즐겨 읽은 건 아니에요. 영화랑 영화잡지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비디오 가게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때면, 처분하는 비디오를 일일이 사서 모으기도 했고요.

-그 나이대부터 활자를 좋아하기가 쉽지 않은데.

▷6학년 때였나요. 남북한비교문이라는 백일장에 나간 적이 있어요. 남북 사회를 비교하는 책을 읽고 이에 대한 글을 쓰는 거였어요. 그때 최우수상을 받았죠. 글쓰기를 좋아해요. 문예창작과를 복수전공했거든요. 뭐랄까, 글을 쓰면 마음에 얹힌 게 해소되고 뻥 뚫리는 것 같아요.

배우 이주영 / 사진=양유창 기자

-어떤 영화를 좋아해요?

▷장준환 감독님의 '지구를 지켜라'(2003)를 굉장히 좋아해요. 독특하잖아요. 아, 내가 이런 걸 좋아하네, 하고 제 취향을 알게 해준 작품이에요. 코믹하면서도 슬프고 어디로 튈 지 모르고, 만화처럼도 다가오고. 그리고 '어톤먼트'(2008). 존 라이트 감독님이 인간 심리를 되게 세심하게 표현하는구나 싶더라고요. 또 '룸바'(2000)요. 화면이 멈춰 있고, 그러다 바뀌는 방식부터 색감이 아기자기한 게 참 예뻤어요.

-배우로 데뷔한 직접적 계기는 뭔가요?

▷모델 일에 대한 회의, 우울감 등이 있었어요. 다른 길을 생각한 게 27~28세 즈음이었는데, 그때 연기학원을 1년간 다녔어요. 근데 그걸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아,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할까. 내가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경쟁력을 보여줄까. 그냥 프로필을 보내는 것으론 부족할 것 같았어요. 그러다 아예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기로 했죠.

-목표 지향적이라는 게 맞네요(웃음). 독창적이기까지 한 걸요. 어떤 영상이었던 거예요?

▷평소 혼자 연습하며 찍은 게 있었고요. 제가 이십대 중반에 현대미술을 하는 친한 언니가 전시영상이 필요하다고 해서 몇 번 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외계인과 관련한 독특한 영상이었는데, 그때 찍은 영상까지 합쳐 3~4분짜리로 직접 편집했어요. 제 다양한 표정과 말투, 분위기가 묻어날 수 있게요. 사실, 연기학원을 다닌 것도 당시 전시 작업할 때 도와준 분들의 권유가 있었던 거예요. 영화계 분들이셨는데, '너 연기 한 번 해봐, 괜찮다'고 추천해주신 거죠.

-아, 이제 아귀가 맞네요. 그걸 이충현 감독한테 보낸 거군요.

▷맞아요. 이 감독님이 필름메이커스에 배우를 찾는다는 글을 올린 걸 본 거죠. 메일로 보낸 영상이 인상 깊으셨나봐요. 사진에선 전해지지 않는 연기적 느낌과 스타일이 묻어나니까. 감독님이 그러시대요. "대충대충 웅얼웅얼거리는 말투가 좋았다, 인상적이었다"고요.

-15분 원신 롱테이크이기에 단편이라 해도 촬영이 만만찮았겠어요.

▷회차가 1회만 추가돼도 제작비가 2배로 늘어요. 그래서 저희 미션은 하루에 끝내는 거였죠. 사전에 2개월 정도 주에 한 번씩 3~4시간 만나 연습했어요. 그렇게 최대한 입에 잘 붙는 대사로 감독님이 대본을 수정하고 그렇게 두 달을 보냈고, 촬영 전날에도 가평 촬영지에서 리허설을 했어요. 다행히 애초 목표대로 하루 만에 끝마칠 수 있었죠.

-'몸 값' 여파가 상당했죠?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각종 국내외 영화제 단편 부문 수상은 휩쓸었던 걸로 알아요. 이후 캐스팅되는 데 끼친 효과가 작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근데 정말로 '몸 값'이 공개되고 1년 반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영화가 영화제를 한참 돌던 시기였는데요. 신기한 게 이후부터 마치 바이러스 퍼지듯 저를 알아봐주는 관계자 분들이 늘더라고요. 이제 겨우 첫 영화인데 팬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러다 '독전' 오디션을 보게 됐고, 드라마 '라이브'(지난달 종영한 tvN 드라마)에도 캐스팅됐고요.

그렇게 지금에 이른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이 정도면 그야말로 탄탄대로. 개중 눈여겨볼 것이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지금껏 소화해낸 그의 배역들 면면이다. 장기밀매업자(단편 '몸 값'), 네발자전거 서커스단원(단편 '걸스온탑'), 싸이코패스 살인마(단편 '코코코 눈!'), 마약 전문 기술자('독전') 등등 어느 하나 범상치가 않다. 차기작도 마찬가지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장편 '나와 봄날의 약속'(2018)에서 그가 맡은 건 외계인.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충무로가 그에게 거는 기대감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여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여성 캐릭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다. 다양한 빛깔의 여배우를 마주하기에 이 나라 영화계의 풍토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저 이주영이라는 배우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하나의 '가능성'이자 '리트머스지'처럼 여겨진다. 감사한 일이다.

이 같은 이야기를 중구난방 늘어놓으니, 이주영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도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왜 여자 캐릭터가 부족할까를 생각해보면요. 이 사회가 아직도 남성 중심 사회라고 하잖아요. 최근 '히든 피겨스'(2017)라는 영화를 봤어요. 되게 놀란 게 유색인종 화장실이 미국에서 사라진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여자들이 사람 취급을 못 받고 도구화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는 거죠. 지금 이렇게 사회에서 여자들이 누리는 권리들이 100년 전만 해도 말도 안 되는 거였다는 거죠. 이 모든 걸 상기할 때면 흠칫 놀라요. 제가 보기에, 아마도 영화계 또한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변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다고 전 성별에 대해 선을 긋고 싶지는 않아요. 배우로서 성정체성에 대한 거부감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달까요. 이를테면, 농아 남매의 경우만 봐도 극 중 주영이 남자처럼 센 캐릭터잖아요. 저는 말이에요, 제 여성성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강박도 욕망도 없어요. 그렇다고 남자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선을 긋지 않으려고 해요. 좋은 캐릭터로, 저만의 개성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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