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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작가

이채은

“내 취향의 이상적인 남성을 그린다”

이채은 1

들어가며

네이버 웹툰 ‘베스트 도전’ 코너는 만화계의 ‘라 마시아’(축구팀 FC 바르셀로나의 유스 시스템)가 될 수 있을까. [트럼프]의 정식 연재 소식을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스트 도전’의 작품까지 챙겨보는 열성 독자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그 시기의 [트럼프]는 괴물 급의 압도적 조회수를 자랑하던 작품이었다. 과연 이토록 강력하던 유망주가 가장 치열한 프로들의 리그에서도 반짝일 수 있을까. 현재로서 즉각적인 대답은 유보해야 할 거 같다. 흥미로운 세계관의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조금씩 거대한 세계관을 드러내며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트럼프]의 현재 인기는 분명 압도적이진 않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라 마시아’가 배출해낸 최고의 천재였던 메시도 처음에는 교체 멤버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가 현재에 이르렀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서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뛸 수 있느냐며 그 기회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느냐다. 하여 앞서의 ‘유보’라는 말에는 실망보단 가능성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이 데뷔작으로 ‘베스트 도전’을 초토화시켰던 이채은 작가가 이제 이십대 초반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가 자신의 작품 방식에 대해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가장 좋은 유망주는 이른 나이에 완성형이 된 선수가 아니라 미래를 미처 가늠할 수 없는 미완의 대기인 법이니까.

2013년부터 [트럼프] 1화를 정식으로 연재했다. 이번 해에 대한 기분이 남다르겠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인 것 같다. 2012년에 ‘베스트 도전’에서 정식 연재로 가고자 노력할 때 초심이 느슨해지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부담감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즐기듯 연재하자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 연재 제의 메일을 받았을 땐 낚시성 메일인줄 알았다

이채은 2

지난해 마음이 약해졌던 건 역시 정식 연재로 넘어가지 못해서였을 텐데.
당시 ‘베스트 도전’에선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성이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잘 안 되니까 힘들었지. 운도 안 따라줬겠지만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부족해서 못 넘어가는 것이었을 테니까. 그게 가장 심적으로 힘들던 부분이다. 특히 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학과가 아닌 디자인과 출신이라 학교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없어서 더 막막했다. 나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었고.

그러다 모 작품이 신인 지원작 여건에 맞지 않아 탈락하면서 드라마틱하게 정식 연재가 결정됐다. 기분이 어땠나.
난리도 아니었지. 휴대전화로 네이버 앱을 실행했는데 ‘네이버 만화 서비스입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왔다. 처음에는 낚시성 메일인줄 알았다. 전에 친구들이 장난으로 ‘웹툰 정식 연재를 축하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적도 있어서. 그런데 메일을 확인하니 확실히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건 진짜이겠구나 싶었다. 밤 11시 쯤 메일을 확인했는데 새벽 3시까지 뭐라 답장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다음날 아침에 보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휴대전화 번호만 시크하게. (웃음) 나름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사실은 밤에 소리 질러서 자고 있는 가족들을 다 깨웠었다.

이걸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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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베스트 도전’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정식 연재가 본인에게 가장 큰 목표였던 건가.
처음에 ‘베스트 도전’에 연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해보니까 진짜 적성에 맞구나, 이걸 계속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독자들이 봐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데 재밌어 해주고 관심을 보여주니 너무 재밌었다.

연재 전에는 미처 몰랐다면 처음엔 무슨 생각으로 시작한 건가.
대학 디자인과에 진학할 땐 좀 더 크리에이티브한 활동을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학과가 실망스러웠다기보다는 내가 이 일에 대해 잘 모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어쨌든 나는 졸업해서 회사에 소속되는 일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일을 하고 싶어 직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집에서 무기력하게 쉬면서 예전에 좋아하던 웹툰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노블레스]나 하일권 작가님 작품들. 그렇게 한 달 정도 웹툰만 보다보니 이걸로 내가 원하던 창작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다.

원래 만화 그리는 거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
중학교 때 혼자 취미로 스프링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학교에서 그리면 애들 눈에 띄니까 집에 와서 그렸는데 방학 때는 노트 세 권 가량을 그림으로 채웠다. 스토리가 있는 만화가 아닌 캐릭터의 눈만 있고 얼굴만 있는 진짜 그냥 그림으로만.

내가 그린 캐릭터 중 이상형은 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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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도전’에서도 높게 평가 받던 게 예쁜 작화인데 그때부터 본인의 스타일이 만들어졌나.
예전부터 잘생기고 예쁜 그림을 그리려 했다. 내 이상형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 남자 캐릭터만 주구장창 팠고, 그래서 여자를 잘 못 그린다. (웃음) 항상 얼굴 먼저 그리다보니 몸의 비율이 점점 길어졌는데 조금씩 그림이 손에 익다보니 신체 비율이 팔등신에 맞춰졌다. 내 눈에 만족스러운 남자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서 계속 그림에 욕심을 냈다.

[트럼프]에 나오는 수많은 꽃미남 중 그럼 누가 가장 이상형에 가깝나.
당연히 카신이지. 책임감이 강해 친구의 아들인 히아센을 맡았으면서도, 무조건 오냐오냐 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기준으로 키우려고 하는 그런 사람. 캐릭터를 만들 때도 우선 디자인부터 하고 그에 맞는 성격과 사연을 만들었다.

그런데 캐릭터가 모두 미남이 될수록 캐릭터마다의 개성을 부여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런 문제가 있다. 컷을 그릴 때마다 채색을 안 하면 누가 누구인지 나도 구분이 잘 안 된다. 내 취향의 이상적인 남성으로만 그리다보니 한정적인 게 있다. 턱은 브이라인에 눈은 찢어졌고 코는 다들 높다. 거의 눈썹과 미묘한 분위기로 구분하고 표현하고 있다. 입 모양도 조금씩 다른데, 노리는 길게 찢어진 입이고 란은 입이 작고 카신은 메롱 하는 것 같은 모양이다.

그런 디테일도 작화가 늘어야 더 다양해지는 걸 텐데.
연재를 할수록 잘생긴 모습에만 집착하는 면이 있다. 좀 확 깨는 표정도 그려야 하는데 그게 오히려 옛날보다 안 되는 게 있다. 대사 없이도 그림만 보고도 이해할 수 있게 그려야 하는데. 어떤 타협점이 필요한 게 있다.

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게 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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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작품보단 그림 위주로 연습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별다른 습작 경험 없이 [트럼프]처럼 스케일 큰 판타지를 기획한 것도 흥미롭다.
중학교 2학년 때, 외계인이나 귀신이 분명 있을 거 같은데 왜 우리 눈에 띄지 않을까 생각해봤었다. 왜 못 만나는 걸까. 그건 둘 사이의 세계에 시간차가 있어서 서로 만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0.8초 전의 세계에 그들이 있다는 설정에까지 미쳤다. 그러다 이번에 판타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 세계관을 접목하게 된 거다.

스토리와 세계관 중 세계관이 먼저였던 건가.
그렇지. 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게 신화였다. 그리스 신화, 수메르 신화, 북유럽 신화 같은 걸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그래서 세계관을 먼저 짜놓고 그에 맞춰 인물과 사연을 넣은 거다. 프롤로그에서 설명했던 세계관이 결국에는 스토리 전체에 영향을 끼칠 거다.

원래 신화에 관심이 있었나.
원래 7대 미스터리 같은 그런 거 좋아한다. 초자연적인 것들. 또 언니가 디지털 콘텐츠과를 전공해서 신화 공부를 많이 했다. 언니 통해 듣기도 하고 영화 [토르]처럼 신화에서 파생된 콘텐츠를 접하기도 하며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고 마니아처럼 책을 판 건 아니고. 차라리 모를 때가 더 낫다고, 이것저것 참고하게 되면 오히려 기존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말을 듣게 될 거 같다.

그 큰 세계를 작품 안에서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중요할 텐데, 현재 구성을 보면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풀어내며 전체 그림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듯하다.
그러려고 했는데 잘 안 되고 있다. ‘베스트 도전’ 있을 때도 이것저것 떡밥을 많이 던졌다가 수거하려니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리메이크를 하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일을 벌이려 했는데 쉽지 않다. 나 스스로 이 떡밥을 어떻게 회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면 예리한 독자 분들은 ‘작가가 이걸 어떻게 회수하려는 거지’라고 얘기하더라.

이제 대중적인 코드를 고민해야 한다

이채은 6

앞서 말하기도 했지만 좀 막히는 기분이 들 때 도움 청할 사람이 없어서 힘들 때도 있겠다.
꼭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옆에서 조언을 해주면 정말 좋겠는데 주변에 만화를 그리거나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없다. 대학 다니기 전에는 그림 그린다는 사실을 숨겼었고, 대학에선 여대라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나처럼 과거를 숨기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건데. (웃음)

정식 연재를 시작하며 더 힘들어진 것도 있나.
다른 작가님 작품이 ‘베스트 도전’에서 정식 연재로 넘어가면 독자 반응이 달라지는 걸 봤었다. 아무래도 직접 찾아서 만화를 봐주는 마니아 독자와 좀 더 넓은 불특정다수의 독자의 반응은 다른 게 있다. 그러다보니 더 신중해지는 면이 있다. ‘베스트 도전’의 독자들은 나와 코드가 맞아서 좋아해줬다면, 이젠 내가 대중적인 코드를 고민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개그를 칠 때도 혹 나만 웃긴 건 아닌지 좀 더 고민하게 되고.

반대로 정식 연재라 좋을 땐 언제인가.
가게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손님들에게 친구가 [트럼프]라는 웹툰의 작가라고 말하면, 20대 여성 손님들이 많이 안다고 하더라. 또 언젠가는 친구랑 밖에서 뭘 먹고 결재 때문에 사인을 할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분이 좀 ‘업’된 상태라 “여기 말고 종이에 사인을 해야 하는데”라고 허세를 부렸다. 아르바이트생이 뭐하는 분이냐고 물어서 친구가 [트럼프] 작가라고 했더니 그분이 작품을 알더라. 정말 기분이 째졌다.

사실 연예인이 아니면 이 나이에 그런 경험이 가능한 건 웹투니스트 밖에 없을 수도 있다.
정말 꿈을 이룬 게 이런 케이스 아닐까.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대사 한마디 때문에 열 편 정도 분량의 스토리가 바뀌는 경험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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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 나이인 만큼 다른 걸 하고 싶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일이 좋은데,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경험은 다 소중한 것일 텐데, 나는 대학 때 남들 하는 걸 많이 못해본 거 같다. 사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발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인데 그걸 좀 책임감 있게 못했다. 단순히 스펙 쌓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건데 너무 소극적이었다. 그렇게 뒤로 물러서는 게 습관이 된 것도 있고. ‘베스트 도전’ 연재 때문에 휴학을 길게 두 번 하느라 아직 졸업을 못했는데 여전히 학교 공부를 하는 건 엄두가 안 난다.

그럼 만화를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얼마 전에 학원도 알아보러 갔다. 디자인만 하다가 만화를 하려니 스토리나 연출에 있어 정말 문외한인 거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다른 작가 분들의 스토리텔링 방식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지금 뭔가 배운다면 이젠 정말 만화를 배우고 싶다. 그런데 당장 마감에 쫓기고 있으니 학원까지 다니면 너무 스트레스가 될까봐 보류하고 있다.

이 일 말고 다른 건 상상을 못하겠다

이채은 8

만화를 하면서 성격이 더 적극적이 된 거 같은데.
좋아하는 일이니 좀 더 주체적으로 하지만 적극적이 성격이 된 건 아니다. 대신 만화를 연재하며 신중해진 건 있다. 정말 인상 깊었던 게, 대사 한마디 때문에 열 편 정도 분량의 스토리가 바뀌는 경험을 해봤다. 그만큼 말 한마디의 영향력이 크다는 걸 느꼈다. 내 말 한마디에 내 인생 열 편 분량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한 사람으로서 조금은 성장한 건데, 연재를 하며 만화가로서도 성장했을까.
한 번 그렸던 자세나 표정은 손에 익으니까 다음 번엔 바로바로 그릴 수 있다. 속도가 빨라졌지. 그림의 균형도 좀 더 잡혀가고. 하지만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고, 그 뭔가가 뭔지 알아야 더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럼 그런 걸 깨달아 이 일을 좀 더 오래 하고 싶나.
지금은 이 일 말고 다른 건 상상을 못하겠다. 물론 살면서 다른 더 좋은 걸 발견하고 이 일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평생 그리워할 거다. 살면서 가장 열정적인 일이었던 거니까.

그럼 지금이 가장 열정적인 시기인가.
그렇다. 식고 싶지 않다.


작가프로필

  • 이채은 9
    이름
    이채은
    출생
    1991년 생
    데뷔
    2012년 네이버웹툰 '트럼프'

발행일

발행일 : 2013. 05. 09.

출처

제공처 정보

  • 위근우 웹 매거진 'ize' 취재팀장

    <드래곤볼>과 <북두신권>을 보면 문제아가 될 거라는 어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만화책을 보며 그럭저럭 멀쩡하게 성장. 동네 글 좀 쓰는 형으로 지내다가 웹 매거진 〈ize〉 취재팀장으로 신분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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