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와 갯장어로 엮인 한국과 일본,
음식문화와 수산업으로 엮인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다!
일본인은 대게는 자국산을 최고로 여기지만 갯장어만큼은 예외다. 장어덮밥으로 유명한 일본의 고도 교토의 수산시장에서 여수산 갯장어(はも)는 최고가에 팔린다. 또 우리 식탁에 오르는 도미와 가리비, 멍게 중에서 상당량은 일본에서 양식된 것을 수입한 것이다.
도서출판 따비의 신간 《한일 피시로드, 흥남에서 교토까지 - 일본 저널리스트가 탐구한 한일 생선 교류의 역사》에서 저자 다케쿠니 도모야스는 생선으로 엮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로 풀어낸다.
일본과 한국을 잇는 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2006년 승객 수 100만 명을 돌파한 이래 해마다 승객이 늘어나고 있는 부산-시모노세키 페리에는,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선도 활어차에 실려 매일 운반된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는 갯장어, 붕장어, 넙치, 피조개, 새조개, 바지락 등이 실려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는 먹장어, 가리비, 멍게, 해삼 등이 실려온다.
이들 수산물 중에서 일본인인 저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먹장어다. 일본에서는 먹장어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에서 잡히는 먹장어는 대부분 한국으로 들어온다. 현재 자갈치시장 하면 알루미늄 포일을 깔고 구워주는 먹장어구이(꼼장어구이)가 떠오르지만, 거기서 팔리는 먹장어의 상당량은 일본산이다.
일본에서 잡힌 먹장어가 한국으로 오는 대신 한국에서 잡힌 갯장어는 일본으로 간다. 현재 갯장어는 경남 고성, 사량도, 사천, 여수 등 남해에서 잡혀 대부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운반된다. 교토 중앙시장에서 연간 거래되는 갯장어의 약 4분의 1 이상이 한국산이며, 한국산은 기름지고 뼈가 연하다 하여 고급으로 친다. 조선 시대에는 갯장어의 생김새가 흉물스럽다 하여 거의 먹지 않았다. 이런 갯장어가 1909년부터 활어로 일본으로 실려가기 시작했다. 당시는 1883년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규칙’에 의해 일본의 어선이 조선의 앞바다에서 마구잡이로 생선을 잡아들이던 시기였다.
부산 자갈치시장의 명물 요리 먹장어구이는 일본산 먹장어로 만들고, 교토의 명물 요리 하모 오토시는 한국산 갯장어로 만든다. 그러나 하모 오토시가 일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인데 반해 먹장어구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요리이고, 그 배경에는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일본에서는 먹지 않는 먹장어가 한국에서 대표적인 서민 요리가 된 연유를 찾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먹장어가 식용이 아니었다. 먹지 않았기에 잡지도 않았던 생선이다. 먹장어 어업은 식민지 수탈의 산물이다. 부산에 먹장어 가죽 공장이 들어섰고 가죽은 일본으로 나갔다.
식민지의 가난한 민중은 그러고 남은 먹장어 고기를 먹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경상남도 수산시험장의 보고에는 부산부, 울산군 부근 하급 음식점에서 먹장어 요리를 내는 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모여든 가난한 피난민들이 먹장어구이를 자갈치시장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 신포에서 후쿠오카로
저자가 주목한 또 다른 생선은 명태다. 명태의 일본어 정식 명칭은 ‘스케토다라(スケトウダラ)’이지만 일본인들이 흔히 친숙하게 부르는 이름은 ‘멘타이(めんたい)’로, 한국어 이름 ‘명태(明太)’를 그대로 가져간 것이다.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먹을거리의 하나로 꼽히는 ‘멘타이코(명란젓)’가 한국의 영향을 받은 음식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한국인에게 명태는 일본인이 기원의 의미로 사용하는 도미와 서민들이 흔히 먹는 전갱이나 고등어를 합친 생선과 같다고 보았다. 저자는 제사상과 고사상 위의 북어를 올려놓고, 새 건물을 지으면 상량식 때 북어를 매다는 모습과 ‘북어 껍질 쪼그라들 듯’ ‘북어 값 받으러 왔는가’ 같은 속담을 소개하고, 생태, 동태, 코다리, 북어 등으로 변신하는 명태를 따라 속초와 양양의 덕장을 취재한다.
저자는 18세기 말부터의 한국 어업사를 짚어보며 명태잡이에 얽힌 한국과 일본의 교류 혹은 악연을 살펴보기도 했다. 동해안의 명태잡이는 황해안의 조기잡이, 남해안의 대구잡이와 함께 조선 재래 3대 어업이었다. 조선시대부터 명태를 가장 많이 잡았던 곳이 함경남도다. 서유구(1764~1844)가 지은 《난호어목지(蘭湖漁牧誌)》에는 명태를 함경도에서 잡아 1월에서 3월 사이에 말려서 북어로 만들어 집하지인 원산으로 운반한다고 했다. 《한국수산지》(1909)에 따르면 함경남도의 어항 신포 근해에는 성어기를 맞이하여 어선 1,500척에서 1,600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19세기 말까지 조선인의 독무대였던 명태잡이에 새로운 어업 기술과 자본을 가진 일본인이 뛰어든다. 저자는 명태잡이의 주도권이 일방적으로 일본인에게 넘어갔을 것이라는 통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1930년대까지 일본인의 명태 어획량이 전체의 28퍼센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명태잡이에 미친 일본의 영향이 훨씬 나중에, 보다 치명적인 형태로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필수적인 생선인 명태를, 이제는 러시아와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것이다. 기후 변화와 분단, 남획 등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일제 강점기의 일본인의 어업 행위, 보다 넓게는 ‘개발 논리’에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먹기 위해서도, 신께 바치기 위해서도 아닌, 조선인에게 팔기 위해서 명태를 잡았다. 이러한 어업의 자본주의화야말로 남획의 뿌리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람을 놓치지 않는 취재와 연구
저자는 한일 양국의 수산업 교류 현황을 꼼꼼한 통계를 통해 짚어보았고, 권말의 참고도서 중 한국어로 된 저서와 논문의 수가 53편에 달할 정도로 한국 수산업의 역사와 문화를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러나 저자의 작업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의 교토, 니가타, 시모노세키를 비롯하여 자갈치시장, 기장의 넙치양식장, 경남 고성, 강원의 속초와 양양을 다니며 현재 한국과 일본의 수산업 종사자는 물론, 생존해 있는 일제 강점기의 어부까지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했다. 이 책이 한국의 어업사를 연구하려는 이들은 물론, 생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기에도 충분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