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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황제를 위하여

구분 장편 소설
저자 이문열
발표매체 문예중앙
발표일 1980. 가을. ~ 1982. 여름.

줄거리(사이버 문학광장 제공)

이 소설은 《정감록》에 예언된 이씨 조선 이후 새로운 왕조의 태조임을 자처하는 「황제」의 이야기로 실제 충청도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수되면서 각종 민속 신앙과 신흥종교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도참비기(圖讖秘記)를 소재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황제는 궁벽한 산골, 계룡산 기슭의 백석리에서 태어났다. 건달 기가 다분하던 그의 아버지, 정처사는 정감록을 교묘히 이용하여 황제를 이씨 왕조를 이을 다음 왕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녔으며 여러 가지 신이한 이야기를 그 증거로 만들었다. 그러나 황제는 어려서는 매우 총명하여 인근에서는 그를 가르칠 스승이 없었고 그 뛰어난 인품은 미물을 고통조차 무심히 넘기지 못했다. 황제를 보고 마을에 정착했다고 알려진 몇몇은 마을 사람들에게 황제에 대한 기대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 사건은 정처사가 모두 꾸민 일이었지만 정 처사는 꿈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예언이 다음날 을사보호조약 소식으로 드러나면서 그 기대는 더 커간다. 과객으로 황제의 집에 들었다가 황제를 가르치게 된 「큰 선생」이 무예와 학문을 가르치기 3년 만에 정처사의 과욕을 알고 떠난다. 황제의 학문은 유가를 주로 하였지만 여러 학문도 두루 섭렵하였고 용력(勇力)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고 외모까지 반듯하였다. 을사 보호조약이 채결된 해에 열 여섯의 황제는 첫사랑인 윤규수를 잃고 정처사의 꾐에 빠진 이웃 거부 황진사의 딸과 결혼한다. 첫사랑을 잃은 정신적 충격에다 열병까지 겹친 황제는 조현(정신분열) 증세가 일어나 자신이 이 왕가를 대신할 사람이라는 환청을 듣고 자금까지 아버지의 말을 못미더워 하던 자신마저 확신을 품는다. 그리고 우연히, 다음날 한일합방 소식을 접한다. 조선 땅이 일제에 빼앗겼다는 것을 안 황제는 항거하는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이때 주위의 독려와 군자금뿐만 아니라 반편인 우발산과 정신이 이상한 재사(才士) 방량을 수족으로 얻는다. 백 이십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매복해 있다가 신작로를 지나는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잘못된 전술과 부실한 무기로 인해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도망치다가 육십 여명이 잡혀간다. 정처사는 황제대신 그 패배의 책임을 방량에게 돌려 마을에서 쫓아내고 마을사람들의 원망으로부터 황제를 보호했다. 황제는 모욕을 감수해가며 잡혀간 마을 사람들을 전부 데려오지만 민심은 예전 같지 않게 되고 신뢰나 열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실망하여 떠났던 배서방이 돌아온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동요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었다가 회복한 황제는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해 봄에 넉넉한 노자와 좋은 옷을 입고 길을 떠난다.

길을 나선 황제가 가장 먼저 접한 것은 기차로 처음 본 기계문명을 큰 뱀으로 착각한 황제는 줄행랑을 친다. 또, 어느 시골 주막에서 주모 모녀에게 속아 비상용으로 가져간 금붙이를 모두 줘버린다. 또, 수원에서 적을 알아야 한다면 일본 헌병에게 「바가야로」라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일본어로 접근했다가 헌병대까지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가장 큰 수확이 있었으니 마숙아(馬叔牙)를 얻은 것이다. 서울에서 마가로 성을 밝힌 한 건달을 만나 봇짐과 전대를 다 털린다. 그 뒤 3년 동안이나 계속된 편력은 말 그대로 걸인과 같은 생활이었다. 북쪽까지 다 돌아보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할 때 즈음, 서울역에서 마가를 다시 만난다. 황제는 마가의 믿어 주는 척 하면서 숙아라는 이름을 주고 고향으로 데려온다. 황제는 마숙아의 세상에 대한 빠른 이해를 쓰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었다.

마가는 황제처럼 백석리 마을도 어수룩할 것으로 여겨 다시 한번 사기를 치기 위해 마을로 따라간다. 황제의 의중을 안 정 처사는 마가를 끌어내 지난날의 잘못을 묻고 죽이려는 척하고 황제가 구해준 것으로 해서 마숙아를 황제 사람으로 끌어들인다. 세상 구경을 통해서, 조선의 패망을 서양 문물을 알지 못해서라고 판단한 황제는 기차의 원리를 살피기 위해 풀무질로 실험하기도 하고 서양의 철선(鐵船)에 대적할 우죽선(羽竹船)을 고안하기도 하였으며 비행기까지 만들기를 시도했으나 당연하게 실패하였다. 모든 실험이 허망하게 끝나자 황제는 가정을 돌보기 시작하여 한 사람의 훌륭한 범인이 되어 생활하였다. 그러나 금새 무력감에 빠지고 술꾼으로 일 년여를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술집에서 문재(文才)는 뛰어나나 알콜중독으로 정신이 이상한 신기죽(申沂竹)을 만나 마을로 데려온다.

여전히 술에 빠져 있던 황제는 저잣거리에서 취중에 삼일운동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오해로 그 운동의 주동자로 몰리고 자신을 잡으려는 일본 순사와 다투던 중 순사는 실수로 자신의 칼로 자신의 목을 베게된다. 무사히 황제가 집으로 돌아오자 이 일은 과장이 되어 마을과 장터거리에 퍼지고 술에 젖어 살던 황제에 대한 불신이 일시에 사라진다. 그러나 황제는 이 일로 인해 북쪽으로 도망을 친다. 문사에 밝은 신기죽과 세상 물정에 밝은 마숙아를 대동하고 정감록의 양백(兩白)설에 따라 장백산과 백두산 사이의 땅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용정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 때문에 상심하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가 영고탑(寧古塔)에 이른다. 여기서 마숙아의 권유에 따라 요릿집을 어느 조선인과 동업으로 경영하여 생계를 잇는다. 요릿집의 경영과 생활은 마숙아가 맡고 황제와 신기죽은 거의 3년간 서책에만 몰입한다.

그러다 새로운 사건의 발단이 일어나니, 토비의 돌연한 내습이었다. 황제와 신기죽의 말만 믿고 황제를 조선의 왕자로 착각한 비적들은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 황제를 사로잡아 가버린다. 그러나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비적들의 대장격인 동과 그들의 두령인 척대야에게 자신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린다. 그러나 그 날 밤 일본군의 토벌이 있자, 일본에게 적개심이 대단했던 황제는 저항하는 비적들의 편에서 함께 싸운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 비적들은 퇴각하여 척가장에 이른다. 그곳의 장(長)인, 척대인의 호의로 척가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놀고 있는 땅을 얻어 마숙아, 신기죽과 함께 경영한다. 마숙아는 중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조선 유민들을 데려와 땅을 일구는 노동력을 충당했는데, 땅이 기름지고 수원이 풍부해 수확이 좋았다.

그리고 황제는 척대인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는다. 조선 유민이 척가장에 유입되고 넓은 땅이 마련되자 백석리 주민들도 이주를 시킨다. 또 무기 시장에 밝은 동(董)으로 하여금 무기를 사 모으게 한다. 그러다가 총상을 입은 김광국을 거두게 되는데 김광국은 민족·민주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로 황제와 사상적 차이를 보여 떠나려는 것을 마숙아가 잡아서 자신의 뒤를 잇게 한다. 김광국은 황제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황제를 미치광이로 여겼으나 그의 고결한 인품을 좋아하였다. 때때로 황제는 기병을 일으키려 하였고 전세의 불리함을 안 마숙아는 황제를 억제하는데 온힘을 쏟았으며 병으로 죽어가면서도 김광국과 동(董)을 설득해 기병을 막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숨진다. 그리고 이듬해 백석리의 정처사 일족이 이주해 온다.

다섯 살난 아이를 통해서 우발산과 아내의 부정이 들통나지만 황제는 그들을 용서해서 우발산의 충성심과 황씨 부인의 내조를 이끌어 낸다. 양력 1934년 10월 황제는 정식으로 개국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황제의 거병결의를 무마시키기 위해 신기죽이 들고 나온 대안이었다. 개국이 결정되자 남조선이라는 국호를, 연호를 신천(新天)으로 결정한다. 즉위식 등 모든 행사는 개국에 대해서 비웃음뿐인 김광국이 맡아서 비밀 유지를 빌미로 간소하게 치렀다.

1936년, 8월 김광국의 건의에 따라 들어선 '양현관'이라는 신식 중학교에서 공산비(共産匪)라는 새로운 근심거리가 나타난다. 그 학교에 필요한 교원으로 공산주의자 이현웅이 온 것이다. 이현웅은 황제를 미치광이로 여겨 이곳이 쉽게 적화가 가능하다고 여겨 인심을 얻은 뒤, 37년 3월 농민들을 선동해 소작쟁의를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동조해 주지 않고 우발산의 보고로 이 일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황제는 노하지만 나름의 계책을 꾸민다. 이현웅은 김광국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전하지만 거절당한다. 한편 황제는 이현웅을 잡아 참형을 결정하고 창고에 가두어 두지만 평소 그를 존경하던 세자 융이 몰래 빼내어 함께 달아난다.

신천 7년, 법가를 받아들여 법을 정비한 황제는 다시 거병을 결심하고 김광국의 만류도 허사로 돌아간다. 김광국은 시간을 끌기 위해 신기죽과 논의하여 감결(鑑訣)을 근거 삼아 1945년으로 미루고 둘째 아들 휘를 비롯한 우발산과 몇몇 늙은이들을 백석리로 내려보내어 재건하게 한다. 신천 11년(1945년) 김광국을 통해 외적이 패망 직전에 있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다시 거병을 일으키고 일본 패잔병들을 공격하였다가 러시아 군을 만나 위험에 빠지지만 김광국의 재치로 팔로군으로 위장, 신식 무기까지 받아낸다. 광복되었음을 안 황제 일행은 귀국 길에 오르는데, 팔로군이라는 위장이 들통나서 무장 해제 다하고 가진 것들을 빼앗긴다.

신의주에 들어서 의복의 정비한 일행은 한 보안대원이 척부인을 희롱하자 울분은 참지 못한 황제 때문에 곤경에 처하지만 이현웅과 아들 융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온다. 그러나 3·8선을 넘으면서 척부인이 숨진다. 김광국은 다행이 서울에 도착한 일행을 기차에 태워보내고 자신은 서울에 남는다. 백석리에 돌아온 황제는 마을 어귀에서 자신에게 무례한 순경과 시비가 벌이는데, 그때, 작은아들 휘가 와 도와준다. 먼저 백석리에 돌아온 휘는 뛰어난 현실 감각으로 농장에서 가져온 것 보다 몇 배나 많은 재산을 불렸으며 주위에서는 상당한 인정을 받는 젊은이로 자라 있었고 아버지 황제에 대한 효성도 깊고 현명한 아들이었다. 이러한 휘의 도움으로 척가장 시절보다 더한 성세를 누린다.

그러나 전주 이씨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것을 안 황제는 시름에 빠지는데 이것을 위로한 것이 승려출신인 두충(杜忠)의 출현이다. 두충은 정감록에 심취하여 지세(地勢)를 살펴 백석리에 이른 자였다. 그 뒤에 출현한 것이 배대기로, 충성심은 의심스러우나 세상 이치에 밝음은 마숙아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절 가장 큰 수확은 신기죽을 이을 문사 변약유를 얻은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6·25가 터지고 백석리에도 공산당이 들어온다. 그러나 휘의 재치와 기지로 인민재판이나 의용군 징집을 막지만 이런 눈 막음도 잠시, 휘는 내무서원들의 의심을 받고 위험에 처하는데, 남쪽으로 내려온 인민군 장교 융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극렬해진 공산군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그 첫날 신기죽이 피난길에서 죽고 또 한 절에서 첫사랑 윤규수와 잠깐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피난길에 국군을 만나는데 황제의 언행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모두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만 휘가 헌병들에게 잡혀간다. 고향으로 돌아온 황제는 배대기의 발설로 이민군인 융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다시 경찰에게 고초를 당한다. 황제는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농지 개혁이 일어나고 휘가 일구어 놓은 모든 농지를 배대기가 모두 가로채고 드디어는 집에서까지 쫓겨나 마을 뒤 숯막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숯막에서 살게된 황제 일행은 우선 배대기를 벌하기를 비는 의식을 끊임없이 행하고 갈수록 번창해만 가던 배대기는 드디어 뇌일혈로 죽는다. 전쟁통에 생사를 알 길이 없던 둘째, 휘는 일본으로 간 뒤 사람을 통해 얼마간의 돈을 보내온다.

백석리에서의 구차한 생활 청산하고 약간의 토지와 돈을 가지고 신도안의 연천봉 계곡 비탈에 새 터전을 잡는다. 국유림인 새 집터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만 과거에 배푼 은혜로 인하여 문제가 해결된다. 처음에는 불교적 방향에서 종교적 색채를 더해가던 황제는 점차 그 방향을 도교로 바꾼다. 황제의 거처에 작은 암자를 내어 생계를 도우려는 두충의 의견을 반대하고는 다음날 변약유와 함께 바로 도교의 삼청전을 설치한다. 이일을 계기로 황제의 도교열을 금새 불붙어 종교적인 심취는 더해만 가고 드디어 <금룡교 토벌>을 행한다. 4·19때, 거병을 준비하다가 얼마 안 되는 토지의 태반을 잃고 다시 구걸과 품일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형편이 되고 황제의 거처 부근에서 놀던 남녀 대학생들과의 시비를 통해 대외적 무력 투쟁을 끝내고 봉검령(封劍令)을 내린다.

그 후 2년 뒤 변약유가 장성한 아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두 달 뒤, 두충이 파상풍으로 죽는다. 이즈음, 황제는 그의 일생을 지배해온 과대 망상과 편집증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된다. 그러나 일생에 걸친 사람들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계속 자신의 천명을 믿는 척하며 죽음까지도 황제로서의 격식을 갖추려 한다. 1972년, 모든 것에 초연해진 황제는 자는 듯 눈을 감아 덕릉에 묻혔고 우발산이 인근 암자의 도승에게 청해, 묘호(廟號)를 태조광덕대비(太祖光德大悲) 백성제(白聖帝)로 정해 올렸다.

출처

제공처 정보

  • 저자 권영민 대학교수, 문학평론가

    1948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버클리에서 한국문학 초빙 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현대문학평론상, 1992년 김환태평론상, 2006년 만해대상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외에도 서울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문학사』, 『우리문장강의』,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한국 계급문학 운동사』, 『한국 근대문학과 시대 정신』, 『월북 문인 연구』, 『한국문학 50년』, 『윤동주 연구』, 『작은 기쁨』 『문학의 이해』등이 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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