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 온돌, 아궁이, 굴뚝이 있는 시골집에 살았다. 당연히 난방은 나무였다. 짚이나 보리때, 콩깍지를 태우기라도 할라치면 매캐한 하얀 연기, 타닥타닥 소리 내며 타들어가는 불꽃,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구수한 건초향기가 온 집을 둘러싸서, 옷이며 가구며 식기며 집안 구석구석이 훈제되고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훈제 소시지나 짚불 삼겹을 먹을 때면 미묘한 탄 내음에서 예전의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곤 한다.

겨울방학이 되면 갈퀴나무, 잡목, 장작 등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가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산에 들어가 아무 나무나 닥치는 대로 벨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신작로와 멀리 떨어진 외할아버지 산에서 아버지는 고사된 나무와 잡목을 베고, 나는 이것을 리어카나 경운기가 있는 곳까지 수차례에 걸쳐 옮겼다.

지금은 수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져 길이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지만 당시는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라 길과 상관없이 무작정 오르내리면 되었는데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은 가볍고 다리는 튼튼했다.

“산이 있어 거기에 오른다.”라는 영국인 산악가 조지 말로리의 말처럼, 주말이 되면 가끔 혼자 산에 가곤 한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라기 보다 그냥 정처 없이 배회하는데, 힘만 들뿐 즐겁다는 생각은 별반 들지 않는다. 산보다는 바다에 최적화된, 몸은 무겁고 다리는 가는 갑오징어 체형이 돼버렸다.

예전에는 기막힌 경치를 보기 위해, 색다른 것을 경험하기 위해, 체력의 한계를 알기 위해 이곳저곳 멀리 있는 산을 찾았지만, 기막힌 경치도 30분 이상 보면 무감각해지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더 이상 색다를 것도 없으며, 이미 체력의 한계를 절실히 알고 있는 바, 이제는 근처 산만 기웃기웃 거릴 뿐이다.

얼마 전 월출산을 오르는데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논어 구절에서 나온 말로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원문 순서상 ‘요수요산’이 마땅하거늘, ‘요산요수’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발음의 편의상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소수설 외에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다. 하여간 요(樂)가 많아서 그런지 요(妖)상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밝아 물 흐르듯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를 중히 여겨 중후하므로 산을 좋아한다고 한다. 이를 본받기 위해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물의 본성을,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산의 존재감에 대해 나름 심사숙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지혜롭다면 어부나 목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천재(天才)여야 하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질다면 산악인이나 사냥꾼들은 성인(聖人)이어야 하거늘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것 같다.

TV에 방영된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분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깨달음, 도에 통달할 줄 알았는데, 표정에서 오히려 피곤함과 괴벽스러움이 묻어나니 어리둥절하다.

‘요산요수’의 본질은 산과 물에 있지 않고 ‘좋아할 요’ 내지 ‘즐거울 락’으로 읽히는 ‘樂’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특정 대상인 산과 물의 본성(외물)에 기댄다고 해서 어질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두루두루 좋아하고 즐겨야 한다는(내면)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이듯, 사물을 좋아해야 지혜로울 수 있고, 사람을 좋아해야 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즐거움(樂)이 지극해지면 극락(極樂)이 된다고 한다. 꼭 천당(天堂)이나 정토(淨土)만이 극락이 아니라 서로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면 극락이 된다.

진정한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내 마음속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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