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푸른 별에서 너와 나는>파두가수와 달콤한 하룻밤, 긴 이별… 그게 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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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김의규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7) 누가 그 사랑을 모르시나요

대서양 보이는 리스본 언덕

청보랏빛 눈동자 이국 여인

“올라” “차우” 은밀한 사랑

기름한 눈매의 민박집 주인

어딘지 동양적 느낌의 美男

“아버지 누군지 아무도 몰라”


해풍이 불어오자 호시우 광장에는 금세 보랏빛 융단이 깔렸다. 아프리카의 벚꽃이라 불리는 자카란다 꽃송이들이 자욱하게 물결무늬 타일 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목질이 단단하고 문양이 좋아 고급 목재가 될 수도 있는 이 나무는 꽃이 피면 오래가고 아름다운 데다 향기롭기까지 해 여간해서 베어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삼촌이 그랬다. 여자도 그런 부류가 있다고….

삼촌은 벚꽃 철이면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에서 마치 무슨 이미지라도 잡아내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허공을 바라보다가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숙이 나중에 대학에 가서 부전공으로 스페인어를 공부할 때 같은 언어군의 포르투갈어를 접하면서 삼촌의 중얼거림 속에 섞여 있던 낯선 말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올라, 보니타, 치 아무, 오브리가두, 차우…. 그녀의 부실한 기억 속에 살아남은 이 몇몇 단어가 결국 삼촌의 좌절한 사랑을 요약해서 말해주는 것임을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초여름 햇빛이 아마포처럼 가슬가슬 감기는 이 그윽한 고도에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보랏빛 군무를 추는 자카란다를 보지 못했다면 영원히 믿기지 않았을 일일지도 몰랐다.

함께 온 후배 둘은 시내관광 스케줄을 빽빽하게 짜서 아침 먹기 바쁘게 나가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출장지인 포르투시도 가슴이 저릿하도록 아름다웠으나 거기서 남은 사흘을 다 보내기엔 리스본이 워낙 숙에게 초발심의 대상이었다. 몇 년 전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각인된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현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었기에 귀국 일정을 리스본발로 조정하고 출국한 터였다. 후배들은 그 이유를 듣고 아연해 했다.



그러니까 선배는 여긴 약국에서도 아직 영화에서처럼 자유 흡연이 가능한지를 확인하려고, 우리 비행기 값 차액까지 대줘가며 온 거였어요? 그러잖았음 마드리드로 건너가 스페인도 좀 보고 갔겠구만은….

암튼 그것은 숙이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긴 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를 그 이유의 타당성을 제시했다.

이봐, 자기들 언제 어디서, 또 어느 영화에서라도 그런 거 본 적 있어? 약사가 담배 피워가며 약 파는 장면 말이야…. 그 모순적 자유로움, 그 데카당스한 휴머니즘이 남아 있는 데를 지금 동서 막론하고 지구촌 어디서 보겠어?

싱글맘 여성으로 자기 세계를 멋지게 개척해 나간 ‘장한’ 모델의 하나로 조앤 롤링을 생각하며 글로벌 현상 ‘해리 포터’의 주요 배경지인 포르투에서 열린 여성학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후배들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으로 보아 그리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려나, 숙은 리스본을 봐야 하는 진짜 이유인 삼촌의 사연으로 생각을 되돌리며 광장을 가로질러 민박집 주인이 소개한 파두 카페를 찾아 언덕으로 향했다. 저녁 아홉 시가 가까웠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태양은 제 도도한 빛을 쉽사리 거둘 기세가 아니었다. 구시가지의 ‘역사적 지구’라 불리는 알파마 지역에는 오래된 성당과 박물관들, 카페와 서민 주택들이 촘촘한 계단 길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언덕배기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삼촌은 이 계단 길 중 어느 하나가 가닿는 지점,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언덕에서 그 사랑을 만난 듯했다.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그는 기관사로 외국계 수산회사 소속의 원양어선을 탔던 적이 있다. 영어도 제법 했고 기술이 좋아 곧 미국 해운회사로 소속을 옮길 참이었던 그가 정어리 조업을 나가는 마지막 항해 중에 들렀던 길이었다. 며칠 리스본에 정박하는 동안 혼자 시내 관광을 나왔던 그는 한 언덕 마을에서 어린 시절 포르투갈 선교수도회에서 나눠준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보았던 천사를 똑 닮은 여인을 만났다. 암갈색 머리에 청보랏빛 눈을 지닌 그 미인은 파두 가수였다. 그들의 달콤한 하룻밤은 긴 이별, 짧은 만남으로 수년간 이어졌고 삼촌은 그 세월 동안 어떤 혼담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상이 숙이 주변에서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의 전부다. 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그는 결국 말년까지 독신의 삶을 고수했는데 마지막 몇 년은 형수인 숙 어머니의 돌봄을 받다가 갔다. 오랜 세월 바다를 떠돌며 얻은 위장병이 악화돼 환갑이 채 안 돼 훌훌 떠나버린 삼촌이 숙은 이따금 그리웠다. 아니, 그립다기보다 궁금했다. 그만의 비밀로 남은 이국 여인과의 사랑. 올라, 보니타, 치 아무, 오브리가두, 차우. 이 여섯 마디의 포르투갈어가 암시하듯, 그들의 사랑은 ‘안녕’ 하고 만난 뒤 ‘아름다워요, 사랑해요’ 하며 서로를 나누다가 ‘고마웠어요, 그럼 안녕’ 하고 작별한 게 다였을까? 그 여섯 마디 사이의 행간에는 대체 어떤 사연들이 숨어 있는 걸까? 숙은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카페 ‘바르꼬 네그로’는 언덕 맨 꼭대기에서 두세 집 아래 높이에 있었다. 파두의 전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대표곡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뜻 그대로 ‘검은 돛배’를 타고 떠난 연인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카페 건물 회벽에는 이 동네 다른 건물들과 달리 그라피티 그림들 대신 남녀 노인들의 흑백 사진이 위아래로 몇 점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검은 레이스 드레스 차림의 핸섬한 할머니 사진이 있어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뒤에서 누가 툭 쳤다. 민박집 주인 마리오였다. 기름한 눈매에서 어딘지 동양적 요소가 느껴지는 그가 짙은 눈썹을 꿈틀 추켜올리며 영어로 말을 건넸다. 맘에 들어요, 그 사진? 우리 엄마예요. 삼 년 전에 돌아가셨죠. 파두 가수였는데, 주로 이 카페에서 노래를 했어요. 노래만 부르며 살다가 어느 날 나를 낳았는데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당시는 수많은 뱃사람이 정처 없이 드나들던 카페였으니까…. 혼자 살면서 나를 키웠죠, 이렇게 잘. 하하. 아, 저기 당신 파트너들이 오네요.

마리오는 층계 중간쯤에서 두리번거리며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는 눈치인 후배들을 소리쳐 불렀다. 올라! 레이디스! 저녁 바람에 펄럭이는 그의 흰 셔츠 저 너머로 어디엔가 흩뿌려졌던 자카란다 꽃잎들이 회청색 바다를 배경으로 보랏빛 나비 떼처럼 날아올랐다.

구자명 소설가·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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