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모습 투영돼 있는 게임 속의 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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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법칙-90] 한자리에 터를 잡고 정주하는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보편화된 지구촌 위의 삶에서 그 터전으로부터 쫓겨나는 일은 단순히 고향을 등지는 정도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제도와 수도, 전기 같은 여러 인프라스트럭처로부터 보호받고 도움받던 개인의 삶은 일궈 놓은 터전에서 쫓겨나며 다시금 야생의 위태로움에 직면한다. 난민의 이름에 '어려울 난' 자가 들어가는 이유가 그것이다.

예멘 난민 문제가 시사 이슈로 대두되면서 난민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재발굴되어 올라오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을 중심으로 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도 일종의 난민 신분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난민의 자식으로 세상에 내려왔다는 이야기들이 다시금 주목받는다. 난민은 적어도 6·25전쟁 이후 특별한 난리통 없이 살아온 한반도 거주민들에게는 조금 낯선 이미지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앞선 몇 가지 언급처럼 완전히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개념만은 아니다. 심지어 디지털게임 안에서조차도 그렇다. 비단, '21 days'처럼 직접적으로 난민의 삶을 다루지 않은 게임에서도 난민 이야기는 곳곳에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모성 아이어를 잃은 칼라이 난민의 이야기

불멸의 국민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첫 번째 자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자부심의 종족으로 등장하는 프로토스는 그 찬란한 성취와 기념비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난민의 지위를 경험한 바 있다. 여러 프로토스 종족의 분파 중 가장 많은 수로 중심을 차지하던 칼라이 프로토스의 고향 행성인 아이어는 1편에서 저그의 침공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뒤로하고 살아남은 칼라이 프로토스들은 '다크 템플러'로 널리 알려진 네라짐 프로토스의 수도성인 샤쿠라스로 이주해 간다.

칼라이 프로토스의 모성 아이어는 저그 침공에 의해 폐허가 되고, 프로토스는 난민이 되어 네라짐의 고향 샤쿠라스로 피신한다.


프로토스 신경삭을 통해 전 구성원의 정신을 하나로 연결하는 '칼라' 시스템의 위험성 때문에 동참을 거부한 네라짐은 그로 인해 칼라이 프로토스와 대립하게 되고, 그 와중에 칼라이와의 전쟁을 피해 어둠 속으로 도망쳐 숨어버린 이들이었다. 모성인 아이어를 사랑했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네라짐 프로토스도 이미 난민으로 시작한 그룹이었는데, '스타크래프트' 1편에서 칼라이 프로토스는 저그 침공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가 난민이 되어 한때 대립하면서 갈라졌던 네라짐의 수도성인 샤쿠라스로 찾아오게 된다.

서로 한 번씩 난민으로서의 상황을 겪었던 두 프로토스 집단의 만남이 '스타크래프트' 1편과 2편의 싱글 플레이를 통해 이어진다. 특히 한 번 네라짐 프로토스를 아이어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던 칼라이 프로토스인지라 한때 핍박했던 이들의 행성으로 피난을 떠나온 입장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 네라짐 집단 안에서는 과거 아이어에서 있었던 네라짐 추방 사태들을 끄집어내며 칼라이 프로토스를 빈정대거나 샤쿠라스로의 유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매스이펙트'의 쿼리안: 우주를 떠도는 난민 종족

미래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 롤플레잉 게임 '매스 이펙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러 우주 종족 중 쿼리안은 상당한 수준의 공학적 성취를 달성한 종족이다. 우주 여러 종족 중에서도 유례없을 기술 수준에 힘입어 쿼리안 종족은 완벽에 가까운 기계 인공지능을 만들어 냈는데, 문제는 이른바 게스(geth)라 불리는 이들 기계 인공지능들이 지나치게 훌륭했다는 점이었다. 게스 인공지능이 과도하게 자립해 나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 쿼리안은 게스를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데, 오히려 이 전쟁에서 쿼리안은 게스에 패배하게 된다.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에 패배한 쿼리안은 고향 행성인 라노크를 떠나 전 우주를 방랑하는 신세가 된다. 쿼리안 이주 함대라는 거대 우주선단 안에서 이들은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돌며 각종 자원을 주워 모으는 등의 형태로 근근이 살아간다. 문제는 이러한 쿼리안의 방식이 우주의 다른 종족들에게는 상당한 민폐로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지나가다 만난 행성의 자원을 몽창 털어가기도 하고, 감옥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쿼리안 내부 범죄자를 지나가던 행성에 떨궈 놓고 가기도 한다. 애초에 우주 전역에 기계 인공지능이라는 위험한 요소를 퍼뜨린 것도 모자라 이런 행태를 보이니 우주 전반에서 쿼리안을 보는 시선은 전혀 곱지 않다. 마치 현실의 난민들이 받는 그 시선처럼.

`매스 이펙트`의 쿼리안은 고향행성을 잃고 우주를 떠도는 난민 함대 종족이다. 다른 종족들로부터 유랑거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검은창 트롤: 스랄은 난민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한때는 전 세계를 휩쓸던 거대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호드와 얼라이언스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원주민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외계 행성인 드레노어에서 넘어온 오크 호드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물론 이들을 그냥 난민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 호드는 강하기 때문이다. (…) 호드의 이야기를 이 글에서 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드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는 트롤 부족은 비단 호드 소속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롤은 게임 안에서 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더 많다. 숲 트롤, 정글 트롤, 얼음 트롤 등 아제로스의 토착 부족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이들은 대체로 호드와도 대립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적지 않은 레이드 던전이 트롤들의 거처임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호드의 일원인 검은창 트롤 부족이 이질적이다.

검은창 트롤은 정글 트롤의 일파로, 본래 로데론 남쪽의 가시덤불 골짜기에 살고 있던 부족이었다. 그러나 가시덤불 골짜기에서의 세력을 잃고 밀려난 이들은 대해를 넘어 외딴섬에 고립되고, 이때 마침 스랄의 신생 호드와 접촉하며 스랄을 도와 호드의 칼림도어 정착에 일조하게 되면서 사실상 호드 내에서 오크-타우렌과 동일한 수준의 지위를 얻게 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호드 캐릭터로 트롤을 골라 초반 플레이를 진행하다 보면, 메아리 섬에서 쫓겨나 센진 마을로 피난을 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플레이어에게 메아리 섬에서 트롤을 쫓아낸 적들에게 복수를 지시하는 퀘스트를 주는 등 삶의 터전을 잃고 밀려난 부족으로서의 '안습함'을 드러낸다.

플레이어는 난민 출신 트롤로서 호드 합류에 필요한 퀘스트들을 마치고 호드의 수도 오그리마를 자연스럽게 방문하게 되는데, 지금은 바뀌었지만 게임 초반기에는 호드 대족장으로 스랄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엄연히 호드의 일원이고 신생 호드 성립 시기에 세운 공도 결코 작지 않아 자주 호드 대족장 후보를 내는 종족이긴 하지만 난민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냄새나는 캐릭터, 못생긴 캐릭터, 더러운 트롤 등의 유행어로 둘러싸인 트롤의 입지는 조금 서러운 구석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난민 출신 트롤에게도 한결같은 대족장의 인사말은 오늘날 난민 문제를 코앞에 맞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스랄: "무슨 일로 왔는가, 형제여?"

대족장 스랄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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