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닐라브리즈 오영욱 개발자



오영욱 개발자는 2006년에 네오플에 입사해 '던전앤파이터'의 거너 개편을 시작으로, 메탈슬러그 온라인과 다양한 웹 소셜게임을 개발했습니다. 현재 모바일 소셜게임을 주력으로 프로그래밍과 기획 등 폭넓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취미로 모아오던 한국 게임과 관련된 자료를 통해 역사를 정리하고 있으며, '한국 게임의 역사'에 공동 저자입니다.




오영욱 개발자는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한국 게임의 역사'를 주제로 세션을 준비한 이유를 간단히 언급했다. 태동기를 시작으로 거듭된 시행착오와 함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천사를 겪은 게임 업계에 대해서 기록된 저서가 국내에 없었다는 것.

또 과거에 즐겨던 '창세기전', '어스토니아스토리' 등 게임을 기억하는 이들은 있으나, 그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인물들에 대해서 아는 이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유년기의 꿈을 제공한 개발자들의 현황과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되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나아가기 위한 조언이 필요한데, 이를 게임의 역사를 통해서 되새겨보는 것이 의미를 두었다.

오영욱 개발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한 '한국 게임의 역사'는 게임의 역사를 기록, 대학의 교재를 목표로 집필되었으며, 윤형섭 박사와 강지운 게임평론가, 박수영 개발자 및 전홍식 개발자와 조기현 게임기자가 참여해 2013년 출간했다.



한국 게임에 대한 역사 - 오락실




1970~1980년에 오락실이 국내에 들어왔다. 이 당시에 보건복지부에서 유기장 관리법을 통해 출입을 통제하며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오락실을 찾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게 됐다. 1983년에 정보산업의 해가 지정되면서 IT 분야를 국가에서 전면 지원, 컴퓨터를 배우는 것의 중요성이 알려지며 '컴퓨터 학습'과 관련된 다양한 저서가 출간됐다.

1987년에 외산 게임기가 한국에 상륙, '닌텐도' 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0~1994년은 비디오 게임의 황금기로, 가정용 오락기를 흔하기 볼 수 있던 시절이다. 이 당시에 다양한 게임잡지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가정용 오락기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사례를 살펴보면, '드래곤볼Z 초무투전' 등의 완벽한 번역과 일본 프로야구 게임을 튜닝해 '한국 프로야구' 게임이 출시될 정도로 현지화가 이루어졌다.



황금기를 거치고 승승장구하던 가정용 오락기는 95년에 접어들면서 32비트 시장이 열리고 종말이 다가왔다. 그 당시에 일본을 중심으로 신작 게임이 출시가 이루어졌고, 국내는 일본 제품의 반입이 법적으로 금지된 터라 새로운 게임을 접하기에 무리가 있었던 것.

신규 콘텐츠를 얻기 위해서는 어둠의 루트를 이용해야 했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용자는 가정용 게임기의 한계를 대처할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 시장은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고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한국 게임의 역사 - PC게임


1987년은 한국 게임 개발의 원년으로, '신검의 전설'이 최초의 게임이다. 이 전에도 다양한 게임이 있었으나, 아마추어 게임이 상용화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정품 PC 게임 시장의 시대가 1990년 개막했고 SKC 소프트랜드와 같은 유통업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은 불법 복제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확립된 시절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디스크를 이용해서 게임을 복사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아마추어 PC 게임의 생태계가 점차 형성되면서 '왕의 계곡', '초롱이의 모험' 등이 잡지부록을 통해 유저들에게 제공됐다. 게임에 대한 정보와 함께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시절, 게임 개발자를 희망하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92년에 와서 본격적인 국산 PC 게임의 시대가 열렸고 국산 게임의 불법복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93년에 와서는 PC용으로 개발된 국산 '스트리트 파이터2'가 탄생했으며, 이것을 개발한 개발자가 소스 코드를 통째로 공유했다. 수많은 아마추어 개발자가 달려들어 새로운 것을 접목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더해졌고, 우리가 만나본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한 '스트리트 파이터2'가 완성됐다.

이러한 작은 시도는 개발자들의 모임이 형성되는데,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게임 동호회에서 개발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한국에 게임 개발자가 늘어날 수 있었던 요인을 제공했다. 당시의 상황을 쉽게 설명하자면 게임을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약간의 붐이 일어났고 '게임 만들기'와 같은 책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1994년에 한국 PC 게임 개발사 연합회인 KOGA가 설립되었다. 국산 PC 게임 시대의 대도약으로 유명한 95년은 '망국전기', '어스토니아 스토리', '창세기전' 등의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아울러 컴퓨터 보급의 증가로 97년에 이르러서 '서풍의 광시곡'과 '임진록', '캠퍼스 러브 스토리' 등의 다양한 장르의 게임들이 출시되었고 유저들의 니즈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2000년도에 이르면서 IMF의 여파와 CD의 불법복제가 활개를 치면서, PC 게임의 몰락이 다가왔고 게임 산업의 기둥이 흔들렸다. 게임의 패치를 받아간 유저의 숫자가 판매량에 몇 배가 될 정도로 불법복제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던 것. 이후로 국산 PC 게임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국 게임의 역사 - 온라인


한국 온라인 게임의 태동은 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머드게임이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국내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이를 시작했다. 90년에는 이를 자체제작 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고 '단군의 땅'과 '퇴마요새' 등의 머드게임이 탄생했다. '쥬라기 공원'은 최초로 상용화를 실시한 국산 머드게임이다.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와 함께 불법복제가 불가능한 머드게임이 PC 게임을 뛰어넘는 잠재적 수익성을 가지고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이를 계기로 96년에 최초의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탄생했다. 이 당시에는 인터넷의 보급 문제와 온라인게임을 즐기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동시접속자가 300명이 나와도 성공한 수준이었다.



98년 무렵에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은 온라인 게임의 발전에 촉진제 역할을 맡았다. 98년 서비스를 시작한 '리니지'는 동접 1,000명을 찍었으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선보였다. 이 시기에 '일렌시아'와 '어둠의 전설' 등 다수의 온라인 게임이 등장했고 큰 인기를 얻었다.

98년에 온라인 게임과 달리,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국내에서 개발된 '아크메이지'는 최초의 웹게임으로, 공성전 등의 다양한 콘텐츠는 온라인 게임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와 비교될 정도로 신선했다. 그러나 상용화 서비스에 대한 확립된 모델이 없었던 시기라 광고에 의존하면서 수익을 창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서비스를 종료하게 됐다.

2000년도에 캐주얼 게임이 등장과 게임포탈의 활성화로 게임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춰졌으며, 이를 시작으로 온라인게임의 영역은 계속해서 넓혀졌고 다양한 장르가 갖춰지게 됐다. 또한 상용화 서비스와 퍼블리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오영욱 개발자는 발표를 끝으로,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한 한국 게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개발자이고, 결과물은 인터넷이 존재하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현존하는 한 사라지지 않음을 강조했다.

온라인게임은 엔딩이 존재하지 않아 스탭 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대표 개발자의 이름은 알 수 있으나, 개발에 참여한 인물을 알 방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오영욱 개발자는 "게임을 중심으로 개발자를 정리해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며, "개발자가 더 많은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 그리고 더 많은 기록을 남겨 훗날에도 되새겨볼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 당신의 흑 역사가 후배에게 소중한 경험담, 연구자에게는 가치 있는 기록이 될 것이다"고 전하며 강의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