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윤이상과 박경리가 있다면 산토리니에는 자유로운 인간의 원형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어 별로 가진 것도 없이 잃는 것이 두려워 애면글면하는 나 같은 이방인들을 끌어당긴다. 그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쏟아지는 강렬하고 순수한 빛이 육체를 관통해 급기야 영혼까지 스며들다가 해질녘에는 부드러운 오렌지 빛이 되어 하얀 집들을 물들이고 바다로 떨어진다. 지금은 산토리니의 자랑이 된 와인과 흰색 마을도 역경을 이겨낸 화산섬의 스토리를 품고 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포도나무는 언뜻 콩 덩굴로 보일 정도로 바닥에 바짝 붙어 자라며, 가시 면류관 모양의 똬리를 틀고 밤바다에서 밀려온 안개를 가둬 물 대신 그 습기로 힘들게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귀하고 바람이 거세 사람들은 절벽에 동굴을 파고 움막생활을 했는데 앞집 지붕이 뒷집 마당으로 다닥다닥 붙어 눈부신 햇빛아래 아름다운 군무를 춘다. 가난한 섬 산토리니는 화산폭발로 생긴 화산재를 선물 삼아 유럽풍 고급 와인 빈산토(Vinsanto)를 만들고 푸른 칼데라 위에 파스텔톤으로 물드는 이아(Oia)마을을 탄생시켰다.
한 시인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하니 또 한 소설가는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로 빛나는 별’이라고 한다. 산토리니의 포도밭 한 가운데에 자리한 민박집 여주인은 아침마다 우렁각시처럼 갖은 식재료로 우리의 식탁을 대가도 없이 가득 채워준다. 그가 소개한 식당은 이름이 하필 ‘굿 허트(Good Heart)’인데 주인 안나(Anna)는 우리 일행을 오랜만에 만났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헤어지는 형제자매처럼 끌어안고 견과류와 빈산토를 거저 내준다. 받은 선물들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며 타는 목마름을 한낱 습기로 견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가슴이 더 뻐근하다. 민박집 여주인의 남편이 마침 큰 선박을 인수하러 통영 근처에 가있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우리나라와 그리스간 직항이 열리기도 전에 우리들 가슴 속에서 두 섬이 먼저 연결된다. 통영도 산토리니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섬 사이에서 서성대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저 안에 깊이 감추고 있다. 조르바처럼 거침없이, 대담하게,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을 때마다 그 섬에 다시 가고 싶다. 그 섬 가득 지천으로 피어있는 붉은 꽃 부겐빌레아의 꽃말도 ‘조화와 정열’이다.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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