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흘러가고,
안목은 자라난다
옛 물건, 새로운 풍경, 참다운 사람과 만나며
마침내 알아 간 아름다움의 기록
온 나라의 사찰에 피어난 꽃살문(紋) 사진으로 큰 호응을 얻었던 국립청주박물관의 관조 스님 사찰 꽃살문 사진전과 그 도록인 『사찰꽃살문』(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선),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절정인 백제 유물을 최고 수준의 도록에 담아 화제가 되었던 『백제』(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부문 대상) 등은 저자의 대표적인 기획이다. 한 나라의 문화 중에서도 정수만을 모아 놓은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써 온 그는 주위에서 ‘공무원답지 않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고 한다.
잠시 머물려 했던 곳에서 수십 년을 보내는 일이 삶에서 드물지 않듯이, 저자 또한 박물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오래 일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나주반을 요모조모 살피며 “어, 그놈 참 잘생겼구먼.” 하는 박물관 선배의 감상이 마음으로 와닿지 않아 괴로워한 시절이 길었다. 그러다가 공부를 하고, 견문을 쌓으며 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남의 지식이 아니라 나의 관점으로 보는 눈이 열렸다. 안목이 트인 것이다.
한 권의 ‘심미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안목이 자라게 된 계기를 되돌아본다. 옛 물건과 새로운 경험, 기억할 만한 풍경 들을 하나로 잇는 것은 그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국의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 꼽히는 정준을 비롯해 다산 정약용 연구를 개척하고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내건 선각자 이을호, 금동반가사유상을 현대의 감각으로 포착해 낸 프로 사진작가 준초이, 아름다운 풀꽃과 미술 전시가 어우러진 풀꽃 갤러리 ‘아소’를 운영하는 주인아주머니,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진 예술을 택해 격조 높은 작품을 남긴 관조 스님까지. 참다운 사람들과 함께하며 자연히 배우고 자신을 새롭게 해 나간 기록이 이어진다.
독자는 이 책에서 박물관 큐레이터가 일하는 생생한 현장을 일별할 수 있다. 하나의 직업에 충실한 반평생을 보낸 한 사람의 초상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또한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예술 작품의 감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일례를 볼 수도 있다. 안목이란 좋은 물건을 고를 때는 물론이고, 삶을 꾸리며 세상과 만나는 그 모든 일에 쓰인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 가는 시간이다.
[책속으로 추가]
한번은 휴일 낮에 헤이리 한길사 북카페에서 네 사람이 모여 도록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간이 길어져 저녁을 먹고, 또 카페가 문을 닫자 어두운 밖에 나와 길에 서서 얘기한다는 게 자정이 가까웠다. 나중에는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넘치는 열정의 시간이었다. ─ 「알아본다는 것」
지방 박물관은 예산이나 전문 인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전시를 기획할 때 저비용 고효율의 주제를 발굴하는 것이 유리하다. 전투로 말하면 대형 박물관은 전면전을 택하고, 소형 박물관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편이 바람직한 격이다. 그런 성격을 고려해서 청주박물관에 있을 때 관조 스님의 사찰 꽃살문 사진전을 기획했다. 대중적이고 전달력 있는 전시라서 반응이 좋았다. 다른 여러 박물관에서 요청을 받아 전국 열 군데가 넘는 곳을 순회 전시했다. 새로이 제작한 도록도 찾는 이들이 많아 여러 쇄를 거듭 찍었다.
스님의 작품집 가운데 예술성과 불교적 정신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은 『생, 멸 그리고 윤회』와 『한줄기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수행과 사진 예술이 결합되어 만들어 낸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듯이, 스님에게 사진은 여기(餘技)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였다. ─ 「관조 스님 행장」
어릴 적에 갔던 시골 마을은 켜켜이 세월의 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진한 색이었다. 정돈된 밭이랑과 논, 논밭에 자라는 농작물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잘 가꾼 정원과 다를 바 없었다.
어린 시절 초여름 날에 할머니는 집 뒷동산 꼭대기의 콩밭을 매곤 했다. 학교가 파하면 나는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매번 산 밑 옹달샘의 물을 주전자에 떠서 할머니에게 갖다드렸다. 물이 차가워서 표면에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주전자를 들고 낑낑대며 산 위에 오르면, 그늘도 없는 초여름의 뙤약볕에서 수건 쓴 할머니는 혼자서 밭을 매고 있었다. 내가 멀리서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 다가가면, 치마까지 땀에 젖은 할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며 주전자 뚜껑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게 콩밭 매는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요, 고독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잡초가 제거되어 말끔히 정돈된 콩밭은 할머니에게 예술 작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무너진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