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 보겠습니다.

 

 

고통 없이 죽는다면

 

멸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어딘가 매력적이다. 죽음만이라도 평등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의 토양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어쩌다 운이 좋으면 리셋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 버티기 힘든 불안한 삶에 멸종은 마지막으로 꿈꿀 수 있는 행복한 파멸이다. 가장 완벽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멸종이란 단어 자체에 매혹을 느낀다면 <EBS 다큐10+ 지구대멸종> 시리즈를 보자. 그 중에도 제3[백악기의 소행성 충돌]을 꼭 챙겨보길. <지구대멸종> 시리즈는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5번의 대멸종을 다루는데 그 양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CG기술 발달로 멸종의 순간은 초단위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 중에서도 공룡이 사라졌던 백악기 대멸종에 대한 묘사는 멸종 판타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반경 10km가 넘는 거대한 운석이 총알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 숫자를 동원한 각종 비유가 파멸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멕시코만을 강타한 충돌로 48km 깊이의 구덩이가 발생하고 수소폭탄 1억 개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경 160km 안에 있는 물이 모두 증기로 변한다. 바위는 부서지는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화된다. 음속보다 빠른 충격파가 북미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인류역사상 경험한 적 없는 진도 13의 강진이 발생한다. 시속 960km에 달하는 쓰나미가 동심원 형태로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음속과 맞먹는 속도다. 파도 높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나래이션이 정점을 찍는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을 상황이다.”

 

충돌 지점 반경 400km안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인지하기 전에 사라졌다. 죽음의 순간을 계획할 수 있다면 가장 매혹적인 선택이 아닐런지.

 

삶을 산다는 것, 살아갈 뿐이라는 것

 

차라리 전쟁이나 나버려라.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넘쳐나는 말은 관용어가 되면 그 다음부터 의미가 변형된다. 망했다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말 망했음을 표현할 말이 빈약해진다. 망했다는 말로는 망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더 처절하게 망했음을 표현할 말들이 필요하다. 멸종이나 멸망은 이런 맥락에서 망했다는 말보다 더 망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멸종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내는 소설, 망했는데도 계속 살아보라는 소설이 있다. 황정은 <계속해 보겠습니다>.

 

살려는 의욕이 제로에 가까운 엄마 애자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랑을 위해 태어났던 종족,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을 때 삶도 사라진 종족. 애자는 남편 김금주가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고 난 후 멸망 상태에 돌입했다.

 

애초 반대하던 결혼이었고 이쪽엔 제사 지낼 아들내미 하나 없으므로, 라는 명목으로 사고 합의금을 친가 쪽에서 받아갔고, 애자도 생활에 별 열의가 없어서 애자와 나나와 내겐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 집을 비워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애자는 짐도 꾸리지 않고 나날을 생각에 잠겨 보내고 있었다.

 

죽고 나면 그뿐, 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죽은 듯 산다. 따라서 자매 소라와 나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둘 사이 끼어든 또 다른 존재. 옆 집 사는 나기와 나기 엄마 순자. 요양원에 맡겨진 애자를 빼고 나면 이들 넷은 두 집이지만 한 식구처럼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산다. 두 집은 지하에 나란히 붙어 있고 화장실을 공유한다. 소라와 나나는 순자의 도시락을 먹으며 성장하고 나기는 그 둘에게 연인인지 가족인지 혹은 그 사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 속에 위치한다.

 

주로 소라와 나나 이야기가 중심인 소설 속에서 삶은 예상대로 고통의 연속이다. 산재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인재. 삶도, 사람도 다 괴로울 뿐인 세상이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싫어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삶은 무욕하며 단지 살아낼 뿐인 시간의 집합체다.

 

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게 싫었다. 닿는 것은 싫다. 닿아도 괜찮은 것은 나나와 나기뿐, 나나와 나기뿐이고, 나나와 나기는 그것을 잘 알지. 그것을 잘 아는 나기에게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라고 말해봤자.

 

나는 나나. 나나는 나. 좋아하는 것보다도 싫어하는 것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잔뜩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결국은 비등한 에너지의 소요. 이것저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기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고등학교에서 나기는 소위 왕따였고 동성애자였는데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나기는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자기혐오를 키우며 성장했다.

 

자신들에게 맞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혐오했을 것이고 때릴수록 맞고 있는 그 몸에 관한 혐오는 불어나 더욱 때렸을 것이다. 맞아도 맞아도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너는 개입하지 않았다. 보태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 너는 삼분의 일쯤 타다 남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맞아가면서도 언제나 보는 것처럼 너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열망하고 원망했다.

 

특별히 살아갈 이유도,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던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꼬맹이 때부터 서로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만큼 셋은 너무 일찍 성장했다. 이들에게 순자의 존재는 각별하다. 순자는 소라와 나나를 만난 순간부터 세 개의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상징적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은 혼자라는 진리를 체득했지만 적어도 부족연맹체 같은 유대감 속에서 안도했고 덕분에 삶은 지속되었다.

 

나나와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먹었다. 성장기였으므로 그 밥을 먹고 뼈가 자랐을 것이다. 뼈에도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면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란 시절의 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봐 이 공간에 셋뿐인데 이렇게 다르잖아. 간장을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하다못해 그런 질문에도 답이 다르잖아. 다 달라. 사소하게도 다르고 결정적일 때도 다르지. 말하자면 나는 간장에 무덤덤한 부족, 소라는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갈등은 동생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라는 애가 싫다. 애를 만드는 게 싫다. 나나가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싫다. 가족을 늘리는 게 싫다. 관계가 늘어나는 게 싫다. 세대가 이어지고 그 세대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게 싫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회로가 그렇게 꼬여 있다. 생각이 아니고 심정의 영역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

 

멸종이야 소라.

소라는 진짜 멸종을 꿈꾸지는 못하지만 자기 대에서 관계를 소멸시키려 한다. 그것이 소라에게는 작은 멸종이다. 그런데 나나가 그 기본 전제를 깨려 한다. 나나는 건조한대로 사랑을 시도하고 애를 낳으려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 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우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모세는 성역할 구분이 분명한 보수적 환경에서 자랐고 나나는, 이를테면 요강을 쓰는 사람은 모세 아버지인데 왜 항상 모세 어머니가 요강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도 납득할 수 없다. 모세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주를 위해 날짜에 맞춰 수술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 요컨대 나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관계는 폭력적이었다. 남의 감정이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예의 없는 관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나 자신도 그런 폭력에 둔감할 때가 있었다. 나나에게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가르쳐 준 것은 나기다.

 

그 시절에 나나는 작은 동물을 괴롭히며 놀았습니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 드물게 기니피그. 꼬리를 밟아본다거나 발바닥을 찔러본다거나 가슴을 눌러본다거나, 괴롭혀서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도대체 뭘 느끼는 것도 없으면서 멍하게 괴롭혔습니다.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 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거야.

 

나나는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혼자서 애를 키워보려 한다. 이별을 통보받은 모세는 나나를 찾아온다. 흥분한 나머지 나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어째서 헤어지려는 것이냐, 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따진다. 어깨를 제압당하고 목을 졸린 채 나나는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손을 휘둘러 모세의 빰을 할퀸다. 그리고 때마침 소라가 나타난 덕분에 모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언니를 외치는 나나.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

 

지구 나이는 45억 살 정도 된다. 대략 6억 년 전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의 생물들이 나타났다. 23천만 년 전에 공룡이 등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200만 년 전에 등장했으며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에 나타났다. 급격하게 종이 줄어드는 대멸종은 지금까지 다섯 번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페름기 대멸종 때는 90%가 넘는 종이 사라졌다. 공룡 멸종으로 유명한 백악기 말 멸종 때는 공룡 100%, 조류 95%, 포유류 90%가 사라졌다. 덩치가 클수록 많이 죽었는데 육지에서 체중이 25kg을 넘는 종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중 99%는 멸종했으며 평균 생존기간은 500만 년이다. 숫자는 때로 그 어떤 설명보다 간명하고 직관적이며 압도적이다.

멸종은 보편적 현상이다. 모든 종은 언젠가 사라진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멸종의 국면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마치 달력 페이지를 넘기듯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훅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달력을 찢어 버리면 뭐가 됐든 새 페이지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멸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 몸이 쇠락 국면을 거쳐 죽어가는 것처럼 수많은 멸종이 말해주는 바,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짧아도 수천 년, 길게는 수십만 년도 더 걸린다. 우리에게 멸종은 순간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지속되는 매드맥스 와도 같다. 거부할 수 없는 재해가 닥쳐 인간이 멸종 국면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최후의 일인이 사라질 때까지 멸종은 고통스럽게 오랜 동안 지속될 것이다. 멸종 국면에 이르러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구의 역사가 숫자로 말해주는 진실이다.

 

나는 예전엔 이런 뉴스를 들으면 지구가 망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별다른 감상이 없었거든.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린다면.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다시 멸종을 생각한다. 멸종이라는 진통제로 현실에 닥친 고통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렇게 고통에 둔감해지고 나도 남는 것은 여전히, 그냥 다시 현실이다. 그러니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기보다는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놓지 않도록. 그래서 금방 망하지는 않을 테니 뭐라도 꿈꿔볼 수 있는 힘을 계속 지켜낼 수 있도록.

 

Posted by 칸나일파

전쟁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개 병사나 지휘관이 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의 내용이 제국주의 침략이든 인종청소이든 아니면 ‘인도적 개입’ 혹은 ‘정의로운 전쟁’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한편 현대전이 총력전의 양상을 띰에 따라, 전쟁에는 전투원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행위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갈수록 많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90%가 군인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10%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가 거의 반반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사망자 중 70%가 민간인이었고, 최근의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는 민간이 사망자 비율이 80~85%에 달했다.

-하워드 진, 『역사를 기억하라』


2012년작 ‘스펙 옵스: 더 라인(Spec Ops: The Line)’이 흡사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라인으로 기존 전쟁게임의 틀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 게임 역시 주인공이 군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은 아주 흥미롭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되어 전쟁의 현실에 내던져진다.


11비트 스튜디오가 2014년 11월 출시한 인디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사라예보를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전쟁통에 한데 모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일단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은신처의 구멍 난 벽을 보수하고, 부서진 잔해를 모아 각종 도구와 몸 누일 데를 만들고, 음식물을 마련하다 보면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밤이 되면 한 명이 밖에 나가 저격수를 피해 폐허가 된 도시를 헤집으며 물자를 수집하고, 나머지는 약탈에 대비해 불침번을 서며 동료들과 은신처를 지킨다.


수도와 가스를 비롯한 모든 자원의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든 적병과 싸우기에 앞서 굶주림과 추위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적과 싸워야 한다.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 빗물을 받고, 겨울에는 눈을 녹인다. 겨울철에 땔감은 식료품, 의약품과 함께 가장 구하기 힘든 자원 중 하나이다. 먹을 것은 언제나 모자라 하루에 한 끼나 제대로 먹으면 다행이고, 며칠을 굶다 덫에 걸린 쥐를 날로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밤에 버려진 건물을 뒤지다가 불한당의 총에 맞을 수도 있고, 수집을 마치고 새벽에 은신처로 돌아오다가 정부군이나 반군 저격수에게 당할 수도 있다. 병이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게 될 것이며, 하나둘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본 생존자는 우울과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이 게임에는 세이브/로드가 없다.



“현대전에서, 당신은 별 이유 없이 개처럼 죽게 될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람들은 보통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을까? 액션게임들이 주는 말초적 쾌락이나 멋진 그래픽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은 아닐 것 같다. 최후 생존이라는 목표 달성에 따른 성취감 정도는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즐겁다기보다 우울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것은 어느 하나도 달갑지 않은 몇 가지 상황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골라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연속이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려야 한다. 플레이어는 곤경에 처한 외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도 있고, 통조림 몇 병을 얻고자 무고한 이웃을 군인들에게 밀고할 수도 있다. 노부부의 집을 강도질하든, 병원에서 붕대와 약을 훔치든, 총칼로 중무장해 군부대를 습격하든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다. 일반적인 법칙은 몸이 편할수록 마음은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도 남는 것은 아픈 과거와 공허한 현재뿐이다. 전장에서의 용맹과 활약을 기리는 훈장도, 명예로운 개선 행진도 없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가장 우울한 게임이었다.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표현하지 않듯, 이 게임을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이 게임을 추천한다.


게임 플레이 화면



Posted by 人鬪

결핍 혹은 새로운 세계의 구축


<화성의 인류학자>는 뇌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례모음이다. 이 책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뇌신경학적 질병에 걸린 환자 7명이 등장한다. 나는 우연히 동네 헌책방에서 이 책을 접했고 소제목을 읽는 순간 책 속에 푹 빠졌다. 몇몇 제목은 다음과 같다. 색맹이 된 화가,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자폐증을 가진 천재 소년, 화성의 인류학자. 

마음에 담아 두고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아서 이 곳 저 곳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었더니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평소 책읽기 습관과 거리가 먼 방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 말이다.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느냐고 묻기보다는 병에게 어떤 사람을 덮쳤느냐고 물어야 한다. 


의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딱딱하게 정립된 ‘기준’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과 욕구에 따라 새로운 조직과 질서를 탄생시키는 유기체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건강’과 ‘질병’의 개념 자체를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뇌신경학에 있어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이론, 가설, 실험, 오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까지 쉼 없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그런데 흐름이 깨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는다.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전념한 전문가답게 관련 지식이 풍부한 이유도 있지만 병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중심을 명확히 잡아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었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감정이 과잉되어 있는 병상일기 같은 글이었다면 굳이 이 책을 소재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탐구를 멈추지 않는 이 뇌신경학자에게서 받은 감동의 핵심은 병을 대하는 고유한 태도에 있다. 저자가 언급한 환자들은 대부분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뇌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가벼운 틱장애에서부터 심각한 뇌손상까지 그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어떤 환자는 색을 잃어버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만 보이고 어떤 환자는 아무 이유 없이 항상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세상은 그들에게서 어떤 결핍을 본다. 환자들은 대단히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을 본다. 


점자를 읽을 때 계속 한 손가락만 쓰면 대뇌피질에서 해당 손가락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비대해진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어 수화를 쓰게 되면 청각피질이 시각 정보 처리에 동원되는 등 대뇌의 구조가 대폭 달라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티븐이 작아지거나 재능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한계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세계를 아무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소중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편협하고 특이하며 독특한 자폐증 환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의 풍요로움은 건강과 질병의 측면,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저자는 이전 지식이 축적되어 온 과학적 방법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 입각한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호스피스와 의사와 학자로서 필요한 태도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가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의 구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질병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환자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이기 이전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가는 개척자다.(환자라는 표현 말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만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의 몸은 새로운 세계관을 구현하는 지도다. 지도 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형이 그려진다. 


삶이 깨어나는 시간


흥미로웠다. 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덕분에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관련 정보를 뒤지던 중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소생(awakenings)>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1991년에 <사랑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로빈 윌리엄스(말콤 세이어)가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연구를 목적으로 원인불명의 뇌신경질환 환자들이 머무르는 요양병원에 취직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의학자로 근무하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모자란 병원에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세이어 박사를 곧바로 진료에 투입한다. 

병원의 일상은 정지되어 있다. 환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특이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병원 풍경은 정물화에 가깝다. 병원 밖에서는 계절이 흐르지만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질 않는다. 의료진은 무언가 개선되리라는 생각이 없다. 그저 때 맞춰 밥을 주고 환자를 재우며 관리할 뿐이다.  

외부 자극에 전혀 변화가 없던 환자들이 특정한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떨어지는 물체에만 반응하는 사람, 선이 그어진 바닥에서만 걸음을 옮기는 사람, 특정한 장르의 음악에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 등등. 세이어는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을 시도한다.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병원도 활기를 찾는다. 관조하던 의료진도 차츰 변화에 동참하기 시작하다. 사람들은 정물화의 캔버스를 찢고 나와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여기에서 결정적 국면 전환이 시작된다. 

파킨슨병을 치료하는 엘-도파(L-DOPA)라는 신약이 개발되자 세이어는 병원과 환자 가족을 설득해 환자들에게 임상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의 중심에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가 있다. 레너드는 어릴 때 원인 모를 마비가 시작되었다. 손가락부터 시작된 마비는 이내 온 몸으로 퍼졌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고 시선은 정지했으며 말은 주인을 잃었다. 그런 레너드에게 투약이 시작되었다. 가족 동의서를 구하러 간 세이어에게 레너드 엄마가 묻는다. "레너드가 파킨슨병도 아닌데 이 약으로 뭘 할 수 있죠?" 세이어가 대답한다. "전혀 다른 병을 위해 만들어진 약이어서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는다.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다시 대답한다. "그를 다시 데려오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으로요." 슬픈 얼굴이 묻는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이곳이든 그곳이든 어떤 차이가 있죠?" 애정어린 얼굴이 답한다.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레너드는 30년 만에 기적적으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그의 시간은 유년에 머물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레너드는 빠르게 적응했다. 모두가 기뻐했다. 레너드는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제목(awakenings) 그대로 레너드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투자가 쇄도했고 투약은 전 환자에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기적의 밤, 환자들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말하고, 춤을 추었다. 병원은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환자들의 활기로 유래없이 소란스러웠다. 환자들은 자유로운 출입을 요구하며 집단 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밀폐된 사회는 급격히 새로운 양상으로 조직되었고 그 중심에 레너드가 있었다. 세이어의 실험은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레너드에게서 발작적인 마비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레너드는 집단적인 저항을 주도하다가 이내 세이어에게 자신을 꼭 고쳐달라며 울부짖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몸은 다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통스런 온갖 번뇌가 몸의 언어로 구현되었다. 그렇게 기적의 시간이 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이어가 그 시간에 대해 말한다. 


그해 여름은 특별했습니다. 재탄생과 순수 그리고 기적의 계절이었습니다. 15명의 환자들과 관리인인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적의 내용을 바꿔야만 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약 때문에 실패했다고도, 단순히 병이 재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잃어버린 세월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뭘 잘못 했는지도 모른다는 게 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뭘 잘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건 약을 통한 해결의 길이 막혀도 또 다른 깨어남이 발생하리라는 것, 인간의 정신은 어떤 약보다도 강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언제나 최악으로 치닫는가?


“농경 이전의 수렵과 채집 시대에 인간의 기대 수명은 20~30살 사이였다. 187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인간의 기대수명은 40살이 되었다. 1915년에는 50살, 1930년에는 60살, 1955년에는 70살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의 80살에 이른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멋진 인도주의적 변천의 원인은 무엇인가? 질병의 세균 이론, 공중 보건 대책, 의약 및 의학 기술 등이다. 과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고귀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그러나 과학이 도덕적으로 해이한 기술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부패한 미친 정치인들에게 너무 막강한 힘을 부여했다고 쉽게 단정짓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의학과 농업의 진보는 인류 역사에서 발발한 많은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김영사, 19~21쪽


여전히 이런 글은 사실여부를 떠나, 글이 옹호하고자 하는 입장 때문에 선뜻 지지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수학과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여기서 멈췄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다. 전쟁은 수학과학의 발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생산력이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코메디였다. 수명을 다한 원전은 여전히 가동 중이다. 수학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파국의 사이즈만 커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에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도 예외는 아니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이름지은 수 많은 병적 증상들은 현실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경우가 많다. 산업사회는 과도한 노동을 합리화시키려고 만성피로와 같이 딱히 병이라 부르기 힘든 증상에 신경쇠약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성차별은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여성에게는 히스테리란 이름을 붙였다. 1,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과 군대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자 스트레스란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 정도가 심해지자 트라우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스트레스란 개념을 담은 보고서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집단은 군대다. 1970년대에 스트레스 연구인력 중 1/3이 미국의 군부기관과 관련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도 다시 과학의 힘에 기대고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역할을 하려고 고민하게 된 것은 몸이 아프면서다. 인공암벽타기를 취미로 1년 넘게 배우다가 손목과 어깨 인대가 심하게 찢어졌다. 좀 나을만하니 이번에는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이식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재활훈련 중이다.

병원은 흡사 실험실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차갑고, 무섭고, 낯설다.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한 처방전, 좀처럼 인간미를 느끼기 어려운 병원이란 시스템 속에서 유일한 구원은 환자친화적인 의사의 존재다. 이를테면 여전히 과학이란 선의를 가진 존재없이는 그 용처가 의심스럽고 통제가 불가능한 무엇이다. 어쨌거나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내 몸이 과학의 힘에 기대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따뜻한 논리, 가장 치밀한 감성


가설은 자주 빗나가고 실험은 항상 성공하지 않으며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새로운 도전은 오히려 더 나쁜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어 온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일관되게 휴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이 근거하는 태도에 있다. 세이어의 휴머니즘은 신파가 아니라 과학적 태도로부터 나온다. 더 근본적으로 과학적 태도는 논리가 아니라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책 제목이자 마지막 7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한 <화성의 인류학자>는 세 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생물학자 템플 이야기다. 

템플은 성장과정을 거치며 학습을 통해 사회생활도 가능했는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마치 함수처럼 그에 적합한 반응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템플은 정상적인 생활과 그에 따르는 정상적인 기쁨(사랑, 우정, 취미생활, 인간적인 만남)이 자신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임을 깨달았다. 세상은 때로 템플을 속이고 이용했다. 템플은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지 않고 직접 고안해서 만든 포옹기계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육환경이 가축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템플은 대량사육시스템, 특히 대량 살상 시스템이 가진 비인간성에 분노하고 시스템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템플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템플에게 가해지는 비정상이란 공격이 너무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편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자폐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템플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템플에게는 인과관계에 충실한 과학이란 언어가 이해하기 쉬웠다. 이것이 과학의 세계로 들어서는 출입구가 돼주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성인 자폐증 환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자폐아가 나이를 먹으면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일부 청소년 자폐증 환자들은 황폐했던 세 살 무렵과 달리 상당한 수준의 언어 능력과 약간의 사회적 기술을 갖추고,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밑바닥에는 심각한 자폐성 특징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통상적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아스퍼거는 캐너보다 훨씬 분명하게 이런 가능성을 예견했다. 따라서 '고도의 능력'을 갖춘 자폐증 환자들은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고 불린다. 


한 동안 손에 놓고 있던 수학과학에 대해 다시 손을 내밀어보기로 한다. 수학과학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태도로서 한 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다시 만지작거리기로 했다는 의미다. 지적 호기심과 따뜻한 시선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시 긍정해보기로 한다. 과학은 편견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편견을 깨기도 한다. 과학적 태도를 지워버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불신이 오히려 편견과 불합리를 키운다면 그에 맞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화성의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Posted by 칸나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