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정략결혼 앞둔 짧은 로맨스… 한폭 정물화로 남은 아픔
■ 연인
1920년대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 가난한 프랑스인인 16세 소녀(제인 마치)는 학교에서 열린 축제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페리에 오른다. 낡은 베이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작은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중절모를 쓴 소녀는 배의 2층 갑판에서 강을 바라본다. 옷도, 구두도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소녀의 눈빛만은 사이공의 푸른 수면을 두 동강 내며 달리는 여객선만큼이나 힘이 넘친다. 그런 소녀를 갑판의 구석에서 한 남자(량자후이·梁家輝)가 지켜본다. 고급 슈트를 입은 남자는 소녀의 아름다움에, 작은 몸에서 흘러내리는 싱그러운 매력에 넋을 잃었다.
용기를 내 소녀에게 다가간 남자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한다. 한눈에도 남자는 소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소녀는 남자의 제안이 두렵지 않다. 호기심 많은 소녀에게 이런 만남은 어쩌면 꿈에서나 그려보던 기회 같은 것이다. 선뜻 승낙하고 남자와 함께 차에 오른 소녀는 구경도 하기 힘든 좋은 차의 시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남자는 소녀의 손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얹는다. 손톱보다도 작은 면적이 닿았는데도 서로의 손끝에서 남녀의 심장이 요동친다.
그날 이후, 소녀는 밤마다 이 남자가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 가난 때문에 억지로 내몰린 가톨릭 학교에 염증이 나던 소녀에게 그가 가진 돈과 건강한 육체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안식이 될 것이다. 소녀의 간절함과 욕망을 읽은 남자는 물질적인 호의를 베풀어 주는 대신 그가 소유한 ‘비밀의 집’에서 밀회를 하자고 말한다. 상속을 빌미 삼아 아버지가 강제로 정해 놓은 혼처로 결혼해야 하는 남자에게 소녀와의 짧은 로맨스는 무덤 같은 결혼을 잊게 해 줄 것이다. 남자에게 소녀는 죽음의 여정 직전, 찰나의 생명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시장 구석 한 어두컴컴한 구가(仇家)에서 이들의 만남이 시작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남자가 제공해 주는 물질과 젊은 육체를 마음껏 사용(?)하는 소녀는 남자의 얼마 남지 않은 정략결혼 날짜를 두 사람의 계약 만료일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반대로 남자는 소녀가 없는 날들을 아편으로 버텨야 할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가 물려줄 막대한 부를 포기하지 못해 사랑도 하지 않는 여자의 남편이 된다. 방학이 끝난 소녀는 그를 처음 만났던 배를 타고 작가가 되고자 프랑스로 떠난다. 갑판에 기대 있던 소녀는 먼발치의 검은 세단 안에서 미동조차 없는 남자의 그림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해가 질 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배에서 남자가 있던 쪽을 바라보던 소녀는 밤이 돼서야 눈물을 쏟아내며 오열한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92년 작 ‘연인’은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서정적인 내레이션이 영화 녹음 당시 70세였던 잔 모로의 노쇠한 목소리를 타고 소설의 기품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 영화가 개봉한 지 26년이 흘렀음에도 그림 같은 이미지와 아이콘은 선명하게 기억된다. 사이공 강을 배경으로 서 있던 소녀가 걸치고 있는 골동품 같은 원피스와 남자용 중절모. 처음 사랑을 나눈 날, 무릎을 꿇고 앉아 참회하듯 소녀의 몸을 닦아주던 남자. 결혼식 전날, 꺼져가는 촛불 아래서 아편에 찌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자가 소녀를 올려다보던 힘없는 눈빛. 이 모든 이미지는 스톱 모션으로 가둬두고 눈에 담아 오랫동안 탐하고 싶은 정물화에 가깝다. 아노 감독은 이 영화 외에도 ‘티벳에서의 7년’ ‘에너미 앳 더 게이트’ 등을 만들었지만 ‘연인’ 이후의 작품들이 평작들로 남은 것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심어둔 ‘연인’을 제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들의 기억 속 남자와 소녀의 육신(肉身)은 시간에 마모되지 않는 영생의 정물(靜物)이 될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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