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거울 앞에서 살아있을 수 없어요
루이지 피란델로 소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2018, 최측의농간)
지금까지 나라고 믿었던 내가 남들에겐 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누구였을까?
본문에서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그는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나름의 만족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코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잘생긴 코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의 믿음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뭐해?" 평소와 달리 거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아내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별건 아닌데, 여기를 좀 봐. 이쪽 콧구멍을 보라고. 누르면 약간 아파."
아내는 웃으며 대답했다.
"휜 쪽을 보고 있군."
나는 누군가에게 꼬리를 밟힌 개처럼 몸을 돌렸다.
"휘었다고? 이쪽으로? 코가?"
그러나 아내는 조용하게,
"그래, 자기. 잘 봐. 오른쪽으로 기울었어."
본문에서
이날의 대화는 우리의 주인공 비탄젤로 모스카르다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스스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휜 코를 달고 28년을 살아왔던 모스카르다. 아무 생각 없이 나누었던 아내와의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코가 약간 휘어있음을 발견한 모스카르다는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이 살아왔거나 믿어왔던 현실을 전면적으로 다시 숙고해보기 시작한다.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자신의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불분명해지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러므로 그의 현실 그 자체다.
보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혹은 타인의 숫자만큼 분열되고 변주되는 자신의 모습-혹은 ‘모스카르다’라 불리는 주체의 면모-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가 발견하기 시작하는 스스로의 욕망을.
고독은 결코 당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없고, 또 이방인과 함께 있을 때만 고독이 찾아오는 법이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불확실한 고통으로 당황할 때, 또 생판 낯선 곳에 있거나 낯선 사람이 옆에 있을 때, 고독은 찾아온다. …(중략)… 그런 식으로 난 혼자 있고 싶었다. 나 없이.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었던 그런 내가 없이. 오로지 그 옆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어떤 이방인과 함께.
본문에서
무너져 내리는 현실 속 그가 보이기 시작했던 분열증적 광기는 이미 당대로부터 우리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하나의 상징적 징후처럼 보인다. 몰락하는 자의 숨결을 닮은 그 징후는 우리들, “언제나 타인들의 시선에 놀라는 야위고 불쌍한” 자들의 분열증적 모습을 닮아 있다.
이처럼 흥미로운 소재와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는 작품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작품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비극적 삶의 경험과 당대 사람들의 위기의식에 대한 자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소설에는 내가 했던 모든 것의 완벽한 종합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의 원천이 들어 있다.”고 언급하였듯, 끊임없이 새로운 문학 실험을 통해 당대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그가 15년 동안 구상했다고 전하는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통해 우리는 피란델로 문학 활동의 총체적 결산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만나게 된다.
피란델로 월드로의 초대
희곡, 시, 장편 및 단편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온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서구권에서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는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가다. 경제적인 어려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아들이 포로가 된 사건, 딸의 자살 시도, 정신이상 판정을 받은 아내의 광기와 함께 했던 나날 등 일련의 극적인 사건들이 그의 작품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그는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 급격한 산업화 및 도시화의 현실과 더불어 무겁고 우울했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던 사람들의 소외와 불안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론을 피력하면서“생각건대 인생은 매우 슬픈 익살이다. 왜,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그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하나의 현실을(저마다 다른 현실을 각자 하나씩) 창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려는 욕망을 우리 내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이 현실이 헛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중략)… 내 예술은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연민 뒤에는 반드시 인간을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이 따라오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가(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초현실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상징주의적으로까지 독특하게 직조해낸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인간을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을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쓰라린 연민”으로 감싸않으면서도 “자신을 속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몰락의 징후와 증상의 각성을 환기하고 있다. 그가 말했듯 그 “쓰라린 연민” 뒤에는 또다시 “인간을 자기기만으로 몰아넣는 운명의 잔인한 비웃음”이 올 것이므로.
우리는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당대의 환경 속에 내던져져 사물과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뿐만 아니라 스스로로부터도 소외된 채 불안에 떨며 분열증적 상황에 노출된 사람들의 존재모순성이 탁월하게 형상화되는 것을 본다. 난해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변적이고 장황한 부분들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이는 피란델로가 부러 현학적인 말놀이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근대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삶 자체가 분열증적이고 불안정한 토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모스카르다의 입을 통해 말한다.
아무도 거울 앞에서 살아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보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당신은 타인들이 당신을 보는 것처럼 결코 당신 자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최측의농간판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탈리아어 원전 완역 판본이다. 최측의농간에서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한 루이지 피란델로의 이 대표작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다. 이번 출간을 위해 옮긴이는 1999년판의 원고 전체를 새롭게 전면 검토하여 다수 교정하고 교열하였으며 우리말로는 다소 딱딱하고 어색하더라도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통해 피란델로 글쓰기의 형식적 면모 또한 가능한 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모든 소설은 일종의 응답일 수 있다. 당대를 둘러싼 문제의식에 관한 것이든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번져온 갈증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질문의 형태로 우리의 뒷덜미를 덮쳐오는 응답이다. 그 미완의 응답은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응답을 요구한다. 당대를 둘러싼 문제의식과 개별 주체의 내면으로부터 번져온 갈증이 교묘히 결합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면, 소설 읽는 일도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앞에서, 시간낭비라는 말은 무력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