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이종원 "'앙가주망'으로 거듭난 후레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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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7.25. 오후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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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비 없는 후레자식

"누구야, 대리 대답한 놈이?"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한 친구가 고개를 수그린 채 마지못해 손을 들었다. "당장 앞으로 나와" 라는 호통에 친구는 겁에 질린 채 교탁 앞으로 머뭇대며 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너 아버지 계셔?" "아니요,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친구의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생님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애비 없는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라는 말을 내뱉었다.

원래 '후레자식'이란 '(로 된 어미)'의 자식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것이 '호래자식'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후레자식'으로 표기되며 전혀 다른 의미, 즉 예의가 없는 아이라는 의미로 변질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듯 애비 없는 자식을 예의가 없는 후레자식이라 부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선생님 말씀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636·25전쟁기념일 날의 일이었다. 초여름 화창한 오후 첫 시간에 교감선생님이 담당한 도덕시간이 있었다. 안 들어도 뻔히 다 알만한 얘기를 지겹게 들어야하는 일은 혈기왕성한 10대 후반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매우 따분한 일에 틀림이 없었다. 더구나 점심을 먹고 난 직후여서 식곤증이 엄습해오는 시간이었다. 이미 초록이 짙은 학교의 동산은 우리를 불러내기에 충분히 유혹적이었고 결국 서너 명이 수업을 빼먹고 교내동산에서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일부 자리가 빈 것을 알아차린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네 자리가 비었는데 출석에 답변하지 않은 학생은 세 명뿐이었다. 결국 대리 대답을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대리 대답한 학생이 아버지가 안계시다는 사실을 고하는 순간 선생님은 결코 교육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폭언을 거침없이 쏟아내었던 것이다.

6·25때 아버지를 잃은 후 가정 자체가 붕괴되다시피 한 환경에서 힘겨운 나날을 버텨가던 나로서는 비록 그것이 내게 던져진 질타는 아니었지만 감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안 계신 것도 서러운데, 후레자식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더구나 도덕 시간에?"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3·8따라지라는 꼬리표가 줄곧 따라다니던 피난민으로써 알게 모르게 차별받는 일도 서글펐지만 아버지가 안 계셔서 겪은 서러움은 더욱 컸었기 때문에 이러한 잠재적 피해 의식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반발로 이어졌던 것 같다. 순간 교실이 싸늘한 정적에 빠졌다.

"넌 또 뭐야, 이리 나와." 내가 교탁 앞으로 나가자마자 선생님은 따귀를 때리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 다그쳤다. 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먹으로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세차게 때렸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엎드려뻗치라고 하고는 마구잡이로 구타를 가해왔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용서를 빌지 않았다. 단지 이를 악문 채 결코 교감선생님 같은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비록 후일의 일이지만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이 결코 틀린 말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가정교사를 하거나 신문 돌리는 일 등으로 학비를 마련해가며 고학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안 계시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집안 대소사를 나와 상의하곤 하다 보니 어린 나이인데도 누구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남으로부터 간섭을 받는데 적응이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꾸지람이나 조언해 줄 아버지 없이 성장하면서 인내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2 때 교감선생님께서 그런 거룩한 가르침을 주시려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이 일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되돌아보면 나는 평생 원칙과 명분에 어긋나는 일에 지나치도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자기희생이 뒤따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훗날 보다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평생 후레자식으로 남았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 없는 가정환경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받은 교육의 영향이 오히려 컸다는 생각이 든다.



2. 돌대가리 교장선생님

나의 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별명은 돌대가리였다. 원칙과 명분이 분명했고 청렴과 양심이 일상화된 분이었다. 특히 불의나 부정부패를 절대로 좌시하지 않는 분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여서 입시와 관련하여 부정이 판치던 시기였으나 모든 유혹을 물리치는 솔선수범을 보여주었다. 어쩌다가 선물을 보내오는 학부형이 있으면 이를 공개적인 경로로 돌려주어 간접적으로나마 모욕감을 주다보니 돈으로 특혜를 보려했던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이 사람은 도무지 얘기가 안 통하는 돌대가리야"라고 선생님을 빗대어 부른데 연유하여 생긴 별칭이었다.

선생님은 "유한흥국", 즉 땀을 흘려 국가를 흥하게 하자는 교훈을 내걸었고 이를 선도해 나갈 젊은이들의 학식과 양심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학식은 사회의 등불이 되고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 된다고 가르쳤다.

선생님의 양심적인 인간 만들기 교육의 대표적인 사업은 한국 최초이며 유일한 무감독시험의 실시였다. 제물포고등학교(이후 제고)를 설립한지 불과 2년만인 1956년에 감독교사 없이 학생들이 스스로 시험을 보게 된 제도이다. 주위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제도시행 후 전교생 569명 중 낙제생이 무려 53명이나 생겼다. 선생님은 이들 낙제생들의 자존감과 양심적 행동을 크게 치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도는 이후 60여 년을 지나오면서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으며 모든 제고인의 명예와 자존감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교육에 힘입어 제고 출신들은 비록 실리는 잘 챙기지 못하지만 스스로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건전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였던 것 같다. 그 결과 교육계와 법조계 그리고 언론계에 상대적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다.

감수성이 가장 민감한 나이에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양심선서를 한 후 선배들이 모표와 배지를 직접 달아 주는가 하면 중학교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건물로 오르는 긴 계단 양 옆에 도열한 또 다른 선배들이 박수로 입학을 축하해 주었던 기억은 이후 내 인생행로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선생님의 교육철학이 일면 나로 하여금 때로는 마치 후레자식처럼 처신하도록 만들어준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돌대가리 교장선생님의 제자로 평생을 살 수 있어 행복했다.



3. 낙방으로 시작한 대학 1

1960년대 대학 입시제도는 1차로 입학시험을 보는 서울대 및 연고대 등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후기에 모집을 하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고 시험에 실패하면 후기대학을 가거나 아니면 일 년 재수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뜻하지 않게 1차 대학 입시에서 낙방하였으나 운 좋게도 성균관대학교에 전교 수석으로 합격하여 입학금과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학비는 면제되었지만 우리 집은 내가 가정교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집안 살림이 가능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성대 재학생으로 가정교사직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성대 수석입학, 제물포고 출신, 성실지도" 라는 광고 문구를 세로로 두 줄 써서 신문에 내고 친구 집에서 전화오기를 기다리는 일을 거의 한 학기 내내 해보았지만 한통의 전화도 받아보지 못하고 만 것이다. 무엇보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점은 친구 집 윗목에서 눈치를 봐 가며 울리지도 않는 전화기만 온종일 쳐다보며 앉아 있어야 했던 비참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점차 학업에 대한 집중력은 흐트러지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시합과 술 마시는데 보냈다. 이러한 나의 일탈 행위는 점차 도를 더해갔는데 그중 하나는 수업을 빼먹고 창경궁 담장을 넘어 들어가 하루를 소일하는 일이었다. 입장료가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이런 식의 일탈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심정이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심리적 자학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목적이었다고나 할까?

성대 학생들의 빈번한 담치기 때문에 봄철이면 창경궁 직원들이 담장 근처 순찰을 강화하곤 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용담이라도 떨치려는 듯 담치기를 계속하였다. 결국 나는 여러 차례 직원에게 발각된 끝에 상습월담 자 명단에 포함되어 학교로 이첩되었고 학생처장실로 소환까지 되었다. 이런 식으로 대학생활을 한다는데 위기감이 들었다.

이렇듯 영혼 없는 방황 속에 나는 당시 대학가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실존철학 논쟁에 자주 참여하게 되었다. 대학생활의 혼란에서 탈피시켜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이념 및 가치의 추구라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도 있으리란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듯 어쭙지않게 시도한 설익은 실존철학 공부였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사를 관조할 수 있는 가치관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무엇보다도 참여('앙가주망') 개념을 통해 개인의 자유에 기반을 둔 현실 세계 비판과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실천적 행위를 옹호했던 사르트르의 철학이념에 심취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념에 쉽게 동감하고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양심과 사회를 선도할 지혜로서의 학식'을 강조했던 중·고등학교 교육 배경에 기인한바 크다고 본다. 여하튼 이러한 관점의 정착이 평생 내가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근간이 되어 주었다. 또한 이는 파스칼이 그의 저서 팡세(Pensée)에서 언급한 '생각하는 갈대'처럼 소극적 차원의 실존적 인간으로 존재하는 대신 보다 능동적인 참여와 비판을 생활화 하려는 사고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후 나의 행보는 단지 생각하는 갈대의 수준을 넘어 행동하는 갈대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 앙가주망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결국 대학에서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송두리째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철학적 관념을 스스로에게 체화시킬 특단의 체험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군 입대였다. 군대와 같이 특수한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다면 더 이상 방황에서 허우적거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4. 자원입대

의정부에서 입대할 장정들이 모인다고 하여 아침 일찍 서둘러 인천 집을 나섰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자원입대 신청을 대신해 주었던 친구로부터 입영 허가가 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만 떠나는 날 까지 입영 통지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고 있던 집이 남의 집 대문을 거쳐야 찾아낼 수 있는 곳이어서 우편물이 배달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기는 했다.

00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많은 젊은이들은 일단 지역 별, 동 별로 일차 분류되고 입영 통지서와 인사 기록부를 대조한 후 순차적으로 열차에 태워졌다. 입영 통지서를 지참하지 못한 사유를 인솔자에게 설명했더니 통지서가 없으면 곤란하니 다음 기회에 입영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귀가했다가 입영 절차를 다시 밟는 일은 심정적으로 받아드리기 힘든 권고였다. 군대 간다며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송별연도 받았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학교를 계속해서 다닐 수 없을 만큼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자원입대 형식을 빌려 그 위기를 탈출하려 했던 것이어서 학교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계속된 일탈 행위로 학교 성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등록금 면제 혜택마저 받을 수 없게 된 형편이기도 했다.

결국 특단의 결정을 하게 되었다. 통지서는 배달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논산 훈련소까지 가면 그곳에서 입영 허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일단 입영 열차에 오르기로 했다. 소집된 장정들 중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 일단 가까운 객실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부모들이 집결지까지 따라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어쨌든 열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남의 이목을 의식했는지 인솔 맡은 군인들이 상당히 예의를 갖춰 장정들을 대해 주었다. 그러나 열차에 오르기가 무섭게 이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폭언과 구타 위주로 졸지에 군기를 잡아갔다. 그리고 4명씩 스크럼을 짜고 '앉아 번호'(한줄 씩 번호를 함께 부른 다음 앉는 방식)를 시키며 인원 점검을 하였다. 우리 객실은 한 사람이 초과 되었는데 나 때문이었다.

인솔자는 앉아 번호를 여러 차례 반복시키며 인원을 점검하였다. 당시에는 입영 대상자 중 중졸은 물론 국졸이나 국퇴 심지어 무학 내지 문맹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구호나 명령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기관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인원이 한 명 남는 게 확인되자 "에이 이런 고문관 같은 놈들이라고, 어떤 놈이 제 칸을 두고 여기에 온 거야?" "여기는 0000동 병력만 타는 칸이야, 이 병신 같은 놈들아, 출신지가 다른 놈 당장 나와."라고 다그쳤다. 순간 자수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러면 집으로 쫓겨 갈 것만 같아 그저 숨죽이고 있었다. 하기야 열차가 논산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니 열차를 세우고 내리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 열차가 논산에 도착하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는지 인솔병도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한밤중인지 새벽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석탄을 태워 달리는 증기 기관차가 큰 기적을 울리며 논산 역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차한 열차를 뒤로하고 수용연대 연병장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운명적인 인원 확인 점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쫓겨날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자진 신고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입안에 찌릿한 아픔이 스쳐갔다. 그리고 "아 이놈 혹시 간첩 아니야? 일단 데려다 가둬."라는 말이 이어졌다. 이후 약 이주일 동안 나의 신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비록 입대 통지서를 지참하지 않았지만 인사 기록부에 기재된 사항이 사실로 확인되자 결국 입대가 허용되었다. "남들은 군대 안 가려고 난리들인데 이놈은 왜 이리 미리 와서 속을 썩이는 거야"라고 누군가 푸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용연대에서 약 한 달간 머무른 후에야 비로소 00연대 (0중대 0소대)에 훈련병으로 정식 입대하게 되었다.

5. 향도 직을 거절하다

훈련소 내무반에 도착하자마자 내무반장이 훈련병들을 침상 양편에 나란히 서게 하였다. 그리고 0.5초 안에 집에서 입고 온 모든 옷을 침상 아래 통로로 던져버리라 했다. 이어 던져진 옷들을 갈퀴 같은 것으로 쓰레기처럼 모아가면서 "민간으로부터 온 모든 흔적을 없애고 국가가 하사하는 훈련복으로 갈아입는다."라는 명령이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뒤따랐다. "제가 가지고 온 돈이 팬티 안에 있습니다. 버리지 마세요," 등의 절규가 시차를 두고 이어졌지만 외침의 내용은 거의 같았다. "아 이놈들아 국가가 다 입혀주고 재워주고 하는데 무슨 돈을 가져 오고 지랄이야." 그러면서 일단 개별적으로 확인한 뒤 돌려줄 터이니 걱정 말라고 했다. 훈련 일정이 바쁘니 모든 동작을 0.5초 내에 끝내라던 소대 내무반장이 이번에는 무슨 시간이 그리 많은지 천천히 팬티 한 개씩 들어 올려 그 안쪽에 있는 비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친절하게 액수까지 확인한 후 돌려주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훈련병들이 돈을 꼬깃꼬깃 접어 조그만 주머니에 넣은 후 팬티 안쪽에 핀으로 매달아 놓았었는데 입대 첫날 첫 시간에 모든 훈련병들이 각각 얼마만큼의 돈을 지참하고 왔는지가 내무반장에게 완벽하게 노출되었던 것이다.

훈련기간 동안 이 돈의 상당 부분이 결국은 내무반장에게 여러 가지 명목으로 또는 자발적(?) 의사에 따라 건네졌다. 빗자루가 망가졌다느니, 방독면의 줄이 끊어졌다느니 하는 명목으로 배상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또는 주말 외출 시 격려금 조로 갹출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훈련병의 병영 생활 여건이나 훈련 장비가 열악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 관물이 망실되면 어떻게 해서든 사비를 들여서라도 보충해야 했었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당시 훈련복은 거지더러 입으라고 해도 사양할 만큼 낡아 있었고 아무리 매일 밤 꿰매도 다음날이면 다시 너덜너덜해졌다. 이나 벼룩이 너무 많아 훈련병들은 천금 같은 오락시간이나 휴식시간을 주로 이 잡는데 보냈는데 박카스 병에다 잡은 이를 담아 제출하곤 했다. 내가 논산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근무할 부대 배치가 끝났을 때 이틀 휴가를 얻어 집에 갔었는데 속옷을 빨던 어머니가 눈물 훔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팬티 양 아래쪽이 깔려죽은 이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지참금 확인 작업이 끝나자 분대장은 훈련병들을 대표할 향도를 뽑겠다고 했다. 우선 대졸 또는 대재 학생들은 손을 들라고 했다. 3명이었다. 그러더니 이 중 태권도나 기타 무술을 한 친구는 계속해서 손들고 있으라 했다.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곧이어 "오늘부터 네가 향도 직을 맡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한시도 지체 않고 못하겠다고 답변했다. "이 새끼가 0으로 000를 까라면 까는 게 군대인데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이놈 군사재판감이군."하더니 "나와서 엎드려뻗쳐."라고 했다. 그리고는 '식은 장쇠'(당시 보급된 총은 2차 세계대전 시 미군들이 쓰던 M1이란 소총이었다. 이를 10정씩 걸어놓고 가로질러 잠그는 ''자 모양의 쇠막대가 있었는데 이것을 그렇게 불렀다)10대를 내려쳤다. 정신은 있었지만 영혼이 신체를 이탈하는 기분이었다. 입대 첫날 군기를 잡는데 좋은 본보기가 되어준 셈이다. 마치 뱀이 지나간 것 같은 검고 붉은 무늬의 부픈 상처가 나서 입대 첫날부터 의무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향도 직은 면했지만 몸과 마음의 상처가 컸다. 군 입대 전 동네 선배들로부터 절대 향도는 하지 말라고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향도 직을 거절했다가 화를 자초했던 것이다. 그래도 당시 향도의 비공식적 임무의 하나가 되어있던 관행, 즉 내무반장의 사적 유흥비 조달 등을 위해 동료 훈련병들의 돈을 거두는 일에 앞장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은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육 이념을 철저히 교육받았던 나였다. 따라서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감당할 수없는 부당한 임무를 강요당하기 쉬운 향도 직을 맡고 싶지 않았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군 입대 첫날에 일어난 불상사는 나에게 군 생활동안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명분과 원칙에 어긋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새로이 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고 싶었다.

사실 이러한 결심으로 인해 나는 전역 때까지 자주 구타나 체벌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논산에서의 훈련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에도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부당한 모금 행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향도와 언쟁을 벌였던 것인데 훈련병들의 훈련 생활 여건 개선을 반대하는 파렴치한이라 매도당한 채 끌려 나갔다. 그리고 들고 나온 도끼로 방화수 통 얼음을 깨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거기에 거꾸로 처박혀졌다. 또 의무대로 보내졌다. 당시 우리 분대장은 까무잡잡하고 체격이 다부진 사람이었는데 H대 재학 중인 자로 특히 여자를 많이 밝혔고 훈련병들에게는 가혹한 제대 말년 병장이었다. 하도 이런 유형의 행패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러한 비행을 고발하는 이른바 '소원수리'라는 제도가 도입되었고 훈련이 끝나는 날 작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의 우리 내무반장은 훈련 기간이 끝나갈 즈음 나를 별도로 부르더니 협박 반 사정 반하며 소원수리에 자신의 일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의 협박이 두렵기는커녕 저런 군인은 영원히 매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현실적으로 혼자만의 대응으로는 시정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소원수리를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후회되는 의사결정 중의 하나이다.



6. 1960년대의 군대문화

개인적 차원의 비행에 비견할 수 없는 군 조직 차원의 비리는 더욱 심각했다. 한번은 부대에서 국회의원 부재자투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참관한 적이 있다. 병사들은 자기 주소지에서 우송되어온 투표지에 기표하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선거 담당관이 이를 뜯어보고 야당에 찍은 것은 찢어 버리거나 무효가 되도록 이중 기표를 하는 등의 행위를 목격한 적이 있다. 군사정권 시절이긴 해도 19603·15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난 지 몇 해 지나지도 않았던 시기의 일이어서 더욱 경악했다. 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해서 시정될 성격의 사안이 아니어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구악을 일소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정권이었지만 전과 전혀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역시 세상은 쉽게 바뀌거나 개선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이외에도 당시 군대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부패 또한 상상이상이었다. 예컨대 부대에 나오는 부식이 빼돌려지는가 하면 한강 모래를 채취하는 이권에 군 트럭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군 지급품 중 비싼 것, 예컨대 동정복(겨울에 입는 정복)은 부대에 배치되는 날로 선임병사나 기관원들에게 뺏기기도 했다. 그러다 관물 검사가 예고되면 하는 수 없이 시내에서 사다가 채워 넣는 일이 허다했다. 부대에 배치된 지 약 반년이 지났을 때 나는 2·4종계 일을 맡게 되었다. 이 보직의 가장 큰 어려움은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군수품 중 돈이 될 만한 품목들을 특수부대 요원들이 가져가버리는 관행에 어떻게 맞서느냐 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배급하기 전에 보관 중인 품목을 내주었다가 검열에 적발되면 투옥될 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부대에 드나들던 방첩대 G하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실제 계급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불렀다. 색안경을 낀 채 사복 차림으로 부대 내외를 안하무인격으로 휘젓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차기 년도 동정복이 부대로 지급되어왔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문제의 하사가 나타나 책상에 걸터앉더니 동정복을 전부 가져오라고 하였다. 나는 강한 어조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순간 그는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전화통을 집어 들어 내게 던졌다. 용케 내가 피하자 내무반으로 들어가 야전삽을 들고 나오더니 나를 마치 찍어 내리기라도 할 듯 덤벼들었다. 실로 위촉일발의 순간 일단 위기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의식중에 삽을 든 팔을 걷어찼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사가 팔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부축해 나갔다. 골절인지도 모르니 일단 병원에 가보아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다소의 부상이 있어 일단 의무대로 올라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병원으로 후송된다던 하사가 갑자기 의무대 문짝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병상에 누워있던 내 얼굴 위로 덮쳤다. 방어적 차원에서 얼떨결에 덮쳐드는 하사의 얼굴 부위를 팔로 강하게 밀치며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앞니를 다쳤는지 하사의 입 언저리에 피가 흥건해진 것이 보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하사를 뒤따라 올라온 병사들이 다시 부축해 나갔다. 실로 순식간에 생긴 그리고 무의식적 자기 방어 본능이 초래한 일이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워진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실로 나의 구세주가 된 분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우리 부대 주임상사로 국방경비대 시절 입대한 한국 최고 베테랑 군인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일단 집에 가되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기거하다가 부대에서 부를 때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중대장도 나에게는 매우 우호적인 분이었지만 걱정만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는 허위로 나를 Y소재 헌병대로 구속 이감시킨 것으로 하사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런 성격의 사태로 소속 부대가 자진하여 부대원을 헌병대로 보냈다는 얘기를 G하사가 수긍할지 의문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레 건넸다. 이에 주임상사는 비록 그가 의심이 가더라도 달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라 답했다. 아마도 그리 처벌된 것으로 믿어 주는 편이 스스로도 마음 편할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헌병대는 특수 부대나 유격 부대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부대가 아니어서 혹시 G하사가 알아보려 해도 잘 알려주지 않을 것이란 점, 나를 찾아내야 하는 사유를 밝히려면 자신이 저지른 비행과 그 때문에 일반 병사로부터 당하게 된 수모가 드러날 수밖에 없어 섣불리 사유를 대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우선은 부상 치료 때문에 당분간 활동하기 어렵다는 점 등의 판단에 근거하여 내린 구제책이라면서 G하사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제공한 사유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전해 주었다. 실로 오랜 군 생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를 발휘한 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 후 부대 선임자가 찾아와 이제는 돌아와도 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귀대한 다음날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문제의 하사가 험상궂은 얼굴로 찾아왔다. 나는 자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어 미안하다고 했다. 물론 사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합도 받고 구타도 당해가며 한 나절 분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주임상사가 이상병도 이번 일로 인해 헌병대에 가서 고생을 많이 하고 나왔다는 거짓 사실까지 들어가며 만류하는 바람에 분을 삭이고 돌아갔다. 이후 하사는 오가는 길에 가끔 마주쳤지만 알은 체도 아니 했다. 군 생활에서까지 행동하는 갈대를 자처했던 나의 애환은 다행히 이렇게 막을 내릴 수 있었다.



7. 한국은행은 ''이었다

군과 같은 특수 사회에서도 끝까지 원칙과 명분에 충실하게 처신할 수 있었던 나는 자신감을 되찾고 제대 후 대학생활을 마치 전투라도 하듯 최선을 다해 가며 보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경제학도에게 꿈의 직장이었던 한국은행에 입행할 수 있었다. 첫 근무지는 제주지점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조사계장 직을 맡게 되었다.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의욕으로 열심히 조사업무에 임했다. 제주도에 제조업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용수가 필요하다는 점, 그러나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뒤덮여있어 비가와도 물이 금방 흡수되므로 저수가 어렵다는 점, 그래서 제조업이 정착되어 도민의 일자리와 소득이 증대되기 위해서는 수원 관리에 관한 기반시설 구축이 절실하다는 점 등, 은행이 요청하지도 않은 연구들까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비스 산업이 진출해 있지만 이들 산업에서 창출되는 소득이 제주도에 머물지 못하고 육지로 빠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 하면 완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각적인 연구를 해보았다. 아울러 날씨가 불순하여 항공기와 선박 운행이 중단될 때마다 대부분의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해 보았다.

우선은 기상이변에 따른 운송 차질이 물가변동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기 위해 정확한 물가변동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도매상의 설정 기준부터 재정립하고 한 달에 1회 하던 물가조사를 4회로 늘렸다. 1971년 여름에도 태풍으로 인한 교통 및 운송 두절은 예외 없이 찾아왔고 그 기간 중 물가변동도 예년처럼 극심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제대로 추계해야 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실제의 물가변동을 조사 발표하는 일은 당연하고 또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계절조정을 고려한 제주지역 도매물가 지수를 조사월보에 올렸다. 물론 이러한 나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어느 신문기자가 물가변동이 전혀 없는 것으로 발표된 제주도청 자료와는 달리 한국은행 제주지점 조사월보 상에는 태풍을 전후한 시기의 도매물가가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기사화 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도청은 우리 지점장을 통해 나를 보내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고심 끝에 나는 응하지 않았다. 공무원도 아닌데 도청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 일로 인해 불행하게도 나는 조사계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나는 한국은행이 희생양으로 활용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직장의 위상과 한은에서의 미래상에 대해 큰 의문이 들었다. 내 입장이나 사건의 자초지종은 들어보지도 않고 도청 입장에 어려움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토록 열심히 시도했던 조사업무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총재께서 개점 축하행사 참석차 제주지점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제주에 온 김에 함덕 해수욕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계획이라 했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두 분도 동행한다 했다. 지점장이 내게 총재 일행이 휴가지에서 필요할만한 용품도 준비하고 안내를 맡아 달라 했다. 대졸 출신이 나 혼자뿐이었으니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약 한 달 전쯤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모 판사가 간첩죄로 수사 중인 함덕 지역 인사들의 현장 검증을 나왔다가 현지인들로부터 받은 향응이 문제되어 옷을 벗었던 사건)가 떠올라 신경이 쓰였다. 물론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은행 내 관행적 차원의 총재 예우라 생각되었지만 자칫 세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지점장께 전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나의 충심은 지점장 지시에 대한 거절로만 비춰졌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서 모시고 싶어 야단인데 납득이 안 되는 행동이라고만 하였다.

도지사 호출에 대한 불응에 이어 결과적으로 총재 모시기 거절로 비춰진 사태까지 발생해 지점장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말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관행이라고들 하지만 지점 신축과정에서 발생한 불미스런 일을 우연히 목격했던 기억 때문에 지점장에 대한 일말의 반감이 남아 있어 그런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행원의 정규급여는 5만원 안팎이었는데 세금도 안 떼고 거의 같은 액수의 비공식 급여가 주어졌다. 그것도 지점장이 조용히 한 사람씩 불러 생색내듯 주었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해서 번 돈을 나누어 갖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수령을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불만이 중첩되는 바람에 연말을 맞아 송년모임을 열었을 때 나는 손창섭의 '혈서'라는 시를 암송하였다.



"혈서 쓰듯, 혈서 쓰듯 순간을 살고 싶다.

모가지를 이 모가지를 뎅겅 잘라

내용이 없는 혈서라도 쓸까?"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지점장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애써 웃음은 보였지만 시의 내용이 연말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힐문 성 의견을 전해 왔다. 나는 인생의 매 순간을 혈서 쓰듯 최선의 몸부림으로 대접하자는 의미였다고 하고 먼저 연회장을 떠나버렸다. 지점장이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인사라 생각하여 요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일이 발생한지 얼마 후 나는 서울로 전근발령을 받았다. 결국 심혈을 기울였던 제주도 물가조사에서 시작된 파행은 제주지점으로부터의 결별로 귀착되고 말았다.



8. 은행감독원에서도 한국은행은 ''이었다

본점에서 근무하게 된 곳은 은행감독원(당시엔 은행감독원이 한국은행 조직의 일부였다) 주무부서인 관리국 심리과였다. 미운 털이 박혀 방출되다시피 본점으로 올라 왔기에 조사부 같은 연구 직 부서로 발령받지 못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더구나 심리과는 시중은행과 은행 지점의 신설과 이전, 그리고 임원승인은 물론 여신관리 및 경영지도 등 중요한 일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금융통화위원회에 상정되는 안건의 절반 이상이 관리국과 심리과의 업무였고 직원들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할 만큼 바쁜 부서였다. 내가 처음 맡은 일은 지방은행의 점포 신설 및 이전에 관한 승인업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키지도 않는 자료까지 찾아가며 승인여부 판단에 필요한 자료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검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부산은행 동래지역 점포의 신설인가 승인여부에 관한 최종 평가에 앞서 현지답사를 가게 되었다. 가벼운 긴장까지 되었다. 서울에서 단지 문서상의 자료에만 의존하여 도출했던 평가의견이 현장답사 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아버지뻘 되어 보이는 부산은행 중역이 기차역 구내까지 들어와 기다리다가 가방을 받아 들겠다고 하였다. 당황스러워 거절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우선 안내된 곳은 점포 신설 예정지가 아니라 동래 근처 온천장이었다. 현지답사는 잠시 미루고 피곤하실 터이니 온천욕부터 하고 식사한 연후에 나가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신열이 많은 체질이라 온천을 즐기지 않아 간단히 샤워만 하고 나왔다. 그런데 온천욕이 끝나자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고스톱이나 치면서 기다리자고 했다. 친선게임이니 판돈은 약하게 하자며 돈을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큰돈이었다. 나는 고스톱을 할 줄도 몰랐고 노름에 대해 매우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옆에 앉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은행 팀이 모두 잃는 것으로 게임은 금방 끝났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게임을 모르는 나로서는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때야 비로소 답사를 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답사라는 것이 차를 탄 채 해당 지역을 지날 때 손으로 가리키며 안내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아연 실색할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대로 출장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며 다시는 이런 식의 출장은 안 가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이제 새 부서에서도 서서히 미운 털이 박히기 시작하였다. 과장에게 불려가서 말도 안 되는 충고를 받고 돌아왔다. 다른 직장에 비해 부정이나 금전수수가 거의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던 한국은행에서조차 예상치 못했던 관행을 목격하게 되면서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한층 더 사라지기 시작했다.

출장을 거부한 결과 때문인지 지방은행 담당에서 일반 시중은행 담당으로 직책이 옮겨졌다. 서울시내에서의 점포신설이나 이전에 대한 평가는 지방 출장 없이도 가능한 것이고 관련 자료의 확보도 손쉬워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한 후에도 또다시 납득이 안가는 일이 가끔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분명히 점포신설 허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시중은행의 인가신청 건이 번번이 기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료를 보완해 다시 제출도 해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검토의견의 본질과 상관없는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등을 이유로 결제가 보류 또는 반송되곤 하였다. 참다못해 나는 차라리 대리께서 직접 기안하는 것이 좋겠다며 백지 기안지를 가져다주었다. 순간 담당 대리의 얼굴이 붉은 빛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며칠 후 다른 동료 행원들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의 핵심은 이러했다. 은행점포를 신설하기 좋은 장소에는 여러 은행들이 경합하게 되며 통상적으로 한국은행은 시중은행 입장에서 호의적인 검토를 하지만 만약 재무부의 비호를 받는 특수 은행들이 눈독을 들이면 일반은행을 포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임자로서 이러한 먹이사슬관계 때문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상실감을 부하 직원에게 내색하기 싫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공연히 자구 수정만 반복해가며 상황을 파악해 주기를 바랐던 것인데 내가 눈치도 없이 인가신청 건을 지속적으로 들이밀었던 것이라 했다. 이해는 하면서도 온몸의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9. 공무원의 갑질

한국은행은 대부분의 부서가 일반고객을 상대하는 일이 없어 모든 직원들이 점심시간이면 한꺼번에 식사를 하러나갔다. , 한사람씩은 화기당번이란 이름으로 사무실을 지켰는데 그날은 내가 화기당번으로 혼자 남아 있었다. 12시 조금 전이었는데 모두 나간 직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신경질적인 사내의 음성이 들리더니 당장 국장을 바꾸라 하였다. 점심식사 나가셨다 말했더니 아직 12시도 안됐는데 벌써 나갔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외부손님이 오셔서 조금 일찍 나가셨다 했다. 한두 가지 힐문이 있더니 대뜸 너는 누구냐며 반말로 물어왔다. 나는 일단 행원 이 아무개라고 대답한 다음 전화하시는 분은 누구냐고 물었다. 재무부 이재국의 아무개라고 하기에 즉시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점심 먹으러 나간다 하고는 택시를 타고 재무부로 갔다. 그리고 아무개 면회신청을 했다.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아무개에게 나는 한국은행 이 아무개인데 왜 아까 전화로 반말을 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국민에 대한 공복이어야 할 공무원이 왜 함부로 남의 직장상사를 부당한 호칭으로 불러댔느냐고도 했다.

여하튼 다른 직원들도 있었고 나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였는지 형식적이나마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후 우리 부서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리고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나 때문에 앞으로 재무부와의 협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사실 나는 공무원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 양심을 최우선시하는 교육 속에서 성장하였고 대부분의 공직에는 부패가 일반화되어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물론 가정 형편상 대학 졸업 이전이라도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어머니를 하루빨리 고생에서 해방시켜드려야 된다는 얘기를 주위로부터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6·25때 납치되었다는 이유 그리고 사망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이상 언제든 간첩으로 교육받고 남파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른바 요시찰인 명부에 올라 있었다. 따라서 공직에 임용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에 아예 고시의 꿈은 접었었다. 숙부는 6·25참전용사로 유공자가 되었는데도 이른바 연좌제 때문에 평생 취업이 안 되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도 할 수 있지만 허용되지 않은 고급공무원 직에 있는 사람이 전화에 대고 함부로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을 때 더더욱 참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사실 나는 이러한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해 해외유학을 위한 신원조회 시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로인해 출국허가가 거의 6개월 가까이 지연되었던 적도 있다.

대다수 경제학도들의 꿈의 직장이었던 한국은행에서의 여러 가지 불편한 경험은 결국 나로 하여금 새로운 커리어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약 2년 반 만에 한국은행을 떠나 해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10. 외국인 강사라서

한국은행을 떠날 무렵 운이 좋게도 나는 모교인 성대와 자매학교관계에 있었던 캔트주립대학교(Kent State University)에 교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인디아나대학교(Indiana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2년차부터(1976) 강사직을 겸하게 되면서 경제통계학 및 계량경제학입문 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아마도 1978년 봄 학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갑자기 긴급 강사회의가 있으니 모이라고 해서 학과장실로 갔다. 어인일인지 몰라 서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가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침내 학과장이 나타나 전하는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경제통계학 과목담당 강사 중 한명이 네팔대학교 교수였는데 박사학위 취득 차 인디아나대학교에 와 있는 동안 경제학과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점관리가 상대적으로 엄격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중간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은 학생 한명이 학교에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외국인 교수의 영어발음이 나빠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니 학교가 나서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해 달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학과는 해당교수를 즉시 강사직에서 해촉하고 다른 강사로 대체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평가한 성적도 모두 무효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당사자에게 소명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내린 일방적인 통고였다. 이럴 것이었다면 본인에게나 통보할 것이지 왜 강사 전부를 소집하였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이런 식의 의사결정은 분명히 인종차별적 측면이 강한 것이어서 나는 강력하게 학교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나를 비롯해서 경제학과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으며 강사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 10여명 있었는데 Associate Instructor(AI)라 불리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미국경제의 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되자 주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이 급감했고 이러한 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박사과정 학생들 중 일부 우수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학부과정의 기초과목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무와 권리는 일반강사와 다를 게 없었지만 급여수준은 일반 교육조교나 연구조교가 받는 장학금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학생신분의 강사는 미국인 중심의 엘리트그룹에 한정되어 있었다. 인디아나대학교는 매우 보수적인 주에 있어서 외국인을 임용하는 경우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강사는 물론 정규직 교수 또한 흑인이나 유색 인종은 거의 없었다. 가끔 임용이 되더라도 정년을 보장받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운 좋게도 내가 이 학교에서 일 년차 성적이 최상위로 나오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제학과 AI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학과로서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한 결정이었겠지만 첫 학기 내 강의에 대한 평가가 20여명의 강사 중 3-4위권에 들자 학과는 점차 외국인 AI를 늘려갔었다. 우수한 미국인 학생을 찾기 어려웠다는 현실적 애로와 재정 압박이 점차 심해졌다는 측면이 동시에 고려된 결정이었다. 그러다가 1978년 봄 학기에 임용된 네팔대학교 교수출신 AI에 이르러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는 인도어 특유의 억양은 있었지만 40세에 가깝도록 자신의 나라에서 10년 이상 영어로 강의를 해온 교수였다.

사건의 핵심은 공부하기 싫은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성향이 강한 학생 한명이 수리적 사고를 요하는 경제통계학 과목을 제대로 이수하기 어려워지자 학교법원(실제 법원이 아니라 각종 학생들의 학사관련 민원을 접수받아 심의하는 기관)에 제소하였던 것이다. 인디아나 대학은 인디아나 주의 대표적 주립대학으로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이 상위 20% 안에 들면 누구든 입학이 허용되는 대학이었다. 따라서 정원이 사전에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유자격 입학 희망자 수에 따라 매년 변하였다. 그래서 어느 해는 기숙사가 남아돌다 또 어느 해는 기숙사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여하튼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입학이 허용되다 보니 공부에 특별한 관심이나 계획 없이 진학한 학생들은 2-3년 내에 약 30% 정도가 대학을 떠나곤 하였다.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학생 중 한명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여하튼 학생의 여론에 매우 민감한 미국 대학의 특성상 경제학과에서는 조속히 사건을 무마하고 싶었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당사자인 강사의 입장과 수강한 다른 학생들의 의견 등을 청취한 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했어야 하는 것을 외국인 강사라 하여 서둘러 직위해제 시킨 것은 분명히 인종차별적 처사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모든 강사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한 결정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고함으로써 너희들도 희생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암묵적 경고를 하달한 셈이다.

이런 식의 부당한 처사를 그대로 넘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실로 큰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우선 강사 중 최고참이었던 나는 강사들을 학과 도서실로 불러 모아 학교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고 이의 시정을 요청하자고 했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사 전원이 사표를 내면서 학교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자고 했다. 외국인 강사들은 물론 미국인 강사들도 모두 찬동하였다. 용기를 얻은 나는 내 이름을 제일 먼저 서명하고 주말까지 서명이 완결되면 학교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주말에 가보니 서명한 사람은 나와 미국인 강사 한 명 총 2명뿐이었다. 서명 이후 예상되는 피해가 두려웠으리라 여겨진다. 소문은 급속히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결국 이종원이란 친구가 이 학교에서 학위받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들 했다.

나도 그 정도의 위험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사 모두가 힘을 합쳐 탄원을 하면 어느 정도 힘이 실리리라 믿었다. 지도교수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가 장학금이 끊겨 다른 학교로 떠나야 했던 한국 유학생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자신이 가진 직책상의 권한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휘두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당하고 있기는 싫었다. 결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었기에 당당히 나선 측면도 있었다.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에 실망이 몹시 컸지만 여러 국가에서 모인 다국적 집단이 일사분란하게 의견을 결집하고 단체행동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순진했던 나만 희생양이 될 위험에 직면했던 것이다. 태연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정도의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얼마동안 마치 폭풍이 몰려오기 전 고요함과 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폭풍은 다른데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박사학위논문을 작성 중이었는데 심사위원장이 학과장이었다. 작성한 논문내용이 얼마간 진전될 때마다 위원회 소속 심사교수에게 점검을 받는 방식으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비롯한 다른 분들은 다들 내용이 참신하다며 격려해 주었는데 유독 학과장만 갈 때마다 수도 없이 많은 지적을 했다. 처음에는 워낙 꼼꼼하고 완벽주의 적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간 지적하는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순수한 의미의 지도라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내가''나는'으로 그리고 또 다시 '본인이'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꾸라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과 사무실 도서실에서 신간 학술잡지들을 열람하고 있던 중 밖에서 학과장이 학과 비서와 얘기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흘려보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다음날 학과장께 면담요청을 했다. 그리고 비서와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사실과 학사문제를 비서와 상의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동안 논문지도 과정에서 지적해준 사항도 본질적인 주제를 떠난 것인데다 자구의 수정이 몇 차례 지나면 원래 내용으로 돌아가는 순환 논리적 특성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드렸다. 내가 부당한 처신을 했다고 생각하면 직접 불러 문책을 하거나 꾸지람을 하면 될 것이지 이런 식으로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전했다. 학과장은 무척 당황해 하면서 오해라고 했다.

불안했지만 학과장 면담 이후 논문작성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래 동안 기다렸던 논문의 구두시험 일정이 잡혔다. 그간에 순탄치 못했던 과정이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시험에 임했다. 그런데 구두시험에서는 한두 가지, 지금으로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질문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 두 시간이 가까워 오도록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설마 이 단계까지 와서 결정적인 불이익을 주려는 것인가? 하는 불안한 상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마침내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리고 심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심사위원장이었던 학과장이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축하해 이 박사(Congratulations, Dr. Lee)!" 라고 축하해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다리의 맥이 풀리면서 거의 주저앉을 뻔 했다. 그 순간만은 학과장의 대인배적 처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사실은 심사 당일 심사위원 교수들도 오랜만에 만난 김에 그동안 밀렸던 저간의 얘기들을 주고받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는 말을 나중에 지도 교수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귀국하여 모교에 교편을 잡았는데 일주일에 주야간 합쳐 26시간씩이나 강의를 하게 되어 미국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귀국 직후 10·26사태와 5·18광주항쟁 등을 겼으며 혼줄 마저 놓고 있을 때였다. 1981년 봄 학기가 끝날 무렵 교무처에서 외국인 교수가 김포공항에서 나를 찾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학과장이었던 캠벨(Robert Campbell)교수였다. 조선호텔에 묵을 예정인데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남겼다 한다. 전경련 초청으로 강연 차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 말고도 동문이 여럿 있는데 하필이면 왜 나를 불렀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캠벨교수는 소련경제 전공으로 그 분야에 관한 한 저명도가 매우 높은 분이었다. 호텔로 찾아갔더니 나보다 더 반가워했다. 그리고 성대에서의 특강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통역은 내가 맡았다. 강연의 핵심은 머지않아 소련은 붕괴할 것이고 한국에 경제 지원을 요청해 올 것이란 것이었다. 모든 관중들이 매우 의아해하기도 하고 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라며 수근 대기도 했다. 혹시 전경련이 사례를 너무 잘해 한국 사람들이 듣기 좋을만한 얘기를 창작해낸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나 그 분은 거의 매년 소련을 방문해가며 연구해온 분이고 또 비슷한 내용의 강의를 미국에서 들은 적이 있어 별다른 의구심 없이 받아드렸었다.

강연이 끝난 후 동문들을 모아 성찬으로 선생님을 대접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내가 캠벨교수에게 미국에서 왜 남편에게 시련(hard time)을 주었느냐고 질문하는 바람에 좌중이 모두 함께 웃었다. 이 분에게도 내가 못 잊을 한국인 졸업생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방한을 기념도 할 겸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상당 금액의 장학금을 전달하였다. 단 수여자 중 최소한 한명은 한국 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본인이 받은 후한 대접을 얼마나 과장되게 포장해 전했는지 서로 앞 다투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한두 분 은사들을 더 맞이하게 됐었다. 자칫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던 사건은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다.



11. 선생님도 도끼 가지고 다니십니까?

"선생님도 도끼 가지고 다니십니까?"

1978년 가을학기에도 나는 미국 인디아나대학교에서 경제통계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유쾌했던 주말의 기억을 곰씹으며 월요일 아침 강의 시간에 맞추어 막 교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한 학생이 느닷없이 손을 들며 질문할 게 있다 하여 그리하라 했더니 대뜸 쏟아낸 말이었다. 순간 교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그의 무례한 발언에 같은 학생의 입장에서 당황해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대응하기 위해 "도끼가 너무 커서 몸속에 품고 다니기 어려웠는데 그만 자네에게 들통이 난 것 같군."이라고 응수하며 도끼 대신 주먹을 내 보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어색하였던 분위기를 무마라도 하려는 듯 웃음으로 맞장구 쳐 주었다.

이에 질문을 던졌던 학생이 불리해진 상황을 역전이라도 시켜볼 심산인 양 "선생님은 문선명과 박동선을 아십니까?"라고 재차 질문해 왔다. 점입가경이었다. 지난번 중간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다 발각되어 해당 시험성적을 0점 처리하는 선에서 선처해 주었던 학생이었다. 원칙적으로는 해당 과목을 낙제시키는 것이 적절한 처벌이었지만 한 단계 낮춘 벌칙을 주었던 것이다. 분기를 억누르며 다시 한 번 짐짓 익살스러운 어투로 대답하였다. "문선명은 내 아저씨(uncle)요 박동선은 내 형제(brother)"라고. 학생들이 이번에는 박수까지 쳐가며 험악해진 분위기를 애써 돌려보려 했다. 이에 화가 난 학생은 문 목사는 문 씨이고 박동선은 박 씨이며 선생님은 이 씨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느냐고 항의조로 되물어 왔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한국에서는 아버지 연배 되는 남자들을 통상 아저씨라 부르고 대여섯 살 터울 간에는 김형, 이형이라는 식으로 부르고 있어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뭐가 잘못인가 라고. 어깨가 들썩이고 숨소리도 고르지 못해 보이는 형상으로 보아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앉은 것 같았지만 논리에서 밀리자 일단 말문을 닫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6818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유엔사 경비원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하는 희대의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명이 죽고 9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미국 내 한국인들은 이후 상당기간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심지어 직장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면 일본 또는 중국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같은 해 1025일 이른바 '코리안 게이트'가 발생하였다. 재미사업가 겸 로비스트였던 박동선이 불법으로 미국 정치인들에게 선거자금과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기소되었던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없는 박동선이 미국 정치인에게 정치 후원금을 제공한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주를 받아 조직적으로 자행된 범죄로 몰아가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유신체제하의 박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미주둔군의 단계적 감축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박대통령이 이로 인한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박동선을 통해 미 국회의원들에게 한국군 현대화 특별 지원에 관한 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여론을 몰아갔던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는 이를 전면 부인하였지만 결국 미국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19781016일에는 미 상원, 그리고 1229일에는 하원에 안건이 상정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결국 1979816일에 기소를 철회한 사건이었다. 주로 미곡수입 위주로 사업을 벌여 왔다는 점과 개인이 아닌 법인으로서 정치헌금을 낸 것이라는 점 그리고 회사는 미국 내 법인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대응논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이 자신들이 가장 신망하는 상원의원들에게 뇌물 내지 불법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소식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또 이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던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통일교 문선명 목사의 미국 내 선교활동과 기금조성과정이 매스컴을 통해 몰매를 맞고 있었다. 미국 청소년들이 껌이나 꽃다발 등을 길에서 팔아 번 돈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기금을 모아 납득조차 할 수 없는 논리를 전파하는 데 쓰고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사실 통일교에 귀의한 미국인 신도들은 우리도 이해가 안될 만큼 거의 맹신적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힘의 원천은 남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미국 사회와는 달리 집단생활과 가족 같은 유대감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을 통해 강한 결속력이 구축되었던 데 기인한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 목사를 구속할 명분이 없어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선교기금에 대한 불과 1000달러 정도의 이자 소득세를 미신고함으로써 탈세하였다는 죄로 구속하였다. 납득하기 힘든 조잡한 사유다. 여하튼 19811015일 뉴욕 검찰청이 기소한 것인데 탈세범으로 기소한 이유는 탈세자나 부패관련자 그리고 간첩죄는 상대적으로 중벌에 처할 수 있다는 점과 보석금을 내어도 석방되지 못한다는 점을 십분 활용한 처사였다. 어지간히도 미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골탕을 먹이려고 했던 미국 검찰의 취지가 무색하게 문 목사가 별 스트레스 없이 수감생활을 잘 해내며 많은 동료 수감자들의 상담자 역할까지 자처하기에 이르자 결국 모범수로 판정하여 일찍 석방해 버리고 말았던 일이 있다. , 1984720일에 '댄버리'감옥에 수감되었는데 모범수로 판정되어 6개월간의 형기단축 혜택을 받고 198574일 출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또한 미국 내 한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 왔었다.

그런데 그즈음에 미국 최고의 토크쇼인 '쟈니 카슨 쇼'에 쟈니 윤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등장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문선명이나 박동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했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반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단지 내 여동생에게 10달러 빚진 미군병사를 찾으러 미국에 왔다"라는 아슬아슬한 농담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또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주는 반향이 아주 커서 그 다음 주에 다시 같은 쇼에 초대되었다.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무대에 다시 선 쟈니 윤이 끄집어낸 말이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지난 한 주 동안 미국 각지에서 자신에게 10달러짜리 수표를 보내온 전 미군 병사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식의 농담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에 대한 반감을 다소나마 완화해줄 수 있을만한 사건이었다.

내가 학생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재치 있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쟈니 윤이 출연했던 부류의 코메디 프로그램들에 힘입은 바 컸다. 외국인 교수가 갖는 발음상의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재미있는 유머로 강의를 이끌어 가야하기 때문에 코메디 프로를 자주 보아오던 과정에서 쟈니 윤의 익살스런 유머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일 그토록 황당한 학생의 행동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단 학생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방금 발언을 한 학생의 태도는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문화적 선진국인 미국시민에게는 결코 걸맞지 않는 행동이란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 나는 북한사람이 아니라 미국의 우방인 남한의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만일 미국인 한 사람이 어디에선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미국인 전부가 지탄 받거나 또 아무 상관도 없는 미국인 개인이 공개석상에서 모욕당한다면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더구나 학생은 자신이 저지른 부정행위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이 오히려 자신을 처벌한 교수를 공개적으로 망신이나 주려는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일말의 수치심도 없는 지극히 야만적인 행위라 했다. 한국에서는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그 수치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간혹 있다는 사실도 곁들였다(물론 작금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이러한 현상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리고 미국의 록히드 항공사가 일본의 다나까 수상을 수뢰한 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미국에 대해서는 하등의 비판도 하지 않고 단지 자국의 수상을 파직과 동시에 투옥시켰고 영원히 정치계에서 매장시켜버린 사실을 상기시켰다. 반면 미국은 부패한 미국 정치인들에 대한 처벌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되새겨보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어처구니없이 불법자금 공여자로 지목된 사람과 국적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를 공개적으로 모욕이나 주려는 태도가 과연 선진국의 시민다운 행동인가 라고 반문하였다. 교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여러 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는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 귀중한 경험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런 상황에서 강의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 버렸다. 여러 학생들이 연구실로 찾아와 대신 사죄하였다. 결국 아무런 죄도 없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강의를 속개하였으나 학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 곳에 남아 간혹 미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줌으로써 미국 내 한인들의 입지를 높여주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보다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고국에서 활동하고 싶은 의지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12. 예상 못한 귀국 후유증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내 중견 대학은 물론 국제 금융기구에서도 일자리 제의(job offer)가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가려던 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 내 국책 연구기관에서도 초빙이 있었지만 모교에서 부름을 받자 만사 제쳐놓고 성대에 부임키로 했다. 연구원으로 갈 때에 비해 급여가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지만 괘념치 않았다.

1978년 성탄절 3일전 드디어 약 6년간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다. 그런데 가벼운 흥분과 기대 속에 돌아온 서울의 모습은 당황스러울 만큼 낯설었다. 당시 통신기반이 매우 낙후되어 있어 국제전화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였고 따라서 그만큼 한국의 실상으로부터 오래 동안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컬러세계에서 흑백세계로 돌아온 듯 도시 전체는 회색빛이었다. 행인들은 무엇엔가 쫓기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쉽사리 말을 걸기 망설여질 만큼 무표정해 보였으며 웃는 모습을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연탄 냄새와 김치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미국에 있을 때 그토록 눈치를 보아가면서도 하루도 빼지 않고 먹었던 김치였는데 말이다. 다행히 대학캠퍼스에 들어서자 비로소 활기찬 젊은 학생들의 에너지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사뭇 흥분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에서의 첫 학기를 맞게 되었다.

신학기 초인 3월 중순 경이었다. 제자들이기에 앞서 모교의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에 강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된 지 불과 보름도 채 안된 시점에 다음 주 간단한 쪽지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다음 주에는 문무대에서 군사훈련을 받기 때문에 수업이 없다고 했다. 나는 역정을 내며 수업에 관한 권한은 교수에게 있는데 내 허락 없이 휴강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의아해 하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수업 후 학생처장으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당시에는 학생처장이 가장 힘든 본부 보직자인 동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그 보직을 거친 사람들이 종종 총장으로 선임되곤 하였다.

S처장은 나의 중학교 선배여서 서먹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 S처장의 설명으로 비로소 나는 학생들이 입학 직후 일주일 간 문무대라는 부대에 가서 군사교육을 받게 되며 따라서 해당 학생들이 수강중인 과목은 자동으로 휴강처리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일 내가 학생들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은 오해의 여지가 크다고 했다. 학교에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교실 내에도 사복경찰이 들어와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자신이 잘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는 되었지만 다소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이어서 선배가 아니었다면 한마디 정도는 대꾸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총장이하 주요 보직교수 및 휴강으로 강의가 없어진 교수들이 새벽에 잠실에 있는 석촌 호수로 나가 훈련받으러 가는 학생들을 전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것이 후회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주요 보직교수와 직원들은 훈련 사흘째 되는 수요일에 문무대로 위문까지 간다고 했다.

한편 당시 길거리에서는 경찰들이 머리가 긴 사람을 무조건 잡아 세운다음 가위로 듬성듬성 깎아버리는가 하면 치마길이가 짧은 여자들을 잡아 벌금을 부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예비군훈련 소집에 나갔더니 논산훈련소에서처럼 각개전투, 포복 등의 훈련이 이어졌다. 불과 몇 달 전 미국에서 강의하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일종의 '역 문화 충격'에 귀국의 기쁨은 눈 녹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13. 저는 고려대 학생입니다.

1979년 가을학기였다. 강의실에 막 들어서려는데 학생들 일부가 자리가 없다며 서성이고 있었다. 200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강의실에서 개설되는 경제원론 강의에는 수강신청 없이 청강하는 학생들이 상당수 있어 좌석이 모자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각종 국가고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학점이수의 부담은 덜면서도 고시에 필수가 되는 교과목들을 청강했기 때문이다. 나도 이유는 달랐지만 대학재학 시 정식으로 수강신청을 하지 못하고 청강한 경험이 여러 번 있던 터라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가 모자라는 경우가 발생하면 알아서 청강생들이 자리를 비워주곤 하였는데 그날은 유독 자리가 많이 모자랐고 자리를 비워주려는 학생도 적었다.

하는 수 없이 청강생은 정식 수강생을 위해 자리를 비워 달라고 공지 했다. 그런데 4-5 명 정도가 일어났을 뿐 여전히 서너 석의 자리가 부족했다. 1차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 들어온 대학에서 이토록 청강생까지 들이차 만석을 이룬다는 것은 내심 즐거운 일이었다. 내가 그만큼 열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도 지난학기 문무대 관련 발언 이후 내 수업에 누군가 몰래 들어와 강의 내용을 관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뒤쪽으로 가서 강의실 문을 닫고 한명 씩 출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결국 출석부에 없는 3명이 남았다. 수강신청 여부를 물었더니 하지 않았다 했다. 조금 전 청강생은 자리를 비워 달라 했는데 왜 좌석을 비워주지 않았느냐 물었다. 죄송하다며 워낙 선생님 강의가 소문이 나서 어떻게든 들어보려고 남아 있었다 했다. 그러면 무슨 학과 학생이냐 물었더니 쭈뼛쭈뼛 망설이다가 자기들은 고려대 학생들이라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기가 막혀 그렇다면 고려대 학생증을 보자고 했더니 안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내 강의를 그토록 듣고 싶어 한다니 반갑지만 등록금도 안 낸 타교생을 위해 본교생의 수업권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말하며 혹시 내 이름을 아느냐 물었다.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면 생각나는 대로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3명의 성함을 대보라 했더니 사색이 된 채 답변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내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란 심증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일단 퇴실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사실 당시에는 소위 '짭새'라 부르던 사복경찰 및 특수 요원들이 학교에 여기저기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듣기는 하였지만 강의실에까지 들어와 앉아있을 줄은 미처 생각조차 못했다.



14. 정신개조교육 참가기

10·26사태 이후 5공화국이 들어섰다. 정국이 불안정해서인지 새 정부의 탄압은 유신정부에서보다 강해졌다. 예컨대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소집하여 일종의 사상교육을 실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누구도 이런 식의 정신교육을 원하지 않다보니 각 대학은 결국 신임교수들 중 일부를 차출하여 교육대상자로 파견하였다. 그동안 한두 가지 불미스런 사건의 주인공이 된 전력까지 있어 교육 대상자로 차출된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첫 번째 연수는 새마을연수원 교육이었다. 일단 입소하니 수련복이라는 제복을 주었다. 왠지 죄수복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내 명찰에는 이름과 함께 학계대표라는 직함이 붙어 있었다. 아직 젊었지만 그곳에서는 그렇게 분류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직함을 일별해 보니 새마을 운동원대표, 주부대표, 종교대표, 기업대표 등이었다. 무언가 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나 사용함직한 호칭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외국인들 눈에는 당시의 한국이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세뇌 받아온 교육에 따르면 북한과 비교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믿어 왔었기에 주어진 호칭들이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순간 1973년 처음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첫 학기를 맞을 무렵 받았던 충격이 머리를 스쳐갔다. 강의시간 중 소개된 유엔자료에서 북한 GNP가 남한보다 훨씬 높게 추계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오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인결과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받아온 교육도 매우 편향되고 왜곡된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미국의 한 주요 일간지가 세계 최고 수준의 독재자들 중 10위 이내 정치지도자 명단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1등이 우간다의 이디 아민, 2등이 필리핀의 마르코스, 3등이 이란의 샤(황제) 팔레비 왕 순이었고, 김일성이 9, 그리고 박정희가 10등으로 나와 있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그렇게 비춰진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던 적이 있었다. 연수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 당시의 평가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시간에는 경제문제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농산물은 점차 국제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으므로 공업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농산물 시장은 개방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인사의 발표 내용이었다. 미국에서 배운 경제이론에 무비판적으로 탐닉한 나머지 자신이 하는 얘기가 무엇을 시사하는지 조차 모른 채 무책임한 발표를 하고 있었다. 농촌 새마을지도자라는 사람이 내게 다가와 어려운 심정을 토로했다. 새마을운동을 지속 발전시키기 위해 실시한다는 새마을교육에서 어떻게 저런 얘기가 나올 수 있는지 그리고 마을로 돌아가서 어떻게 전달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망연자실해 했다. 나는 발표자 개인의 소견일 뿐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이러저러한 발표들이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단지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라며 발표하는 사람의 태도나 내용은 거의 사이비 종교 광신도들의 간증기도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못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저녁식사 후 일찌감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은 오래 전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본 것과 유사한 일종의 내무반이었다. 통로 양쪽에 침상이 있었고 한편에 12명씩 총 24명이 함께 숙소에서 취침하도록 되어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숙소별로 인원을 파악한다며 입소한 연수생들을 양쪽 침상위에 두 줄로 도열케 하고 번호를 붙이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하나"하고 새마을지도자가 선창하자 ""하고 조계종 총무원 대표가 이어갔고 이어 K재벌 총수라는 분이 ""하고 뒤따랐다. 내가 이제 ""하고 구령을 붙여야 할 순서였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24명이 이 방에 다 있는 것을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군대 점호하듯 각계각층의 사회지도자들 인원을 파악하는 것이 적절한지 물었다.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연수 담당자들이 급히 한자리에 모여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작동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녹음을 중지하는 것 같았다. 이어 나를 불러내더니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며 자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자리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취침이아니라 분임토의라는 것을 한다고 했다. 분임토의는 원래 일본에서 생산성 향상 및 경영 합리화를 위해 경영 팀과 종업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산 공정 개선방안을 숙의하던 과정에서 연유한 것인데 연수원에서 벌어지는 것은 그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제일 먼저 새마을지도자가 나와서 울먹여가며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소개했다. 연이어 듣고 있기 민망한 자기반성문 같은 발표문이 뒤따랐다. 그런 연후에 모든 연수생들에게 그곳에서의 연수과정으로 인해 갖게 된 자신의 새로운 마음가짐을 편지로 써서 집으로 부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내려졌다. 물론 나는 반대하고 나섰다. 어느 나라에선가 하는 일과 흡사하다며 민주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연수방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날 밤 나는 어떤 형태로든 모종의 조치가 내려질 것이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반은 나로 인해 교육이 중도에 중단되는 바람에 모두들 일찍 자리에 들게 되어 밤은 더욱 길게만 느껴졌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내가 잠시 눈을 붙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 해서 따라 나섰다. 마치 군대에서 전역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닥쳐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흥겨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정문에 다다르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의외였지만 우선은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아마도 귀가 후 별도 소환이 있으려는가 싶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연수원교수로 있던 고등학교 동창 L군이 사태를 잘 수습해 주었다고 들었다.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친구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는데 불행하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새마을 연수원에서 하루 만에 퇴교를 당해 결국 수료증도 받지 못한 채 학교로 돌아왔다. 동료 및 선배 교수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내게 사태 수습 차원에서 다른 종류 교육에 지원하라고 권했다. 하는 수 없이 참가한 것이 정신문화원 교육이었다. 연수교육의 핵심은 외국에서 교육받은 젊은 학자들이 외국식 사고방식에 물들어 우리 고유의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 정신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첫 시간에 서울대 C교수가 정중하게 교육목표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번에는 위험한 길로 가지 말자던 결단이 무색하게 나는 또다시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나보다 훨씬 큰 소리로 질문에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은 나이도 40이 넘었고 귀국한지도 5년 이상이나 되었지만 최근 국책 연구원에서 대학으로 이직하여 신임교수가 되는 바람에 이곳에 차출된 것 같다고 했다.

당시의 강사는 K대학 H교수로 대표적인 유신정치교수였다. 그는 '이 박사님'의 의견에 따르면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도 없이 '이 박사'라고 통칭되던 분은 이승만 대통령뿐이었는데 그는 당시 문교부 장관을 그렇게 칭하고 있었다. 매우 교조적인 사고를 가진 독일 유학파 학자로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를 자주했던 인사를 그렇게 예의까지 갖추어가며 강의하고 있었다. 질문에 나선 늦깎이 교수는 자신은 공학을 전공한 공돌이라서 오묘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하시는 거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서 그는 그런데 왜 교수님 발표 자료는 한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 독일어, 한문, 그리고 일본어가 뒤섞여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연수생들이 모두 통쾌하게 웃었다. 강사는 이후 주눅이 들어 마지못한 듯 강의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문제의 공돌이 교수는 일정 간격을 두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경상도 사투리로 우렁차게 "스님이요 질문 있심더."라는 말과 함께 질문이 시작되면 강사는 기가 질린 듯 눈에 총기를 잃었고 그의 카랑카랑하던 목청도 끝내 가라앉고 말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이때다 싶어 강사는 서둘러 강의를 마치려 했다. 그런데 문제의 공돌이 교수는 강의교재를 들고나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배우는데 점심쯤 건너뛰면 어떠냐며 매우 중요한 것 같은데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을 빨간 볼펜으로 밑줄 쳐 왔다면서 설명을 강청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래도 식사는 해야 될 것 아니냐며 우선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공돌이 교수는 식사가 문제냐며 밥도 안 먹고 강사 옆에 붙어 계속 질문을 해대는 것이었다. 최고수급 항변 가 모습을 목격할 수 있어 너무나 즐거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문제의 교수와 같은 숙소 팀이 되었다. 그리고 분임토의에서 대체로 내가 먼저 질문은 꺼냈지만 결정타는 이분이 계속 날리고 있었다. 당황한 연수담당 교수들이 결국 토의과정 녹음을 중단하고 말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의견이 계속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지겨운 분임토의가 일찍 종료되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새벽녘에 또 누군가 내 어깨를 흔들어 깨우더니 짐을 챙겨 따라 나오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크게 문제를 일으킨 편도 아닌데 웬일인지 의아했다. 짐을 챙기며 옆자리를 보니 문제의 교수는 깨우지 조차 않는 게 아닌가. 숙소 밖으로 나왔더니 불행한 소식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부터 건네 왔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런데 정작 다음에 전달된 말은 집으로부터 장인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왔다는 것이었다. 안도와 슬픔이 교차했다. 여하튼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도 연수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학교는 다시 내게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리는 학생지도 대책회의에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일 년 내내 교육만 받다 끝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학생처장 급 교수들과 원로교수들도 일부 참여하는 교육이었다. 다행히 앞서 두 교육과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물론 여기서도 조별로 분임 토의를 하는 것은 같았지만 숙식부터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핵심 주제는 실효성 있는 학생지도방안의 강구였다. 아무리 떠들어도 해결될 일이 없는 주제이니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형식적인 보고서나 만들어내면 될 듯싶었다. 우리 팀 조장은 영화감독인 Y교수였다. 이분은 젊은 사람 대신 자신의 지우였던 시인 S교수를 간사로 지명하며 다음날 회의내용을 요약·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무슨 내용을 전할까 하는 것이었다. 이때 Y대학 의대교수라는 분이 나서서 자기에게 정답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였다. 내용인 즉 요즘 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럽게 구호를 외치고 거리로 나가는 것은 엄마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젖을 안 먹이고 우유를 먹여 키우는 바람에 아이들이 성장해서도 "음매, 음매"하고 울부짖듯이 비명을 지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학생지도는 엄마들의 모유 수유습관부터 정착되어야 장기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우리 조는 이 의견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다음날 우리조의 대책을 발표할 때 S교수는 소 울음소리 흉내까지 내가며 학생지도의 궁극적 대안이란 제목의 결의문을 아주 천천히 읽어나갔다. 그리고 연수 참여자 모두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하단하였다. 이번에도 논리적인 항변대신 그야말로 수준 높은 해학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의 지혜를 목격하며 큰 깨우침을 얻었다. 중요한 것은 이로써 연수교육 이수 의무를 마침내 끝마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5. 고함은 쳤으나

19805, 언론이 완전 통제되어 광주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C교수가 단파라디오로 일본과 대만 방송을 수신해 얻은 소식에 따르면 계엄군이 광주로 진격하면서 시민 시위대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광주로 들고 나오는 길이 원천 봉쇄되어 사건의 전말은 파악 자체가 어렵다고도 했다. 영혼이 떠나버린 듯 마음의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다각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려 노력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대학들은 휴교에 들어갔다. 단 학생들의 집단유급을 막기 위해 강좌별로 과제물을 부여하여 성적처리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동료들과도 떨어져 집에 머무르고 있자니 더욱 답답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학교 교정은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시위 진압을 위해 동원된 특전사 부대원들로 꽉 찼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병력이 학교로 진입하던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성균관 근처에서 저녁모임을 갖고 있던 학생들은 물론 연구실에 남아 실험을 하던 교수들까지 개 패듯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도 있었다.

당시 나는 삼성동에 있는 15평 규모의 AID차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기 내가 맡은 강좌(주 당 26시간)의 수강학생 수가 천명을 육박했었다. 그 많은 학생들이 과제물을 우편으로 제출하니 이를 전달해야할 집배원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승강기도 없는 5층 건물 꼭대기 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내의 학생들 과제물까지 함께 도착하니 집배원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배원은 왜 교수님들은 주로 5층에만 사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하는 것으로 노고를 풀고 있었다.

얼마 후 성적 처리를 위해 학교 방문이 잠정적으로 한 나절 허용된다는 연락이 왔다. 교문에 이르니 수위는 온데간데없고 군인들이 수위실을 위병소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기에 경제학과 교수라 했더니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런데 물끄러미 신분증을 들여다보던 군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에이 교수가 아니라 이거 조교수 아니야?" 아마도 조교수와 조교를 착각했던 것 같다. 조교수도 교수라는 설명을 뒤로 남긴 채 교정으로 들어섰다. 성균관 옆 비천당 앞에 이르니 군 탱크와 장갑차들이 즐비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그 위쪽에 위치한 교수회관 건너편 대운동장에는 수많은 탱크들과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빼앗긴 교정을 보고 있자니 마치 조국을 잃은 식민지 백성이 된 기분이었다. 연구실을 열었더니 도서와 비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성적 처리에 필요한 자료만을 간단히 챙겨 30분 내에 퇴실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눕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다 잠깐 잠이든 것 같았다. 연구실문을 열고 동료교수들 연구실을 돌아보니 이미 모두 떠난 듯했다. 교수회관은 실로 깊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저 밖에서만 군인들이 훈련받으며 내는 기합소리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다소의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당시 나는 대학생 때처럼 군화를 즐겨 신었고 위에는 가죽점퍼를 애용해 입고 다녔으며 머리는 짧게 깎아 얼핏 보면 군인 같아 보인다는 얘기를 가끔 듣곤 했다. 긴장감을 억누르며 교수회관 앞길을 내려가 비천당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총검술 훈련을 하던 군인들이 휴식 시간이 되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중 두어 명 정도가 학교담장으로 가더니 바지지퍼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의 두려움은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 아니 남의 학교에 그것도 환한 대낮에 국방의무를 다해야 할 군인이 문화재 재산인 성균관 담벼락에 소변을 보다니. 격앙된 감정은 높은 톤의 고함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이곳이 문화재 관리국 재산이란 것도 모르는가?" 화들짝 놀란 군인들이 급히 옷을 추어 올렸다. 아마도 이들은 나를 사복 입은 군 특수요원 정도로 착각했던 것 같다. 하기야 교수들은 이미 모두 학교를 떠난 지 한참 되었으니 내가 교수일 것이란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체통을 지켜, 체통을"이라는 말을 남기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군인들은 뒤로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발걸음은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내 신분을 눈치 체고 쫓아오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등허리가 절반은 없는 듯 써늘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해 갔다. 정문을 지나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들이 쉬었다. 긴 하루였다.



16. 남영동에 다녀오다

1982년으로 짐작된다. 학생처장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연락이 왔다. 경제학과 학생 한 명이 반정부시위 사전모의 혐의로 모처에 연행되어있다는 것이다. 수고스럽지만 학과장이 그곳이 직접 가서 신분보증을 하면 구속된 학생이 석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학생을 풀어준다면야 무엇이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찰서에서 석방시켜줄 때와 사뭇 그 절차가 달랐다. 전해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서울역 서북쪽 출입구로부터 남쪽 방향으로 두 번째 전신주 앞에서 아침 9시에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30여분 일찍부터 나가서 기다렸다. 마치 영화에서 간첩들이 접선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듯싶어 기분이 떨떠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처다 보는 것 같기도 하여 어색한 태도로 마음 바장이고 있을 때 검은 색 지프차가 앞에 와 섰다. 검은 색 안경을 쓴 요원의 안내로 차에 올랐는데 밖이 보이지 않았다. 피차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얼마간 이동하는 차안에서 어색한 동행을 하였다. 실제보다는 긴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질 무렵 어디선가에서 차가 멈추었다.

내려 보니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다소 음산한 분위기의 건물이었다. 안내를 받고 들어간 다음 한동안 또 기다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소의 무료함에 살짝 졸음까지 오려는 찰나 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나더니 직급이 꽤 높아 보이는 사람과 그의 보좌관인 듯싶은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필요 이상의 미소와 친절한 어투로 학생 지도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시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다분히 형식적인 내용의 인사치례를 하여 왔다. 그리고 마침내 본인들이 취조한 학생은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후회하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어 교수님만 보증해 주신다면 훈계방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잘되었다 싶어 나도 공치사를 곁들여가며 이미 작성되어 있는 보증서에 서명하였다. 그러자 구금되었던 학생을 데리고 나와 대면시켜 주었다.

그런데 그토록 강성이었던 학생은 어색한 웃음까지 지어가며 자신이 생각이 짧아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학교와 교수님께 누를 끼쳐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책임자로 보이는 인사가 내게 교수님의 협조로 일이 원만하게 처리될 수 있었다고 치사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학생을 그 자리에서 풀어주지 않고 오후에 치안본부로 이송시킬 계획이니 그곳에 가서 데리고 가라는 것이 아닌가. 하릴없이 다시 검은색 안경을 쓴 경호원 안내로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서울역 서북쪽 입구로 돌아왔다. 갈 때보다는 짧은 시간에 도달한 듯 느껴졌다.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한 후 서둘러 서대문에 있는 치안본부로 갔다. 그러나 학생을 인도 받은 것은 일과가 거의 끝나는 오후 5시경이었다.

그런데 1987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 고문 사 사건이 세상에 밝혀진 후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그날 다녀온 곳이 바로 남영동 분실이 분명해 보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17. 폐과라니요?

철옹성 같던 5공화국의 공포정치의 효력도 점차 약해지며 1985년에 들어서서는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그 중 하나가 523일 미문화원 점거사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1114일 민정당사 점거농성사건이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3개 대학 13명의 학생이 주도하였는데 그 중 9명이 성균관대학교 학생이었고 또 그 중 5명이 경제학과 학생이었으며 나머지 4명은 사학과 소속이었다. 공포정치 세력의 본거지를 학생들에 의해 점거당한 정부는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성대 경제학과를 폐과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학교당국에 전해왔다. 그저 화가 나서 하는 소리려니 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정부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한 학교 당국은 공개적으로 경제학과 폐과 안을 공론화 해가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추태였다. 학생 몇몇이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학생의 소속 학과를 폐과시킨다면 차후 과연 어느 대학 어느 학과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묻고 싶었다. 가증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내시위만 발생하면 무조건 경제학과 학생들일 것이란 가정 하에 우리에게 학생들을 해산시키도록 종용하는 친 독재정권 성향의 학자들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그날 전체교수회의에서도 경제학과 폐과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바람에 경제학과 교수일동이 항의 차 총장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 대학 학장이 총장실로 들어오더니 지금 경제학과 학생들이 시위중인데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들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우리를 겁박해 왔다. 하는 수 없이 현장으로 나가 보았는데 시위학생 집단은 바로 그 학장이 소속된 학과 학생들이었다. 모처럼의 반격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다시 총장실로 갔다. 가는 중에 학과 최 연장자인 A교수가 자기에게 처리를 맡겨 달라했다. A교수는 들어서자마자 학교 당국이 애시 당초 경제학과 폐과 운운한 것부터 잘못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는 어느 과잉충성하려는 작자가 총장의 총명을 흐려 어려운 학교사태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게 만들었냐며 일갈을 토했다. 바리톤의 낮지만 창문이 쩡쩡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이어 우리를 채근했던 교수를 향해 제 새끼도 몰라보는 주제에 누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하는가 라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는 학과교수 모두가 함께 총장실을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모월 모일 00식당으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며 대학본부가 당시 학과장이었던 나에게 이 사실을 학과 교수들에게 전달하라 했다. 그러나 나는 사립대학 교수가 반드시 공무원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결국 대학본부에서 경제학과와 사학과교수 전원에게 이 모임 참석을 종용하는 전화를 직접 걸어왔다. 나는 계속해서 갈 필요가 없다고 강변했고 상당수 교수가 동의했다. 폐과하겠다는 발상자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만일 실제로 폐과절차에 들어갈 경우 예상되는 학생소요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이때 원로교수인 A교수가 찾아왔다. 그리고 일단은 우리 함께 청와대가 주선한 모임에는 나가야할 것 같다고 하였다. 당시 C교수의 막내아들이 시위관련사범으로 투옥 중이었는데 만일 우리가 초청까지 무시하면 C교수 아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 했다. 역시 인생경륜이 높은 분이어서 사려가 깊다는 생각에 학과교수 전원에게 회의참석을 부탁하게 되었다.

안국동 골목 안 어느 전통한정식 집이었던 것 같다. 사학과 교수들까지 합쳐 십여 명의 교수들이 침울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민정수석과 문교부차관 그리고 신분을 알 수 없는 두어 사람이 함께 들어 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날 그 자리에 불려갔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는 심정을 무언의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거들먹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온 L수석은 우선 술부터 한잔씩 하자며 권주를 하였는데 한 손으로 술을 따랐다. 그래서 나도 한 손으로 받았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가기가 무섭게 L수석은 왜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하지 않고 정치문제에 관여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C교수가 화가 난 음성으로 학생들은 군인이 국방에나 힘쓸 것이지 왜 정치를 하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대응했다. 이렇게 시작된 말 겨루기는 얼마간 계속되었는데 평행선을 그리는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일단 예상외로 기선잡기에 어려움을 겪던 L수석은 말을 바꿔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도 그간 국민들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주었기 때문 아니냐며 반문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C교수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경제발전 이전에 민주사회의 건설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구라파 국가들 중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나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 소중한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에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되받았다. 할 말이 궁해진 L수석은 "아 선생님은 전공이 무엇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라고 다소 공손해진 태도로 물었다. C교수는 "남의 전공은 물어서 뭣하오. 그저 제시한 주장의 정당성만 얘기 합시다"라고 쏘아붙였다.

바로 이때였다. 너희들은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어라 하는 식의 태도로 약주만 계속 들이키던 A교수가 갑자기 L수석에게 거의 반말로 "이 보오, 당신들은 박통보다 정치할 줄을 모르고 있소"라고 말문을 열었다. 당황한 L수석은 "어째서 우리가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A교수는 "왜 당신들 애들 땅 뺏어서 재벌 줘?"라는 힐난 성 질문을 던졌다. 경기고와 서울고를 강남으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를 현대 구릅 등이 인수한 일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우리가 왜 박통 때만 못합니까?"라는 식으로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못해"라고 A교수는 잘라 말했다. L수석이 이후 한말은 "더 잘합니다, 아주 많이 더 잘" 뿐이었다.

난장판이 되다시피 한 회의를 나는 학과장 입장에서 어떻게든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L수석에게 우리의 입장을 전했다. 국정에 바쁘신 분께서 이렇게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가며 우리를 초청해 준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폐과 운운하는 얘기는 오히려 학생들의 반발만 부추길 것이라는 점, 그리고 오늘 진정으로 우리에게 실효성 있는 학생지도 방안을 듣기 위해 오셨다면 보다 정중하게 예우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점 등이었다.

그랬더니 "그렇다면 대안이 있소?"라고 대뜸 반문해왔다. 그래서 나는 우선 학교에서 학생소요가 있을 때마다 교수들을 강제 동원하여 몸으로 막도록 강요하는 방식을 버리라 했다. 그런 식으로 정권의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교수를 어느 학생이 존경하고 따르겠느냐고도 했다. 이어서 학생처장이 출결을 확인하니 마지못해 시위현장에 나가기는 하지만 물리적으로 학생들을 저지할 의사가 있는 교수는 거의 없다는 점, 그래서 대다수 교수들은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지곤 하는데 단지 이런 교수들을 촬영해서 방관교수 또는 오뚝이교수라는 식의 오명을 붙여가며 무언의 압력을 가한다면 이들이 진정한 학생지도에 나설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는 의견도 건넸다.

내친김에 문무대 군사훈련 방식의 문제점까지 꺼냈다. 대학교수라면 하늘처럼 생각했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문무대 교육에 동원될 때 새벽부터 석촌 호수부지에 전부 불려나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을 보거나 훈련기간 중 위문 차 찾아오는 교수들을 보면 과연 존경심이 나올 수 있느냐고도 했다. 의견이 군사훈련 문제에 이르자 내내 불쾌감으로 일그러진 채 마지못해 듣고 있던 L수석은 다시 "대안이 있소?"를 반복하며 마치 보안법을 적용할 기회라도 잡은 듯 흥분된 어조로 언성을 높여 왔다. 나는 대만의 군사훈련 사례를 꺼냈다. 대만에서는 학생들의 군사훈련은 주로 방학 중에만 실시되는데 그것도 가까운 친구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함께 훈련에 참가하도록 배려하며 훈련이 끝나면 해변 등지에서 캠프 화이어 까지 해가며 일종의 축제 같은 분위기로 훈련을 종료한다는 점, 그리고 훈련내용은 주로 새로 나온 무기의 조작법 숙지와 숙달과정에 치중한다는 것을 전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학생 군사훈련은 물론 예비군 훈련마저도 그저 참석만하면 끝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했다. 더구나 예비군을 화물운송용 소형트럭 뒤에 실어 나르는가 하면 그 자랑스러운 얼룩무늬 예비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아무대서나 소변을 볼 정도로 정신상태가 흐트러지게 하는 훈련방식, 그리고 직장예비군 훈련에 가면 소방분대, 경계분대, 등 소속 현황만을 알려준 채 불이 났을 때 응급대응이란 홍보물을 몇 년씩 반복해 틀어주는 방식이 과연 유사시 예비군을 제대로 적재적소에 투입시킬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모처럼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꼴이 된 L수석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듯 보였다. 그러더니 문교부차관을 처다 보며 왜 귀하는 이런 일들을 제대로 구상도 해보지 않았냐며 힐문조로 말을 돌렸다. 차관은 대답대신 무선전화기를 계속 귀에 댄 채 "아 지금 야간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어대학에서 시작된 학생시위가 진정될 기미가 없다는 급보가 왔습니다."라는 말로 즉답을 피해갔다. 이때다 싶어 나는 학과장으로서 학과를 대표해서 말씀드리겠다고 하며 대학 시위문제 등으로 신경 쓸 일도 많으실 것 같아 오늘은 이만 일어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화두를 돌렸다. 그리고 답변도 나오기 전 모두 그 장소를 나와 버렸다. 마치 10년 체증을 다 날려 보낸 듯 통쾌한 기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 이후 정부가 더 이상 경제학과 폐과문제를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8. 김 귀정 사건

108714일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발생한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 사 사건과 같은 해 69일 연세대 교내시위 도중 사망한 이한열 군 사망사건에서 촉발된 전국적 반정부시위는 6·29선언 이라는 귀중한 성과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 하에서 대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줄 몰랐다. 그러던 중 1991525일 시국관련 시위에 나섰던 성대 김귀정 양이 시위도중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분노한 학생들은 김 양에게 열사 칭호까지 부여해가며 시위를 확대해 나갔고 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여러 각도로 학교를 압박해 왔다. 당시 나는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함께 시국관련 서명 작업에 참여했던 교수들 삼사십 명과 김 양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명동 근처 백병원으로 조문을 갔다. 물론 교수협의회 이름으로 조의금도 일정액을 가지고 갔다. 이를 두고 비판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나는 우리가 가르치던 학생이 졸지에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조문가는 것일 뿐이라 일축하며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학생들과 유가족 뜻에 따라 김 양을 학생장으로 치루는 데는 합의가 되었으나 시신을 학교로 운구해 오는 경로를 두고 학생들과 학교 측 일부교수들 간에 이견이 생겼다. 유학대학교수들 중 일부가 학교 정문으로 시신을 운구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했다. 성스러운 대성전 앞을 시신이 통과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와 대다수 교수들은 학생들과 입장이 같았다. 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시위도중 불행하게 사망해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까지 했는데 정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왜 문제 삼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반대하는 유학대학교수들의 의견은 관례와 전통이 그러하다며 우리대학 초대총장이며 독립투사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도 돌아가셨을 때 학교장으로 장사는 치렀으나 시신은 후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균관 역사 전체를 통해 시신이 대성전 앞을 지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겠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정할 필요가 있다며 나는 반론을 폈다. 그리고 내가 읽은 기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6·25전쟁 당시 대성전 안에서 죽고 살육 당했다는 점까지 지적하면서 반대사유의 논리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불교나 기독교에서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고 남은 유가족을 위로하는데 유교는 왜 죽은 자를 불경하거나 죄악시하는가 물었다. 그리고 과연 이것이 공맹사상에 부합하는 관행인가도 묻고 싶다 하였다. 회의장은 순간 조용해졌고 결국 총장은 점심식사 겸 잠시 휴회하겠다고 하였다.

나와 유학대학교수들은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논리에서 밀리자 이교수는 과연 학문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핵심 관심사에 본질적 해답을 얻기 위해 부단히 연구하는 과정이라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무식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발언을 했다며 나무랐다. 그리고는 나도 대학생 시절에 배워서 이미 익숙했던 공자말씀의 일부를 들먹였다. 이어서 몸까지 좌우로 흔들어가며 암송하더니 그 의미를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그렇다면 과연 독재정권에서 돈을 받아 유교신문이나 발간하며 항상 친정부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 학문하는 사람의 길인지, 그리고 밝은 심성으로 언행이 일치하는 처신을 행하라는 공자의 말씀에 부합되는 처사인지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선생님들은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인지 유학의 경전 내용을 맹목적으로 암기하고 지키려는 유교집단인지도 물었다. 그러니 세상이 바뀌어도 현대사회에 걸 맞는 패러다임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 낡은 과거논리로 사장되어가는 길을 재촉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격분한 교수 한 분이 경전의 또 다른 부분을 암송하며 이것을 모르는 것 같으니 가르쳐 주겠다고 나섰다. 그 때였다. 함께 식사하던 L교수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일갈을 토했다. 그는 유학보다는 제자백가를 주로 연구해온 나의 대학시절 은사이기도 했다. "아 그 말은 공자가 하도 무료해서 자위하듯 내뱉은 말이야" 결국 이 한마디에 우리의 논쟁은 파장되고 말았다.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장사지내는 날 학생들은 정문으로 운구하겠다고 통보했고 일부 유학대학교수 측은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저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학생장이 치러지는 날 학생들이 김 양의 시신을 운구하여 학교 정문에 다다랐을 때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몹시 궁금했던 일본 NHK방송은 물론 미국의 NBC방송 등이 열렬히 취재 경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일단 교문 앞에 상여를 내려놓더니 문 앞을 막고 있던 성균관 유림대표들에게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정중하게 전하고 길을 터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림대표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학생들은 곧 일어나 좁디좁은 언덕길로 상여를 운구하여 비탈진 도서관 옆문을 통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학생들이 양보했지만 논리적으로는 학생들의 승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수와 학생들 간에는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업자적인 유대감이 컸던 시기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교수들과의 분란을 피해주었던 것이다.

19. 평창면옥 사건

김귀정 양 사망사건을 비롯해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구속되는 일이 빈번해지자 평소 가까이 지내던 교수들을 중심으로 어떤 형태로든 공개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반정부서명 전력이 있는 교수 몇 명만 모여도 즉시 경찰들에게 보고되어 계획했던 일들이 사전 봉쇄되곤 했기에 고심하고 있었다. 저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분노를 삭여가며 교정을 서성이던 중 J교수로부터 "6263시 평창면옥"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기본취지는 1960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의 시신이 4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르게 된 사건이 4·19 혁명으로 이어졌던 사실,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시위 도중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자 마침내 425545분 경 전국 27개 대학 3백여 명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들고 가두행진을 벌였던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음날인 426일 오전 10시경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던 사실을 벤치마킹하여 전국 규모 교수 약 3백여 명의 서명을 받아 시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시위자 명단에 이름이 포함될 수 있어 기뻤다. 4·19 당시 교수시위(이를 군자들의 행진이라 부르기도 함)때 플래카드를 들었던 분은 나의 모교 교수였던 임창순 교수와 변희용 교수(경제학과 교수였고 후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는데 당시 민주당 당수였던 박순천 여사의 남편이기도 했음)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비록 공식적으로 대표성이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전국교수 시위대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당일 학교에서 평창동으로 갈 4명의 교수가 택시 한 대에 동승하였다. 내가 뒷좌석 제일 안 쪽에 앉았고 그 옆에 독문학과 C교수가 탔다. 이분은 광주항쟁 발발 시 전남대 교수로 있었는데 당시 서방의 유일한 518 취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독일 힌츠페터를 도와준 혐의로 투옥된 전력이 있는 분이었다. 좁은 자리에 3명이 뒷 자석에 타다보니 내 오른 팔이 C선생 가슴 위에 놓여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쿵쿵 뛰는 가슴의 박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는 다소 흥분은 되었으나 두려운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C선생에게 농담 삼아 물었다. 역전의 용사가 왜 이리 심장 박동이 크냐고. 그랬더니 매도 맞아본 놈이 아픈 줄 아는 법이라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평창동에 이르니 이미 어떻게 알았는지 천여 명에 가까운 무장경찰들이 모임장소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J교수 일행이 이미 경찰 저지선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도 택시에서 내려 옥신각신하는 교수대열에 합류하여 힘을 더해 보았지만 저지선은 꼼짝도 안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저지선 건너편에서 한양대 L교수팀이 경찰대열을 헤치고 우리 쪽으로 나왔다. 이분은 언제 어떻게 저지선 안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대단한 분이었다. 결국 저지선을 마주한 채 우리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유인물들을 기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집회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시내로 피켓을 들고 함께 나가려던 계획마저 봉쇄되자 하는 수 없이 소집단별로 시내로 나가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나는 우리대학 동료인 이 모 교수와 김 모 교수 등과 함께 일단 택시로 시내까지 진출한 다음 소공동을 지나 서울역까지 행진하는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최루탄 속에서 수도 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어두움이 깔릴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당일 전국적으로는 약 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며칠 전 연락을 받고 오늘 평창동 집회를 상의 없이 참가했던 일을 아내에게 전하며 이해해 달라 했다. 아내는 뭐 그런 일을 미리 양해 받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자신도 알았으면 같이 나갔을 것이라고 했다. 고마웠다. 사실 1980년 봄에 그랬듯이 이번일도 상황에 따라 일부 교수들은 수배되거나 해직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날은 토요일이기도 하여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29(월요일)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개헌 요구를 받아드리겠다는 것과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 8개항으로 된 6·29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무사히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 에필로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정년퇴임한지도 10년이 다 되어오지만 나는 여전히 저항하는 갈대처럼 그리고 때로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과 같은 언행으로 일관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지인들로부터 "이 교수는 언제나 철이 들지?" 또는 "이 교수는 못 말리는 반골이야, 반골" 이란 소리를 가끔 듣는다. 그런데 이렇게 불리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다. 자칫 대안도 없이 비방을 일삼거나 심지어 소속집단의 이해에 습관적으로 역행하는 행동이나 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오해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고집불통의 학자나 딸깍발이라 불러주면 좋을 텐데. 그래서 "야 이 사람들아, 나는 반골이 아니고 정골이야, 정골"이라며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를 만들어 가며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반골이란 원칙과 명분에 어긋날 경우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타협하거나 순응하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이란 뜻을 갖고 있으니 거부감을 가지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실존철학자로서 행동하는 지성을 부르짖었던 사르트르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순된 상황과 부조리에 맞서 행동할 것을 주문한 바 있었다. 동시에 그는 이른바 '참여문학론'(앙가주망)에서 작가는 자신의 자유는 물론 타인의 자유까지 존중하기 위해 스스로를 구속할 것을 주장하였다. , 그의 '앙가주망'이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일을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 구속' 내지 '자기 절제'를 동반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같은 비판으로부터 자유스러울 만큼 항상 자기절제를 생활화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러한 사르트르의 '참여'이념에 충실해 왔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사회변화를 선도할 지혜나 용기는 아예 없었고 저항한다 해보았자 그저 소극적 이의제기 정도에 머무는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연약한 갈대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정도, 또는 자신의 존재감을 자신에게나마 확인시키고 싶은 욕구의 분출 정도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더구나 그 정도의 저항도 때로는 두려움 때문에 망설여지곤 했던 경우가 허다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저항이 과연 무슨 소용 있을까 싶은 의문이 자주 들기도 했다. 개인적 저항이나 희생만으로 세상이 바뀔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태양은 내일 또다시 같은 자리에서 떠오르게 되는 것처럼 세상은 결코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한 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단순히 애비 없는 후레자식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앙가주망'으로 거듭난, 말하자면 '참여적' 후레자식으로 처신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선 소감>

이종원 씨


단지 희망사항일 뿐 당선은 욕심이라 생각했다.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기쁨보다는 문단에 대한 송구스러움이 앞섰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이러한 영예를 안아도 될까 싶어서였다. 문학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거의 전무한 이성위주의 경제학도가 단지 자신의 생각을 논문 쓰듯 체계적으로 전개해 본 수준에 불과하다고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문학형식으로 포장한 이성이라고나 할까?

정년 이후 심리적 혼란기를 겪으며 제 2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일 중 하나가 자전적 수필집의 발간이었다. 스스로 이 세상 다녀간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출한 작품은 준비해 오던 수필집 내용의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글이다.

고등학교 시절 도덕 시간에 대리대답을 했다가 발각된 친구에게 담당교사였던 교감선생님이 다짜고짜 애비 업는 후레자식이라고 질타하는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비록 내게 던져진 질책은 아니었지만 6·25 때 아버지를 잃고 지내던 나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안 계신 것도 서러운데 후레자식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더구나 도덕시간에" 라며 반발했다가 하루 종일 체벌을 당한 적이 있다. 저런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비록 후일의 일이지만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이 결코 틀린 말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안의 남자 어른으로부터 꾸지람을 받는 일 없이 성장하다보니 인내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지인들로부터 "이 교수는 언제나 철이 들지?" 또는 "이 교수는 못 말리는 반골이야, 반골" 이란 소리를 가끔 듣기도 했다. 그러면 "야 이 사람들아, 나는 반골이 아니고 정골이야, 정골"이라며 스스로 신조어를 사용하여 항변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반골이란 원칙과 명분에 어긋날 경우 어떤 권력이나 권위에도 타협하거나 순응하지 아니하고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이란 뜻을 갖고 있으니 거부감을 가지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나의 이런 생각과 행동은 다분히 대학시절 심취했었던 행동적 실천철학자 사르트르의 '참여문학론'(앙가주망)에 근거해 나온 것이어서 조금의 후회도 없다. 그의 담론은 내가 단순히 애비 없는 후레자식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앙가주망' 말하자면 '참여적' 후레자식으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이번 출품은 지난 2년여 기간 동안 성남시가 주관한 문학 강좌에 힘입은 바 크다. 본 지면을 통해 감사드리고 싶다. 앞만 보고 치닫던 생활방식에서 탈피하여 주위에 귀 기울이고 살펴볼 줄 아는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도 듣지도 또는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무심히 그리고 무감각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 강좌는 내가 평생 추구해온 경제학처럼 인간생존에 관한 필수적 논리로는 아니지만 인생을 윤택하게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게 해 주었다. 어느 스님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 했던 책의 제목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끝으로 이번 출품을 처음 계획하고 추진할 때부터 용기를 북돋아 주고 교정과 편집에 애정을 쏟아 준 아내 박 상옥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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