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늪…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이우영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우영] 1. ‘불씨’
3억 5천만 명의 인원과 세계최고의 시설 및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1995년 초부터 1996년 2월까지의 생산효율을 측정하는 척도에서 마이너스 지수가 나타남으로 해서, 중역들을 비롯한 모든 관리자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으며, 더군다나 국내 대형 조선사 세 곳 중에서 현대중공업이 가장 뒤떨어져 있다는 경영기획부의 조사까지 사장님께 보고가 되어, 사내 분위기는 전에 없이 매우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외 영업만 주로 맡아하시다가, 금년 1월초에 본사에 취임하신 사장님은 몇몇 측근들의 건의 끝에 긴급 중역회의를 소집하여, 일본의 ‘도몬 후유지’가 쓴 ‘불씨’의 주인공인 ‘우에스기 요잔’이 시도한 변화와 개혁을 당사에 맞도록 수정하여 적용할 것임을 예고하였으며, 그리고 기술력. 기획력. 추진력을 갖추고 있는 부장 직급에서 한 명을 뽑아 보고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중역들은 협의를 통하여 선택된 자를 결정하였고, 참여한 중역들의 최종 결정임을 사장님께 보고 하였다. 현대중공업 창설 이래 의전비서들만 근무하던 사장실에, 최초로 기술비서가 들어서는 사건이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발생되었던 것이며, 내가 기술비서로 채택된 사실을 총괄 중역으로부터 미리 귀띔을 받았었고, 그 후에 인사부로 부터 의전실에 근무케 됨을 정식으로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3일 째 되던 날 개혁의 추진방법을 검토하여 보고하라는 사장님의 첫 지시가 떨어졌다. 제로베이스 관점에서 보는 개혁의 알고리즘을 철저히 분석하였고, 별 지적이 없이 가격한 표현만 고쳤으면 좋겠다는 지시가, 사장님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하는 공문을 전 부서에 띄우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있었고, 경쟁사들의 추종을 불허했던 과거 현대중공업의 기술력을 다시금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지원 부서를 제외한 하부조직을 중역들 중심으로 만들 것을 내게 지시했다. 바로 사장님의 뜻을 중역들에게 전달함으로서, 생산현장의 피 끓는 사투가 줄기차게 이어지기 시작했으며, 생산과 관련 된 중역들은 진행 상황들을 체크하는 등, 회사 전체가 전에 없이 활기 넘치는 모습들이 벌어졌다. 개혁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던 이듬해부터, 생산성은 기대치 이상의 수치를 기록하였고, 수치의 척도에서도 생산효율을 나타내는 경쟁사들의 추월이 불가할 정도로 사상최대의 실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2. 잔인한 4월.
2003년 4월은 ‘T. S 엘리엇’이 읊었던 ‘황무지’라는 제하의 첫 소절인 ‘죽은 자의 매장’에서 묘사 했듯이, 나의 인생 여정 중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1. 죽은 자의 매장.
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이하 생략.
오후 4시 쯤, 사장님께 노동절에 발표할 ‘비전 2010’의 개혁에 관한 수정안을 브리핑하여 흔쾌히 재가를 받고, 상큼한 마음으로 사장실을 나왔다.
“부장님! 사모님의 전화가 왔었는데, 집으로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의전비서인 미스 윤이 사장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자, 일어서며 말을 했다.
“그래? 알았어.”
가볍게 말을 던지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책상위에 브리핑 자료를 올려놓는 순간,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흠칫했다. 7년 동안 집사람이 회사에 전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일이 아니면 의전실에 전화를 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집에서 얘기해도 될 텐데, 그렇게 화급한 일이란 말인가?” 조심스레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벨의 첫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집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예요?”
약간 고음의 음성이 귀를 때린다.
“전화 했어?”
애써 감정을 죽인 채 조용히 물었다.
“대구 지방법원에서 고소장이 날아 왔어요! 돌아가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자식들이 50억 4천여만 원을 갚아야 된대요. 무서워 죽겠어요. 퇴근해서 어디가지 말고 집으로 바로 오세요!”
난데없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비명처럼 내뱉는다.
“도대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버님 대신에 돈을 갚으라니!”
나는 이러한 일이 마치 집사람의 잘못인양 따지듯이 물었다.
“대구에 있는 삼보신협이 파산이 되었는데, 아버님이 그 회사에 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대요.”
아버님은 대구전신전화국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분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국통신공사인 셈이다. 그리고 공무원의 최고 명예인 청백리상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받을 정도로, 평생 옆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살아오신 분이다. 그런데 삼보신협은 무엇이며, 또 이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확실하게 내 이름으로 고소장이 왔느냐고 되물었고, 법원과 관련된 모든 서류는 본인 도장이 없으면 전달할 수가 없다는 말을 집사람으로부터 듣고는 전화기를 놓았다. 갑작스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집사람도 확실한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예삿일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퇴근시간까지 2시간 정도가 남아있었지만, 벽시계의 바늘은 꼼작도 않고 머물고 있었다.

3. 나락에 떨어지다.
대구 지방법원의 소장을 마치 살생부를 보듯 불안스레 읽어 내려갔다. 원고는 파산자 대구 삼보신용협동조합의 파산관재인 예금보험공사로 되어있었고, 피고는 여섯 명이 나열되어 있었으며 부친은 마지막 여섯 번째에 선명히 등재되어 있었다. 근무기간은 79년 6월 27일에서 98년 4월 6일까지였다. 98년 4월 6일은 부친의 망일이었으며, 더군다나 울산에서 부친이 돌아가신 그날까지 8년간이나 내가 모셨는데 대구의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망자 ‘이 JB’ 대신에 기명된 자와 연대하여 50억, 4천2백, 2십5만원을 변제하라는 ‘당사자표시’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장이 손에서 스르르 떨어졌다. 기명된 사람은 장남인 내 이름을 필두로 남동생. 누나. 여동생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 송달 다음 날부터 완제일 까지 연 20%의 각 비율에 의한 금원을 지급하라고 했으며, 소송비용은 피고들의 부담으로 한다고 했고, 손해배상 청구액은 가집행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은 강력한 고압선이 지나가며, 모든 사고로부터 완전 단절되어 버렸고, 와글와글 거리는 소음덩어리들로 난장만 치고 있었다.
“아!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천길만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가 있구나! 이건 말이 안 돼! 아주 야비하고 비열한 짓이야 법이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어!”
내 몸의 모든 뼈를 누군가가 발라내어 온몸의 힘은 아메바처럼 흐느적거렸고, 혹시나 하며 나의 눈치를 보던 집사람도 절망감으로 소파에 털썩 엎어져 버린다. 대구에 있는 누님과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보니 자기들도 소장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자기들은 남편 앞으로 재산이 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했고, 나의 문제가 큰일이라고 했다. 남동생은 운영하던 공장의 부도로, 부친의 유일한 재산인 집마저 없애 버린 채 6년째 소식이 없는 상태다.

4. 상속채무법의 덫.
밤새도록 수잠으로 뒤척였다.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안고 회사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패트롤을 마친 후 사장님께 대충 소장의 내용을 말씀드리고, 대구에 다녀와야 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사장님은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이 많겠다고 하시면서 회사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하셨다. 나는 일단 집사람에게 대구 갈 준비를 하라고 일러놓고, 인사부에 있는 법률담당 고문에게로 달려갔다. 소장을 보여주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 삼십여 장이나 되는 소장을 한참을 읽고는,
“죄송하지만 부장님은 개정된 민법 경과조치 조건에 맞지 않습니다. 개정 민법이 2002년 1월 14일 국회로부터 공포되었는데, 상속개시 되는 1998년 5월 27일부터 공포일까지를 소급효로 지정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친의 망일이 1998년 4월 6일이었고, 경과조치 시행일자가 1998년 5월 27일 이후라, 부장님은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변재 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환장할 노릇이고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으며, 법을 만든 국회에 대한 원망과 업화로 미칠 지경이었다. 상속채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할 요량이면 현재 소가 진행되고 있는 자들까지 모두 구제해줄 것이지, 대관절 무슨 얼어 죽을 전혀 무책임하고 차별 된 조치를 취하여, 처절한 죽임을 당하게 한다는 말인가!
공적자금이라 정책이 바뀔 수도 있고, 혹시 부채상속법에 관한 재 입법도 가능할 지도 모르니, 일단 시간을 벌어놓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제기해 놓는 것이 좋겠다는, 법률고문의 위로 섞인 조언을 뒤로하고 인사부에서 나왔다.

5. 기결된 패소.
소송 원고인인 법무법인 변호사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치 실어증 환자처럼, 집사람과 나는 2시간을 계속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아내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원고 측 변호사 사무실에서 부친이 이사로 등재되어 있는 법인 서류를 우선 확인하고 궁금했던 사항들을 물었다. 가장 의아했던 부분인 부친이 어떻게 삼보신협의 이사로 등재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바로 풀렸다. 대표이사가 부친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생전에 호인으로 소문났던 분이라 친구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울 보듯이 뻔했다. 출근부에는 아예 부친의 이름이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친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무한책임을 져야하는 법인이사 명의를 아무런 안전장치나 반대급부도 없이, 그냥 등기이전을 해 준 실수를 저질은 것이다. 동일인 대출한도 초과. 견질어음담보 부당대출. 대출취급의 부적. 근저당권 부정해지. 대출금이자 미 징수 및 부당감면. 분식결산까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없는 여러 가지의 혼란스러운 죄목이 있었으나, 부친과 여섯 명이 책임져야할 항목은 분식결산 부분으로 매년 순손실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합원에게 허위보고를 한 후 배당을 하여 손실을 초래한 것이었다. 이 부분의 총 손실금액 50억4천 여 만원이 갚아야할 액수였다. 그러나 실제금액은 재판이 오래 끌었을 경우를 가정하면, 연 20%의 추가 금원이 발생됨으로서 상상조차도 못 할 금액이 발생될 소지가 농후했다. 경영불실로 적자인데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이 발생된 것으로 조작하여 집행되어, 해마다 그 손실은 눈덩이처럼 쌓여졌던 것이다. 여러 인감도장 속에 아버지의 것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누군가가 아버지 대신에 날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나의 재산이 압류되지 않았다면, 사전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 선임은 뒤로 미루고 울산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울산법원 등기소에서 아파트와 땅의 등기 열람을 했다. 다행이도 압류는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행정행위를 신속히 처리하기로 작심하고, 32평 아파트를 시세보다 훨씬 싸게 부동산에 내어놓았다. 늦은 오후에 임자가 나타났기에 바로 팔아버렸다. 평소 작물 가꾸기가 취미였던 부친을 위해 생전에 텃밭이라도 하시라고, 울주군 척과리 산자락에 사둔 땅 300평은 바로 팔리지 않을 것 같아, 친한 이에게 부탁하여 등기 이전을 해주었다. 그리고 은행에 들어있던 현금을 찾아 집사람 친구에게 맡겼다. 오후에는 살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 마침 오래된 다세대 주택인 25평의 빈집이 있어,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전세 삼천만 원에 서둘러 계약을 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사장님께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27년을 동고동락했던 현대중공업을, 2003년 5월1일자로 49세의 나이로 사직서를 내었다. 봉급과 퇴직금의 압류를 막기 위함과, 정신적 핍박으로 계속 일을 한다는 자체가 회사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직장생활 중 가장 피크일 때 그만두게 된 셈이다. 숨 가쁘게 지나간 5일이었고, 그 5일간은 얼마나 거친 시간들이 준비되어 도사리고 있을지, 또한 언제쯤 끝이 날지도 모르는 미로로 떠나는 거칠고, 외롭고, 힘든, 형극의 시발점이었다. 변호사 선임도 끝냈다. 마침 소식을 접한 이종사촌 동생이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금융사건 전문인 김 모 변호사를 소개해 준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것은 삼수갑산을 가드라도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놓고 보자는 생각이었고, 설사 승산이 없다 할지라도 내 인생을 담보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사로, 국회가 7년을 미루다가 통과시킨 엉터리 같은 부채상속법을 상대로 할 수 있는 한 무조건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6. 이사 가는 날.
집사람과 나는 마치 죄진 사람처럼 도망치 듯 이사를 서둘렀다. 전셋집으로 탑차에 짐을 실어 보낸 후, 집사람은 십여 년을 현관문에 붙어 우리를 지켜주었던 ‘가톨릭인의 집’이라고 쓰인, 자그마한 십자가의 성물을 마지막으로 뜯어내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참을 찡그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원망의 눈으로 쳐다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사를 온 뒤에도 성물은 현관문에 다시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다세대 주택은 1, 2층 각 두 세대로 2층 안쪽이 우리가 살 집이었고, 건물 정면의 모자이크 타일은 여러 군데가 불규칙적으로 떨어져 흉악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함에도 도시가스가 설치되지 않아, 옥상에는 위험스레 세워놓은 마치 소형 순항 미사일 같은 LPG통 여덟 개의 가스케이블이, 제 멋대로 흩어져 케이블 구경만큼 벌어진 각각의 집 거실 창문 속으로 뱀 꽁지 감추듯이 사라지고, 벌어진 창문 부분은 빛바랜 초록 테이프가 너덜너덜하게 막고 있었다. 방과 부엌, 거실의 외벽 쪽 벽지는 마치 그리다 만 오래된 수묵화처럼 검게 피어난 곰팡이가 춤을 추었다. 싱크대 밑에 있던 바퀴벌레 여러 마리가 인기척에 혼비백산하여 방향 없이 달아나고 있었으며, 이를 본 집사람이 숨이 넘어 갈 듯이 비명을 질러댔고, 바로 안방으로 달려가 세운다리에 이마를 댄 채 서럽게 울었다. 모르긴 몰라도 꼭 바퀴벌레 탓에 우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를 놓고 나니 답답해진 작은 부엌, 거기다가 알록달록한 무늬의 리놀륨을 덧대어 나를 서글프게 하는 싱크대 하며, 거실 외벽 쪽 천정은 비가 새는지, 오줌자국 같은 빛바랜 얼룩이 지저분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짐을 넣어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방 한 개를 아예 창고로 쓰기로 하고, 컴퓨터 책상과 나의 정취와 삼십 여년을 같이 해왔던 오디오 시스템. CD 천이백 여장. 즐겨 연주하던 몇 개의 악기들은 박스에 집어넣고, 그냥 두어도 무방한 여러 가지 소품들은 대충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방 하나는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큰딸이, 나머지는 우리 부부가 사용키로 했다. 작은 딸은 서울의 중앙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막바지 어학연수 중이며, 보름 뒤 귀국할 예정이다. 괄목할 만한 일은 연수과정에서 여섯 번의 우수상을 받았고, 연수 후에는 토론토 대학 장학생으로 추천이 되어 학비가 면제되는 특혜를 받았다. 집사람과 나는 이미 토론토대학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7. 막내의 귀국.
어학연수를 마친 작은 딸은 인천공항을 거쳐, 저녁 8시 경 울산공항에 도착했다. 집사람은 막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큰애와 같이 준비한다고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구실이었다. 아버지 사건만 없었다면 큰딸과 더불어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공항이 떠들썩한 장면을 연출할 텐데, 우울증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작은놈의 수다에 맞장구치며, 차마 기승을 떨 수도, 가식적인 표정과 몸짓도, 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쉴 사이도 없이 재깔재깔하는 딸의 호들갑을 오래간만에 들으면서, 내 몸뚱이의 일부가 되어 가슴 깊숙이 더부살이하고 있는, 악성종양과 다름없는 부채상속건을 어떻게 말 할 것인지 난감해 하고 있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을 말할 수 있는 빌미를 자연스럽게 작은 놈이 만들어 주었다. 전셋집을 300미터 정도 남겨 둔 상태에서, 전에 살던 집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 “아빠! 왜? 이쪽으로 가? 어디 멋진 곳으로 집을 옮겼어?” 하고 딸애가 물었던 것이다. 나는 말없이 비상 깜박이 버튼을 누르고는 차를 도로 가에 세웠다. 막내는 작지 않은 눈을 부릅뜬 채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숨을 죽인 후 놀라지 말라고 하고서는, 현재까지 있었던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를 했다. 엄청 충격적인 사실에 둘째 놈은 말문을 닫아버렸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없이 내 손을 잡고만 있었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나의 속내와 흡사한 어두운 하늘만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사람과 두 딸은 서로 부둥켜안고 비둘기 울음 같은 작은 소리로 서럽게 흐느꼈다. 두 딸은 집사람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나는 옥상에 슬그머니 올라가 시커멓게 타버린 내 가슴속 같은 칠흑의 하늘을 얼없이 치어다봤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컴컴한 하늘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집사람과 이미 말을 맞추어 두었던 터라, 막내에게 유학을 가려면 걱정 말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랄 때부터 황소고집이었던 막내는, 그냥 복학을 하겠다고 끝내 고사를 했다. 집안의 분위기로서는 도저히 유학 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친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또 한 번의 절망스러움과 인간사 처절함을 보여주었다. 좁은 방을 언니와 같이 쓰는 것도 그렇고 하여, 하숙도 구할 겸 복학 준비도 할 겸, 막내는 미리 서울에 올려 보내기로 했다.

8. 사행행위.
일단 이사도 끝내었고 부동산도 등기이전을 하였다. 유체동산은 가압류 딱지를 붙이더라도 감수를 할 작정이었다. 어느 중앙지에 예금보호공사의 공적자금회수에 따른 피의자들의 사행행위에 대하여, 300여명의 회수위원들이 전국을 돌며 일일이 추적하여 고발조치를 한다는 내용이, 실제 경우의 예를 들어가며 대서특필하였다. 또한 이러한 사행행위는 형사범에 해당된다고 토를 달고 있었다. 국회가 만들어 놓은 부채상속법의 덫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재산을 도피 시켰지만, 사행행위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을 뿐더러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도 없었다. 두려울 것도 겁날 것도 없는 엉터리 같은 부채상속 건은 내 생애에 처절한 상흔만 남겼을 뿐이며, 있을 수도 없고 있었어도 안 될 그야말로 콜타르로 부어버리고 싶은 사건이었다. 얼마 후 가압류 조치는 대표이사 및 간부 2인과 여타 2인에게 실행되었다는 소식을 사건 담당 변호사가 연락을 해왔으며, 항소까지 가려면 통상 5년 이상 소요될 것이니 일단 느긋하게 잊어버리라고 했다.
집사람은 평소에 그렇게 조잘조잘하던 말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밖엘 잘 나가려 하지도 않았다. 눈자위는 결결히 눈물에 젖어 있었고, 얼굴엔 어둠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었다. 눈 꼬리는 항상 처진 울상이었다. 온 집안도 비온 뒤의 운애처럼 음침한 기운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족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져버린 지가 오래였다. 아무대책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누군가가 말이라도 걸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 약속이라도 하듯 모두들 침묵만 이어갔다. 집사람이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 처져 있으니, 큰 딸과 나는 눈치를 보며 맥을 놓고만 있었다. 집안의 기둥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 또한 밤이면 잠자리에 들기가 몹시 겁이 났다.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 허공을 두리번거린다거나, 양쪽 옆머리가 마치 연탄가스에 취한 듯 자근자근 쑤시어, 주먹으로 짓눌러가며 온몸을 쭈그린 채 날밤을 지새운 적이 허다했다. 이러한 증상들로 인한 얼음장 같은 불면은 악귀처럼 곁에 머물러, 잠을 자도 겉잠을 자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삶이 내가 의도한 적이 없는 생소한 쪽으로 급선회한 탓으로,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생활 리듬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한 바이오리듬까지 깨어져 그 무서운 당뇨병이 덮쳤고, 당뇨합병증으로 머리에 5mm정도의 핏줄이 막혀버려 혈전까지 생겼다. 조기에 치료했으면 쉽게 뚫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냥 방치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몸을 움직이거나 활동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으나, 오른쪽 엄지와 검지가 매우 불편해서 글씨를 쓴다거나 컴퓨터 자판기를 사용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한마디로 풍이었다. 그래도 의사는 이만하기 다행이라며 천운이라고 했다. 당뇨병은 70kg이나 나가던 체증을 62kg으로 줄여버렸다. 그러나 진즉 나를 실망에 빠뜨린 것은 손가락 두 개가 노후의 멋진 계획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회사 정년퇴임을 하면 리듬박스를 두고, 피아노. 키보드. 기타. 색소폰(소프라노. 알토, 테너)까지 혼자서 바꾸어 가며 연주하는 독특한 카페를 운영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카페는 내 또래 지인들의 아지트로 노후에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음악을 들으며, 알코올이 들어있는 미도리 샤워 같은 것을 마신다거나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버진 마가리타 종류의 칵테일을 들거나 하면서, 옛날 잘 나갔던 시절을 은근히 자랑도 하며 소일할 수 있는 회상의 자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연예협회 연주분과 66번의 프로페셔널이었다. 대학 4년을 대구 미 8군 캠프 헨리와 캠프 워크에서 8인조 밴드를 조직해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했었으며, 군 생활 3년 6개월을 50사단 문화선전대에서 기타연주를 했고, 제대 후에는 카바레와 홀에서 피아노. 키보드. 기타를 치며 10여년의 연주생활을 하며, 남동생과 여동생의 학비와 어머님의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다. 나의 노후 계획을 알고 있던 지인들은 혈전으로 인한 연주가 어렵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퍽이나 안타까워했다. 부채상속 사건은 삶을 영위하면서,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다 할 수도 없고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우리 인생에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9. 판도라의 상자.
60년대, 어느 삼류극장에서 낡아버린 필름을 뭉텅뭉텅 가위질해버려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알 수 없게 된 영화처럼, 나는 갑자기 낯설어진 삶으로 답답한 테두리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한동안 가족이나 알던 사람들에게도 대책 없는 모양새로 비춰지기도 했다. 그리고 정녕 고민스러운 것은 이때껏 자존심과 오기하나로 뻗대어왔던 내 자신이, 이 두 개의 잣대를 훨씬 낮게 가져가든지 또는 완전히 죽여 버리고 살아가던지, 여하튼지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에 상당히 당혹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자존심과 오기 같은 것들이 앞으로의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또한 집사람의 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에서 살아갈 이유를 상실해 버린 연민스러움을 읽었으며,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취업을 하겠다고 뛰고 있는 큰딸의 모습은 가슴이 터져버릴 듯 아리게 다가왔다. 당장 뾰족한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이라도 일어서야 한다는 본능 같은 것이 꿈틀되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압박감이, 썰물처럼 쉴 새 없이 나를 밖으로 밀어내었다. 얼마 전, 미사 때 신부님이 하셨던 강론의 구절이 떠오른다. 꼭 나를 염두에 둔 듯, 마음에 절절이 다가왔던 얘기였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절망을 안고 살아간다. 절망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며, 새로운 출발이다. 희망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다만 찾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이며, 신이 만들어 주신 ‘판도라의 상자’는 언제나 간곡히 바라는 자에게 희망만이 남아 있는 뚜껑을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생각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그리고 성사의 축복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10. 툰드라의 갤.
울산노동부에 취업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부탁도 해 놓았다. 그러나 초조하게 기다리는지를 악귀가 알아챘는지 좀처럼 소식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노동부에서 2개월이 지난 후에야 신청한 서류상에 요구한 희망 임금이 너무 높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현대중공업 연봉의 반 정도로 신청했는데도 그런 높은 임금으로는 취업이 불가하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담당자가 상담을 원했다. 울산노동부를 방문하여 가능한 임금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했다. 담당자가 비고란에, “고 임금 요구로 취업불가 통보완”이라고 쓰여 있는 2개월 전 제출했던 구직서류와 임금 수준 및 모집 직종이 망라된 채용정보를 참고로 보여주었다. 구직서류에는 노동부의 업무 종결을 말해주는 직인이 내 가슴에 물든 멍 자국처럼 퍼렇게 찍혀있었다. 담당자는 본인이라는 난에 사인을 요구했다. 상담을 요구한 이유가 본인의 확인을 받음으로서 확실한 업무종결을 위한 의도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삼천 여개의 하 많은 채용정보 중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요구직종이 대다수가 기능직이었다. 경리. 택배기사. 배달원. 심부름센터. 파출부. 간병인. 정문 경비. 현장 야간경비 등이 전부였고, 지급하겠다는 가능 임금수준이 월 120만 원 이하가 그 넓은 신문을 덮고 있었다. 주로 컴퓨터 전문 직종을 구하는 곳에서 150만원에서 200만원을 지급한다는 곳이 이따금 눈에 띄었으며, 동네 곳곳에 비취 되어있는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생활정보에지에 실려 있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내용들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연봉 4천 2백만 원을 희망 연금으로 신청했으니, 설사 나의 경력을 보고 채용하겠다는 회사가 있었더라도 황당해 했을 것이고, 더군다나 노동부 직원들이 얼마나 웃었겠냐고 생각하니 머쓱하기가 짝이 없었다.
“도대체 중소기업에서의 나의 가치는 얼마짜리라는 걸까?”
갑작스레 북서풍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들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에서의 27년이 혹한을 막아주던 ‘툰드라의 갤’이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11.우렛소리.
노동부 방문 후 축 처져버린 마음을 긁어대는 볼썽사나운 막바지 여름비가 이따금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여 아침부터 나를 한없이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큰딸은 저녁의 첫 수업 준비를 위하여 독서실에 가고, 아내는 병원에 출근했다. 취업을 하겠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던 딸이, 그예 학원 국어강사로 취업이 되어 집사람에게 매달 250만원의 목돈을 주게 되었으며, 본래 간호사 출신이었던 아내도 교우가 운영하는, 어느 내과 병원에 일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식구들이 조금씩 현실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한동안 걱정스러웠던 가족들이 자기 자신들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나보다도 훨씬 더 잘 싸우고들 있어, 그저 감사하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니체’가 말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망각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고맙게도 생활의 숨통은 물고가 트이게 되었으나, 내가 지고 갈 무거운 짐을 식구들에게 슬그머니 밀어놓은 꼴이 되어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파륜자 신세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대기업 사장의 기술비서로 자존심과 오기로 자승자박했던 내 자신이 가슴이 시리도록 부끄러웠다. 어이없게도 아직까지도 한때 잘 나갔던 사장의 기술비서인 것으로 착각하고, 허튼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동안 조용히 비만 뿌리던 하늘이 뇌성벽력의 힘을 실어 찢어질 듯이 울부짖었다. 꽈! 꽈! 꽝! 대는 우렛소리가 마치 내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차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천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 외벽 쪽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고 있던 백철 양동이 하나가, ‘아다지오 디몰토’ 템포로 똑딱거리는 ‘메트로놈 소리를 내며 나를 한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후다닥 일어나 윗도리를 걸치고 현관문을 향했다.

12. 민 사장님.
과거 모셨던 분 중에 중역으로 퇴임하여, 경주 외동공단에서 도장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민 사장님을 찾아뵙고 취업을 부탁해 보기로 했다. 민 사장님과는 3년 만에 만나는 셈이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고, 사장님의 근황과 공장형편을 물었다. 몇 년을 적자운영이 지속되고 있었고, 올해부터는 은행융자도 끊겨 집사람이 천금같이 알차게 모은 돈을 공장운영비로 쓰고 있다고 했다. 본래 성격이 좋기로 소문이 났던 민 사장님은 공장을 시작한 자체를 후회하고 계셨다. 나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도 하였고, 간단하게 아버님 사건도 말씀드렸더니, 몹시 놀라셨다. 그리고 큰일이라며 걱정을 하셨다. 결국 잡다한 얘기만 나누다가 진작 요점은 말도 못하고 다음에 뵙겠다고 하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민 사장님의 힘든 형편을 보고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저녁 무렵에 뜻밖에도 민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다시 회사에 들렸으면 하는 전화였다. 취업 때문에 왔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도 어려운 공장 형편에 몇 번이고 주저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적자가 지속되는 공장형편 속에서도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적지 않은 임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한 배려는 숫기 없는 나를 가슴 찡하게 만들었다.
2002년 10월 10일부로 부사장 직책을 부여받고, 민 사장님의 공장인 C산업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중공업 떠난 지 5개월 만에 실질적인 사람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연봉이 적어 미안하다는 사장님의 양해의 말에도 감지덕지 하였다. 칠천 여 평의 부지에 브라스팅 공장이 한 개, 도장공장이 세 개, 종업원은 임금이 한국인의 60% 정도인 방글라데시인 7명을 포함해서 33명으로, 2차 벤더의 물량을 받아 처리하고 있는 막말로 돈이 안 되는 기업이었다. 현대중공업의 물량을 직접 받아도 될까 말까 하는 판에, 2차 밴드로부터 물량을 받아 처리를 하니 매달 적자 운영이었고, 이런 상황은 5년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나는 근무하는 동안 적자상황을 개선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마디로 껍질이 단단한 회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보름동안 업무와 연관된 공장 시스템을 파악한 뒤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또 더 숙여라.”는 사장님의 조언을 머리에 새기고, 하늘의 별따기라는 현대중공업의 업체등록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왕 물량이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잡을 바에야 대어를 잡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또한, 현대중공업에서 기술비서라는 자리에 있을 때,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는지 시험해보고도 싶었다. 만일 내가 직책을 앞세우고 거만했다거나 몹쓸 짓을 저질렀었다면, 나의 부탁은 보나마나 끝장이다. 면회실에서 만나야할 구매중역과 담당부장의 면회 신청을 하고 전화 통화를 한 뒤, 면회실에서 멀지않은 구매부 상담실로 향했다. 모두들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를 풍문으로 듣고 있었던지, 아버지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에 걱정들을 많이 해주었고, 다행이 도장 물량이 늘어 기존 업체 외에 두개 업체를 추가 물색 중이라는, 귀가 확 뚫리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금주 중에 품질관리부. 구매부. 물류부가 공장실사를 하기 위한 공장방문을 할 것이라고 했다. 운이 좋게도, 그 어려운 업체등록을 너무나 쉽게 성사시켜, 첫 영업 관문을 성공리에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현대중공업의 기술비서로서 인심은 잃지 않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13.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한 달 후 현대중공업의 물량이 몰려와, 21시까지 매일 특근을 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2차 밴드의 물량을 받아 처리 할 때 보다는 금액과 도장 단가는 훨씬 개선이 되었지만, 겨우 현상유지 정도였다. 그래도 민 사장님은 사모님의 돈을 축내지를 않아 어느 정도 만족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현대중공업과 직거래를 하고 있는 도장 공장 네 곳을 방문했다. 상황이 우리공장과 거의 동일했다. 과거에 공장 대표들이 구매부와 단가 싸움을 했으나, 구매부에서는 작업할 때 페인트 사용이 과다하다고 업체 탓으로 돌렸고, 업체는 그렇게 적게 쓸 경우 작업속도나 작업능률 문제가 발생이 되어 공정에 문제가 발생이 된다고 했다. 회사나 업체가 말하는 내용이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대다수의 공장들은 회사와의 협상을 포기한 상태였다. 나는 도장업체들을 우리공장으로 긴급히 소집 하여 대책회의를 가졌다. 단가를 올려 달라고 해봐야 거절 할 것이니, 나는 모기업에서 페인트 사급조치를 해 줄 것을 요구하자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업체 사장들은 이구동성으로 불가능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중공업에서는 선박에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페인트를 포항제철로부터 공장직거래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대리점 가격보다도 5%포인트 이상 저렴하게 구매한다. 따라서 사급만 결정되면 도장업체로서는 최소 3~4%의 단가 상승의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고 했으며, 총대는 내가 메겠다고 했다. 그러나 업체 사장들이 염려했던 데로 구매부의 강력한 거부가 발생되어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부 이유는 관리비가 많이 들고 드럼 단위로 주게 되어, 쓰고 남는 페인트의 재고 처리가 힘이 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쓸데없이 자기들 업무가 가증된다는 얘기였다.
“페인트 가격이 너무나 높아 업체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관리가 어렵다는데 무얼 관리 하겠다는 것이냐? 지금 하고 있는 방식대로 도장면적 산정해서 전체금액에서 페인트 값만 빼고 주면 된다. 그리고 페인트는 업체가 스스로 운반할 것이며, 재고 문제는 우리가 관리하겠다. 의심스러우면 감사를 하라. 무엇이던지 간에 다 수용 하겠다.”
몇 번에 걸쳐 열변을 토로했으나 성사가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기로 했다. 사장님을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뒤에 구매 이사와 부장에게 욕먹을 각오를 한 것이다. 업체가 살 수 있는 길은 이 방법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만 이런 짓은 한 번으로 끝내어야 한다. 그리고 사장님을 이용한 불손을 어떤 식이던 간에 실무자와 반드시 풀어야 하고, 잃어버린 신뢰를 바로 만회를 해야만 한다. 어차피 사장님은 지금의 위치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가 없는 탓에, 이런 일로 인하여 쌍방 간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는, 향후에 서로 껄끄럽게 되어 업체는 불이익을 면치 못하게 될 뿐이다. 전에 내가 모셨던 사장님은 물러나고 생산 본부장(부사장)이었던 분이 사장이 되었으며, 나하고는 자주 대화를 나누었던 가까운 분이었다. 사장님의 한가한 시간대를 잘 알고 있기에 의전실에 미리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통보가 바로 왔다. 사장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사는 얘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제조업의 실상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 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사장님은 기분이 상당히 업(Up) 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날 면담이 성사 된 것 같았다. 한참을 잡담만 한 뒤 사장님은 벌써 눈치를 채셨는지, 혹시 도와줄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를 하라고 운을 띄웠다. 나는 준비해간 리포트 한 부를 드리고, 프레젠테이션 하듯 조목조목 간단히 설명을 드렸다. 사장님은 별 코멘트 없이 구매담당 이사를 지금 사장실로 오라고 비서에게 지시하셨다. 나는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재빨리 빠져나왔다. 맞닥뜨려서 피차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감이 아주 좋았고, 사장님과의 면담은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에 새까만 후배인 구매부장의 호출을 받고 정신없이 치도곤을 맞았다. 사장님께 드린 리포트를 탁자위에 세차게 치며 노발대발이었다. 이미 각오를 한 터라, 나는 민 사장님의 조언대로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또 숙였다. 현대중공업에서 사급해주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도장업체로서는 숨통이 확 트이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3%의 이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수치는 엄청나게 큰 비약이었다.

14. 공장 문을 닫다.
2005년 들어서면서 집이 부산 안락동 이었던 민 사장님이 출근을 안 하시는 날이 무척 많아졌다. 본래 불교에 심취하신 분이시라 집에서 멀지않은 절에 나가셔서 스님과 대화도 하고 골방을 얻어 책도 읽으며 심신을 다독거린다고 하셨다. 사업의 의욕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연세도 60대 후반이라 기력도 쇠진하여, 부산에서 울산까지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출퇴근하시기도 옛날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혹시, 사장님이 사업을 접으시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생각이 옳았다. 사장님 지시로 현대중공업의 물량을 서서히 줄여 나갔으며 우선 퇴직금이 발생되지 않는 1년 미만의 작업자들부터 점차적으로 퇴사처리를 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내가 주도를 했다. 회사는 팔려 2005년 8월에 민사장님은 결국 공장 문을 닫았다. 완전히 정리한 하루 전날 사장님과 경주 보문단지에서 홍어 삼합을 시켜놓고, 대낮부터 동동주를 취하도록 마셨다. 사장님은 모든 것이 허무한지 “인생무상이다”를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알게 모르게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리고 사장님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시며 내 손을 잡으셨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하며, 이번 경험을 계기로 프리랜서로 뛸 작정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15. ‘프리랜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조선업을 자랑했던 브라질이 조선업을 오랫동안 접은 뒤 본격적으로 조선업에 회귀하기 위하여, 3개사가 연합하여 리오데 자네이로에 업무추진을 위한 사무실을 개설했다는 내용이 최근신문지상을 통하여 핫이슈로 떠올랐다. 또한 한국, 일본, 중국으로 부터 조선기술을 전수 받을 목적으로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현재는 중국 다롄에 결집해 있는 조선회사와 접촉중이라고 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의 해저파이프 제작 및 설치 전문 업체인, ‘Y 엔지니어링’과 프리랜서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일단 타진했다. 업체 사장은 현대중공업의 중역 출신이었으며, 운영하는 공사자체의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아 많은 이익을 도출하고 있는 회사였다. 기술비서 시절부터 잘 알던 분이었다. 외국을 상대로 하는 프리랜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첫째가 인성을 겸비한 추진력과 끈질긴 영업력이 있어야 했고, 두 번째는 조선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설계능력 및 현장경험이 풍부해야하며, 세 번째는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과 분위기에 따라 탁월한 유모감각도 소유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안들은 프리랜서들이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보루였고 당연한 능력이어야 했다. 그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고 4년을 봉급쟁이로 묵묵히 뛰어왔었던 터라, 프리랜서로의 시도는 주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Y 엔지니어링 사장은 적지 않은 연봉을 제시하며, 회사 중역으로서 근무해 줄 것을 거듭 권장하였고, 특히 현재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는 동남아 시장을 관리해 줄 것을 제안했다. 나에 대한 배려였었다. 그러나 나의 결심을 끝까지 번복하지 않았다. 프리랜서로서 기여하겠다는 뜻을 굽히지도 않았다. 사장도 나의 고집에 결국에는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나에 대한 금전적 문제는 별도로 영업성과에 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며칠 후, 인천 공항 로비에서 나를 비롯하여 국내3개 팀이 건설관련 사람과 더불어 브라질 기술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명함도 서로 주고받았다. 6명의 브라질 인들은 나이가 지긋한 60을 넘긴 분들이었고, 전부가 조선전공 공학박사였다. 협회에서 이들과 미팅 스케줄을 조정했다. 나를 제외한 두 팀은 대불산업단지에 적을 둔 조선관련 엔지니어링 회사였다. 스케줄은 쉽게 결정이 되었다. 대불에서 20일, 울산에서 20일로 확정이 되었다. 대불단지에서는 6명중 2명이, 2명은 울산에서, 나머지 2명은 일본 담당이었으며 이들은 서로 인사만 나누고는 일본으로 떠났다. 각종 필요 공장의 위치 및 규모. 건축물의 동선. 도크의 위치와 규모의 위치표기와 향후 설립예정인 조선소의 차량 진입로와 자재창고 및 사무실. 화장실. 골리앗 크레인 2개 등. 이 부분은 각 팀이 임의대로 수정을 할 수가 없는 이미 고정화 된 위치였다. 기외로 실지 생산품을 만드는 ‘Lay-Out Arrangement’는 각 팀이 20일 만에 끝내어야 하며, 그 결과에 의한 최종 업체 결정은 브라질 팀에서 별도 통보하는 것으로 했다. 단지, 도면 오른쪽 하단에 연간 시공할 선박 종류와 척수, 선박 선형과 구조 등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백지로 된 부분이 각 업체가 아이디어를 내어 실질적인 ‘Lay-Out’을 제시해야 하는 중요 부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세계 최고의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에서 생산설계만 18년을 했던 경력과, 사장님을 모시고 7년간을 매일 전 현장을 샅샅이 둘러보았던 경험은, 선박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덧붙여 서술하자면 현대중공업은 선박을 건조하는 모든 작업은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어, 자기 분야가 아니면 전혀 모른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의 기술비서로서의 현장경험은 선박의 상세한 구조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준이 아니었으나, 7년간의 현장경험은 현재 브라질이 요구하는 초기단계의 도면작업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다.
브라질인 2명을 대동하여 바로 울산으로 내려와 ‘Y 엔지니어링’ 사장에게 이들을 소개를 하였고, 이들이 사용하게 될 사무실은 별도로 마련해 주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사장실 안쪽에 또 다른 집무실이 있는 곳을 사용토록 배려를 해주어, 제도 책상과 최신식 자동 제도기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설계담당자 중 기능이 우수한 한사람의 보조기사를 내게 붙여주었다. 설계는 한마디로 정확한 공장의 종류와 위치, 크기(공장의 길이. 높이. 출입구 크기와 위치 등)를 표시해주는 계획 설계였기 때문에 철판을 자르기 시작하는 공정부터 선박 진수 전 공정을 ‘U’자 형태로 만들어 군더더기가 없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설계를 했다. 2명의 브라질인 들에게 최고급 호텔과 뷔페식 식사를 포함한 별도의 스케줄을 마련 완벽한 예우를 했으며, 토요일엔 직원 2명이 안내하여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를 견학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들은 얘기만 듣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많이 놀랐다고 했으며, 브라질에도 현대차가 많이 있다고 은근히 토를 달았다. 나를 보조해 주는 기사와 더불어, 20일 동안을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하는 사투를 벌렸다. 이들은 도면 내용과 성실한 작업 자세에 세계최대 빈국이었던 나라를 불가 20여년 만에 자원이 전혀 없는 불모의 땅을 일으킨 한국인을 보았으며, 밤을 세워가며 일을 하는 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들이 출근 시에 제도책상위에 두 팔을 대고 엎드려 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것이다. 자기들은 꿈도 꾸지 못할 감동이었다고, 레이아웃 도면이 끝난 뒤 술자리에서 이들은 화제로 삼았다. 며칠 후 내가 그린 도면에 대한 브리핑을 브라질의 6명과 당사 사장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 그리고 설계요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되었다. 6명의 브라질 인들은 조목조목 질문을 하였고,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바로 답변을 해 주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이들은 박수를 치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브라질말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따봉을 연발했다. 그리고 당사 사장님은 “Mr Lee는 현대중공업 사장님의 기술비서였다”고 은근히 나를 치켜 올렸다. 대덕, 일본, 울산 팀과 합류한 브라질 인들은 3일간의 도면검토 및 자체 협의 끝에 결국 프로젝트는 ‘Y 엔지니어링’으로 결정되었다.

16. 브라질에 가다.
나를 보조해 주었던 설계기사와 2명의 기술요원을 데리고 최종 검토를 위하여, 난생처음으로 지중해의 해변을 물고, 그 유명한 ‘구세주 그리스도’가 산 정상에 서 있는 리오데 자네이로를 향하여, 중간 기착지인 프랑스에서 머문 여섯 시간을 포함하여 총 20여 시간을 날았다. 브라질은 한국과의 시간격차가 12시간이었다. 공항에는 의전 팀 2명과 브라질에서 10여 년을 거주한 현지 한국인 통역사가 우리들을 맞았다. 이들은 백사장을 마주보는 해변의 최고급 호텔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호텔 앞 ‘리오 꼬빠까바나’란 이름을 가진 모래 해변은 수많은 남녀들이, 지극히 작고 아슬아슬한 수영복을 입고 왁자지껄 대며, 이따금 철석거리는 파도소리에 뒤섞여 환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 년 내내 덥다는 브라질은, 땀이 많은 나를 헉헉거리게 만들었다. 도착 다음날부터 브라질 프로젝트 팀과 우리 요원들은 시내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본사 직원들이 요구하는 수정사항을 검토하고 의견을 교한 한 뒤, 기본 방향을 결정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 우리 팀은 세계 7대 불가사이의 하나인 700m 높이의 ‘코르코두바 산’ 정상의 ‘구세주 크라이스트’를, 밤에 보는 것이 절경이라고 본사에서 귀띔을 해주어 일단 오후에 택시를 타고 올랐으며, 양손을 펼치고 인자한 모습을 띤 거대한 그리스도를 마주보며, 나는 무릎을 긋고 화살기도를 바쳤다. 그러고 사방을 둘러본 뒤 택시를 타고 숙소 앞 해변에 내렸다. 어둠이 짙어지자 푸른색의 야광을 입힌 그리스도가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떠다니며 마치 움직이는 듯한 모습은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브라질 하늘에 떠있는 ‘지저스’를 본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고, 평생을 잊을 수없는 감격이었다.
이틀을 쉰 뒤 18일간의 강행군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1차부분의 기본설계만 마쳤다. 본 설계는 향후 브라질 자체 검토 후 울산으로 이상 유무를 통보하기로 했다. 장시간 소요되는 기본설계의 마무리는 3개월 뒤에 완료하기로 했으며. 5개월 후 부터는 상세설계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모든 필요 사항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우리 팀은 일목요연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사항은 브라질에서 자체 검토 후 문제점은 별도로 우리에게 통보하기로 했다.
팀원들은 난생처음으로 비즈니스 석에 오르는 특급대우를 받으며, 프랑스에서 대한항공으로 바꾸어 타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했다. 업무 스코프는 차후 브라질에서 검토 후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며칠 후 ‘Y 엔지니어링’에 대한 프로젝트 비용이 브라질로부터 날아왔다.

17. 프로젝트의 붕괴.
좋은 일엔 마가 낀다고 했던가!
사장이 긴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브라질에서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전면중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비보였다. 내용은 50%의 지분을 가진 회사에서 다른 프로젝트에서 금전적 문제가 크게 발생이 되어 손을 털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프로젝트 자체가 깨어져 버린 것이었다. 6년간의 일거리가 삽시간에 날아가 버렸다. 앞이 캄캄했다. 당황스러웠다. 허망하기도 했다. 나는 급히 자세한 내막과 문제의 실상, 그리고 향후 계획을 알아보기 위하여 리오데 자네이로를 향해 급히 날아갔다. 이미 사무실은 비어있었고, 주인 잃은 집기들이 여기저기 너절하게 놓여 있었다. 건물 관리사무실에서 프로젝트 팀이 어디로 옮겼는지를 물었으나, 어깨를 으스대며 자기들은 아는바가 없다고 했다. 프로젝트 자체가 깨어졌다고만 알고 있었다. 계속 수소문을 하였으나, 프로젝트 팀 자체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나는 서로 주고받았던 명함 중 리드 격이었던 한 분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이 통화가 되었다. 그분은 흔쾌히 만나자고 했다. 우리 팀이 묵었던 ‘포르토산파울로’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아쉽게도 결론은 프로젝트 자체가 완전 무산되었음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그분은 연신 면목이 없다고 고개를 계속 숙였다. 난 할 말을 잃었다. 그분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손을 잡았고, 향후에도 다른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꼭 연락을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는 발길을 돌렸다. 거대한 프로젝트가 누더기가 되어, 확실하게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허무했다. 황당하기도 했다. 한동안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무산된 사실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기 위하여 몸과 정신을 새로이 가다듬어야 했다. 2002년 8월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다. 브라질 프로젝트는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입혔으며, 상상외로 나를 흐느적거리게 만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다.”란 말이 머리를 짓눌렀다. 몹시 피곤했다. 좀 쉬고도 싶었다.

18. 천지개벽 의 도래.
사건이 터진지 4년이 지난 2005년 12월 29일, 이미 습관화 되어버린 부채상속에 관한 새로운 기사거리가 있는가를 컴퓨터를 열어보던 중에, 상속한정소송 민법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며, 서울지법 민사항소6부는 헌법재판소의 직권으로 위헌제청을 하였다는 깜짝 놀랄만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나와 똑 같은 경우에 고통을 받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1998년 5월 27일 이후와 그 전으로 나누어 1998년 5월 26일 이전에 상속개시를 안 경우 개정민법의 소급적용을 제한함으로써 차별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합리적인 헌법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며, 개정민법규정의 소급효를 1998년 5월 26일 이전에 상속개시를 안 상속인들의 경우까지 제한 없이 인정해야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에 따라 2차 개정된 민법(2005년 12월 29일)은, 개정 전 민법의 부칙에 제4항을 신설하면서, 그 제1호에 1998년 5월 27일 이전에 상속개시가 있음을 알았으나, 한정승인 하지 아니한 사람은 개정민법의 시행일인 2005년 12월 29일로 부터 3개월 이내에 신고할 것을 발표했다. 국회가 엉터리 같이 만든 민법조항을 깨부수는 결정을 헌법재판소가 과감히 시행했던 것이다. 나는 대구 사건담당 변호사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변호사는 내 얘기를 듣고는 알겠다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오후 4시 쯤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음 해 2월 28일까지 울산지방법원에 제출하면 되고, 제출 방법은 법무사 사무실에 가면 알아서 해주니까 염려 말라고 했다. 온몸이 짜릿한 흥분과 환열이 뒤섞여 회오리를 쳤다. 그러나 ‘상속특별한정승인’을 법원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기 전까지는 가능성만 비쳤을 뿐이고, 구제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자괴에 빠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대한 심한 정신적 불신의 찌꺼기들은, 수년간에 걸쳐 온통 가슴에, 머리에, 얼굴에, 처절하게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시린 눈물이 눈시울에 주체할 수없이 흘러내렸다.
2006년 2월 13일 ‘상속특별한정승인’을 국세청의 아버지 재산상속내역 및 사건내역을 첨부하여 울산지방법원에 속달로 띄웠다. 이제 고한의 바위 덩어리를 짊어지고, 남은 평생을 시름에 찌들어 무겁게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기사회생하여 환희의 눈물을 펑펑 흘릴 것인지는, 오직 신의 심판만을 기다려야할 따름이었다. 서류를 보낸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울산지법으로부터 통보가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서류가 판사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까? 혹시 유실되어 접수되지가 않은 것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체국에 가서 발송되었는가를 재확인을 했다. 분명히 발송되었다고 했다. 한정승인을 제출한지 73일 만인 오후 3시 쯤, 나는 도장을 들고 현관으로 집배원을 맞으러 나갔다. 울산지방법원에서 등기가 온 것이다. 극도의 울렁증에 휩싸였다. 언제부터인가 생겨난 습관성 불안감이었다. 집사람은 걱정스런 얼굴로 아예 눈을 감고, 성호만 계속 긋고 있었다. 천천히 상처 난 딱지를 떼 듯 조심스레 울산지방법원이라고 굵게 쓰인 하얀 봉투를 뜯었다. 쿵쿵대는 디딜방아 소리가 심하게 온몸을 때렸다.

울 산 지 방 법 원 심판사건 : 2006느단 2** 상속특별한정승인
청구인 : 이 우영. 이 WJ. 이 SH. 이 JH
피상속인 : 망 이 JB. 1998. 4. 6. 사망
신고일자 : 2006. 2. 13.
주문 : 청구인들의 피상속인 망 이 JB의 재산상속을 함에 있어 별지 상속 재산 목록을 첨부하여서 한 한정승인 신고는 이를 수리한다.
이유 : 청구인들의 본 사건 청구는 모두 이유가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1. 상속재산 : ‘없음’
2. 채무금 : 원고 파산자 대구삼보신용협동조합의 파산관재인 예금보험공사가 피상속인을 상대로 제기한 대구지방법원 2002가합4***손해배상(기)사건의 청구금액 금 5,042,250,000원.
2006년 4월 24일 판사 이 HB.
질퍽거렸던 ‘통한의 늪’에서 4년간을 허우적대다가, 천리를 간다는 매화 꽃향내가 흩날리는 4월의 넓은 초원으로, 힘차게 한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또한, 2002년 4월과 2006년 4월이 극과 극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신은 약한 자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승리의 노래가 심포니오케스트라에 의해 상속채무의 올가미에 걸린 나와 모든 이들을 위하여 우렁차게 팡파르를 터트린 것이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집사람은 안방으로 달려가 방바닥에 주저앉은 채 침대에 머리를 대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건이 터졌을 때 몇 날 며칠 혼을 놓고 울던 집사람을 보다 못해,
“나를 믿고 다시는 울지 마라”
크게 한마디 했었더니, 4년 동안 이를 악물고 참았던 눈물을 눈물샘이 다 마르도록 쏟아 내려나 보다.
“그래 옳거니! 이제는 울고 싶으면 맘껏 울게. 그리고 그동안 고통으로 어둡고 찌들었던 세월들은 모조리 내쳐버리게!”
허탈! 오직 허탈! 그 자체였다.
“천주여! 상속특별한정승인이란 단지 여덟 글자를 내리기 위해 이렇게 긴 세월을 물질적, 정신적, 질곡의 구렁텅이로, 나와 나의 가족들을 밀쳐 넣어 시험에 들게 했단 말입니까? 정녕 그리 했단 말입니까? 누구를 붙들고 이 억울함과 고통에 찌들었던 세월들을 하소해야 할 것이며, 뼈가 어스러지는 아픔들은 어떻게 치유해야 합니까? 생전 겪어보지 않았던 삶들은 어찌해야 되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심적 고통으로 썩어버린 가슴은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말자! 그냥 허허거리자! 아버지에게 불효막대를 저지른 나의 업보였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천주님의 시험에서 벗어났음을 오히려 감사 또 감사를 드리자.”

19. 반전의 시작.
향후, 재판에서 책임질 일은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인생파탄의 엄청난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상속특별한정승인으로 상속채무 문제는 해결이 되었으나, 그 외의 변화되어버린 모든 것들은 2002년 4월 이전으로 되돌릴 수도, 또 치유도 될 수 없는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설사 그렇다 하드라도, 극적인 삶의 터닝 포인트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 까맣게 지워진 가족들의 웃음만은 반드시 되찾아야만 한다. 내게 주어진 책임과 소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통회하고, 세상을 원망했던 비틀어진 심성의 편린들까지도 모조리 내쳐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정녕 시급한 일은 지긋지긋한 염세적 우울증이 켜켜이 묻어있는 전셋집으로부터 탈출하여 항시 음울하게 만들었던 그곳에서,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 오랜 세월동안 정서적 불안감이 고착되었음을 통감하고, 이를 씻어내어 삶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라도, 필히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낯설게 느껴졌던 주변의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처럼, 이제야 우리도 다시 사람 사는 짓을 해봐야겠다.

흡사 거짓말 같은 좋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작은 딸애가 국책은행인 IBK(중소기업은행)에 무려 팔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본사 기획부에 입사하는 쾌거로 우리 가족들에게 또 하나의 웃음을 선물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미 ‘상속특별한정승인’을 받아 재판 결과와는 무관하게 면책이 되었지만, 항소했던 재판이 예상했던 대로 여타 피고인 모두가 패소되었다는 내용의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황한 판결서가 2006년 5월 7일에 날아왔으며, 전 피고인들은 원고가 제시한 소장 내용 그대로 확정 판결이 선고 되었고, 연 20%가 가산된 금원을 변제하라고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건에 대한 판결문 뒤에는 피고인들 중 유일하게 다음과 같은 자그마한 단서가 붙어있었다.

한정승인 항변
“피고 이 우영. 이 WJ. 이 JH. 이 SH는 상속을 한정승인을 하였으므로, 이 JB로부터 상속받은 재산범위 내에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울산지방법원 2006느단***호로 상속한정승인을 하여 2006년 4월 24일 수리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상기판결에 대한 일체의 책임이 없음을 심판한다.”
아버지 부채상속 소송건의 완벽한 타결의 끝자락을 본 것이었다.

20. 새로운 둥지를 틀다.
가족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동남으로 바라보고 있는, 2007년 11월의 국수봉 산자락은, 일찌거니 겨울나기에 들어가 봄철 내내 먹을거리가 되어 주었던 엉겅퀴. 칡. 쑥 들이 바닥에서 비틀려 다가오는 봄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가 비스듬히 서산을 넘실대는 무렵의 포근한 볕살은 꽁다리만 남긴 채 안쓰럽게 누운 논바닥을 쓰다듬었고, 진작부터 산촌의 청청하던 수목들의 잎들은 누런색으로 퇴색되어, 매년 되풀이되는 겨울맞이 행사에 곤욕을 치루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푸름을 잃지 않았던 청솔과 동백만은 불어대는 바람결에 거드럭거렸다. 오후 4시쯤이면 해는 서쪽 국수봉 봉우리 끝에 살짝 걸려, 그림자가 반쯤 우리 집 마당을 뒤덮는다. 부친 사건 당시 친한 이에게 등기해 주었던, 울주군 척과리 국수봉 산자락에 있던 300평 땅을 재판에 패소하드라도 딸의 재산은 법적으로 손댈 수가 없다고 법무사가 일러주어, 2004년 5월에 큰딸 앞으로 등기이전을 하였고, 상속특별한정승인을 득한 후 2006년 9월에 집사람 앞으로 32평 철골조 패널 집을 지어 전셋집에서 이사를 했던 것이다. 젊을 때 꿈이었던 전원주택을, 우리 땅에 아예 지어버렸던 것이다. 대학전공이 건축인 나는 현대중공업에 들어오기 전에 설계사무실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우리 집을 직접 설계를 했다. 방부목재로 된 덱(Deck) 모서리에는 집사람이 세운 작은 성모마리아의 고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더더욱 박수라도 쳐주어야할 일은 이 행위자체가 집사람이 오랜 시간동안 고통에 휘몰렸던 정신적 죽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소생했다는 의미의 소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산자락엔 우리 집까지 달랑 세 채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벽돌집 주인 영감님이 2개월 전에 돌아가셔서, 칠순 할머니 혼자서 서럽게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백 미터 아래로 옹기종기 웅크려 앉은 삼십 여 채의 이락이 가슴 가득히 안겨, 시골 풍경의 심상을 불러 일으켜주었다. 나는 평상시와 달리 일찍 송정암 길을 올랐다. 당뇨를 5년이나 달고 있는 터라, 아침저녁으로 어김없이 산을 오르며 혈당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괄목할 만한 일은 산골로 이사 온 이후로, 혈당치가 거의 정상치로 돌아와, 제2당료인 나는 운동요법이 최고라는 의사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젓가락질이 힘들었던 오른쪽 엄지 검지도 벌써부터 호전이 되어 간단한 못질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송정암에는 나와 말벗인 사십대 중반이 갓 넘었을 법한, 법호가 ‘자산’인 잘 생긴 스님 한 분이 계셨다. 온화한 얼굴에는 풍성한 햇살처럼 항상 자비심이 넘쳐났고, 볼 때마다 다소곳이 합장을 하며 웃는 그 모습이 참으로 푸근했다. 숲길은 본래 인적이 드문데다가, 오늘 같은 주말에도 등산객의 발길조차 뜸했다. 그러나 불자들의 도움으로 내년 봄에는 사찰공사가 착공이 될 것 같다는 스님의 얘기가 얼마 전에 있었다. 송정암 길은 쉼 없이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울창한 숲마저 없다면, 절의 한량한 모습 때문에 나의 발길은 주저할 지도 모르겠다. 30분쯤 올라가면 도무지 절 같지 않은 송정암이 모습을 나타낸다. 벽체는 조립식 패널로 엮어 놓고, 지붕은 진갈색의 아스팔트 싱글로 덮어 놓았다. 세 갈래로 너울너울 달아놓은 색깔이 바랜 연등조차 없었다면, 아무도 절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님은 만행 중인지 보이질 않았다. 축대에 피어난 개망초 창백한 꽃이 쑥부쟁이, 코스모스, 구절초 따위의 가을꽃 속에서 용하게도 11월이 다 가도록 시들지 않고 굴기를 위한 몸부림인지 바람에 살랑살랑 되니, 내 인생과 너무나도 닮아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몹쓸 어제가 바람처럼 흘러서 간다.

21. 대부님.
방부목재로 된 24계단을 올랐다. 누군가가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 덩치가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엷은 우유 빛 격자무늬 거실 창은 집 안과 밖의 밝기 차이로, 모든 형태를 어슬핏하게 보이게 한다.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이 붙어버렸다. 10년 전에 회사의 부도로 울산에서 야반도주를 했던 대부님이 눈에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 말문을 닫은 채 움켜진 도어 록에 힘만 주고 있었다. 대부님은 찻잔을 앞에 둔 채 일어서서 빙거래 웃으며 가볍게 내손을 잡았다.
“데니스! 정말 오래간 만이야. 놀랐지! 불쑥 찾아와서.........,”
데니스는 대부님이 지어주신 나의 영명이었다. 차림새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6척 거구에 호남형의 잘생긴 얼굴이 햇볕에 약간 타버린 모습이었고, 세월은 어쩔 수 없는지 눈가에는 제법 굵은 손금 같은 주름이 육십 중반의 노인임을 말해 주었다. 대부님은 현대중공업에서 36년을 근무를 한 뒤, 1996년 10월에 상무로 명예퇴임을 하셨다. 퇴임한 그 해에 평생을 모아 갖고 있던 시가 20억 상당의 5층 빌딩과 울산의 요지에 있는 48평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바로 다음해인 1997년에 IMF가 터지는 바람에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은 자금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창업 한지 3년 만인 1999년 8월에 부도가 났으며, 집이며 공장이고 간에 소유하고 있던 전 재산까지 깡그리 날려버렸다. 끝내 다 막지 못한 빚을 견디지 못하여 맨몸으로 아무도 모르게 울산을 떠났던 것이다. 대부님은 내가 현대중공업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바람 곁에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왜 회사를 사직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건을 대충 요약하여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지금은 중소기업 부사장으로,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쉬고 있다고 했다. 대부님은 한 숨을 쉬시며, 왜 다들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어쨌든 대부님이 불쑥 나타나신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대관절 어찌하고 계신지 몹시 궁금했다.
“그 동안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네.”
말씀하시는 중에 눈초리가 약간 쳐졌다. 부도로 수배가 된 상태라 고향인 대전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디 갈 곳도 마땅치가 않아, 큰딸이 있는 이천 근방 시골에 마침 빈집이 있어, 월 쌀 한가마 값을 주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공소시효가 끝날 때 까지는 일체 외부와의 연락도 끊었다. 생활은 소일거리라고는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일과 본인으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겼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고해하는 심사로 성서 필서를 매일 조금씩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종교의 힘으로 인고의 세월을 견뎠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다. 대부님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 길고 긴 역경의 세월을 채 일각도 안 되어 얘기의 끝을 내었다. 자랑거리도 아닌 기억의 아픔을 미주알고주알 곱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님은 넓은 마당이 있는 창밖을 허허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망각하고 싶은 과거는 일부러 지우려 해도, 마치 말 궁둥이에 각인된 불도장처럼 가슴에 영원히 남는 법이다.
“자세한 얘기는 앞으로 얼마든지 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다음에 하고, 자네를 애써 찾아온 이유는 중국 다롄에 같이 들어가자고 왔네.”
10년 만에 나를 찾아 왔을 때 무언가 도움을 청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중국에 같이 가자는 얘기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제야 대부님이 주신 명함을 보았다. 앞뒤로 한자와 영어로 새겨진 명함에는 ‘코스코’의 생산관리실 총경리로 되어있었다. 코스코 그룹에서 운영하는 여섯 개의 수리선 회사를 신조와 동시 운영하는 체제로 전환했으며, 지금은 조선이 사상유래가 없는 최대 호황이라, 아무래도 수리선 보다 신조를 하는 편이 채산성이 훨씬 좋을 것으로 판단되어, 일부 수리선 조선을 아예 신조 도크로 바꾸었다고 했다. 더군다나 신조로 전환한지가 불과 2년이 채 되지 않아, 타 조선사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서는 지금과 같은 경영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이었고,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이 필요했으며, 이에 따른 절실한 숙제는 개혁을 주도할 전문가를 ‘코스코’ 자체뿐만 아니라 중국의 어디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유경험자를 찾아야할 문제가 절실했던 것이다. 코스코 그룹 총수가 세계 최고의 조선사에 근무했던 송 총경리를 통하여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기술자에 대한 자문을 했고, 현대중공업에 재직 시 내가 주도했던 기술비서란 직책이 바로 개혁안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 당시 상무이사로 계셨던 대부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 대한 대우는 놀랄 정도라고 했다. 어쨌든 모든 궁금증은 미흡하나마 풀렸고 나의 결심만 남았다. 나는 국내도 아니고 해외에 장기간 근무는 현재 여건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집도 세 채 밖에 없는 이 산골에 집사람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고, 설사 데리고 간다 하여도 빈집을 둘 수도 살림살이 때문에 세를 줄 수도 없다. 나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은지라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중히 거절을 하고, 그 대신 유능한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라는 둥, 개혁을 주도했던 경험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개혁분야에서는 엑스퍼트라고 총수에게 이미 보고가 되었고, 데려오지 못하면 중국 땅을 밟지 말라는 오더를 받고 왔다고 심각하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3개월 마다 8일간 휴가를 쓸 수 있으니, 그 때 울산에 오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집사람과 상의를 해 보겠다고 했고, 저녁에 회포나 풀자고 하여 시내에 있는 T호텔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내려가셨다. 대부님이 가시자마자 집사람이 먼저 잠깐 얘기하자고 하면서, 내 앞에 앉아서는,
“제 생각에는 당신이 중국에 들어갔으면 해요.”
아마 귀동냥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대우가 놀랄 정도라는 소리에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테고, 넉넉지 못한 살림에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적막강산에 여자 혼자 몸으로 어떻게 지나려고?”
“대전에 있는 윤우네 가서 있으면 돼요. 2주나,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오면 되고요. 빈집을 둘 수는 없으니 환기도 시키고 보일러도 가동해 습기도 제거할 겸 말이 예요. “
10개월 된 외손자를 돌보며 큰딸이 있는 대전 유성에 가서 있겠다는 것이다. 큰딸은 2005년 10월에 결혼하여 대전의 대덕단지에 있는 ‘ETE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이고 박사인 남편을 따라 유성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사람은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자고 했다. 사실 대부님의 중국행 제안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구원을 주는 주님의 계시였다. 어쩌면 의외로 빨리 웃음을 되찾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집사람의 감사기도 소리는 헬륨을 가득채운 애드벌룬이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바람 나게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활짝 핀 집사람의 메리골드 닮은 얼굴을 보니 너무나도 좋았다.

22.다롄.
2008년 2월 20일 오후의 중국 다롄은 혹한이었다. 스모그인지 황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늘까지 온통 잿빛으로 뒤 덮여 있어, 초행길로 예민해진 가슴은 하늘을 똑같이 닮은 듯했다. 이백여 명의 승객들은 체크아웃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공항은 발자국 소리와 캐리어 바퀴소리로 생기 넘치는 소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환영객 속에서 대부이신 송 총경리께서, 나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반가움으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C. S. GROUP이란 영문이 크게 장식된 쥐색의 미니버스에 올랐다. 10차선 도로를 물고 대규모의 광장을 품은 대다수 건물들은, 다양하고 멋진 모양의 디자인으로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계 500대 그룹에 속한 코스코 그룹 본사는 화강석으로 된 묵직한 건물이었다. 미니버스는 두 명의 국방색 유니폼을 입은 정문경비의 절도 있는 경례를 받으며, 넓은 대리석 마당을 지나 자동회전문 앞에 섰다. 로비 안의 정면에는 한자로 된 뉴스가 초대형 스크린에 쉴 사이 없이 방영이 되고, 화면 아래쪽엔 영문 자막으로 된 코스코의 뉴스가 아주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베이지색 바탕에 영문으로 C. S. GROUP이란 붉은색 글자가 왼쪽 상부 가슴에 새겨진 세 명의 여사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곁눈질하며 송 총경리께 까닥대며 인사를 한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자유스러운 중국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짓게 만들었다. 숙소는 본관 뒤편의 건물로 본관과 2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내가 기거할 곳은 6층 건물의 3층이었다. 주방에는 필요한 전자제품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고, 세탁기와 냉장고는 한국산 S브랜드 제품이었다. 제법 큰 방 두 개에 거실 화장실이 상당히 크고 고급스런 내부를 가졌으며, 별도의 작은 샤워시설을 겸비하고 있었다. 캐리어속의 짐들을 하나하나 필요한 곳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욕조에 더운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근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새삼 흘러간 몹쓸 어제가, 또다시 머리를 뒤 흔든다.

23. 개혁의 팡파르.
다롄에 온지 어느 듯 3개월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신조 세 개의 조선사를 20여 일간의 출장을 통한 기업진단을 했으며, 이에 따른 문제점을 발췌하였고, 개혁에 필요한 분야별 실천 방안을 결정하여 회장의 재가를 받은 후, 오늘 화상회의실에서 발표하게 되었다. 개혁은 획기적인 기술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즉! ‘Paradigm Shift’, 사고의 틀을 아예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사고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인간은 과거에 해 왔던 생각과 행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거나, 변화하는 자체를 싫어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Top Down’방식에 물들어 있는 사회주의 국가인 이들이, 과연 유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과거에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을 과감히 바꾸어 버린다면 생산성은 실효를 가져오게 되지만, 만일 일의 방식. 방법. 행위에서 완전히 일탈하지 않으면, 개혁은 선언적 의미로 끝나거나 구호로만 그치게 된다. 개혁이란 새로운 생각에 의한 적극적이고 과감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5월 8일 금요일 오전 7시 50분, 코스코 본사 화상 회의실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룹회장인 ‘판 총수’를 비롯하여 각 부서 책임자와 경리급 이상 간부, 나의 전속 통역인 ‘미스 통’, 송 총 경리의 비서 겸 통역인 ‘미스 웨이’, 송 총 경리, 내가 신설한 개혁팀 6명을 비롯하여 25명은 숨을 죽이고 총수의 체제개혁선언의 포효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니터는 이따금 수리조선까지 여섯 개 조선사들의 무겁게 가라앉은 회의실 표정들을 비쳐주기도 했다. 성능 좋은 마이크로폰은 전 조선사의 노트를 넘기는 미세한 소리까지 잡아내고 있었다. 정확히 8시 8분에 화상회의는 시작된다. 중국인들의 숫자 ‘8’에 대한 집념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8의 중국 발음 ‘빠’가 발(發)과 비슷해 돈을 벌거나 재산을 모은다는 ‘파차이(發財)’의 뜻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중국인들의 ‘8’자에 대한 선호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쓰촨 성 청두 전화국이 실업자 지원기금 마련을 위해 실시한 전화번호 경매에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 ‘8’이 연속 들어가는 ‘88888888’이 233만 위안(한화 약 3억 5천만 원)으로 스찬 공항에 낙찰된 경우가 있었다. 또한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분에 시작한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화상회의를 주관하는 생산관리실의 상무부총경리가 정확하게 8시 8분에 개회 선언을 하는 순간, 모두들 ‘오성홍기’를 향하며 일어서자 ‘의용군행진곡’이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국가가 끝나자 바로 ‘판’ 그룹 총수가 마이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체제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 얘기를 했으며, 결의에 찬 의미의 뼈있는 말로 훈시 겸 체제개혁 선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옷을 벗고 나가라는 소리로, 전체간부들에게 일성을 고하며 개혁의 분위기를 이끌어내었다. 미스 ‘통’은 메모지에 ‘판’총수 얘기의 핵심을 내게 계속 한글로 적어 주었다. 이제 체제개혁안에 대해서 내가 설명하는 순서다. 왼쪽엔 나의 통역관인 미스 ‘통’, 오른쪽엔 미스 ‘웨이’를 두고 장장 총 4시간 정도의 분량을, 나는 짤막짤막하게 끊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스 통이 번역한 내용은 미스 통이, 미스 웨이가 번역한 것은 미스 웨이가 통역하였다. 자료를 주지 않은 상태로 브리핑을 하는지라, 중요한 관점이 발표될 때마다 다들 노트에 적는 모습들이 보였다. 처음부터 분위기는 사뭇 긴장의 연속이었다. 간부식당을 전부 폐쇄하고 종업원과 서로 대화하며 식사. ‘판 총리’를 비롯한 최고 간부급은 식사 후 별도 회합. 재고자재 및 장기간 방치된 잉여재는 전부 처분. 수리조선과 신조 조선의 완전 분리 및 조직의 재구축. 상하이에 있는 설계실을 다롄 본사로 이관할 것을 발표할 때는 웅성대는 소리가 심했으며, 설계실이 있는 상하이 쪽은 당혹함이 확연했다. 또한 비전의 제시 부분에서 능력위주의 인사관리. 성과급 지불. 특근 시는 임금 기준의 100% 지급. 주 5일째 원칙 고수. 분기별 생활 용품 지급. 우수팀 선진조선 해외 연수 실시. 특히 식당을 신속히 중축하여 종업원들이 3교대로 식사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공사 완료시까지 도시락을 지급하여 이리저리 앉아서 무질서하게 식사하는 일이 없도록, 시급히 개선하라는 발표에는 모두들 알게 모르게 머리를 꺼덕였다. 기외에도 일일 단위의 점검 및 중장기 계획까지, 쉬는 시간도 없이 거의 4시간이 넘도록 발표회는 계속되었고, 향후 3개의 수리조선을 제외한 세 곳의 조선소를 혁신 팀 전원이 방문하여 재차 필요한 토론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는 말을 끝으로, 체제개혁의 선포식과 개혁의 깃발을 우렁차게 흔드는, 개혁안 발표를 모두 끝냄으로서 코스코 그룹은 역사적인 개혁의 팡파르를 울리게 되었다. 개혁의 성공적 수행은 광범위한 종업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사회주의에 물든 이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시키어, 또 하나의 실험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함으로서 감동과 성취감의 짜릿한 경험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총수의 재가를 받고 발표된 체제개혁안은 이제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각 사의 최고 경영자들은 한손에는 따끔한 매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괄목할 만한 선물과, 격려의 말로 사기를 올려주어야 할 것이다.

24. 미국 발 금융 위기와 조선.
코스코 그룹의 개혁운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던 4/4분기부터, 좋지 않은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미국 부동산 시장의 버블붕괴가 전 세계를 금융위기로 몰아가고 있었고,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신청과 ‘메릴 린치’ 매각으로 인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구제 금융을 통해 적극적인 개입을 약속하고, 세계 각국이 공조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을 공포하고 있었지만,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다. 금융위기는 모든 산업을 공항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조선 산업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 여파로 물동량이 감소되고, 운임이 폭락했으며, 신조수주가 자취를 감추는 등 세계조선 수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일본, 중국의 조선사들은 초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초 올해 중국의 신규 수주 물량이 지난해의 절반가량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대폭 하향 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들을 했다. 발주한 선주들이 선박인도 시기를 늦춰달라는 요구는 무섭게 급증했다. 주문 취소나 선박건조대금 지불지연도 엄청나게 발생이 되고, 특히 발주가 취소된 것 중에 벌크선이 많아, 코스코 그룹의 타격이 매우 컸다. 코스코에서 생산하는 선종이 대부분 ‘벌크 캐리어‘가 주종이었기 때문이다.
12월 초에 총수의 구조조정에 관한 특별 담화가 발표되었다. 모든 경영은 신조선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수리선 체제로 돌아가며, 현재 건조 중인 선박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인도를 시키라고 했다. 세계가 선박수리 쪽에 온 정성을 모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인원을 삭감할 수밖에 없지만, 그 규모는 최소한으로 하겠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전 산업을 파국에 몰아넣었다. 예외 없이 코스코 그룹도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그 여파로 아쉽게도 내가 주도했던 개혁은, 성공의 틀을 맛보기도 전에 당분간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실질적인 휴면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개혁운동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며 자존심 강한 중국을 가르쳤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내 가슴 깊숙한 곳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코스코 그룹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물질적 풍요와 명예를 얻게 해주어 절망과 혼동으로 인한 정신적 핍박에 파열해 버렸던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해 주었다. 특히, 나의 가족들에게는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는 크나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단지 3악장으로 구성된 개혁이라는 이름의 오케스트라를 1악장에서 끝내어버리고 접어 둔 채, 최고의 개런티만 챙긴 꼴이 되어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바람이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글로벌 경제가 회복이 되고, 심해에 침몰된 조선 경기가 서서히 부상하여, 완성하지 못한 코스코의 개혁 성공이라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Epilogue.
세상사 만화경이다. 삶의 조각들을 집어넣어 돌리면 돌릴수록,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낸다. 청하지도 않은 불행이 느닷없이 나타나


ⓒ매일신문 - www.imaeil.com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