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열린 공간서 노인ㆍ젊은이 ‘동거동락’… 얼굴 붉힐 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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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노인들의 사회] <6>대화의 힘, 존중을 꽃피우다: 스웨덴ㆍ독일
# ‘코하우징’ 50여개소 마련

가구별 주거 공간은 따로 갖되

영화관ㆍ작업실 등 시설 공유하고

2주에 한 번꼴로 공동 저녁식사

세대 구분 없이 자연스러운 교류

#2030 젊은이들의 든든한 이웃

잠깐 외출할 때 “아이 좀 봐달라”

물건 고장 나면 “와서 고쳐달라”

페북 친구 맺고 옥상 즉석 티타임

노인들 “양로원 같지 않아 좋다”


지난달 11일 오후 소피룬드 코하우징 별채 옥상 테라스에서 30대부터 70대 노인까지 연령을 초월한 5명의 이웃이 샐러드와 빵을 나누어 먹고 있다. 소피룬드 코하우징에서는 즉흥적인 피카(Fikaㆍ스웨덴의 티타임)와 아파트 앞 정원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 등을 통해 세대간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북구의 여름이 시작되던 지난달 11일 오후 2시. 스웨덴 남부도시 말뫼에 위치한 소피룬드 코하우징(Co-housingㆍ협동 주거)의 공동 주방에선 백발노인과 갓난아이를 업은 젊은 여성 등 6명이 한데 어우러져 식사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5시 30분에 시작될 주민들의 공동 저녁 식사를 위해 이날 당번인 F팀이 모인 것. 팀 리더이자 소피룬드 코하우징 최고령자인 에바 뤼달(75)씨가 닭고기를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느릿하게 오븐으로 다가가자 옆에 있던 모텐 팜(40)씨가 재빨리 “제가 할게요“라며 쟁반을 옮겨 든다. 식사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30분. 50인분 식사를 준비하기에 빠듯했지만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이틀 전 일찌감치 뤼달씨가 이메일로 팀원들의 스케줄에 맞춰 재료 꺼내기부터 데우기, 채소 다듬기, 설거지 등 식사 준비 시간대별 세부 사항과 책임질 팀원을 정해 알린 덕분이다. 벌써 1년 넘게 손발을 맞춰온 노인과 청년이 뒤섞인 F팀 주민들은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웃음꽃을 피우며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광장과 공공장소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노인들이 정치적 편견에 휩싸이거나 비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에 내몰려 분노하고, 끝내 젊은 세대와 화합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 많은 전문가는 우리가 이토록 부정적인 노인의 이미지에서 헤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로 ‘대화의 부재’를 꼽아왔다. 이와 달리 말뫼 소피룬드 코하우징에서 만난 스웨덴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귀를 열며 너그러움을 드러냈다. 65세 이상 인구(약 201만명ㆍ2017년 기준)가 전체의 20.3%를 차지, 한국(14.1%)을 크게 앞서는 초고령사회 스웨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상이한 경험과 가치관이 걸림돌일 수 있지만 세대간 일상의 대화가 결국 ‘존중의 싹’을 키울 건강한 토양이 된다는 것이다.

소피룬드 코하우징의 저녁 식사를 맡은 F팀의 리더 에바 뤼달(75ㆍ왼쪽)씨가 메모지에 요리의 재료 정보를 적고 있다. 뤼달씨 뒤로 공동 주방에서 팀원들이 요리 준비에 한창이다.


노인의 지혜와 젊은이의 힘이 어울려


소피룬드 코하우징 F팀의 이날 임무는 여름휴가 시즌을 앞두고 냉장고에 쌓인 식재료를 최대한 소진하기였다. 뤼달씨가 이끄는 팀이 선택한 저녁 메뉴는 치킨과 쿠스쿠스(Couscousㆍ좁쌀 모양의 파스타), 카레. 팀원들이 여기저기서 “이 채소는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쿠스쿠스가 모자라진 않을까요”라며 걱정하자 뤼달씨가 “그건 샐러드를 만들면 된다. 치킨이 있으니 양은 괜찮을 것”이라며 안심시킨다. 노인의 지혜로운 리더십이 어떻게 집단의 톱니바퀴를 돌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금씩 음식 냄새가 피어나는 사이 뤼달씨가 완성된 요리 아래 붙일 ‘채식용’, ‘고기’, ‘알레르기 재료’ 등 각종 메모를 적던 중 휴대폰 알람음이 크게 울렸다. “에바는 주머니에 스타워즈를 넣고 다니는 것 아니냐.” 팜씨의 농담에 주방 팀원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세대와 인종, 가족 형태를 초월한 45세대 120여명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소피룬드 코하우징에서 노인은 이웃이자 동료 그리고 가까운 친구다. 공동 공간에서 취미 활동을 공유하고 2주에 한 번꼴로 공동 식사를 준비(미성년자 제외)하며 마주하는 동안 연령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서로를 공동체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이곳에서 분노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든 이유다. 이날 식사팀인 안나 오스트베리(42)씨는 “나이에 관계없이 코하우징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라며 “노인들이 물리적으로 힘든 작업을 하긴 어렵지만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레시피(요리법)를 배우고 함께 작업하는 게 즐겁다”라고 말했다.

코하우징은 자립적인 개인주택과 공동체의 이점을 결합한 주거 시스템이다. 현대적 개념은 1980년대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 시작돼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전역과 북미 등으로 번져 나갔다. 스웨덴 코하우징 협회인 콜렉티브후즈에 따르면 현재 스웨덴 전역에 마련된 코하우징은 50여개소다. 주거공간은 따로 갖되 여가 생활(영화, 음악 연주, 정원관리, 다용도실 사용)을 공유한다. 설계와 디자인부터 입주자들이 함께하고 얼굴을 맞댄 공동 식사와 각종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대화의 장에 녹아 드는 사이 자연스레 세대간 존중이 확대되는 구조다. 특히 스웨덴은 임차인들이 주택조합을 구성해 공영임대주택회사로부터 아파트 전체를 임대하는 공영임대주택 방식이 흔하다. 다른 국가들이 넓은 부지에 저층 주택 형태가 일반적인 것과 달리 아파트 형식이라 국내 도입도 고려해 볼 만하다.

코하우징의 열린 공간은 대화의 장을 만든다. 2014년 12월 시작된 소피룬드 코하우징은 5층 아파트(45세대)로 주거 공간은 1인 가구부터 최대 5인까지 살 수 있도록 설계됐다. 각자 자기 집 문 앞 복도에 의자, 테이블, 화분 등을 꾸며 놓고 휴식을 취하는 게 일상이다. 각 층은 하나의 복도로 쭉 이어져 있어 이웃끼리 지나가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 좋다. 1층과 5층에 있는 작은 영화관과 요가실, 악기 연주실, 다용도 작업실 등은 공동 취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아파트 앞 잔디와 옥상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친목 모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카자 뵈르에손(32)씨는 1층의 한 공동 공간을 소개하며 “운동기구를 놓자는 젊은이들과 베틀 짜는 기계를 설치하자는 노인들의 의견이 공존해 결국 한 곳에 두 기구 모두를 놓기로 했다”라며 웃었다. 소피룬드는 공동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점과 규모에 따른 월 임대료(한화 70만~200만원) 등 경제적 이유 등으로 대기자가 200여명에 이를 만큼 인기가 좋다.

스웨덴 말뫼 소피룬드 코하우징의 정원에서는 주말이면 다과회 등 각종 교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을 초월한 주민들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다. 소피룬드 코하우징 제공

젊은이는 친구를, 노인은 활력을 얻다


이날도 옥상 테라스에는 즉흥적인 피카(Fikaㆍ스웨덴의 티타임)가 마련됐다. 이란 출신 살레 하미드(36)씨가 직접 만든 피타(Pittaㆍ넓은 원형의 빵)와 샐러드를 제공하고 룸메이트 크리스티나 룬클린트(64)씨를 포함해 총 5명의 이웃이 참여했다. 60대인 룬클린트씨는 하미드씨, 아프가니스탄 출신 20~30대 젊은이 2명, 50대 스웨덴인 등 4명의 룸메이트와 한집에서 각자 방을 나눠 살고 있다. 모두 소피룬드를 통해 만난 사이다. 룬클린트씨는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룸메이트들이 나이 많은 날 배려해 집안일을 더 하겠다고 자청했지만 내가 가사를 분담하는 게 공평하다고 주장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라며 “서로를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로 여기고 돕고 있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베라 라스덴베르예르(74)씨는 “늙은 사람끼리 모여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이 있는지 묻는 게 좋겠나”라고 반문하며 “젊은이들과 이웃처럼 지내면서 사소하게는 식사 메뉴에 유기농 재료를 사용할지 등을 정하는 문제부터 이것 저것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늘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그를 위해 이웃 젊은이들은 식사 때마다 식당으로 부축해주는 등 도움을 주고 있다.

소피룬드에서 노인은 다가가기 힘든 존재가 아니다. 친인척으로 얽혀 있진 않지만 누구보다 물리적, 정서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2014년 입주해 3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에바 피어 뱅어(36)씨가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로 꼽은 이는 아랫집 노인 쿠트씨다. 뱅어씨는 “주로 집에 있는 쿠트씨는 우리집에 수리할 것들이 있으면 먼저 나서 친절하게 도와주신다”라며 “운동하러 갈 때 아이를 봐달라고 하는 등 도움을 청하거나 안부를 묻는 일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나이든 친척이라고 생각하면 되레 어려울 수 있지만 이곳의 노인들은 교류가 잦아 오히려 친구로 지내기 쉽다”라며 “이곳에서 자란 딸이 여러 세대의 이웃과 교류하는 방식을 배우는 점이 마음에 든다”라고 말했다.

2015년 2월 소피룬드 코하우징에 입주한 안나 칼손(왼쪽), 데니스 페르손 부부가 지난달 11일 집 앞 의자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다 보니 모든 일이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을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꾸준한 대화로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많지 않다. 2015년 2월부터 아내와 함께 이 곳에 살고 있는 데니스 페르손(69)씨는 “아파트가 개방형이어서 외부인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것에 대해 나이든 이들은 잠금장치를 설치하자는 입장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개방성을 중시해 그대로 두자는 의견이 부딪혀 회의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매달 1회꼴로 열리는 주민 회의에서는 아파트 유지 관리, 보안, 식당 등 다양한 안건들을 다수결로 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다수결 결정 방식을 보완하기 위해 주민들끼리 고민하다 미국의 코하우징 전문가를 초청해 자문을 구했고, 주요 이슈는 75% 이상 찬성을 얻어야 통과시키기로 했다.

다른 세대와의 만남은 이곳 노인들의 삶에 활력을 주고 있다. 페르손씨의 아내 안나 칼손(64)씨는 “나이 많은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양로원 같지 않나요”라며 “젊은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게 다른 노인과 대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이스북을 보고 여행 잘 다녀왔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묻다 보면 어느새 대화가 이어진다”라고 설명했다. 페르손씨는 “(세대간)교류라는 게 갑자기 잘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영화를 같이 보고 식사를 함께하는 등 작은 행위가 서로를 사람 대 사람의 관계로 볼 수 있게 이끈다”고 말했다.

말뫼(스웨덴)=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스웨덴 말뫼 소피룬드 코하우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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