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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 신안군

압해도

신해양도시를 꿈꾸는 행정 중심지의 섬

[ 押海島 ]

요약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에 있는 신해양도시를 꿈꾸는 행정 중심지의 섬으로, 총면적 48.840km2, 해안선 길이 81.9km이며 인구는 2,684세대, 5,992명이다. 섬의 지세가 삼면으로 퍼져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태라서 압해도(押海島)라 불렀다 하며, 낙지가 발을 펴고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위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면적 48.840km2
길이 해안선 81.9km
인구 5,992명(2,684세대, 2021년 기준)

압해도 개요

섬의 지세가 삼면으로 퍼져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태라서 압해도(押海島)라 불렀다 하며, 낙지가 발을 펴고 바다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압해도, 총면적 48.840km2, 해안선 81.9km, 세대수 2,684 인구수 5,992명이 살아간다. 압해도는 목포 북항에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다. 그동안 육지와 단절되어 있었던 압해도는 지난 2008년 6월, 8년 만의 공사 끝에 목포시 연산동과 압해면 신장리 사이 1,840m가 교량으로 이어졌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 책임지고 돈 끌어다가 목포까지 다리를 놓아불겄습니다." 국회의원들은 해방 이후 1대부터 19대까지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연륙교 공약을 했었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는데,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된 해인 2000년 5월 어느 날 압해도가 발칵 뒤집어졌다. 압해도라는 섬이 생긴 이래 최고의 경사가 일어난 것이다. 바로 연륙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날 이후로 압해도 사람들의 오래 묵은 꿈이 8년 만에 이루어져 드디어 목포와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의 기공식이 있었다.

사실 이 다리는 우선순위를 놓고 볼 때, 진작 놓여야 했을 다리였다. 진도나 거제도는 두 개의 다리가 놓였고, 압해도보다 더 먼 육지와 섬, 섬과 섬들 사이에는 거리가 멀어도 대부분 다리가 놓였다. 실상, 섬의 크기로 보나 인구로 보나 비중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압해도는 이상하게도 늘 다음으로 밀렸다. 그동안 비금도도초도, 안좌도팔금도, 자은도암태도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새천년대교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목포시에서 가장 가까우며 신안군의 요충지인 압해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다.

압해대교는 군 소재지인 압해도가 교통의 중심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중심부에 케이블로 경사지게 교량을 연결하는 닐센아치교 형태로 설계하여 조형미를 살린 연륙교이다. 국도 2호선으로 총길이는 3,563m이다. 이 가운데 해상교량이 1,420m이고 육상교량이 420m이며 접속도로가 1,720m이다.

압해대교

압해대교

압해대교의 일몰

압해대교의 일몰

압해도는 이제 배를 타고 가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섬이 되었다. 신안군민들의 숙원사업인 압해대교 건립을 두고 '신안군 발전의 호기를 맞았다'며 주민들은 크게 반기고 있다. 다리공사가 착공되면서부터 압해도는 부동산값이 치솟고 지역경제가 여러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목포에서 가장 가까운 섬 압해도, 북항에서 뱃길로 10여 분이면 닿는 압해도는 이제 뱃길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주민들의 말처럼 앞에 있으니 압해도란 말이 실감났다. 섬사람들에게 압해대교는 발전을 성큼 앞당기는 매개이자 신안군이 예전에 미처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예고하는 상징이 됐다.

지금은 연도교(連島橋)로 이어져 있는 여러 개의 섬들을 향하여 차도선에 차를 실어서 가고 싶은 대로 섬의 명소를 찾아갈 수 있다. 그동안 대부분 목포항에서 홍도와 흑산도, 제주도로 출발을 했고, 또 하나 새롭게 개발된 목포 뒷개의 북항에서 신안군의 대표적인 섬 비금도, 도초도, 안좌도 등 연안 섬들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북항에서는 새벽 6시부터 수많은 차들이 줄을 서서 섬으로 가는 배에 차근차근 오른다. 목포항과 목포 북항 외에 또 하나 주목받는 항구가 최근에 생겼는데, 그 항구가 바로 압해도 끝에 있는 송공항이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바라본 천사대교

압해도 송공항에서 바라본 천사대교

송공항에서 출발하는 배가 신안군의 암태도 오도항으로 들어가면, 다리로 이어진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추포도, 박지도, 반월도, 부소도 등 8개 섬들을 승용차로 돌아볼 수 있다.

압해도에 딸린 섬인 매화도와 병풍도, 소 · 대기점도의 많은 주민들이 이 송공항을 이용해 뭍으로 드나들고 있다. 새로운 해상교통의 관문이 된 이곳에서 배를 타면 시간절약과 요금절감 효과가 있다.

압해대교가 생기고 나서 그동안 목포시 북항과 압해도의 남쪽 끝에 있던 장감리 선착장 사이를 쉴 새 없이 운항했던 철부선들은 사라졌다. 대신, 압해도의 서남쪽 끝에 있는 송공항으로 옮겨가게 되어 송공항은 다른 섬으로 가는 관문이 되었다.

제 기능을 상실한 압해도 장감리 선착장에서 보면 목포를 상징하는 유달산과 목포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 섬 주민들이 뭍으로 나들이할 때 목포항보다 압해도 송공항을 이용하면, 목포 시내까지 진입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이전에는 목포까지 가는 뱃길이 최대 1시간 20분 이상 소요됐었는데, 송공항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압해대교를 경유하면 목포 시내까지 20분이면 닿는다. 압해대교만 건너면, 좌로는 서해안 고속도로, 우로는 최근에 개통된 목포대교로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송공항에서 신안군 숙원사업인 압해도와 암태도 간 새천년대교 건설도 진행되고 있다. 총길이 16km 가운데 순수 해상교량만 7km인 새천년대교는 압해도,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하의도, 장산도, 비금도, 도초도, 신의도 등 이른바 다이아몬드 제도를 잇는 교량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압해도는 징검다리 섬이며 보배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새천년대교 공사현장

새천년대교 공사현장

선착장, 물양장(物揚場) 등 중형 선박접안 시설을 갖춘 송공항은 연안항으로 지정되어 신안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해안 시대에 따르는 서남권 항만수요 폭증에 대비하여 압해면 서쪽 끝에 위치한 송공항이 연안항으로 지정되면서 안벽공사, 물양장, 선박접안 시설 등 각종 항만 기본시설 공사가 국고지원으로 추진된다.

신안군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비금도, 도초도 등 6개 면내 3만여 명의 주민들이 송공항을 이용함으로써 농수산물의 신속한 수송과 운항시간 단축으로 교통의 불편함을 덜고 경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송공항에는 선착장과 어판장을 비롯한 수산물 물류단지, 각종 어항 관련시설이 들어서 현재 목포 북항의 역할을 일부 대체하게 될 것이다. 송공항 개발로 압해도는 모름지기 신안군 섬지역의 관문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송공항은 신안군의 중심항이다 보니 늘 많은 사람들과 승용차들이 왕래해 대단히 북적대는 곳이다.

송공항 근처에 자리한 송공산은 높이 230m로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의 정상부분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축성된 산성의 흔적이 있다. 송공산의 정상은 동서남북의 수많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신안군 제1의 다도해 전망대이다.

송공산성터

송공산성터

압해도는 국도 77호선과 국도 2호선이 교차 통과하는 지점으로 압해대교에 이어 2013년 12월 27일 무안군 운남~압해간 다리가 개통되었으며 다리 명칭을 놓고 무안군과 신안군이 팽팽이 맞서다가 결국 '김대중대교'로 명명되었다. 2번 국도인 압해로를 따라 면 소재지로 가다가 길이 갈리어 우측 길로 접어들면 77번 국도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면 더 이상 길은 없어지는 선착장이 나타난다. 바로 복룡선착장이다. 원래 이름은 나룻가선착장이었다. 강으로 인식되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나 짐작이 된다. 압해도의 북동쪽 끄트머리인 이곳 복룡리 일대는 과수농가가 밀집한 곳이다. 한적한 이곳이 무안의 운남과 연결되는 다리가 건설되어 주민들의 생활이 더욱 편리해졌다.

압해도 김대중 대교

압해도 김대중 대교

복룡선착장에서 본 일몰

복룡선착장에서 본 일몰

이 대교는 서해안고속도로 및 광주-무안고속도로와 직접 연결되면서 목포와 신안 도서지역 간 교통의 요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무안공항과 목포권의 거리를 17km 단축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 목포와 연륙된 압해도는 압해-암태 간 새천년대교가 2018년 완공되면 압해도 송공항이 암태와 안좌, 자은, 팔금 등 신안 중부권 도서의 관문항으로 자리잡으면서 교통요지로 급부상할 것이다.

압해도 사람들의 희망

섬사람들의 가장 큰 소원은 육지와 다리로 연륙되는 것이다. 연륙교의 바람은 육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하다. 그들에게 다리란 생활의 개념을 넘어 생존의 문제이다. 섬사람들은 위급한 환자가 밤에 발생하거나 바람이 많이 불 때, 높은 파도 앞에서 절망해야 했던 안타까운 경험이 많다. 그래서 응급 환자가 숨지고 부모의 임종도,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여객선에서 아기를 낳기도 하고, 풍랑주의보에 2~3일씩 붙잡혀 계획에 차질을 빚어야 했던 것이 섬사람들이 겪는 애환이다. 위험한 풍랑 속에 선박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일도 허다한 곳이 섬이다.

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31 기상 정보에 신경을 쓰며 산다. 그리고 저녁 뉴스 다음에 나오는 텔레비전의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명절날 고향이 섬인 귀성객들은 날씨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들어보고 가슴을 조이며 고향을 찾곤 하는 것이다.

행정의 중심섬 압해도

현재 목포와 다리로 연결되어 다도해의 관문역할을 하는 압해도는 최근 신청사가 들어섬으로써 새로운 행정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군청이 들어선 신장리는 한때 휑뎅그렁한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섬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군 청사가 들어섬으로써 신장리는 신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2012년 1월 1일자로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신안군 행정구역체제는 1읍 13면에서 지도읍을 포함한 2읍 12면 체제로 개편되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72개 섬을 포함해 모두 82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은 1969년 무안군에서 분리된 후, 육지인 목포에서 타향살이를 해 왔다. 실로 43년 만에 명실상부하게 행정구역 내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박우량 신안군수는 "군 청사가 남의 동네에 있다 보니 군민들이 일체감을 갖지 못해 정체성이 떨어졌는데,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압해도와 가란도를 잇는 목교

압해도와 가란도를 잇는 목교

신안군청

신안군청

압해도 역사

압해도 지명으로는 드물게 누를 압(押) 자에 바다 해(海) 자를 쓰고 있다. 읍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낙지다리가 세 방향으로 뻗어 나가면서 바다와 갯벌을 누르고 있는 형상이라 압해도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압해의 또 다른 의미는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써, '맑은 바다의 고장'이라는 의미의 청해(淸海)와 '바다를 진호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처럼 붙여진 이름이다. 청해는 9세기에 동아시아 해상을 제패한 장보고가 그의 근거지였던 완도를 스스로 그렇게 불렀고, 진해는 16세기 말에 침략세력인 일본 수군을 격퇴한 이순신이 머물렀던 여수의 좌수영을 진해루(鎭海樓)라 칭했던 사례에서 근거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압해도는 장보고의 청해 및 이순신의 진해와 유비(類比)되는 한국 해양사의 대표명소라 할 만하다. 가히 목포 앞바다 갯벌의 한가운데 떠 있는 이 섬에 어울리는 지명이다. 그런데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외지 사람들은 목포 앞에 있는 섬이라 앞에도가 변해서 압해도가 된 것 아니냐며 가벼운 상상력을 펼치기도 한다.

한편 압해도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목교리 등 섬 곳곳에 산재돼 있는 40여 기의 고인돌을 비롯해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선돌은 지금도 볼 수 있다. 동서리 선돌과 대천리 광립 조개무지 그리고 여러 곳의 지석묘군 등 선사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복룡리 갯가에는 작은 돌멩이로 담을 쌓아 밀물에 휩쓸려 들어왔다가 다시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를 주워담는 석기시대 유물 독살이 남아 있다.

복룡리 원형독살

복룡리 원형독살

압해(押海) 정(丁) 씨의 선산과 시조묘도 있다. 가룡리의 야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시조인 대양군의 묘는 남으로 멀리 남해 바다를 안고 있고 북쪽으로는 승달산의 기운을 받고 있는 압해도 최고의 명혈(名穴)로 손꼽힌다. 이 명당 덕택에 정씨 후손들이 번창해 금성, 영성, 의성 등의 본관으로 세분되며 오늘날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압해도에는 역사와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동서리 도창마을에는 높이 4.5m, 둘레 3m의 대형 선돌이 남아 있는데,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송장수지팡이 또는 선돌이라 불리고 있다. 옛날에 송장수가 무술을 연마하던 중 휘하에 있는 한 병사가 죽어 석관에 그의 시신과 무기를 넣고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선돌을 세웠다고 전해 오고 있다. 구비(口碑)로 전승되는 설화와 전설도 많다. 벼락바위, 역도, 압해도와 기씨, 송공산 도둑골, 벼락바위와 변덕샘, 범바위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가룡리에는 신안의 전통사찰 금산사가 있다.

금산사

금산사

압해도 인물

압해도는 현재 섬 중의 섬으로 떠오르면서 조명을 받고 있지만, 사실 역사 속 압해도 역시 예전부터 시대마다 주목을 받아 온 섬이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원장이자 역사문화학부 강봉룡 교수는 '압해도와 수달장군 능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목포 앞 영산강이 흘러가는 길목 바다에 압해도가 있다. 압해(押海)란 '바다를 눌러 진호한다'란 뜻으로 진해(鎭海)나 청해(淸海)란 말과 의미가 통한다. 여수 진해루에 이순신이 있었고, 완도 청해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엔 능창이 있었으니, 여수와 완도와 압해도는 한 시대 바다를 석권한 해양영웅들이 활동한 현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능창은 장보고가 비운의 암살을 당한 지 반 세기 만에 압해도에서 일어나 장보고의 꿈을 재현하고자 했던 해양영웅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최고의 해양영웅 왕건에 의해 생포당하여 꿈을 실현하지 못한 역사의 패배자로 전락하였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능창의 위세는 대단한 것으로 나타난다. 몇 구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압해현 도적의 우두머리 능창은 섬 출신으로 수전에 능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다... 태조가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서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도적의 무리가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승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라 하였다."

당대 최고의 영웅 왕건도 능창과 정면대결하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고려사』에서 능창은 '도적의 우두머리'나 '도적의 무리'라 표현되고 있으나, 이는 왕건과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패배자를 비칭(卑稱)한 것일 뿐, 능창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분명 장보고를 잇는 서남해 지역의 유력한 해양세력, 해양영웅이었다. 그의 해전능력은 물개의 일종인 수달이라 별칭될 정도였다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당시 서남해의 호족들은 대세에 편승하여 대거 왕건에게 스스로 귀부(歸附)해버렸다.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의 생부인 다련군 오씨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창은 마지막까지 서남해 해양세력을 결집하여 왕건에 저항하였다. 서남해 해양패권을 장악하여 장보고의 꿈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결국 왕건의 작전에 말려들어 생포돼 당시 왕건의 주군이던 궁예에게 끌려가 참수당하고 말았다.

압해도 송공산성

압해도에 송공산성이 있다. 신라 말 능창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고려 말 몽골군이 고려의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서 압해도를 총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압해도민들은 침략군을 패퇴시켰다. 송공산성은 그때의 근거지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능창의 별명으로 알려진 수달은 1~2급수에서만 사는 바다동물이다. 지금도 압해도와 영산강 유역에 오염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수달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창은 송공산성 및 수달과 함께 서남해 해양세력의 기개와 청정 해양생태를 상징하는 존재로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일까?

이런 역사의 현장인 압해도에 압해대교에 이어 또 하나의 다리가 생긴다니 늦은감이 있다 해도 다행한 일이다.

압해도 특산물

압해도가 다른 섬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것은 광활한 황금갯벌에서 낙지를 비롯하여 김과 감태, 굴(석화) 등 다양한 수산물을 풍요롭게 채취할 수 있어서이다. 1982년 영산강 하구 둑 공사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압해도의 주 수입원은 김양식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에 따라 가격 폭락으로 김양식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일본으로 수출하는 갯지렁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섬사람들은 갯지렁이를 잡아 집도 사고 자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

요즘 압해도의 명품은 세발낙지이다. 갯벌에서만 사는 낙지는 청정해역을 가진 신안군의 효자 특산물이다. 낮에 물이 빠지면 낙지구멍을 찾아 삽으로 깊게 파서 잡고, 밤에는 물이 들어온 개펄 위에 배를 띄워 칠게를 미끼로 단 주낙으로 낙지를 잡아 올린다. 해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세발낙지는 보통 한 접(20마리)에 5만 원 정도 받는다.

세발낙지

세발낙지

이곳 주민들은 갯벌에서 한 해 35~40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어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우럭이라는 조개가 나오는데, 이 조개는 기름기가 있는 곳에서는 잠시도 살지 못하는 특성을 지녔다고 한다. 압해도는 아직까지 바다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임을 입증하고 있다. 우럭이 오래오래 사는 환경이 유지되기를 기원해 본다.

압해도의 해안은 대부분 사질이며, 동서남쪽에 큰 만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에는 만과 곶이 많아서 굴곡이 심하지만 간척공사로 해안선이 단조로워지고, 작은 섬들은 이웃에 있는 섬들과 이어져 논과 염전이 조성되었다.

압해도에는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에 말려 흰 빛깔의 결정체인 소금들을 생산하는 염전 8곳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은 3개뿐이다. 값싼 중국소금 때문이다. 평야지대에는 원예 시설 재배가 많아 농산물이 풍부하다. 배, 사과, 포도, 양다래, 무화과 등의 과일은 그 맛이 뛰어나 대부분 높은 가격에 수출을 하고 있다. 수산업은 돌김양식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압해도는 황토와 기후조건의 조화로 이곳에서 나는 배, 포도, 단감, 수박 등은 당도가 매우 높고, 고구마, 감자, 마늘, 양다래 등도 이곳의 특산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인기가 높다고 한다.

압해도를 떠나면서

섬으로만 이루어진 신안군의 중심지는 압해도이다. 송공항은 자은도, 암태도, 안좌도, 팔금도를 연결하는 중심 항구로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08년 압해대교가 놓이면서 목포와 연결되었고, 신안군 새 청사도 이곳 압해도로 이전했다. 2013년에는 무안 운남과 압해도 복룡마을이 다리로 연결되어 중부권 신안군 주민들의 생활이 한층 편리해졌다. 앞으로 2018년 압해도와 암태도 간의 새천년대교가 완공되면 압해도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서남해안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다. 신안군은 바다와 섬의 자산을 잘 활용하여 독특하고 차별화된 경영전략을 발휘해 우리나라 섬 행정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230m의 송공산에 올라 보면 신안군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경관을 살린 분재공원과 한국화전시관, 수석전시관이 잇달아 들어서 섬에 예술의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2009년 4월 문을 연 천사섬 분재공원은 4년간 50여 만 명이 찾았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이제 압해도는 섬의 굴레를 벗어나 우리나라 서남권의 명품 휴식 장소가 되어 사시사철 손님맞이에 바쁜 섬으로 거듭났다.

압해도 관광명소

금산사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지가 만들어졌다.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 백제 법흥왕 1년에 왕의 자복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로는 진표가 762년 신라 경덕왕 21년부터 766년 신라 혜공왕 2년까지 4년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1069년 문종 23년 혜덕왕사가 대가람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이라는 대사구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이 되었다.

동서리 선돌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송장수지팡이 또는 선돌이라 불리고 있다. 옛날 송장수가 무술을 연마하던 중 휘하에 있는 한 병사가 죽어 석관에 그의 시신과 무기를 넣고 매장한 뒤,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선돌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서리 도창마을 앞 들판에 서 있는 선돌

동서리 도창마을 앞 들판에 서 있는 선돌

송공산성

송공산 정상에 축조된 석성이다. 지금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으나 일부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곳도 있다. 축조 시기는 고려 이전이었을 것으로 전해 오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정상에 소형 석루와 우물 1기가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송공산성은 삼한 이전에 설치된 산성지라고 전해 온다. 1255년 몽골군이 내습했을 때 이 성에 터를 잡고 몽골에 대항했다는 기록이 『동국병감』에 기록되어 있다.

용과 관련된 지명들

신장리 선착장에서 우측으로 1.4km 전방에 보이는 섬이 용섬이다. 이 무인도서는 바위굴이 하나 있는데 용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용출도, 용난섬이라고도 부른다. 압해도는 섬의 생김새가 무안반도의 연안을 따라 마치 용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龍(용)'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압해도의 북쪽이 용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좌우에 駕龍(가룡)과 伏龍(복룡)이 있다. 가룡과 복룡에서 남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會龍(회룡)이 있으며, 남쪽에는 新龍(신룡)과 居龍(거룡) 등이 눈에 띤다. 또한 용의 꼬리를 닮은 곳이 하룡마을, 용정마을이며 학교 이름까지도 쌍용분교가 있을 정도다.

압해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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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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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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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시리즈는 25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 눈으로 보며 느낀 감상과 행정기관에서 갖고 있던 기존의 자료 등을 정리한 것으로, 각 지역별로 나누어 수필집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13권으로 출간되었다. 자세히보기

  • 저자 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섬에서 나고 자란 저자는 우리나라의 섬 탐험 전문가이다. 바나바선교회 섬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섬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국의 446개 섬을 3번이나 순회하였다. 저자는 많은 섬을 찾아다니며 섬의 기본 현황과 역사, 문화, 민속, 주업, 삶의 애환 등 수많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을 촬영하여 기록을 남겼다(드론 사진 포함).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 재직하였고, 2020년 1월부터 목포과학대학교 해양레저사업단 섬해양 선임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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