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아, 남은 더위 씻어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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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산세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계곡 바로 옆에 들어선 석천정사. 골이 깊지 않은데도 고즈넉한 분위기와 청아한 물소리로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석천정사는 인근 닭실마을의 정자 청암정과 함께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여름의 끝’ 보이는 경북 봉화

입추가 진즉 지났고, 말복이 코앞인데 기록적인 폭염은 여전합니다. 벌겋게 달궈진 무더위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질 않네요.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날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뜨거워 델 것 같은 날에 서늘한 바람을 기다리다가, 더위가 한 발짝 물러가면 가봐야 할 곳으로 경북 봉화를 떠올렸습니다. 발치에 낙동강을 두르고 선 청량산의 담담한 아름다움과 차가운 물이 흐르는 봉화의 오지 계곡, 그리고 오래 묵었으되 풍류 넘치는 정자…. 봉화 땅에서 만난 이런 곳들에서는 늦여름 무더위쯤은 쥘부채 하나만으로도 능히 쫓을 수 있을 듯했습니다.

# 청량산을 굽어보는 최신판 명소

‘맑을 청(淸)’에 ‘서늘할 량(凉)’. 경북 봉화에는 청량산이 있다. 청량.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이름이지만, 적어도 한여름만큼은 그렇지 않다. 다녀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 같은 염천(炎天) 더위에는 청량산 산행은 무리다. 지금 청량산 안에 ‘청량’은 없다. 절집 청량사까지 줄곧 뜨겁고 가파른 시멘트 도로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 데다, 산행 코스에는 서늘한 계곡 하나 없으니 말이다.

이즈음에는 청량산 맞은편 산자락으로 물러나야 비로소 산의 맑고 서늘한 형상이 보인다. 청량산은 코앞에서는 잘 안 보인다. 설사 보인대도 열두 개의 바위봉우리가 솟아 있어 보는 자리를 조금만 바꿔도 인상이 다르다. 청량산을 들고 나는 도로 위에서도 전체적인 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길이 낙동강을 끼고 산에 바짝 붙어 달리니 협곡과 산의 허리까지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맑고 서늘한 청량산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는 청량산 맞은편 만리산 자락의 허리쯤에 있다. 그 자리에 대해 말하려면 펜션 겸 찻집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얘기부터 해야 한다. 펜션 겸 찻집은 경북 예천 출신 김두한(58)·이형희(60) 씨 부부가 10년 전에 들어와서 지었다. 작은 그네를 놓아둔 펜션의 잔디마당과 2층 카페의 창가 테이블. 이 두 곳이 청량산을 보는 최고의 전망대다. 눈 밝은 부부가 거미줄 같은 시멘트 농로의 끝까지 찾아 들어와 터를 잡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몰랐을 자리다. 청량산 전망대는 그만큼 멀고, 또 깊은 곳에 꼭꼭 숨어 있다.

여기서 보는 경관은 독특하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청량산이 뚜렷한 ‘뫼 산(山)’자 형상임을 이 자리로 물러나서야 비로소 안다. 산발치에는 협곡 사이로 흘러가는 낙동강 물길이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펜션 앞 잔디마당이나 찻집 창가 테이블에 앉으면 누구나 ‘와’ 하는 탄성을 터뜨리게 된다. 희한한 것은 이런 감동이 도대체 왜 느껴지는지 잘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기암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기막힌 산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풍경은 없다. 모두 부드럽고 순한 경관들이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모여서 최고의 경관을 빚어내고 있는 셈이다. 오래 앉아 바라봐도 그곳의 경관이 질리지 않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청량산 전망대에 오르겠다면 적잖은 수고를 바쳐야 한다. 청량산 쪽에서 작은 시멘트 다리 오마교를 건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가는 급경사의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대부분 구간이 차량이 교행할 공간도 없을 정도로 좁은 데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 구불구불하기까지 하다. 초보운전자라면 언감생심. 웬만한 운전 솜씨로도 간이 다 콩알만 해진다. 한 번 길에 오르면 돌아나갈 공간도 없으니 핸들을 붙잡고 덜덜 떨면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올라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찻집 창으로 청량산을 내려다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 전통의 명당, 청암정과 석천정사

요즘에는 최고의 조망을 누리거나 정취가 깃든 자리에 십중팔구 카페나 펜션이 들어서지만, 과거 선비들은 그런 자리에다 정자(亭子)를 들이거나 정사(精舍)를 지었다. 청량산을 마주 보고 있는 카페가 봉화의 ‘최신판’ 명당이라면, 봉화의 전통 명당은 단연 청암정과 석천정사를 품고 있는 닭실마을이다.

정자나 고택 같은 전통 건축물이 유독 많은 봉화에서 가장 이름난 전통 마을이 닭실마을이다. ‘닭실’은 금닭(金鷄)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금계포란형’의 지세를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명당의 입지도 입지지만, 닭실마을이 이름난 것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영남 사림파를 대표하는 충재 권벌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곳이기 때문이다. 권벌은 조선 연산군 때 벼슬길에 나섰다가 기묘사화로 낙향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후 다시 벼슬자리로 돌아가 우찬성 자리까지 올랐지만, 다시 을사사화로 파직당하고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권벌의 종가 옆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 청암정은 단아하면서도 풍류가 넘친다. 청암정은 마치 해자처럼 연못을 두르고 있다. 거기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 청암정은 본디 정자가 아니라 정사였다. 이름도 청암정이 아니라 구암정(龜岩亭)이었다. 정자와 정사는 방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널찍한 대청마루만 있으면 정자, 온돌을 넣어 방으로 쓰는 공간이 있다면 정사다.

청량산 맞은편 만리산 자락의 펜션 겸 찻집 ‘오렌지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앞마당에서 본 청량산의 경관. 산 정상이 ‘뫼 산(山)’자의 형상이다. 통창을 통해 이런 경관을 내다볼 수 있는 찻집의 창가 자리가 명당 중의 명당이다.


지금은 마루의 결이 다르다는 것으로만 짐작할 수 있지만, 청암정은 방을 들여 지은 정사였다. 그런데 온돌방에 불을 넣으면 괴이하게도 정자 아래 바위가 울었다. 이에 한 스님의 처방대로 굴뚝을 막고 바위 주변을 파 못을 만들었더니 그 뒤로는 거북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명문가의 정자답게 청암정에는 현판과 글씨로 가득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청암정’ 현판은 매암 조식의 솜씨다. 헷갈리기 쉽지만, 매암 조식은 ‘칼 찬 선비’로 일컬어지는 남명 조식과는 다른 인물. 매암은 남명의 제자다. 매암은 10세 때 함경도 경원의 성남루 편액을 썼을 정도로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청암정 현판을 조식이 썼다는 것은 10년 전에야 확인됐다. 현판에 낙관이 없어 그 이전에는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없었다. 현판 도난을 막기 위해 2008년 문중의 현판 서른 개를 모두 철거해 유물관에 보관하는 과정에서 청암정 현판 뒤에서 매암의 이름이 나왔다.

# 그리워하던 경관에다 글을 내걸다

청암정에서 현판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다. 전서체로 쓴 글자 모양이 워낙 독특해 금세 찾을 수 있다. 편액 글씨는 미수 허목이 죽기 사흘 전에 써준 것이다.

허목은 조선 후기 남인의 우두머리로 정계와 사상계를 이끈 인물이다. 허목은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는 찾아가 보려 했으나, 나이 여든여덟이 되도록 가보지 못했다. 너무 늙어 봉화까지 갈 수 없었던 허목은 마음을 다해 ‘청암수석’이란 큼지막한 글씨를 담아 보내면서 ‘정자 안에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걸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허목은 바로 병석에 누워 사흘 만에 세상을 떴다. ‘청암수석’이 생전의 마지막 글씨, 그러니까 절필(絶筆)이 된 것이다.

그는 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청암정에 걸어둘 편액을 보냈던 것일까. 짐작하건대 경관의 아름다움만 말하고자 함은 아니었으리라. 허목은 단순히 청암정 주변의 물(水)과 돌(石)이 아니라, 정자의 임자였던 권벌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글에 담았을 것이었다.

지금 정자 안에 걸려 있는 허목의 편액은 근래 새로 만든 것이고, 원본은 청암정 옆 충재박물관에 있다. ‘청암수석’이란 네 글자 옆에다 써넣은 작은 글씨를 찬찬히 읽어보자. “청암정은 춘양의 권 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 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둔다.”

허목은 1595년생이다. 청암정의 주인 권벌이 154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권벌이 죽은 지 47년 뒤에 허목이 태어난 셈이다. 둘이 살아온 시간의 차이는 한 세대가 넘지만 학문과 인품의 향기는, 사모와 존경은 시간을 뛰어넘는다.

# 빼어난 계곡에 맑은 정자를 짓다

청암정 풍류도 자연에 힘입은 바 크지만, 충재 권벌의 큰아들이 아버지 뜻을 이어 석천계곡에다 지은 석천정사야말로 전통 건축이 자연경관과 어떻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봉화 닭실마을의 정자 청암정. 연못을 둘러친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자가 올라앉은 형상이다.


석천정사는 닭실마을 뒤쪽 석천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내성천 물길을 끼고 들어서 있다. 삼계교 다리 쪽에서 물길 옆으로 이어진 좁은 오솔길 곁 바위에 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권벌의 5대손인 권두응이 마치 물줄기를 그리듯 유연한 필치로 쓴 ‘청하동천(靑霞洞天)’이다. 빼어난 경관에 이끌려 석천정사 주변으로 몰려든 도깨비들이 밤마다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선비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자, 바위에 이 글씨를 새겨넣으니 도깨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숲으로 둘러싸인 천변의 오솔길을 지나 만나는 석천정사는 마치 자연의 터널 끝에 꼭꼭 숨겨둔 신선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 석천정사에 들어서 계곡을 바라보는 경관도 빼어나지만, 더 훌륭한 것이 물 건너에서 석천정사를 바라보는 경관이다. 천변 이쪽의 너럭바위에 앉아서 뒷산의 뻐꾸기 울음 속에 내성천의 물에 탁족하며 바라보는 석천정사의 모습이라니….

봉화에는 석천정사처럼 물길을 끼고 있는 풍류 넘치는 자리에 세워진 정자 사미정도 있다. 운곡천 변의 사미정의 주인은 조선 영조 때 우부승지를 지낸 조덕린이다. 조덕린은 당쟁의 폐해를 지적한 항소로 인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는데, 거기서 3000리 밖의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정자를 짓도록 했다.

사미정(四未亭)이란 이름은 정미년(1727년), 정미월(6월), 정미일(22일), 정미시(오후 1~3시)에 맞춰 지은 정자라 해서 붙여진 것. 때는 조덕린이 유배생활 3년째로 접어들던 무렵이다.

정자 건축을 하필 정미(丁未)의 시간에 맞춘 건 4개의 미(未)가 합쳐지는 날은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때 집을 지으면 길하다는 속설 때문이지만, 중용에 등장하는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는 공자의 말에서 사미정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기도 하다. 공자가 자신은 능하지 못하다는 군자의 4가지 도는 효(孝)·제(悌)·충(忠)·신(信)이다.

유배 중이던 그는 왜 자식들에게 가볼 수도 없는 정자를 지으라 했던 것일까. 정자를 지어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후손들에게 중용의 4가지 도리를 실천할 것을 당부하는 뜻이 아니었을까.

#오지 중의 오지 구마계곡

염천의 더위가 한풀 꺾여서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이나 산수화 그려진 부채 하나만으로도 더위를 능히 쫓을 수 있을 때쯤 되면 소천면의 구마계곡을 권한다. 경북 봉화를 흔히 ‘오지’라 부르지만, 봉화에서도 첩첩산중의 깊은 오지가 바로 여기 구마계곡이다.

구마계곡은 태백산에서 발원하는 계곡 중에서 가장 길다. 좀 긴 정도가 아니라 자그마치 20여 ㎞를 넘는다. 계곡의 지류까지 포함하면 40㎞에 이른다고 해서 ‘백리장천(百里長川)’이라고도 부를 정도다. 계곡 물의 청량함은 감히 견줄 만한 곳이 없을 정도다. 일대의 지세도 범상치 않다. 구마계곡이란 이름도 이 계곡 어딘가에 말 9마리가 한 기둥에 매어 있는 ‘구마일주(九馬一柱)’의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에 근거해 붙여진 것이란다.

계곡 곳곳에 맑고 푸른 소가 있고 모래밭이 깔린 천변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인적 드문 오지. 휴가철 물놀이를 즐기기에 이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은데도, 피서철이 다 지난 지금에서야 이곳 얘기를 꺼내는 건 도로가 좁고 편의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구마계곡은 물이 맑고 주변 경관도 훌륭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도로와 주차공간이다. 우선 길이 좁다. 차량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길이 자그마치 10㎞ 남짓 이어진다. 길옆으로 드문드문 차량이 비켜 갈 공간이 있지만, 얌체 피서객들이 이런 곳에다 차를 대면 순식간에 계곡은 아비규환이 된다. 간혹 민가 앞에 한두 대 차를 댈 공간이 있긴 하지만, 주차장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구마계곡은 휴가의 절정을 지나서 피서지가 호젓해지는 늦여름 무렵이 가장 좋은 때다. 인적 드문 계곡에서 옥빛의 차고 맑은 물에 탁족하며 더위를 씻기에 딱 좋으니 말이다. 물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맞은편 산중의 소쩍새 울음소리만으로도 더위는 저만큼 물러간다. 기록적인 폭염이 한발쯤 물러가고 난 여름의 끝에 맞춰 찾아갈 곳으로 봉화를 권한다. 그곳이 철 지난 계곡이든, 천변의 정자든, 아니면 조망의 명소든, 모두 쥘부채 하나 들고 느린 걸음으로 가볼 만한 곳들이다.

봉화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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