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생의 숙명, 그 소중함에 대한 고백
멸치야 갈치야 날 살려라
너는 죽고 나는 살자
에야 술배야
가거도 어부들의 고기 잡는 소리를
밥상머리에서 환청으로 듣곤 한다
[……]
그토록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
소화가 되겠느냐 핀잔하는 이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이에게 권하고 싶다
술배소리 음미하며 한 끼 먹어보라고
그래야 음식마다 맛이 새롭고
먹고사는 일이 더욱 생생하게 소중해지므로
- 「술배소리」 부분
뒤표지 글과도 맞닿는 이 시는, 인간으로 태어나 일생 동안 자연에서부터 얻는 ‘숨’(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은 이 뱃소리에 등장하는 ‘멸치’ ‘갈치’뿐만 아니라 시집 제1부에서 다루는 많은 음식들―‘가물치’ ‘모자반국’ ‘자두’ ‘마늘’ ‘고들빼기’ 등―을 통해, 숨 쉬는 모든 존재의 숙명인 ‘먹다’라는 행위에 집중하여 우리 모두가 이 세계 속에서 서로에게 유관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이 ‘먹는’ 순간에 “다시 올 수 없고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나날의 삶을 더욱더 절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뒤표지 글)는 솔직한 고백으로 생의 무게를, 매 순간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한다.
설화적 소재들로 명징해지는 의미
숨구멍이 막힌 씨는 썩는다네
말에 숨구멍 만드는 이가 시인이라면
곳곳에 은밀하게 숨구멍이 있는 시라야
오랜 세월 움틀 날 기다리는
씨가 되리라 생각하네.
- 「아라홍련」 부분
늙은 무녀의 목쉰 노래로
귓가에 맴돌며 피는 꽃
상처에 문지르면 살이 돋아 살살이꽃
가슴에 문지르면 숨이 트여 숨살이꽃
- 「숨살이꽃」 부분
7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연꽃 씨앗에서 발아한 ‘아라홍련’, 바리데기 설화 속 상상의 꽃 ‘숨살이꽃’ 등 최두석은 시의 소재들, 특히 ‘꽃’에 설화와 역사를 기입하며 그 의미망을 넓힌다. 시인은 전작들에서도 흥부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아기장수 설화 등 꾸준히 고전이나 설화를 변주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해온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설화적 소재들이 그의 초기작에서는 역사에서 지워진 채 살아가는 상처 입은 민중들로 주로 현현되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맡는다. 이로써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시인의 정신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조화로운 세계, 우정의 공동체를 향하여
몇 해 전 군산 비웅도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의 한쪽은 꽃게 수만 마리가
바닷물에 달을 굴리다 말고 나타나
집게발로 잡고 힘을 쓰고
다른 쪽은 포클레인이 줄을 감아 걸고 잡아당겼다
꽃게 편이 졌고 새만금 제방을 막게 되었다
몇 해 전에 부안 해창갯벌에서 줄다리기를 하였다
줄의 한쪽은 낙지 수만 마리가
바닷물에 달을 굴리다 말고 나타나
뻘밭에 몸을 박고 힘을 쓰고
다른 쪽은 포클레인이 줄을 감아 걸고 잡아당겼다
낙지 편이 졌고 새만금 제방을 막게 되었다
새만금 제방 위로 난 미끈한 도로 위로
자전거 타고 파도소리 가르며
씽씽 속도를 즐기는 이여
당신은 그때 어느 편을 들고 얼마나 힘을 썼나
아니면 그냥 구경꾼이거나 방관자였나.
- 「새만금」 전문
인간이 더 많은 땅을, 재화를, 이익을 위해 꽃게와 낙지의 집터를 허물어버릴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되묻는 「새만금」은 그간 문명이 자연에게 가하는 폭력을 통렬하게 비판해온 최두석의 시 정신이 잘 드러나는 시편 중 하나다. 만물로 생동해야 할 세상에서 마치 자신들만이 주인인 듯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 지어대기 바쁜 인간의 초상을 들여다보며 우리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가고자 하는 ‘조화로운 공동체의 세계’는 어떠한 모습인가. 「복숭아 벌레」에서는 그 힌트를 엿볼 수 있다.
복숭아를 베어 무니 또 벌레가 나오고
예닐곱 개의 복숭아를 시험해보아도 다
벌레가 들어 속살을 파먹고 있다
[……]
벌레에게는 복숭아가 전부이지만
나에게는 여러 먹거리 중의 하나
하지만 벌레나 나나
태고로부터 전해지는
복숭아를 탐하는 맛망울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상념이 불쑥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다.
- 「복숭아 벌레」 부분
열매를 못 먹게 하는 성가신 방해꾼으로 생각되기 마련인 벌레가 ‘맛망울을 함께 지닌’ 동료로 바뀌는 순간. 나에게는 여러 먹거리 중 하나이지만, 벌레에게는 이 복숭아 한 알이 집이자 생의 전부라는 깨달음. 낮은 숨소리에 귀 기울여야 겨우 지각되는 이런 작은 존재들까지도 이 세계의 구성원이자 저마다의 삶을 가진 무거운 존재들이며, 우리 스스로 겸허하게 그들과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전언은 유기적으로 구성된 이 세계의 근본 이치를 관통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종훈은 시인 최두석을 “이 시대의 사무사(思無邪)”라고 칭하며, 앞으로 펼쳐질 그의 행보를 이렇게 예상한다. “‘사무사’의 길은 완망한 경사로 길게 이어질 것이며, 그 길은 어느새 ‘만물보(萬物譜)’의 장관을 이룰 것이다.”
■ 추천의 말
최두석은 전형적인 시인보다는 시인-채록자에 가깝다. 내면의 감정만큼 체험의 역사도 중요하다는 듯 그는 직접 발품을 팔아 현실의 반경을 넓히고 그곳에서 만난 이야기와 노래를 시로 구현해왔다. 최두석 시의 발원지를 탐사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넘실대는 개인의 감정에 앞서 둘레 세계에 대한 존중이 있을 것이다. 개별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고 기억을 복원하고 설화의 시간을 잇대놓으며 그의 시 세계는 조용히 확장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펼쳐질 최두석의 행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사무사思無邪’의 길은 완만한 경사로 길게 이어질 것이며, 그 길은 어느새 ‘만물보萬物譜’의 장관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