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암나무와 ‘부부’였던 볼음도 수나무
‘대홍수로 뿌리째 떠밀려온 것 심어’ 구전
8㎞ 거리 북녘 호남리에 800살 암나무 확인
문화재청, 17일 볼음도서 부부나무 위한 ‘민속행사’
볼음도는 강화도와 다리로 이어진 석모도의 서쪽, 강화군 서도면 섬 무리(주문도·볼음도·아차도·말도) 중의 하나다. 민통선 안에 있어, 방문객은 모두 신분증을 제시하고 신원 확인을 받아야 한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로 1시간20분 거리에 있다. 볼음도는 백합·고둥 등이 지천으로 깔린 광활한 갯벌을 거느린 섬이다. 서도면 일대의 갯벌은 세계적인 희귀 조류 저어새의 집단 번식지로도 이름 높다. 저어새는 천연기념물 205호, 강화갯벌 저어새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419호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또하나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바로 볼음도 주민들의 자랑인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4호)다.
먼저 은행나무가 드리운 그늘 안으로 들어가 보자. 높이 약 25m, 가슴 높이 둘레가 약 9m에 이른다. 묵직한 밑둥도, 갈라져 뻗은 줄기도, 짙푸른 잎들을 피워낸 가지들도 건강해 보인다. 늘어진 가지 일부를 철선으로 묶어 지탱하고 갈라진 틈을 메운 것말고는 온전한 모습이다. 나무 앞 볼음저수지 한쪽에는 홍련·백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볼거리를 더한다.
할머니 한 분이 할아버지 은행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그늘 의자에 앉아 무수히 뻗어나간 거대한 은행나무 가지들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본다. 마치 은행나무의 품에 안기기라도 한 듯 행복한 표정이다.
“이삼일에 한번씩은 오지. 자전거 타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요.”
당아래 마을(볼음1리)에 사는 이양금(69)씨다. 그는 “은행나무를 며칠 안 보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라고 했다. 집안일 하다가도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지면 자전거로 3㎞ 거리를 달려 온다. 봄·여름·가을·겨울 가리지 않고 수시로 달려 온다. 여름에는 그늘이 좋고, 가을엔 노란 단풍이 멋지고, 겨울엔 눈 흩날리는 광경이 정말 볼 만 하단다. 전북 부안에서 시집 와 50년 가까이 살며 정 붙여 온 나무다. 이씨는 손주들에게 “너희들도 이 나무처럼 크고 훌륭하게 자라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려준다고 했다. 이렇듯 볼음도 은행나무의 큰 그늘은 주민들 쉼터이자 배움터요, 힐링의 공간이다.
수백년 전 어느 여름, 큰 비가 내린 뒤 볼음도 북쪽 바닷가로 뿌리째 뽑힌 은행나무 한 그루가 떠밀려 왔다. 주민들은 이를 건져 바닷가 산자락에 심었고, 나무는 용케도 잘 자랐다. 오가는 어민들을 통해 이 나무가 황해도 바닷가 마을(현재의 연안군 호남리)에 있던, 암·수 한 쌍의 은행나무 중 대홍수 때 뽑혀 나간 수나무인 것을 확인했다. 그 뒤 양쪽 마을 주민들은 각각 정월 풍어제를 지낼 때 헤어진 부부 나무의 안녕을 비는 제를 함께 지냈다고 한다. 풍어제는 볼음도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시들해졌고, 한국전쟁 뒤로는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 기록에는 없지만, 볼음도 주민들에게 오래전부터 구전돼 오고 있는 사연이다.
‘강화 볼음도 은행나무 민속행사’로 이름 붙인 이날 행사에선 평화의 시 낭송, 마당놀이·살풀이·판소리·북춤·풍물놀이 등 전통공연, 황해도 연안의 은행나무를 대형 그림으로 그리는 페인팅 쇼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섬연구소 강제윤 소장은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판문점 선언’의 구체적 실행 조처의 하나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평화 수역화다. 이 구역에 있는 부부 나무의 인연을 다시 이어주고 ‘평화의 나무’로 정한다면, 평화 수역의 상징물로 남북 화해·평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이희영 사무관은 “서로 연락이 되고 기회가 온다면, 볼음도와 호남리 양쪽 마을 주민들이 함께 하는 ‘부부 은행나무 기리기’ 행사도 정기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볼음도(인천)/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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