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이 본 세상이야기](마지막회)신비와 불굴의 300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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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07.09.20. 오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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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에티오피아

한국의 외교는 강대국 상대로만 하는 게 아니다. 세계 190여개 나라에서 펼쳐진 숱한 외교성과가 쌓여 우리는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됐다. 지난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탄생은 우리 외교관들이 누비고 다닌 발품의 결실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어려운 근무환경을 이기면서 뛰는 외교관들이 있다. 외교관의 눈으로 보는 세계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에티오피아하면 먼저 떠올리는 영상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이 1980~90년대의 비참한 기아이고 다음이 맨발의 마라톤 세계 금메달리스트 아베베와 1960년대 한국을 방문하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정도다.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원산지이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병력을 파견해 북한과 맞서 싸우는데 기여했던 혈맹 우방이라고까지 아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가 3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기독교(동방정교) 국가로서수많은 외침에 저항하며 아프리카 53개국 중 유일하게 식민지화를 모면하고 면면히 독립국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특히 우리가 조선 말기 중-러-일의 직접 각축과 영-불-독-미의 간접 영향권에 휘말리다 결국 일본에 의해 병탄된 것과 달리 유사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에티오피아는 영국-이집트-수단-이탈리아 등과 싸우며 조국을 사수해냈다.

에티오피아가 유럽 식민 사냥의 희생물이 되지 않은 요체는 뿌리 깊은 신앙으로 정신 무장된 국민들에게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도 자신의 목숨은 물론 왕족의 멸문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을 사수한 국왕들의 살신성인에 있다.

왕의 죽음은 곧 왕위를 노리는 정적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자신의 왕족이 몰락하는 것이 자명함에도,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이 나라 왕들을 보면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과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것도 모자라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며 구차한 목숨을 보전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에티오피아 국왕들은 외침을 당하면 궁궐에 앉아 있지 않고 반드시 직접 전선에 나가 진두지휘하며 싸웠다. 또 그들은 싸움에서 물러서거나 비겁하게 타협·항복하기를 거부했으며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테워드로스 2세는 1868년 4월 막달라지역에서 3만2000명의 영국 원정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자결했다. 1872년 왕권을 넘겨받은 요하네스 4세는 에리트리아 지방으로 침입한 이집트군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 이집트의 에티오피아 점령 기도를 무산시키는 한편 노획한 무기로 군대를 현대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탈리아가 식민 야욕의 마수를 뻗어왔다. 당시 아프리카와 중동·인도까지 주름잡던 영국은 요하네스에게 이탈리아에 도발하지 말고 고분고분하라고 거듭 압력을 가해왔다. 때를 같이 해 마흐디스트 회교도들이 당시 에티오피아 수도 곤다르를 유린했다. 이탈리아와 마흐디스트의 침입에 맞서 요하네스 왕은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며 10만 병력을 모았다.

“에티오피아의 아들들이여! 명심하라. 에티오피아는 너희의 어머니며 왕관(영광)이고, 아내이자 자녀이며 너희의 무덤이라는 것을! 그러니 분연히 일어나 어머니의 사랑과 같고, 왕관의 영광과 같은 에티오피아를 수호할 지어다! ” 그는 1889년 3월 마타마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왕위를 물려받은 메넬릭 2세 역시 우리의 을사조약에 해당하는‘우찰레 조약’의 해석을 놓고 이탈리아와 갈등, 1895년 국민 동원령을 내렸다.

“적들은 여기에 와서 우리나라를 멸하고 우리의 종교를 바꾸려 한다. 나는 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 힘이 있는 사람은 내게 힘을 보태고, 약한 사람은 기도로 나를 도우라!”

마침내 1896년 2월 29일 에티오피아 군 10만 명은 아드와 계곡에서 이탈리아를 무찌르고 제국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에티오피아는 1936~41년 이탈리아 무솔리니에 의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유럽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역사가 오래고 찬란한 문화를 간직하며, 자존심 강하고 용감한 민족이 왜 이다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것이 누구의 탓이며, 무슨 이유일까?

종교개혁을 거친 적 없이 구약성서식 계율을 그대로 따르는 종교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보수적 사고 방식 때문만일까.

주 에티오피아 대사관 정병국 대사

에티오피아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이라는 의미다. 구전에 따르면 시바 여왕이 예루살렘으로 솔로몬 왕을 찾아가 얻은 아들 메넬릭 1세가 악숨 왕국을 건국함으로써 에티오피아 왕국이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시바는 현재의 에티오피아 북부와 예멘 지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래서 에티오피아와 예멘 모두 시바를 자신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5배이나 인구는 약 7400만명 가량된다. 1인당 국내총소득(GNI)가 110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극빈국이다. 주요 수출품은 커피, 두류 등 1차산물이 대부분으로 2005년 기준 2500만달러 이상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전 당시 보병 6037명이 한국을 도와 참전했으며 우리와는 1963년 수교했다. 한국은 주로 타이어·튜브, 섬유 등 3500만달러 내외를 수출하고 용연향, 해리향 등 1700만달러를 수입한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해 각각 상주공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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