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씬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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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요조의 책잡힌 삶
클림트
고등학생 때 엄마와 크게 다툰 적이 있다.

그 시절 내가 홀딱 빠져있던 한 음료가 있었다. 번쩍이는 은색 팩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음료였는데 겉에 그려진 그림들이 근사했다. 오렌지, 오렌지망고, 사파리, 알라스카 아이스티 …. 맛보다도 그 패키지 자체에 매료돼버린 나는 그 음료를 매일매일 사 먹었다. 다 먹은 음료수 팩은 버리지 않고 다시 집으로 챙겨와서는 물에 깨끗하게 씻어 말려 다림질까지 해놓았다. 빳빳하고 번쩍거리는 팩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당연히 가장 자주 모이는 팩이 있었고 여간해서 발견하기 힘든 팩이 있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팩은 오렌지 맛이었고 딸기&키위 맛은 그야말로 레어아이템이었다. 워낙 귀한 물건이어서였는지 맛도 제일 좋게 느껴졌다. 더 빨리 팩을 모으기 위해 나는 누구를 만나든 그 일대 슈퍼로 데리고 들어가 그 음료수를 강권했다. 그런 식으로 어마어마하게 팩들이 모인 어느 날 밤, 나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에 입을 꾹 다문 채 착수하였다. 내 방 벽 한 면 전체를 그 팩들로 메꿔버린 것이다. 손바닥만 한 것들 하나하나 붙여가며 벽을 메우느라 몇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다 완성된 벽이 번들번들거렸다. 기진맥진한 채로 그 옆에 자려고 누웠는데 마치 좋아하는 사람 옆에 누운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이 금방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왔을 때 내 방 벽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전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내가 그 음료수 팩을 모았던 적도, 그 음료를 좋아했던 적도 없었던 것처럼.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무척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거 내가 다 떼버렸다. 정신 사나워서.”

나의 국민이었다. 빛나고 깨끗했던 나의 오렌지족, 사파리족, 딸기&키위족이 매정한 어머니에 의해 멸종하고 말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 분노가 대뜸 부모님 방 침대맡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으로 향했다.

“왜 허락도 없이 내가 방에 붙여놓은 걸 떼! 내가 엄마 방에 걸린 그림 맘대로 떼버리면 기분 좋겠어?”

“그 그림이랑 네가 덕지덕지 붙여놓은 그 어수선하고 정신 사나운 거랑 같니?”

“엄마 방에 있는 그림이 더 어수선해, 정신 사납고! 여자 목도 이상하게 꺾여있고! 저렇게 이상한 그림도 버젓이 걸어두면서 왜 난 안돼!”

강원국의 글쓰기
엄마가 내 벽에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 그림을 향해 가차 없이 욕을 퍼부었다.

전원경 작가님이 쓰신 『클림트』라는 책을 팟캐스트에서 얼마 전 다루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책이었다. 책 안에 그 그림이 있었다. 차마 엄마를 미워할 수 없어서 대신 미워했던,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키스’가.

얼마 전 프랑스를 여행했다.

최근 개관한 ‘빛의 아틀리에(L’Atelier des Lumières)’라는 미술관에서 클림트의 전시를 보았다. 올해가 그의 사망 100주기라고 했다. 옛 제철소 자리를 개조해 만든 이 미술관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클림트의 작품들로 만든 미디어아트를 공간 전체에 프로젝트로 쏘는 방식의 전시를 선보였다. 그래서 미술관 이름이 ‘빛의 아틀리에’인가보다. 그림들은 환상적인 빛의 안내를 받으며 클림트의 생애를 따라 흘러나왔다. 초창기 사실적 화풍의 그림들이 지나가고 황금시대의 그림들이 등장하자 함께 전시를 보던 남자친구가 ‘어, 다른 작가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 클림트의 그림이야.” 나는 말했다. 또 다른 느낌의 그림들이 등장할 때 남자친구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이것도?” 하고 물었다. “응, 그는 여름마다 아터호수로 휴가를 가거든. 거기서 그린 그림일 거야.” 내가 대답했다. 전시를 보고 나오며 남자친구는 “클림트를 되게 좋아하나 봐” 하고 말했다.

“사실 조금 미안해하고 있어.”

미술관 앞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클림트에 대해서 좀 더 말해줄까?” 남자친구의 손을 잡으며 내가 물었다.

며칠 전 읽었던 강원국 작가님의 『강원국의 글쓰기』 속에서 읽은 “들여다본 지점까지만 내 세상이다”라는 문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내 세상에는 오렌지족, 사파리족, 딸기&키위족 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있다.

요조 뮤지션 chaegbangmusa@gmail.com
뮤지션. 제주의 책방 ‘책방무사’ 대표.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등을 썼다.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를 장강명 작가와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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