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값진 ‘삶’을 물려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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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8.17. 오전 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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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

전방위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

자서전 수업 지도한 경험 압축해

자서전 쓰기 방법론 책 출간

“세계와 연결지어 자기 역사 써라”



다치바나 다카시의 수업을 들은 한 수강생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기 역사를 쓰지 않으면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출처 게티이미지
인간은 언제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을까. 자서전이란 장르의 시작은 적어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2천년이 넘는 계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인류 역사 대부분 시기에 그런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저자들이 독자를 만나기 위해선 책이라는 진입 장벽이 높은 매체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같은 소셜미디어로 개인이 독자를 만날 수 있는 길이 무한히 열렸다. 최근 글쓰기와 자서전 쓰기 방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이처럼 오랜 기간 눌려 있던 욕구가 분출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논픽션과 역사 등 전방위로 책을 써내는 다작의 일본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지상 3층·지하 2층짜리 건물에 20만권의 책을 채워 넣은 엄청난 장서가이자 다독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일본 도쿄 릿쿄대학에서 운영하는 ‘세컨드 스테이지 대학’에서 2008년부터 자서전 쓰기 수업을 맡아 지도해왔는데, 이번에 국내 출간된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은 그 수업의 결과물을 토대로 자서전 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수업에서 가르쳤던 노하우와 함께 수강생들이 직접 쓴 좋은 자서전 사례들이 담겨, 자서전 쓰기 지침서로 추천할 만하다.

릿쿄대학에서 이런 대학과 강좌를 마련한 이유는 우리가 자서전을 써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50살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이 대학은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가야 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뭘까. 다치바나는 “과거를 총괄해보는 중간 점검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을 재확인”하는 자서전 쓰기가 그 답이라 말한다.

자서전을 써야 하는 급박한 이유도 있다. 죽음과 병이다. 자서전을 쓰지 않은 채로 죽거나 치매 같은 중병에 걸리면 나만 아는 내 생애사는 영영 사라져 버린다. 이를 두고 다치바나는 “한 인간이 죽으면 그 사람의 뇌가 담당하던 장대한 세계 기억 네트워크의 해당 부분이 소멸하고 만다”고 표현한다. 이 말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자녀나 가족, 친구들에게만큼은 내 삶의 이야기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기억”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전달자요, 자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자녀들이 부모를 잘 알지 못하고선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또한 어렵다는 것이 다치바나의 생각이다. 자신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면서.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내 역사지만, 막상 자서전을 쓰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래서 그가 수강생들에게 가장 먼저 주문하는 것은 ‘자기 역사 연표’ 만들기다.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다양한 일들과 함께 같은 시기 세계나 국가 단위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표로 죽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자기 삶의 다양한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되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전쟁이나 88올림픽, 아이엠에프(IMF) 사태 때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 책엔 수강생 4명이 작성한 연표와 인간관계 지도가 브로마이드처럼 삽입되어 있는데, 꽤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자기 역사를 쓴다는 것>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 <한겨레> 자료 사진
다치바나는 강좌를 운영하면서, 많은 수강생의 글이 질적으로 도약하는 지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내보이기 꺼려지는 기억들이다. 지은이는 끔찍했던 고부 갈등이나 어린 시절 부모와 겪은 심각한 불화처럼 다 낫지 않은 상처를 직면하고 글로 표현해보라고 독려한다. 그럴 때 글의 호소력이 높아질 뿐 아니라 자신을 치유할 수도 있다면서. 프로이트가 마음속에 숨은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 곧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엔 ‘자서전 쓰기 강좌에 참여하거나 자서전 쓰기 모임을 만들라’거나, ‘다른 사람의 자서전을 읽어보라’, ‘자신이 맺은 인간관계 지도를 그려보라’는 등의 실용적인 자서전 쓰기 조언이 곳곳에 담겨 있다.

책 후반부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들을 소개하는데, 수준들이 꽤 놀랍다. 전공투에 참여해 좌익 학생운동을 하다가 대기업인 마쓰시타에 입사한 이후 신입 교육 7개월 만에 대기업 영업맨으로 변신한 남자의 이야기,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초창기 입사자로 일본 유통업의 변화상을 현장에서 체험한 사람의 이야기, 세계를 여행한 경험을 살려 국제협력 단체에서 일하고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로 ‘동반자’와 함께 두 아이를 낳은 뒤 혼자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등 자서전들의 흡입력이 꽤 높고, 우리나라 상황과 겹치는 데가 많다. 아무리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사건 하나쯤 없을 리 없는 것이다.

50살 이상을 대상으로 진행된 수업을 다룬 책이지만, 그보다 젊은 연령대의 독자들이 읽는 데도 무리가 없다. 특히 요즘처럼 평생 여러 개의 직업을 거치는 것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삶의 전환점은 더 일찍, 더 자주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고 싶은 욕구도 더 일찍, 더 자주 찾아오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10년 넘게 쓰지 않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일기가 꼭 필요할 테니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자서전 쓰기에 도움될 책들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한 권만 소개하고 지나가기엔 아까운 책들이 많다. 글쓰기와 자서전 쓰기에 정통한 전문가 세 명에게 ‘자서전 쓰기 방법을 다룬 책’과 ‘전범으로 삼을 만한 자서전’을 각각 한 권씩 추천받았다.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로 지금 가장 잘 나가는 글쓰기 책 저자이자 강사인 강원국은 강진과 백승권의 <손바닥 자서전 특강>(한겨레출판)을 “공저자의 자서전 강의 경력을 바탕으로 쓰기 쉽게 쓴 책으로, 자서전 쓰기 강좌 회원 모집을 목적으로 쓴 책들과 차별화된다”며 추천했다. 또 그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집문당)을 “최초의 자서전이라 일컬어지는 고전으로 구체성과 솔직함이 자서전의 생명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라며 권했다.

<손바닥 자서전 특강>의 저자인 소설가 강진은 메리 카의 <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다른)을 꼽았다. “왜 자전적 기록이 중요한가, 기억을 어떻게 글로 쓸 것인가,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어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안그라픽스)를 목록에 올리며 “다다오가 오사카 도톤보리 헌책방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책을 발견하는, 우연이지만 기적 같은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삶의 가장 큰 변곡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는 것은 자서전 쓰기의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출판평론가인 장동석 <뉴 필로소퍼> 편집장은 유호식의 <자서전>(민음사)을 들었다. “이 책은 모든 ‘자기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성찰적 글쓰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앙드레 지드 등의 자서전을 통해, 글쓰기가 범람하는 오늘 우리 시대 글쓰기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함께 권한 책은 노명우의 <인생극장>(사계절). “질곡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이 땅의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반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가 대신 풀어낸 부모의 이야기는 우선 세대 간 대화의 물꼬를 트는 방법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더불어 그 자체로 한반도의 역사인 모든 부모 세대의 이야기가 쓰여지기를 기대하는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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