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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눈물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랑을 뜨겁게 지닌 동체 대비의 보살로서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분

윤소암 칼럼 | 기사입력 2015/02/17 [03:04]

법정스님의 눈물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랑을 뜨겁게 지닌 동체 대비의 보살로서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분

윤소암 칼럼 | 입력 : 2015/02/17 [03:04]

2010년에 타계한 법정스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프다. 그리고 숙연해진다.

그날 길상사 조문객 사이에서 추모하고 돌아서려니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불일암에서 강원도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겨 스님을 만나기란 더욱 어려웠다. 다행히 그 후 길상사에서 몇 개월에 한 번씩 여는 대중 법회에 참여하는 스님을 만나려면 만날 수 있었으나 그저 언론 보도와 책을 통해 먼발치에서 스님의 근황을 접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스님을 처음 만난 곳은 뚝섬 봉은사였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쯤 내 나이 20대 중반이고 스님은 40쯤 되는 나이였을 것이다. 스님의 명저『무소유』에 실려 있는「너무 일찍 나왔군」의 글처럼 당시 봉은사는 허허벌판의 오아시스 같은 아름다운 절집이었다. 그 넓은 강남 땅에 절집과 드문드문 촌집 수십 채가 있었을 뿐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았던 섬 같은 곳이었고 봄부터 가을까지 서울 시민들의 주말 놀이터나 휴식처였다.

나는 봉은사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스님과 한솥밥을 먹었다. 유명한 다래헌 샘물과 이웃한 추사 선생의 판전현판도 매일 보다시피 했다. 스님은 일찍부터 나의 우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때 한국 지성인의 대표간판인 <동아일보>의「서사여화」칼럼을 스님을 통해 읽었고 뜻도 잘 모르면서 그저 좋기만 했다. 사회에서 낙오되고 염세주의자처럼 비치던 시절에 스님의 글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삶의 의미를 불러 일으켰다. 50년대 남북전쟁과 정치 혼란에 이어 불교계의 정화 사건 이후 절 집안은 세상보다 더 움츠러들었고 선불교 일변도의 청정 승가를 지향하던 터라 참선수도가 아닌 책을 본다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금기로 여겼던 때였다.

나는 몸마저 허약해 대학과 군대를 못 갔고 40세가 넘어서야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만화, 동화책,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은 독서 벽이 있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유명작가, 언론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는 등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 바빴다.

60년대 말 이미 승려 시인들이 여럿 문단에 등단해 나의 선망을 자극했으나 나는 법정스님의 짧은 칼럼과 수필을 읽고 그 영향으로 나 또한 수필을 썼다. 사실상 불교계에서 법정스님에 이어 두 번째 수필가인 셈이다. 워낙 재주가 없고 요령부득이어서 80년대 중반을 지나 겨우 책을 내고 수필 등단 몇 해 후 시인 등단을 했으니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남들은 이십 대에 시인, 삼십 대에 수필·소설가가 된다는데 나는 사십이 넘어 등단을 했으니 늦깎이다.

나의 글쓰기와 사회 참여는 법정스님의 영향이 크다. 스님의 간결한 문체와 깊은 사유 고독한 수행자의 삶, 그리고 대중들 간의 소통 정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정신까지 온전히 스님은 그때부터 나의 멘토였다.

엄격한 구도자 정신을 집약한 “선가귀감, 오두막 편지, 말과 침묵, 텅 빈 충만”이나 인간·자연·생명에 대한 외경을 담은“진리의 말씀, 영혼의 모음, 무소유,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등은 스님의 고결한 정신세계와 더불어 후세에 길이 남을 국민 교양서이고 세계적인 명저라 할만하다.

비록 스님에 비해 백분지일에도 못 미치지만 나는 스님의 걸림 없는 자유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 공동체 사상을 거울 삼아 글을 쓰고 조금이라도 닯고저 노력하였다.

그러나 70년대 초 봉은사에서 접한 스님의 결백증에 가까운 청정함은 괴퍅함으로 비쳤고 80년대 말 불일암으로 찾아간 후배에게 첫 수필집『청솔가지를 태우면서』의 추천사를 거절했던 스님에게 서운한 감정을 오랫동안 가졌었다. 스님이 자비심이라고는 없는 몰인정하고 비정한 분이라고 오해를 했다. 스님의 글과 행적이 세상에 유명세를 타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갔고 홀로 지내는 수행자의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욕구를 앞세우는 대중들의 성화와 번거로움이 결국 스님을 강원도 오두막집으로 추방(?)하는 결과를 낳은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스님의 출가 전후 삶과 행적이 밝혀진 것은 스님이 입적한 후였다. 승려는 원래 입산 수도 이후에는 세속 가족의 인연을 끊으므로 묻거나 답하지 않는 관행이 있다. 수행자로서 세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야 수행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님은 일반 승려들보다 더 특출하고 고독하게 지냈으므로 나는 스님이 늘 어렵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단지 글을 통해 소통했으나 한 점 티끌 없는 스님의 삶은 이 시대의 성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생 수도자로서 차디찬 지성과 고독한 삶, 맑고 향기로운 인품의 소유자였지만 스님이 가난한 집안에서 대학 중퇴를 하고 절에 들어갈 때 남긴 혼자 남은 누이와 할머니를 위해 흘린 눈물은 스님의 청빈한 수행자로서의 삶과 더불어 고귀한 보석이다.

스님은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랑을 뜨겁게 지닌 동체 대비의 보살로서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분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윤소암 : 『월간문학』 수필 부문(1987년), 계간 『시세계』 시 부문(1992년) 등단. 불교신문 논설위원·주필, 부산불교 대표, 정토구현승가회 지도위원, 민추협 운영위원, 국민운동본부 부산상임집행위원,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자문위원, 경실련, 지역감정해소국민협, 환경운동 부산상임위원, 운암 김성숙 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역임. 현)시인, 수필가, 시사평론가, 동아시아불교문화연구소, 한국불교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저서『허공에 점 하나 찍어놓고』『청솔가지를 태우며』『분열과 통합의 논리』『만법귀일 일귀하처』『승려가 죽어야 불교가 신다』『백담사 이팝나무』외 17권. soam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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