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임종게를 남기시지요.”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간다,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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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지음/김영사/1만4500원
간다, 봐라/법정 지음/김영사/1만4500원


“정기 법회일. 의례적인 행사. 이런 것이 불교이고 종교인가? 법회란 법다운 집회가 되어야 할 텐데 이런 모임이라면 법다운 집회가 될 수 없다. 구도의 길은 자기 자신이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째서 남의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오늘 점심공양 바로 후 웬 미친 녀석이 계집애를 하나 데리고 시근덕거리며 올라왔다. 여기저기 부처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큰절에 가면 큰스님들 많으니 거기 가보라 했더니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스님이 없다고 했다. 자기 부처 놓아두고 어디로 찾아다니냐고 호통쳐 내려보냈다. 내려가기 전 ‘어떤 것이 부처의 본질이냐’고 묻기에,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느냐 했더니 알아듣지 못하고 횡설수설. 장마가 오려는지 미친놈들이 설치는구나.” 

세상에 무소유라는 큰 울림을 주고 간 법정스님의 8주기를 맞아 스님의 글과 어록이 일반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연합뉴스
법정 스님이 남기고 간 글 가운데 한 토막이다. 벌써 스님의 입적 8주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무소유로 일관했다. 큰 울림을 주고 간 스님의 유고집과 유품 등을 찍은 사진집이 최근 나왔다. 현대 미술학자도 감탄할 만한 스님의 수준 높은 심미안과 질박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이다.

이 책 글들은 스님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강원도 산골 시절에 대부분 쓰였다. ‘수류산방(水流山房)’이라 이름 붙인 마지막 거처에서 스님은 세상을 향해 육필 메모와 붓글씨를 남겼다. 자연과 생명, 홀로 있음, 침묵과 말, 명상, 무소유, 차, 사랑, 섬김 등 주제별로 다양하다. 스님의 치열한 공부와 번뜩이는 감성이 느껴진다. 어느 장을 읽어도 여운이 깊은 색다른 잠언집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성철과 법정이 안거 중 만나 담소하고 있다.
특히 임종 직전에 남기는 말 ‘임종게’가 처음 공개됐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상좌스님이 물었다. “스님, 임종게를 남기시지요.” 법정은 답했다.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 간다, 봐라.”

197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옥중 고초를 겪던 무렵 쓴 세 편의 저항시와 당시 투사들과 주고받은 글도 처음 공개됐다. 김수환 추기경, 장익 주교, 함석헌, 향봉 스님, 구산 스님 등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지인들이 간직했던 스님과의 주요한 일화들도 부록에 담겼다. 자신에게는 칼날처럼 차가웠지만 타인에게는 따뜻한 유머를 간직했던 스님의 면모가 드러난다.

법정과 김수한 추기경은 불교-가톨릭 대화를 강조하며 자주 만났다고 한다.
육필 원고의 한 대목이다.

“올해의 행동지침 써서 식탁 앞에 붙이다/1. 과속차로에서 탈피-천천히 즐기면서/2. 아낌없이 나누라 -본래 무일물(本來 無一物) 삶의 종점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3. 보다 따뜻하고 친절하라 -무엇이 부처이고 보살인지 시시로 살피라.”

무엇보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자아의 깨달음이었다.

“내가 없어야 한다. 자아(自我)가, 자아중심적인 행동이, 되어가는 것이 없어야 한다. 크나큰 침묵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것의 텅 비어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텅 비어 있음에는 무한한 공간이 있다. 거기에는 이기주의적인 에너지, 한정된 에너지가 아닌 무한정한 에너지가 있다.”

법정이 쓴 ‘이밖에 무엇을 구하리 무인년 입춘절’ 친필액자.
김영사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은 전남대 상대 재학 시절 1955년 서울 선학원에서 효봉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이듬해 사미계를 받고 1959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불교사전과 경전 편찬 일을 하던 중 함석헌, 장준하 등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이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자 1992년 아무도 모르게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떠났다. 1996년 서울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로 있었다. 2010년 3월 11일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이 밖에 무엇을 구하리’ 제목으로 스님의 유품을 찍은 사진집도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진집을 엮은 김용관 사진작가의 후기다.

“스님께서 머무셨을 공간, 남기신 흔적들을 한동안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멋지게 예쁘게 촬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사진가의 기술, 재주는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전기도, 인공적인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던 그 공간에서 스님께서 보셨던 그 빛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전달이라 생각했습니다. 선명하고 반듯하게, 가장 기본적인 저의 역할만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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