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락 도르락 툭툭' 매화가지에 100만개의 봄이 터진다, 삼월의 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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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에 봄이 왔다.
고혹적인 색을 자랑하는 광양 홍매.

[광양=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우석기자] 매화가 터지고 있다. 누가 뭐래도 봄을 부르는 꽃이다. 눈 아래 피어나는 복수초, 산속에 노란 구름을 만드는 산수유 등도 있지만 그 화사함에선 감히 비할 바가 못된다.

매화는 볕좋은 광양에서 가장 먼저 향내를 피운다. 매실농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일조량이 많아 전국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틔우기 때문이다.
백매는 아직이지만 3월 하순에는 만개한다.

벚꽃과 닮았지만 매화에는 훨씬 기품이 서려있다. 꽃도 가지도 그렇다.(그렇다고 벚꽃이 천박하단 뜻은 아니다. 연분홍 벚꽃은 고혹적이며 서정적이다.)
잔인한 겨울을 버텨낸 고불한 한 가지에서 툭툭툭 터지는 매화는 선비의 잘 다린 도포처럼 절제된 매력을 풍긴다.

누구보다 매화를 빨리 보고픈 마음에 광양을 다녀왔다. 봄비가 도둑처럼 다녀간 어느날 오후 남도는 봄을 선포하는 반가운 개화 소식이 한창이었다.

광양 매화마을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다.

◇나뭇가지에 달린 백만 개의 봄
무슨 영화였지? 계속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설정. 매화를 두고 나도 몇 년을 그랬다. 꽃이 피었나 물어보고 광양에 오고 빈 가지만 보다 돌아오기를 십년 가까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화 전에 취재를 하고 만개를 앞둔 상태를 기사를 써야하니 보름 쯤 빨리 갈 수 밖에 없다. 꽃 피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여행기자 치고 만화방창 꽃구름을 직접 본 이는 별로 없다. 이런 제길.

그래서 내게 ‘광양은 불고기’였다. 불고기는 배신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번엔 홍매를 제법 봤다. 오래 바라보면 눈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진한 핑크빛을 내는 홍매는 길 주변에도 섬진강변에도 터져나와 그 심하게 매혹적인 색을 자랑하고 있다.

봄꽃 중 가장 먼저 피어난 홍매를 즐기고 있다.

매화는 사람을 잡을 작정이라도 한 듯 굽이치는 도로변에 피어났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달려가면 가녀린 가지에 ‘조화’처럼 분홍 꽃이 다닥 다닥 붙었고 지나는 트럭은 어김없이 경적을 울렸다. 데시벨 높은 공기압식 경적이 개화를 앞당기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신기하게도 그 길에만 피어있다.

‘위험한 유혹’ 아래 색의 향연을 실컷 만끽하다 내려와 다압 매화마을로 향했다.

광양 .다압 매화마을에 피어난 홍매

하동과 맞붙은 다압면. 광양, 아니 전남에선 가장 외진 곳(무안 전남도청에서 2시간도 넘게 걸려, 차라리 창원 경남도청이 더 가깝다)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또렷히 기억한다. 그 유명한 광양매화농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른 봄마다 십만 그루의 매실나무에서 구름같은 꽃이 피고 또 구름같은 사람이 몰려온다. 원래는 매실을 수확하는 농장이니 ‘매실마을’이 맞겠지만 지금은 꽃으로 더 유명하다. 애초 관람시설이 아니다. 식품명인으로선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선정된 홍쌍리 명인이 매일같이 나무를 가꾸고 장과 장아찌를 담그는 ‘살아있는’ 농원이다.
광양 매화마을은 이리저리 둘러볼 수 있는 산책로가 많다.

2500여개 장독대가 섬진강을 바라보고 섰고 뒷동산에는 대숲, 매화밭이 산 등성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아직 일러 홍매를 제외하고 나뭇가지엔 낙지 빨판처럼 미처 틔우지 못한 몽우리만 가득 붙어 있다.

봄맞은 섬진강 강바람은 대숲에 숨쉬듯 댓잎소리를 내게 만들고, 이제 겨우 한둘 씩 터져나는 꽃몽우리로부터 향기를 모아 농원 전체에 공급한다.
봄은 매화를 타고 가장 먼저 내린다.

꽤 넓지만 아기자기하다. 이리저리 이어진 오솔길은 매화터널을 지나고 내려오면 초가와 기왓집을 만난다. 초가는 어설프지 않다. ‘다모’, ‘천년학’ 등 드라마·영화의 촬영배경이었던 까닭이다. 세트장으로 지었지만 이젠 세월의 때가 묻어 자연스럽다. 손바닥만한 마당엔 역시 매실나무가 꽃가지 그늘을 드리운다.

광양 매화마을.

매화는 삼월 보름께 만개할 전망이다. 이 기사가 나가고 축제가 열리는 17일이면 연분홍 구름이 광양 곳곳을 덮고 있을게다. 지금 이순간에도 약 300만개의 봄이 마이크로 웨이브를 만난 팝콘처럼 ‘도르락 도르락’ 터져나고 있을테니.

홍쌍리 명인. 광양 매화마을.


◇매향에 취한 봄날의 꽃밭
장독대에서 봄볕을 쬐다가 명인을 만났다. 매화마을을 일궈낸 홍쌍리 명인은 “이곳에 와서 꽃만 구경하지 말고 건강을 생각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매화는 아름답지만 보름 뿐이며 매실이 영글어 사람을 제대로 피어나게 만들어 준다는 뜻. 겨우내 익은 매실 장아찌를 권했다. 하나 얻어 먹어보니 아삭하니 씹는 느낌이 좋고 맛은 새콤달콤했다.

매화마을에 봄이 찾아왔다.

고추장을 첨가한 것은 영락없는 밥도둑이다. 명인과 눈을 떼지않은 채 말을 건네며 손은 계속 장아찌를 집었다. 혹시나 얻어갈 수 있나해서 비닐봉지 비슷한 것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내려오는 길, 잔맛이 남은 혀만 쩍쩍 다시며 ‘락앤락’을 생각했다.

마음이 바빴다. 스타필드 고객 휴게 벤치에 핸드폰을 두고온 사람처럼 바삐 내려왔다. 혹시나 해서 도선국사마을 뒷산 옥룡사지를 갔다. 매화가 이르니 동백이라도 볼 요량이었다. 이름에 겨울 동(冬)자가 들어가는데 설마 춘삼월에 피어난 동백꽃이 하나도 없을라고?.

광양

없진 않았다. 그 넓은 동백 군락지 옥룡사지에 단 한 그루만이 탐스러운 붉은 꽃망울을 매달고 있다. 원래 동백이란 아이돌 그룹처럼 여러 송이가 이리저리 피어나고, 또 땅바닥에 떨어져 붉디붉은 꽃잎을 살포시 벌려 샛노란 꽃술을 드러내야 제맛 아니던가.

키가 껑충한 동백나무가 사과처럼 빨간 꽃 몇 송이만 움켜쥐고 있다. 실망 가득이다. 올해도 이렇게 꽃에 또 당하고 만다.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매화가 한창일때 동백이 개화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릴레이 바통처럼 말이다.

그래도 기분이 들떴다. 하얗거나 회색이 되버린 겨울만 그동안 실컷 봤다. 매화며 동백꽃이 툭툭 터져나온 것을 보니 정말 봄이 온 줄 알겠다. 롱패딩 따위를 입고 ‘춘래불사춘’이라 한탄하던 일주일 전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순신대교가 보이는 광양항.

눈이 즐거워지니 배가 화를 낸다. 혀도 입도 배와 한편이다. 망덕포구의 벚굴과 광양불고기, 백운산 닭숯불구이 등 먹을 것도 많은 곳이 광양땅이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광양 망덕포구.

일단 목이 칼칼해 백운산 동동마을을 갔다. 나무에서 봄을 알리는 물이 쏟아진다. 고로쇠. 그것도 광양 백운산 고로쇠다. 나무(모든 나무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에 드릴을 살짝 대고 구멍을 내면 정말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봄에만 나온다니….
봄을 알리는 물, 광양 백운산 동동마을 고로쇠 채취 현장.

광양 백운산 고로쇠 채취 조합 소속 아저씨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귀찮았던지 고로쇠 물을 한 병 담아 주며 가라고 했다(다음 작업장은 험하다고 돌려말했다). 단번에 비웠다. 아주 청량하다. 미세먼지로 몇겹 이상 퇴적층이 쌓였을 식도가 한번에 씻겨가는 느낌이다. 달달하고 시원한 천연 음료를 마시니 봄을 한 모금 채워넣은 기분이다. 보통 비디오게임 중에는 사람 모양 틀이 있고 그안에 에너지가 닳거나 채워지는 그래픽이 있는데 붉은색으로 주욱 채운 느낌이다. 빈병을 꺼내 보였으나 아저씨들은 어느새 비탈을 내려가고 없다.

예로부터 ‘천하일미 마로화적’이라 불렸던 광양불고기. 금목서 회관.

이제 광양읍으로 향한다. 불고기든 뭐든 ‘살이 되고 살이 되는 것’을 먹어야 겠다. 광양은 길이 머니 맛좋은 음식을 먹어야 달려온 수고에 제값을 치른다.
광양에 오면 모든 기관으로 봄을 느낄 수 있다. 오감이 여지껏 신나 날뛴다.
demory@sportsseoul.com

여행정보
●먹거리=광양하면 불고기다. 광양읍 금목서회관은 광양불고기와 등심 구이 등 생고기 종류를 ‘제대로’ 하는 집이다. 숯부터 좋다. 참숯에 너붓너붓 썰어낸 불고기를 올려 구워먹는다. 매실과 효모를 써서 진하지 않은 양념을 내세운다. 갖은 나물과 장아찌, 김치 등 찬의 면면도 훌륭하다. 명불허전이다.
금목서회관 (061)761-3300.
광양읍 ‘비밀’의 이베리코 흑돼지 바비큐.

광양읍에 인근에선 보기드문 집이 생겨났다. 가게 이름도 ‘비밀(B·mil)’이다. 영락없는 카페 분위기지만 스페인산 이베리코 흑돼지를 바비큐로 맛보는 집이다. 미리 주문하면 꽃목살, 삼겹살 등을 구워서 플레이트에 내온다. 매콤달콤한 닭볶음탕도 있다. 소주 한잔도 좋지만 체코산 흑맥주와 문배술 등 다양한 전통주도 맛볼 수 있다. 맛나고 즐거운 식사를 겸해 술 한잔 하기 딱인 곳이다. 밝은 분위기라 술꾼들은 발을 들여놓기 어렵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들어가보면 집에서 마시는 듯 편안하다.(070)4015-4224
굽기 전에 바로 양념을 살짝 하는 광양 불고기는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한다. 금목서 회관.

●매화축제=광양매화축제가 17~25일 광양시 섬진강변 다압면 매화마을 등에서 펼쳐진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찾는 대표 봄꽃축제인 매화축제에선 매화 무늬 한복패션쇼, 셰프가 진행하는 매실 쿠킹쇼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음악 콘서트와 건강밥상 토크 콘서트 등 즐길거리·배울거리도 많다. 광양시는 축제기간 관광객 교통 편의를 위해 둔치주차장부터 매화마을 삼거리 구간을 순환버스 전용구간으로 지정 운영한다. 광주 터미널에서도 축제장까지 임시버스를 운영할 계획이다.(061)797-1987, 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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