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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가야산 해인사--알수록 신비스러운 ‘한국의 불가사의’


[헤럴드경제=합천] 8톤 트럭 35대 분의 대장경판을 조심스레 포장해 지게에 짊어진 남정네와 머리에 인 여인네, 그리고 소달구지에 가득 실은 사람들이 끝이 안 보이는 긴 행렬을 이루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간다.

행렬 맨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가 길을 안내하고 수많은 스님들은 독경을 하며 뒤따른다.

조선 태조 7년(1398) 5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서울의 지천사(支天寺)에 임시로 옮겨 모셨던 고려 팔만대장경을 경남 가야산 해인사로 이송해 갈 때의 모습이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펼쳐졌다. 첫번째 간행된 구판 대장경은 1011년에 불력(佛力)을 모아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는데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됐던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5년 뒤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한 것이 현재의 팔만대장경이다.

대장경판 모형


고종 23년(1236) 몽골군의 침입으로 크게 화를 입은 고려는 호국불교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제작을 국가사업으로 크게 벌였다.

당시 천도한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본사(本司)를 두고 진주, 남해에 분사(分司)를 설치해 대장경판을 새기기 시작, 장장 16년의 대역사 끝에 고종 38년(1251) 팔만대장경을 완성하게 된다.

이 팔만대장경판은 부수(部數)로는 1516부로 책으로 엮으면 6815권 분량이다. 이를 하루 1권씩 읽는다고 해도 18년 이상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그런데 당시 그 험한 길로 이 엄청난 분량의 대장경을 소달구지에 싣고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인 행렬이 조선 태조 7년(1398) 5월에 시작돼 이듬해 정종 원년(1399)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인사에 옮겨졌으니 장장 8개월이 걸렸다. 그 거리를 보통 걸어서 간다면 보름 전후면 갈 거리였다.

일설에 의하면 한강에서 배에 싣고 서해를 통해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까지 거슬러 가서 해인사로 운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왕조는 왜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보관하다 다시 합천 땅으로 옮겼을까.

이는 전란에 소실된 이전의 뼈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안전한 보관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은 곳이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였다.

가야산 해인사는 대장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석했던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몽골군의 침략과 왜구의 잦은 노략질로 호국불교의 대명사인 대장경을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하는 문제가 급했다. 강화도나 서울은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해인사 모습


해인사는 남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왜구의 발길이 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북의 몽골 등 침략에서도 먼 남쪽 땅이니 지리적으로 가장 안전했다. 게다가 이 땅은 이미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최치원 선생이 은둔의 땅으로 삼고 들어와 살 정도로 피장처로서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훗날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민중들이 십승지마을로 삼아 찾아 들어온 곳이었다.

이렇게 깊은 곳에 보관을 했으니 전국을 불사른 임진왜란의 화도 피해갔으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속에서도 온전히 보전해 오늘날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이 ‘나무로 된 작품’이 7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러나 갑작스런 문제가 생겼다. 2013년 11월 KBS에서 약 1만개의 대장경에서 좀이 생겼다고 긴급 보도했다. 정확한 조사와 대책이 마련돼야겠지만 적어도 750여 년 간 나무제품이 온전히 보전돼 왔고 외침에서도 변고를 맞지않은 세계인의 유산이 됐다는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해인사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팔만대장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여행가고 싶어하는 해인사다. 심지어 필자의 지인 미국인 크리스(Chrisㆍ시카고 거주) 씨는 해인사 여행을 버킷리스트로 꼽고 기다릴 정도로 외국인들도 이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여행을 갈망하고 있는 명소다.

이 팔만대장경을 모셨기 때문에 가야산 해인사를 ‘법보(法寶)사찰’이라고 부른다. 즉 우리나라 ‘삼보(三寶)사찰‘의 하나다. 팔만대장경은 대장경 수가 8만여장이어서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아주 많음’을 나타낼 때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데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절이라 해서 ‘불보(佛寶)사찰’,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는 절이란 뜻으로 ‘승보(僧寶)사찰’이라고 해서 이 3개 사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장경판과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가 각각 국보 제 32호와 제 52호로 지정돼 있다.

세계인의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있는 이 깊은 산사로의 여행을 떠나본다.

워낙 깊은 산 속에 있는 해인사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승용차든 버스든 주차장에서 20분을 오르막 데크길을 따라 올라야 일주문이 맞아준다. 차량이 일주문까지 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사찰 관계자 전용으로 엄격 통제하므로 20분간 초연히 마음을 비우는 단계로 걷는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대신 도중에 성보박물관을 둘러볼 수도 있고 성철 스님의 멋진 부도도 거쳐갈 수 있다. 우리 보다 조금 앞시대에 살다 간 성철 스님 이야기도 먼 훗날 후손들의 귀에는 전설 처럼 들리겠다.

일주문 아래쪽 왼편에 보면 큰 바윗돌에 자랑스럽게 ‘세계 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이라고 새겨져 있다.

나는 이 일주문 앞에서 풍수지리 연구가이시며 합천군 한문교육 선생님이시자 문화관광해설사이신 손홍배 선생님을 만나기로 해 함께 공부하며 여행했다.

일주문은 부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이곳을 들어서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고사목이 있다. 고사목이라고 우습게 넘길 나무가 아니다. 해인사 창건 설화를 품은 나무다.


해인사 창건 때 심은 기념식수,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1945년 고사목이 됐다.

신라 40대 애장왕의 왕비가 병환이 깊자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이자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 이정(理貞)화상이 애장왕 3년에, 이 가야산에서 전국의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불러 치료한 결과 병이 낫자 기뻐한 왕과 왕비가 서기 802년 10월16일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게 도와주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나무는 그때 심은 기념식수로 보고 있으며 의미깊은 1945년까지 살다 고사됐다고 하니 1100살을 훨씬 넘긴 나무였다. 그 위쪽에는 같이 심었던 것으로 보이는 몹시 늙은 한 그루가 더 있는데 1200살을 훌쩍 넘겨 살아있는 나무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렇게 지어진 절 해인사는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로 근처 암자만도 16개가 에워싸고 있고 새로 또 생겨나고 있는 곳도 대여섯개나 된다.

고목 다음의 문은 ‘해인총림(海印叢林)’이라는 현판이 걸린 봉황문(사천왕문)이다. ‘총림’은 참선도량인 선원과 교육기관인 강원, 계율기관인 율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인데 국내에는 현재 총 5개 사찰에만 이 명칭이 사용되는 귀한 용어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해인사의 이모저모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의 작은 건물이 국사단이다. 국사단(局司壇)은 우리나라에 또 하나의 신화를 쓰고 있는 건물이다. 국사대신을 모신 단으로 이 ‘가야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ㆍ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가졌다. 큰아들은 이진아시왕으로 대가야국을, 작은아들은 수로왕으로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국했다는 이야기다. 이 가람을 수호하는 신을 모신 단이기 때문에 도량 입구쪽에 배치했다.

세번째 관문은 해탈문이다. 속세를 완전히 떠나왔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아 이를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이제 부처의 세계로 들어섰음을 알린다. 또한 이곳 해인사는 여기까지 총 33계단을 오르게 돼 있는데 이 역시 ‘33천’에 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해인사는 보통 사찰과 달리 올라가며 층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주문에서 시작해 대장경판전까지 가면 108개의 계단을 오르게 되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이 문에서 현판을 유심히 봐야 하는데 계단을 오를 때의 현판은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문 안쪽에 ‘해탈문(解脫門)’으로 돼 있다.

그리고 마당으로 들어서서 꼭 뒤를 돌아보자. 또 하나의 현판이 있다.

바로 수려한 글씨로 쓰인 ‘해인대도량(海印大道場)’이다. 이 글씨는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다. 손 선생님의 빠뜨림 없는 친절하신 설명에 무심코 스쳐넘길 것들이 제법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왔다. 스쳐 지나쳤으면 ‘의미없는 것들’이 됐을 것을, 듣고 보니 이렇게 이야기 담겨있고 의미를 지닌, 말 그대로 ‘의미있는 것들’이 되었다. ‘의미있고 없고’의 차이는 ‘알고 느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한자로는 ‘도장(道場)’으로 쓰지만 불교에서는 ‘도량’으로 읽는다. ‘부처님이 머무는 신성한 곳’을 의미한다.

해탈문을 들어서서 본 모습. ‘해인대도량’이라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다.

이 마당이 구광루 마당이다. 구광루(九光樓)는 화엄경에서 온 말로 부처님이 아홉 번 설법할 때 그 때 마다 백호 눈에서 아홉 번 빛이 났다 해서 ‘구광’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설법을 듣고 공부하는 곳이다.

여기선 구광루의 현판 글씨 모양의 의미와 마당에 펼쳐진 탑돌이 시설물을 눈여겨봐야 한다.

구광루 현판 글씨는 자세히 보면 세 글자의 크기가 다르다. 갈수록 커진다. 이는 ‘유선형’을 의미하고 유선형은 바다의 돛을 상징해 ‘순항’한다는 뜻을 담았다. 즉 ‘해인’의 ‘바다 해(海)’ 자에서 연유된 것인데 풍랑을 이겨내라는 의미를 담아 해인사 전체 57개의 가람 배치 역시 유선형으로 설계했다. 그 깊은 의미를 ‘구광루’ 글자 크기로 표현한 것이다.

마당에는 탑을 중심으로 마치 미로 처럼 생긴 길이 있다. ‘해인도(海印圖)’다. 해인도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화엄사상을 요약한 210자 7언 30구의 게송(偈頌ㆍ부처의 공덕이나 교리를 담은 노래 글귀)을 ‘만(卍)’자 도안에 써 넣은 것인데 이 마당에 그 모형을 본 떠 탑돌이 코스를 만들었다. 출발점에서 두 손 모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부터 시작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맺는 210자를 외우면서 돌아 나오면 ‘깨달음’에 도달해 처음에 들어갔던 곳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54번 꺾어 돌아 같은 곳으로 나온 것 역시 부처님의 세계임을 의미하고 또한 ‘윤회’의 의미이기도 하다.

구광루. 현판 글씨가 점점 커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해인도를 돌아 나오면 다시 원점이다. 해인사만이 갖고 있는 풍경이다.

해인사만의 특별한 광경이다. 이 곳에는 사운당과 범종각, 큰 우물도 있다.

여기서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석탑 하나와 석등 하나가 있다. 보통 좌우로 두 개의 석탑이 있음직한데 여기서 하나인 것은 절의 배치가 가야산 정상과 일직선상에서 살짝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 중심축을 맞추기 위해 하나만 그 선상에 배치했다고 한다.

여기서 전면 계단 위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다. 즉 대웅전이 있을 자리다. 그런데 이름이 생소하다. 대웅전은 부처님을 가운데 모신 경우에 쓰는 말로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반해 해인사는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심으로써 이름을 대적광전으로 하고 있다.

사찰기행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것인데, 이 명칭을 보면 이 절은 누구를 모셨는지를 알 수 있다. 관음보살을 모시면 관음전, 미륵보살을 모시면 미륵전이 되는데 ‘전(殿)’은 임금이 있는 궁궐과 같이 최고의 부처님이 계시는 건물에 붙이는 명칭이다.

이 대적광전 전면 기둥에 붙은 주련의 글씨도 의미있다. 총 6개가 있는데 맨 오른쪽 2개는 고종황제가 7살 때 썼다고 한다. 왼쪽 4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다.

석탑과 석등, 그리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적광전.
대적광전의 주련. 6개의 기둥 중 오른쪽 두 개는 고종황제가 7살에 쓴 글씨라니 놀랍다. 그 나머지 왼쪽 4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왼쪽 하나는 그 4개 중 하나)

아까 그 마당에서 이 대적광전에 오르는 계단이 3개가 나란히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신도(神道)이므로 관람객은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고 왼쪽 계단으로 내려오는게 예법이다.

대적광전 앞에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게 있다. 건물과 마당과 이어지는 작은 낭떠러지에 좌우로 망주석이 2개 서있다. 보통 왕릉 같은데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절에서는 희귀한 모습이다. 해인사만의 또 하나의 특징인데 자세히 보면 작은 동물그림이 양각돼 있다. 무슨 그림일까. 다람쥐다. 오른쪽 계단 가까이 있는 망주석 다람쥐는 위쪽으로 오르는 모습이고 반대쪽 내려가는 계단쪽 다람쥐는 내려가는 모습이다.

여기에 많은 뜻을 갖고 있는데 천상의 세계의 부처님께 알현하러 올라가고 또 용무를 마치고 내려오는 의미임과 동시에 탄생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람쥐는 쳇바퀴 돌 듯 이 또한 ‘윤회’의 의미를 갖는다.

이 망주석의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데 꼭 관찰해 보자. 저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사는 ‘내 모습’일 테니까.

대적광전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불(木佛)이 모셔진 대비로전(大毘盧殿)이다. 이 곳에는 똑 같은 모습의 목불이 2개 모셔져 있는데 신라 진성여왕과 그가 사모한 대신 김위홍(金魏弘)이다. 살아생전 여왕이 대신과 사랑을 나눌 수 없으니 사후세계에서라도 함께 하라는 염원으로 조성한 목불로 그 사연을 담은 기록물이 이 복장에서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건물의 주련에도 ‘일존진성일존위(一尊眞聖一尊魏)’라는 글로 ‘진성여왕과 김위홍’의 이름을 담아 두고 있다.

이렇게 귀중한 유산임이 알려진 그 무렵 마침 2005년 양양 낙산사가 화재로 완전 소실되자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이 귀중한 유산을 지킬 안전장치를 갖췄다. 화재감지기가 작동하면 이 두 목불은 순식간에 지하 6m 창고로 내려가면서 동시에 차단문이 닫혀버린다고 한다. 천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불에 대한 ‘예우’인 셈이다.

대적광전 옆 대비로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불(아래 작은 사진)을 모신 곳이다. 기둥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일존진성’은 진성여왕을, ‘일존위’는 진성여왕이 사모한 대신 김위성을 뜻한다.

이 목불이 금상 처럼 보이는데 개금불사한 것이다. 절을 한 후 불상과 눈을 맞춰보자. 불상이 웃는 얼굴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진성여왕의 그 ‘천년사랑’이 이뤄진다는 의미다. 아마 내 마음 속으로 읽을 수 있는 표정인 것 같다.

대적광전 뒤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마지막 관문, 세계인이 자랑스러워하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성역이다. 국보가 있는 장경판전이다. 건물이 4개동이 사각형의 배치를 하고 있는데 남북 건물은 같은 모양이면서 크고 동서 건물은 역시 같은 모양새로 작은 건물이다.

이 4개동의 건물의 기둥이 총 108개로 돼 있다. 역시 ‘불교의 숫자’다. 건물 벽면에 만들어진 통풍구를 잘 보면 아래 위 크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앞쪽의 통풍구는 아래쪽이 크고 위쪽이 작다. 뒤쪽 통풍구는 위쪽이 크고 아래쪽이 작다. 이는 앞쪽은 낮은데서 불어올라오는 바람이 큰 통풍구로 많이 들어오게 함이고 뒤쪽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위쪽의 큰 통풍구로 빨아들이게 함으로써 내부에서 충분한 습도유지를 할 수 있게 한 고도의 과학이 숨은 통풍구다. 쉽게 말해 어느 쪽이든 큰 통풍구로 바람이 들어오고 머물다가 작은 통풍구로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것이 700여년 목재 대장경판을 길이 보전해온 비결 중 하나다.

대적광전 뒤에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관문.
팔만대장경을 모신 가람들. 아래 위 통풍구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이렇게 잘 보전돼 왔던 대장경에 지금은 초비상이 걸렸다. 일부 좀이 먹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만 여장으로 알려진 손상된 대장경판, 복원이 가능할지 아니면 그 판의 인쇄본을 찾아 다시 조각해 만들어야 할지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원형 대로 복원될 수 없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관리요원이 철저히 출입통제를 하고 있어 그 안타까운 현실을 직접 볼 순 없었다. 건물 옆에 마련된 대장경 모형판은 그대로 전시하고 있어서 내방객들은 대장경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오다 보면 큰 고목(전나무)이 보인다. 학사대(學士臺)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나무다. 통일신라 말기 신라 최고의 지성인이라 칭송받던 최치원은 신분의 한계에 부딪혀 자신이 꿈 꾼 ‘국가개조’를 실현할 수 없자 40세가 막 넘은 나이에 은퇴하고 이곳 가야산으로 은둔해 살았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꽂은 지팡이가 1200년의 세월을 이렇게 자라왔다. 학사대라고 부른다.

해인사 이웃에 가족과 함께 거처를 마련한 최치원은 줄곧 산 넘어 이 곳으로 와서 지냈는데, 하루는 스님과 지인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자신의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잘 살아남으면 내가 가야산 신선이 된 줄 알아라” 라고 했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천년을 넘게 아직도 푸른 잎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말 대로 신선이 되었는지 몰라도 그래서 최치원은 태어난 연도는 있어도 사망연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인사 바로 옆에는 용탑선원과 사명대사가 말년에 들어와 지은 홍제암이 붙어있고 주변에도 암자가 수없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해인사와 별도로 주변 암자를 묶어 ‘암자 투어’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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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경이란 : 부처님이 설법한 내용을 생전에 문자로 기록하지 못했는데 80 생애를 마치고 열반 후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 여러 과정을 거쳐 대장경으로 만들게 됐는데 지금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뜻한다.

석가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經藏), 교단(敎團)의 계율 및 이를 해설한 율장(律藏), 경(經)의 주석문헌(注釋文獻)인 논장(論藏)을 집대성한 불교의 대경전으로 경·율·론(經律論)이 삼장(三藏)이다. 후대에는 여러 고승들의 문헌도 포함됐다.

‘장(藏)’이란 산스크리트(梵語)어로 피타카(pitakaㆍ광주리)에서 유래해 ‘문서 ·교의(敎義)를 담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경(經)’은 수트라(sū tra)에서 연유했고 날실(經絲)을 뜻한다. 그래서 ‘삼장’은 경·율·론(經律論)을 새긴 패엽(貝葉)을 담은 세 개의 광주리(Tripitakaㆍ트리피타카)란 뜻이다.

초창기에는 나뭇잎, 금속, 돌에도 만들었지만 취급과 보존 등에서 나무가 가장 훌륭했기 때문에 목판 대장경이 만들어지게 됐다고 한다.

■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란 :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자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을 안고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데다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해 앞에 매화산을 바라보고 있어 수려한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한국 사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절이다.

현재 주지스님은 선해 스님으로 1973년 명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4년 해인사에서 도견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6년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계했다. 1978년 해인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으며 1990~2002년까지 해인사 노전 소임을 보았고, 2012년 7월 24일 법보종찰 해인사 26대 주지로 취임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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