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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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속내

  • 저자
    조은영
  • 출판
    산과들
  • 발행
    2020.11.20.
책 소개
“조은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갈망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아 늘 목마르”(「마흔의 시」)다고 말하고 있지만 겸손이 지나치다. 조은영의 시집은 성장하는 시인의 사유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서 응당 가지게 되는 낡지 않은 은유를 발견해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위해 가끔은 후퇴했다가도 다시 물러난 만큼 전진하며 나가는 자신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시에 등장하는 몇 어휘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그녀도 많은 경험치를 가진 세대이자 슬슬 기억력 감퇴를 걱정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서글퍼하고 한탄할 시간이 그녀에게는 없다. 한낱 행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지나가는 시인의 세월, 시인의 세계 속에 무한히 널려 있는 소재들을 잡기 위해 그녀가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이 시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책 정보

책 정보

  • 카테고리
    한국시
  • 쪽수/무게/크기
    122198g130*205*8mm
  • ISBN
    9788990918314

책 소개

“조은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갈망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아 늘 목마르”(「마흔의 시」)다고 말하고 있지만 겸손이 지나치다. 조은영의 시집은 성장하는 시인의 사유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서 응당 가지게 되는 낡지 않은 은유를 발견해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위해 가끔은 후퇴했다가도 다시 물러난 만큼 전진하며 나가는 자신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시에 등장하는 몇 어휘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그녀도 많은 경험치를 가진 세대이자 슬슬 기억력 감퇴를 걱정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서글퍼하고 한탄할 시간이 그녀에게는 없다. 한낱 행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지나가는 시인의 세월, 시인의 세계 속에 무한히 널려 있는 소재들을 잡기 위해 그녀가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이 시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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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평 론



시인, 은유의 속내를 발견하다



구미리내 (시인, 문학박사)





우리는 자라면서 언어를 습득한다. 인간에게 언어는 필수다. ‘언어’가 빠진 인간을 우린 가끔 늑대인간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회에서 떨어져 동물 사이에서 자란 인간은 모습 자체만으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동물에게는 인간의 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배후는 바로 이성이다.

또한 언어라는 것은 혼자 스스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우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렇듯 관계 속에서 얻어내고 성장한 언어는 사물의 유사성을 은유로 표현할 능력도 가지게 된다.

시언어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은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과 사물 혹은 어떤 사물과 개념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하얀 눈을 보고 같은 색깔과 비슷한 형체를 가진 설탕 혹은 소금과의 유사성을 찾는 일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을 가지고 은유적 시를 쓰는 일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능력이다. 은유로 인해 시인 역시 특별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것, 이를 테면 사람이나 사물, 경치 등을 보고 느끼고 듣고 먹는다. 그 행동의 반복은 곧 삶이 된다. 삶은 살아있다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이라고 누구나 문학의 세계를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체험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이 살면 살수록 많은 경험이 쌓이게 마련인데 살면 살수록 머리가 굳어져 기억력이나 사고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장년의 시인들은 많은 경험을 축적하는 동시에 뇌(머리)의 퇴행을 막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며 뛰어난 은유 능력까지 가진 위대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그들에게 사회는, 세계는 무한한 호기심의 대상이다. 다양한 시적 소재가 길 위에 널렸어도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 메타포적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발견하는 시인이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이다. 이 낡고 오래된 은유에 대한 서술은 지겹지만 명료한 사실이다.





조은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갈망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아 늘 목마르”(「마흔의 시」)다고 말하고 있지만 겸손이 지나치다. 조은영의 시집은 성장하는 시인의 사유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시인으로서 응당 가지게 되는 낡지 않은 은유를 발견해내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을 위해 가끔은 후퇴했다가도 다시 물러난 만큼 전진하며 나가는 자신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시에 등장하는 몇 어휘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그녀도 많은 경험치를 가진 세대이자 슬슬 기억력 감퇴를 걱정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서글퍼하고 한탄할 시간이 그녀에게는 없다. 한낱 행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지나가는 시인의 세월, 시인의 세계 속에 무한히 널려 있는 소재들을 잡기 위해 그녀가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이 시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맞추려면 흩어지는 꿈의 조각”(「마흔의 시」)들을 무던히도 열심히 잡아끌어 당겨 완성한 그녀의 시 세계를 살펴보자.



직유를 버리고

고상한 은유를 입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직설법을 버리고

최대한 은유로 멋을 내

인용부호를 적절히 끌어다 쓰고

말줄임표로 말끝을 흐리며

회색빛 하늘을 슬며시 중용으로 둔갑시켜

끼워 넣는다

속내는 키우되 쉽게 들통 나지 않게

뒷문은 열어두어

피할 길을 모색해둔다

(중략)

난 다시 유치한 직유를 입는다



「은유의 속내」 부분



이미 그녀는 알고 있다. 시인에게 은유란 얼마나 절실하면서도 당연한 것인지를. 은유의 속내는 바로 시인의 반성이다. 직유, 은유, 직설법, 인용부호, 말줄임표 등의 시어로 시 쓰기에 대한 자기반성적 시를 완성한 시인은 ‘직유를 버리고’, ‘은유를 입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시를 쓰기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은유의 속내를 모르고 속기 마련으로 시인 역시 속아 넘어갔다.

시인은 이내 깨달았다. ‘멋을 내’고 ‘적절히 끌어다 쓰’고 ‘끼워 넣는’일은 은유가 아니라 흉내임을, 창작이 아니라 도망이었음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직유를 입는다’는 표현은 후퇴, 퇴행의 의미가 아니다. 은유의 속내를 알아버린 시인의 반성이자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이 더 크다.

1행에서 시인은 직유를 벗는 것이 아닌 ‘버리고’ 은유를 ‘입으’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버리다/가지다 혹은 벗다/입다의 대결구조로 삼은 것이 아니라 직유는 버리다/ 은유는 입다의 구조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시의 마지막 행을 보면 직유도 ‘입는’ 행위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의도는 바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을 ‘입는’ 행위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직유보다 고상한 은유가 더 시다운 것이라는 생각은 곧 착각이었으며 직유든 은유든 시 창작의 길은 가지고 버리는 소유의 길이 아니라 입고 벗는, 장착의 기술 즉 내 것으로 만드는 길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진정한 시인을 ‘어른’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상한 은유’를 입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지만 실상 어른, 진정한 시인이 되는 길은 은유에 있지 않았다. 버린 직유를 다시 ‘입는’ 시인의 행위는 단순한 기교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유치한 유년을 버리고 비로소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초심으로의 회귀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막힌 시가

굳어서 나오지 않는다

유화제로 묽게 만들고

황색4호, 적색2호로 화장을 한다

마지막단계

팽창제로 부풀려 세상에 내놓는다

온몸이 근질근질

잠복한 아토피가 아니나 다를까

성질을 낸다

색소 알레르기

피나게 긁어도 시원치 않다

첨가물 없는 시

활활 벗어던지고

속살을 보여주고 싶다



「변비」전문



은유는 언어의 기본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의 구조는 다양하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하는 고뇌, 고통스러움을 ‘변비’라는 소재로 표현하며 은유를 구상화하고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좀 더 구체적인 증상인 변비로 표현함으로써 구체성을 확보한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해서 너무 힘들고 괴롭다, 시를 쓰고 싶다, 라는 막연하고 일상적인 표현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시인의 영리함은 ‘재능은 주지 않았’다는 투덜거림과는 정반대로 알맞게 발휘되고 있다. ‘변비’라는 단어로 ‘의문은 키우되 쉽게 들통 나지 않게’ 은유를 시도한 시인은 옳았다.

‘변비’라는 제목을 보면 우리는 응당 화장실을 떠올릴 것이고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힘을 주며 쏟아 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그 모습에 창작의 고통을 덧씌우며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이고 자신의 시세계로 빠르게 끌어들이는 영리함은 중년 시인의 힘이 아닐까.

시인은 현대인 대부분이 느껴봤을, 오랫동안 배변활동을 하지 못하는 괴로움과 오랫동안 제대로 된 창작품을 내놓지 못한 고뇌를 동일시하며 은유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유화제로 묽게’ 만들고 ‘팽창제로 부풀려 세상에 내놓’고 ‘황색4호, 적색2호로 화장’을 하는 시는 ‘온 몸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쩌면 유화제와 팽창제를 사용한 시는 ‘인용부호를 적절히 끌어다 쓰’고 ‘말줄임표로 말끝을 흐’려 멋을 낸 고상한 은유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은 ‘첨가물 없는 시’, ‘속살을 보여 주고 싶’은 희망으로 오늘도 힘을 주고 노력한다. 그만큼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외로운 길이다.





한눈 판 미싱 바늘 따끔한 피 한 방울

마침표를 찍으면

끝내 박아 지지 않았던 마음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돌아오는 길 이 빠진 보도블록이

삐죽이 고개 내밀고 올 나간

스타킹 같은 하루를 어루만진다



「아침을 저녁에 박는다」 부분





닭장 같은 아파트

아침이 와도 울지 않는 수탉

어미 품 찾지 않는 병아리

품을 둥지가 없는 어미 닭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쪼고 있다



(중략)



달빛아래 돌아오는 아이들

가벼워져 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들이 남긴 흔적은

고단한 양말 짝 뿐



디지털 시대에도 난,

아날로그의 양말을 빤다



「말하지 않고도 산다」 부분



리처즈에 의하면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동일화의 욕망 때문에 비유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훌륭한 시는 시적 상상력을 수단으로 경험의 전체성을 노린다. 경험의 전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은유적 인식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①의 시에서 시인의 하루는 고되게 표현된다. 힘든 하루를 보낸 것은 일상적 경험이고 이 일상적 경험을 시로 전환하기 위해 시인은 ‘스타킹’이라는 은유적 상상력을 끌어왔다. 시인에게 하루는 ‘스타킹 같은’ 하루다. 직유는 상이한 것 가운데 유사성의 요소를 찾는 것인데 가시적인 사물인 스타킹과 추상적 개념인 하루는 완연히 다름에도 스타킹을 신고 겪었을 고단한 하루를 생각하면 ‘스타킹 같은 하루’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다. 더욱이 스타킹은 여성에게 국한된 사물이다.

여성들이 치마 속에 덧입는 것으로 남성들은 가질 수 없는 여성들만이 경험한 부분을 상징하고 있다. 조은영 시인에게 스타킹은 여성적 사물임과 동시에 중년의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상상력의 산물로 거듭나고 있다. 하루 종일 다리에 붙어 모든 먼지와 걸음걸음에 축적된 일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스타킹은 냄새나는 양말과 다름 아니다.

구두 속에 숨겨진 발 부분부터 모두가 볼 수 있는 종아리, 치마 속에 살짝 숨겨진 허벅지 모두 스타킹 속에서 하루를 같이 견뎌온 동지다.

하루 종일 탄탄하게 다리를 감싸고 있는 성벽처럼 보이지만 하루를 고단하게 보낸 다리에서 벗겨진 스타킹은 허물처럼 힘없이 흐물거린다. 다리를 온전히 감싸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리를 감추지 못하고 다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스타킹에서 우리는 삶의 이중성마저 느낀다.

결국 강인한 것 같은 엄마는 사실 가족을 벗겨내면 여리디 여린 중년의 여성이다. 가족을 위해 온전히 희생했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해져버린 중년의 주부다. 그리하여 탱탱한, 새 것 같은 스타킹이 아니라 ‘올 나간’ 낡은 스타킹으로 대변되는 시인의 삶은 하루를 열심히 살아 온 대가다.

②의 시에서 중년의 시인은 엄마로서의 삶을 지속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수탉’은 아침이 와도 울지 않고 ‘어미품 찾지 않는 병아리’가 된 자식들은 각자 자신의 둥지로 떠나고 ‘품을 둥지가 없는 어미 닭’은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쪼며 인생의 시 한편을 완성하려고 노력 중이다.

여기서 남편은 수탉이고 아이들은 병아리인데 아내는 암탉이 아니라 ‘어미 닭’으로 표현되고 있다. 단지 남편의 아내로서가 아닌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을 지켜야 하는 ‘어미 닭’으로 표현되는 시인의 하루는 여전히 고단하다.

①의 시에서는 고단한 하루의 의미가 ‘스타킹’에 집약되어 있었다면 ②의 시에서 그 의미는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식으로 빨아야 하는 ‘양말’에 함축되어 있다.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쪼는 행위에서도 디지털 시대와 아날로그가 병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산물로 불리는 ‘컴퓨터와 자판’을 사람처럼 보고, 치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감각으로 ‘쪼고’ 있는 행위에서 우리는, 시대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온 시인의 역행하는 삶을 발견한다. 그래도 수탉과 병아리가 없을 때의 ‘어미 닭’은 디지털 시대의 엄연한 구성원이다.

조금은 느리고 서툴러 여전히 ‘쪼고’있지만 그래도 디지털 시대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일부 소통중이라 다행이다. 더 다행인 것은 시인의 자판 쪼기는 의미 없는 행위가 아니라 시를 쓰는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모성이나 여성이 아닌 이 시대의 시인으로 남기 위한 노력은 이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라 시대와의 싸움이 되어버렸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디지털 시대의 시인이 되어 보고자 했던 어미 닭은 다시 ‘달빛 아래 돌아오는’ 아이들과 남편을 맞이하는 엄마로 돌아간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엄마가 아닌 품을 둥지가 없는 어미 닭으로의 회귀다. 수탉과 병아리가 남긴 흔적은 대화(언어)나 몸짓(행위)이 아닌 ‘고단한 양말 짝’(사물)이기 때문이다.

발이나 다리의 신체 일부가 아니라 신체일부를 감쌌던 껍데기 같은 양말 한 짝만 남은 하루다. 위의 스타킹처럼 양말 역시 발을 감싸고 하루 종일 신발 안에서 땀과 냄새를 흡수한 사물로 양말은 결국 어미 닭 자신이다.

남은 건 껍데기뿐이다. 땀과 먼지를 흡수하며 희생한 대가는 감사가 아니다 발을 보호해준 양말은 하루가 지나면 그저 축축하고 더러운 빨래가 된다. 오랜 시간 알을 품고 둥지를 지켜 온 중년의 어미 닭은 둥지를 잃은 채 이제 축축하고 낡은 양말을 빨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양말’이 되어버린 어미 닭은 그 ‘아날로그의 양말’을 빨아 널어야 하는 신세다. 그것이 디지털 시대에 여러 ‘말하지 않고도’ 사는(삶) 방법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 시는 결국 디지털일까 아날로그일까.









이달부터 받게 될 노루꼬리 만 한

선택지 앞에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중략)

굵고 짧게냐, 가늘고 길게냐

계산기를 두드린다

흐릿한 주관을 객관화 시켜본다

스무 번의 봄날과 노을을 예약하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연금」부분







어제 저녁만 해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던 녀석

둥둥 떠올라있다

나머지 두 녀석 태연하게 딴 짓을 한다

혼이 빠져나간 곳엔 정적이 흐른다

핀셋으로 집어 올리는 느낌

턱없이 가볍다

생선 대가리도

척척 잘 다루었는데

까짓 열대어 한 마리

들어올리며

생과 사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무게」 전문

삶과 죽음의 무게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쯤인 것인가. 죽기 전에 알 수 없는 이 주제를 가지고 시인들은 여전히 사유하고 시를 쓴다. 죽음에 대한 경험치는 우리에게 다른 경험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쌓인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이별 같은 것들은 직접 가능한 것들로 그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고 은유를 사유하고 완성된다.

그러나 어디 죽음이 직접 경험이 가능한 것인가 말이다. 물론 죽음에 근접해 갈 수는 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이 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저 목격으로 죽음의 경험치를 쌓는다. 할머니, 엄마, 아빠, 친구, 배우자, 누구의 누구 등등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된다.

그 죽음의 경험을, 타인이 아닌 내 스스로의 죽음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들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매번 반복되고 있고 조은영 시인은 여기, 새로운 은유로 자신만의 삶과 죽음을 명명하고 있다.

두 편의 시를 보자. 먼저 첫 번째 시 「연금」은 삶과 죽음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다. 연금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나 회사 등의 단체가 일정기간 동안 개인에게 해마다 주는 돈’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주는 돈이 아닌 대부분은 자신의 몫을 다하고 물러난 중,장년의 퇴직자들이 받을 수 있는 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삶속에 있지만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시인에게 연금은 ‘이달부터 받게 될 노루꼬리 만한 선택지’로 명명된 시인의 ‘삶’이다. 그러나 뒤이어 ‘몇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는 죽음의 경계와도 맞닿아있다.

시인은 이 무거운 주제를 아주 명쾌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저울질로 전환시키며 예의 그 영리함을 드러낸다. 살아있음에 가질 수 있는 ‘돈(연금)’을 가지고 몇 살까지 살 수 있는지 계산기를 두드리며 ‘죽음’을 예상하는 시인의 은유는 기발하다.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다시 삶과 죽음의 추상성을 ‘봄날’과 ‘노을’로 구체화시키며 은유의 구조를 완성한다. ‘스무 번의 봄날과 노을을 예약’하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는 구절에서 봄은 우리에게 긍정적 기운을 가져다주는 계절이다.

추운 겨울지나 새싹이 돋아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생명의 계절로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반대로 아침을 지나 저녁으로 가는 길목 어디쯤에서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이 장렬하게 기울어지며 변화하는 노을은 분명 아름답지만 사라지고 저무는 기운을 담고 있는 단어다.

그렇게 볼 때 노을은 ‘죽음’에 가깝다. 이달부터 받게 될 연금을 가지고 삶과 죽음의 주제를 명쾌하게 논하고 있는 시인은 더 이상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삶과 죽음을 명명 짓는 창조의 행위자다.

두 번째 시 「무게」에서 시인은 목격의 방법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시인이 목격한 죽음은 직접 기르던 ‘열대어’의 죽음이다. 열대어가 죽음으로 인해 열대어의 ‘생과 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과 사’의 문제까지 확장시키며 그 무게를 짐작하고 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인데 그것에 실질적인 무게가 있을까. 시인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던 녀석’이 ‘둥둥 떠올라’있다고 하며 빠릿빠릿한 움직임은 살아있는 것이고 둥둥 떠오름은 죽음이라는 표현으로 죽음의 무게가 상당히 가벼움을 묘사하고 있다. ‘둥둥’은 물체 따위가 떠서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 말 자체에 가볍다는 무게의 의미가 담겨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턱없이 가볍’다고 이야기한다. ‘턱없이 가볍다’라는 표현 안에는 ‘살아 있을 때는 무게감이 있었다’ (혹은 이렇게 가볍지 않았다)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셈이다.

살아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물고기를 잡아 올리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리고 살아있는 열대어를 애초에 ‘핀셋’으로 가볍게 잡아 올리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의 무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이미 죽어있던 ‘생선 대가리’는 아무 생각 없이 잘 다루었는데 살아있던 열대어의 죽음을 마주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시인이 소름이 돋았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생과 사의 경계에서 달라지는 ‘무게감’에서 오는 것이다. ①의 시가 삶 속에서 예상하는 죽음에 대한 것이라면 ②의 시는 죽음(의 목격)에서 경험한 삶일 것이다. 같은 삶과 죽음, 생과 사의 주제를 두고도 시인은 다양한 관점으로 은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인의 은유는 단순한 언어의 발전이 아니라 시인의 지식, 경험, 사유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시인의 삶의 양식이다. 그래서 말만 잘한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단순한 언어의 기교만으로 좋은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조은영 시인은 시적 재능의 갈망 속에서 더 이상 목말라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로 그녀의 작품은 은유의 바다 속에 충분히 젖어있다. 지면상 다루지 못한 많은 시들에서도 조은영 시인의 상상력은 빛난다. 단순한, 일회성의 반짝임이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청정기로 걸러낸 공기로 숨 쉬어도 더해지는 외로움” (「두레박」) 이라고 독백하듯 투덜거리고 있지만 사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시 속에서 “외로움은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오리온자리이며 부푼 달이다」) 반짝이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이제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더 이상 퍼 올릴 것 없는 빈 우물” (「여행」) 이라고 생각한 그 우물 속에 꽉 차 있는 시인의 바다를. “다른 언어로 세상이 수군거릴 때” (「물들어가기」)도 묵묵하고 부지런하게 시인의 길을 걸어온 그녀, 그 삶에 기록 될 위로의 한 줄, “그래 이만하면 잘 견딘 거야 /빙하 속 흐르는 봄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입춘열차」)! 이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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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6



제 1부 혼자하는 술래잡기

가지치기 11

은유의 속내 12

포트폴리오 사랑법 14

입춘열차 15

아다지오 16

알레그레토 18

변명이 예의 있기를 20

아침을 저녁에 박는다 22

우기 23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24

쓸쓸함에 관하여 26

삼켜지지 않는 건 27

사랑의 역설 28

혼자하는 술래잡기 30

행복 31



제 2부 꿈을 서랍에 보관했다

혼자서 깊어지는 강 35

카페룽고 36

터키, 그리다 38

솔베이지의 노래 40

대부도 가는 길 42

요가Ⅰ 44

요가Ⅱ 46

여행 47

2.7그램의 오후 48

왜냐구요 49

오월동주 50

숨은 꽃 52

미스킴 라일락 54

유월엔 또 그런 56

오리온자리 부푼 달이다 57

꿈을 서랍에 보관했다 58



제 3부 상처도 꽃이다

카카오톡 61

마흔의 시 62

상처도 꽃이다 63

코로나 블루 64

삭제버튼 66

선을 넘다 67

라돈매트리스 68

강력한 청소기를 꿈꾼다 69

여름 70

안녕, 고마웠어 72

변비 73

연금 74

봄밤 75

물들어가기 76

가을날에 77

저무는 만남 78



제 4부 화해

고향생각 81

한가위엔 연어가 된다 82

공원묘지에서 83

소중한 것 84

말하지 않고도 산다 85

우울증 86

첫사랑 88

무게 89

비늘 90

황사 92

훈련소 가는 길 94

흔들리는 땅 96

두레박 98

쿼바디스Ⅰ 99

쿼바디스Ⅱ 100

쿼바디스Ⅲ 101

화해 102



평론 시인, 은유의 속내를 발견하다 _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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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
글작가
2005년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회원, 부천시인협회 회원, 복사골문학회 산우물 시동인 회장이다. 동인시집 『유효기간』, 4인시집 『한가위엔 연어가 된다』 등에 참여했다. 2020년 부천시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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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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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회원, 부천시인협회 회원, 복사골문학회 산우물 시동인 회장이다. 동인시집 『유효기간』, 4인시집 『한가위엔 연어가 된다』 등에 참여했다. 2020년 부천시문화예술발전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