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선] 사람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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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소설가

71세의 할머니가 세 살 때 헤어진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나이는 89세. 아흔아홉의 어머니는 72, 71세인 두 딸을 만났다. 6·25전쟁 때 헤어졌으니 68, 69년 만이다. 이들이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은 12시간, 이번에 처음으로 개별상봉 3시간을 가졌다. 사연도 나이도 다르지만 만나는 장면은 비슷하다. 말보다 눈물이, 말보다 몸이 먼저이다. 와락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늙은 손들이 조난에서 구조된 가족을 대하는 듯 보였다. 차마 울지도 못하는 한 할아버지의 얼굴은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앤서니 퀸의 표정과 닮았다.

이산가족 상봉 기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중이었다. 남북 단일팀으로 구성된 농구와 카누도 있고 북한 경기를 중계하는 곳도 많다. 그뿐 아니다.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남한 기업체가 북한 사람을 고용했던 개성공단, 남과 북으로 오고간 예술단의 문화교류, 그 외에도 이곳저곳에서 교류를 추진하거나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부모와 자식이, 형제자매가 만나는 일은 이토록 오래 걸리는 걸까. 경쟁률도 569 대 1이란다. 아파트 청약 신청도 아니고, 21번 신청했는데 21번 떨어진 분도 있었다.

60여 년 만에 만나자마자 이별
방문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도
이산 아픔은 비극을 넘어 폭력
'사람이 먼저'라는 가치 인식을


만남은 상대가 있는 일이니, 북측이 요구하는 조건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까다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까다롭다 한들 부모가 자식을 만나는 게 유엔의 대북제재 위반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핵무기와 관련 있을 턱도 없다. 그런데도 생사 확인도 서신 교환도 안 된다. 그저 국가가 마음 나면 놓아 주는 오작교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휴대전화 하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소통 가능한 세상인데, 69년째 만나지도 연락도 못 하는 부모와 자식을 가진 이산가족이 사는 나라는 세계 어느 지도에도 없을 것이다.

이호철의 단편소설 '탈향'에는 전쟁을 피해 부산에 정착한 4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남한 사람과 어울리는 광석, 그걸 못마땅해하며 거칠어지는 두찬, 고향 원산을 그리워하며 늘 징징 우는 하원, 이 세 사람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서술자인 나. 하원은 부산에는 눈도 안 온다며 고향의 눈을 그리워한다. 고향의 우물, 날이 새기도 전에 그 물을 뜨러 왔던 집안 형수. 나는 그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하원을 떠나기로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탈향' 후의 삶은 1963년 발표한 '닳아지는 살들'에 나타난다. 은행에서 퇴직한 아버지가 하는 일은 오로지 북한에 두고 온 딸을 기다리는 것이다.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보고 있는 자식들은 분단의 그늘 아래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기력한 주인공을 내세우는 건 당시 군사정권의 억압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주장하거나 북한의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정치적으로 의심받던 시절이었으니 그리움조차 숨겨야 했을 것이다.

2000년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은 지금까지 21차례나 진행되었으니 정부는 그런대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이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이후 자유왕래가 보장된 점을 비교하면 우리 정부의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방문 차례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이 절반이 넘고 현재 살아계신 분의 21.4%가 90세 이상이다.

작별을 앞둔 아버지와 아들은 말없이 소주를 마시고 99세, 72세의 모녀는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추며 서로 울지 말라고 한다. 다시 만나자는 말을 아버지도 아들도, 엄마도 딸도 하지 못한다. 그저 전쟁을 피해 잠시 헤어졌던 것뿐인데, 69년 만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이건 비극을 넘어 폭력이다. 전쟁의 주체였던 국가는 왜 이 분들의 상처를 그렇게 오랜 시간 외면한 것일까. '사람이 먼저다'고 강조한 대통령의 핵심 가치가 남북관계에도 적용돼 사람과 사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새로운 역사가 하루빨리 펼쳐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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