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긴 한데 신선함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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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주변에 무수한 언어들이 넘실댄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엄청난 양의 홍보물들과 표지판들이 거리에서 쉼 없이 말하고 있다. 이들 문자언어들 사이에 심각한 지경의 폭력적 언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감각과 심리를 자극하는 흉물스런 언어들 중에는 죽음과 연관된 것들도 찾아낼 수 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생결단' '죽어도 아니' 등등의 가슴 서늘한 단어들은 모르는 사이 우리의 깊은 심리에 속속히 스며들어있다.
 죽음의 징후들을 알아내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지만 결코 자신의 죽음을 즐거워하진 않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죽음보다는 사건에 의한 우발적 죽음이 늘어가고 있다. 느닷없는 사고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이 점점 더 커가면서 아주 작은 단서라도 미리 잡고 싶은 게 현대를 사는 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어쩌면 죽음의 징후를 미리 감지할 수 있겠다는 것과 그 징후는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3'의 매력이다. 주변에 널려있는 언어들 속에서 얼마든지 여러 징후들을 감지할 수 있다는 상상은 대단히 흥미롭다.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사건들이 내 주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소재 역시 기발하다. 그래서 이 영화 시리즈를 고정적으로 즐기는 이들이 많은 가 보다.
 인간은 자극에 대해서도 매우 잘 적응한다. 잔인한 영상에 어느덧 감각이 무디어져간다. 눈앞에서 실제보다 더욱 생생한 끔찍함이 전개되어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한다. 주로 머리 부분의 분해 장면에 대한 '파이널 데스티네이션3'의 집중력은 감탄할 경지이다. 다행히 흥건하게 화면 가득 붉은 피로 채우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 명 한 명씩 순서대로 살해하는 방식이나 주인공과 그를 돕는 이만 살아남게 된다는 공식은 이전의 서양 공포이야기 전개구도를 그대로 닮았다. 조금씩 조여들면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계산일 것이다. 그래서 자칫 여러 죽음의 양태를 나란히 보여주는 옴니버스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묘한 여운을 여전히 두었지만 말이다.
 어떤 사건이든 이유만 알게 되어도 불안은 걷힌다. 왜 하필 그 사람이 그 일을 당해야 했나 하는 것에 대한 속 시원한 답만 들을 수 있어도 현대가 그리고 도시가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방 알 수 없는 위험에 둘러싸여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위험은 곧장 우리에게 달려든다. 습격하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다. 온 신경의 날을 곤두세우고 거리를 다녀야할 판이다. 하지만 징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감지하지 못할 뿐이라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교훈을 불쑥 생각나게 한다. 별똥별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우리네 삶 속에서 자주 멈칫거림을 하라고 영화는 친절하게 말하고 있다.
 이정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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