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죠. 놀 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세상인데, 누가 역할놀이 같은 짓에 목을 매겠어요? 실사 같은 그래픽으로 돌아가는 온라인게임을 놔두고 직접 테이블 위에 모여 연기할 필요가 없잖아요. 플레이 행사를 열어봐야 백 명이 넘는 목표 인원이 가당키나 할까요? 더군다나 여기는, 마이너 계열 서브컬처가 특히 살아남기 힘든 한국인데요.

- 라고 누군가 냉소를 날린다고 해도, 틀렸다고 지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흔히 생각할 만한 것들이거든요.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맨주먹으로 해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잊을 뻔했습니다. 'RPG'는 원래 'TRPG'를 일컫는 말이었다는 걸 말이죠.

'TRPG클럽'은 크라우드 펀딩 시스템을 국내 TRPG에 처음 들여와 성공시킨 곳입니다. 자체 제작한 룰북을 통해서였지요. 그리고 올해 들어 '대박 사건'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World of Darkness)'라는 거대한 라인업, 그중에서도 '뱀파이어: 마스커레이드 20주년 기념판'을 정식 한글판으로 출간하게 된 겁니다. 말 그대로 한국 TRPG 역사에 남을 쾌거지요.

텀블벅 펀딩 페이지 바로가기




그들은 '회사'라고 말합니다. 구성원은 고작 세 명. 각자 본업이 끝나고 해가 지면 그들은 이대 근처의 작은 사무실 '창운당'에서 모입니다. 제2의 직장 생활이 시작되지요. 룰북 작업을 하거나 모임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따로 연봉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그 일에 매달립니다. 주말에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놀이 장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반가웠습니다. 저 역시 어릴 적 TRPG 팀들을 기웃거리며 RPG컨벤션까지 참여해본 경험이 있거든요.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함께 알고 있는 사람들 이름이 튀어나왔고, 서로 한 공간에 있던 옛날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창운당에서 만난 시각은 저녁 8시,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풀어내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판타지스러운 열정이 뭉쳐서 이뤄낸 마법 같은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TRPG에서 느낀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만 바뀌어도, 아예 다른 게임이 돼요"



▲ 왼쪽부터 김효경 씨, 곽건민 대표, 정재민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할게요.

곽건민 : TRPG클럽의 대표직을 맡은 곽건민입니다. 본명보다는 '이그니시스'라는 필명으로 조금 알려졌고요. '리셋라이프'와 '인디고 스톰' 등의 판타지 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현재는 글 쓰면서 TRPG 관련 책자 제작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김효경 : '펠군'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해온 김효경입니다. TRPG클럽에서 룰북 기획과 룰 제작을 주로 합니다. 네이버에 있는 카페 매니저이기도 합니다.

정재민 : '광황'이라는 아이디를 오래 써왔습니다. (좌우에서 웃자)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에요. 오래 쓴 닉네임은 바꾸기도 힘들잖아요. 인사 총무 회사 구조나 비지니스 등을 셋 중 그나마 아는 편이라 여기에서도 회사로서 필요한 업무들을 담당합니다.


가장 처음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TRPG는 언제 어떻게 접하게 됐나요?

곽건민 : 존재를 알게 된 건 1996년이었어요. 벌써 18년이 지났네요. 그 시절 게임매거진에서 매달 TRPG 컬럼 코너에서 리플레이 기록을 보여줬거든요. 매번 보면서 궁금해 하다가 중학교 때 친구들과 D&D 클래식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RPG컨벤션에도 가면서 지금의 인연을 시작했죠.

김효경 : 저는 중학교 2학년 때요. 학기초에 반이 바뀐 다음 혼자 '로도스도전기'를 읽고 있는데, 친구가 다가와서 '소드월드'를 권해주는 거예요. "네가 읽고 있는 세계관이 바로 이거야" 라면서. 알고 보니 그 녀석들은 게임마스터(GM)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설 읽는 애가 있으니 쟤한테 시키면 되겠다 싶었던 거죠. 룰북 딱 하루 보고 플레이를 하게 됐어요.

정재민 : 저도 중학교 시절 D&D 클래식 박스셋을 사서 읽었죠. 그런데 할 사람이 없어서 플레이는 못 했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군대 전역 후였으니, 다른 두 사람보다는 경력이 짧은 편이죠. 그전까지 이런저런 게임에 열중하고 지식을 쌓다 보니 TRPG가 게임의 근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이 생겼어요. 그 와중에 펠군에게 낚여서 일일플레이 체험행사에 참여했고, 해보니 "왜 이런 걸 몰랐지" 싶었죠.


어떤 점에 끌리게 된 걸까요?

곽건민 : 충격이었죠. 당시에는 D&D 클래식만 해도 게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수단을 가장 가까이에서 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사람끼리 이끌어가는 게임이다 보니 매번 플레이마다 생각지도 못한 국면이 나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죠.

김효경 : 어릴 적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때 좋아하던 '슬레이어즈' 작가가 TRPG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로도스도전기'를 쓴 미즈노 료도 RPG에 심취했다고 들었고요. 이런 걸 하면 훌륭한 소설가나 시나리오라이터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제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걸 좋아해요. 저는 게임을 아주 좋아하는데, 빨리 질리는 편이라 온라인게임은 잘 못해요. 게임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하고, 분석이 끝나면 게임이 질리거든요. 그런데 TRPG는 사람이 바뀌면 아예 다른 게임이 돼요.

정재민 : 한국에서는 창작하는 사람에게 권장할 만해요.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언제나 대화를 해야 하고, 필연적으로 혼자만의 이야기는 못 쓰게 되거든요. 미국이나 일본은 이런 점을 먼저 이해해서 TRPG를 활용하고 있어요. 블리자드 경우만 봐도 사내에서 적극 권장하고 내부 동호회도 있죠. 일본의 창작 전공에는 RPG스쿨이 따로 있을 정도예요.


인벤 독자분들 중에서는 TRPG를 접해보지 못한 분들도 꽤 많을 것 같거든요. 간단히 기본 개념을 설명하면 좋을 것 같네요.

정재민 : 파티 게임의 일종으로, 게임규칙을 바탕으로 가상의 세계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게임입니다. 즉흥연극과 흡사하지요. 다만 제3자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고, 정해진 규칙 아래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능동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는 겁니다.

한 사람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고, 주사위라는 난수의 존재 때문에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기도 해요. 최근 모 영화를 봤더니 클라이막스에서 악당 앞에서 춤을 추자 악당이 멈칫하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상상도 못한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것이 바로 TRPG입니다.

진행자(게임마스터, GM)가 던지는 가상 세계 속 과제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중세뿐 아니라 SF, 호러, 연애, 현대판타지 등 다양한 세계관에서 진행이 가능해요. 최근에는 국가를 경영하거나 조직의 향방을 결정하는 스토리를 쓰기도 하죠.

▲ 창운당에 놓여 있는 다양한 보드게임들


TRPG클럽이 생겨난 과정과 지금까지의 활동 내용도 궁금하네요.

정재민 : 친목동호회 성격으로 인터넷 카페에 몇몇 TRPG팀이 모인 게 시작이었어요. 일일플레이 행사 제1회를 시작하면서 전환점이 열렸죠. RPG컨벤션이 끝난 뒤로는 사람들이 모일 방법이 없고, 우리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3회쯤부터는 외부인을 받아 철저하게 초보자를 위한 행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세계를 통틀어 드문 경우지요. 7년간 잘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제가 들어온 계기가 된 행사기도 하고요.

김효경 :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무조건 적자가 나서, 당시 매니저던 형님들이나 스탭들이 사비를 털었어요. 어떻게 살릴지 고민한 끝에 RPG 초심자를 받아야 한다고 의견이 모였어요. 주변 GM이 가능한 분들을 돌아다니면서 설득했죠. 소중한 능력을 써서 도와달라고요. 이건 혼자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재밌거든요. 그저 사람 늘리자는 일념이었어요.


정말 힘든 과정이었을 것 같아요. 요즘은 반응이 좋더라고요.

김효경 : 사람 부족하고, 펑크 나고... 주먹구구로 하다가 지금 와서는 120~130명 규모로 늘었어요. 참가 페이지를 열면 6분만에 100명이 차고 세 시간 만에 마감될 정도죠. 심지어 접수하려고 매크로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수강신청인 줄 알았어요.

정재민 :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있었죠.

김효경 : 맞아요. 누구 한 명의 노력이 아니라 예전부터 TRPG를 사랑하던 많은 분들이 자기 시간, 돈, 열정 다 바쳐가면서 이룬 결과라고 생각해요.


특별한 대가가 없는데도 자발적인 열정으로 그렇게 모인다는 점이 놀랍네요.

정재민 : GM의 본질은 사실 창작이에요. 창작자는 자기 작품에 태클이나 수정 요구가 오면 도전한다 싶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참여해주신 분들이 열린 마인드라 그런 요구를 잘 받아들여 주셨어요. 초보자 단기체험이니까, 행사 기획의도만은 준수해야 한다고 간절히 요청했죠. 지금처럼 시스템이 잡히기 전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의 고심이 있었어요.

김효경 : 행사 취지를 전 매니저 형님에게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울었어요. "공감합니다! 한국 RPG 어떡해요!" 하면서. 심지어 그날 처음 본 사이인데...(모두 웃음) TRPG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했고, 한순간 모든 행사가 끊기니까 어린시절이 다 날아간 느낌이었거든요. 가끔 RPG컨벤션 시절 형님들을 만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이야기를 나눠요.




■ TRPG클럽,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주사위를 던지다 "자료조사만 1년을 했어요"



그럼, TRPG클럽이라는 이름의 '회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정재민 :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사이트 운영이나 관리를 오래 해왔어요. 행사도 잘 알고 있었고요. 이전 매니저인 신두하 형님에게 스탭 권유를 받았어요. 더 일 늘리기 싫어서 격렬하게 거부했죠. 지금 다니는 회사도 워낙 바쁘던 시절이라. 술자리까지 가면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들어가게 됐죠. 당시 부매니저가 펠군이었어요.

김효경 : 말단에서 거기까지 차근차근 올라간 상태였죠.

정재민 : 그 형님이 개인사정으로 은퇴하시고 이 친구가 매니저로 올라가면서 현재 이런 구성이 됐어요. 업무데스크를 만들고 효율적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하면서, 경리 체계를 만들고 금액 손익집산을 하기 시작했죠.

▲ TRPG클럽에서 자체 개발한 룰북 '던 오브 페이트(Dawn of FATE)'. 오른쪽은 '이야기와 놀이'에서 번역한 RPG '폴라리스'


활발하게 룰북 관련 프로젝트가 진행한 게 이 시점인 것 같은데요. 특히 한국 TRPG에서는 최초로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잖아요.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인가요?

정재민 : 안정기에 들어선 다음 생각한 것이 "한국에서 만든 룰북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룰북은 RPG의 시스템이자 원류인데, 특히 저작권과 연관이 깊죠. TRPG는 파생콘텐츠가 많아요. D&D만 해도 만화, 소설, 게임, 시나리오, 영화 등 셀 수 없잖아요. 이런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리지널 콘텐츠가 필요해요. 그게 룰북이고, 한국에는 제대로 된 게 없었죠.

시장에서 키우기 위해서는 모금이 될만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스타트를 끊기 위해 자료조사만 1년 동안 했죠. 저작권법까지 줄줄이 익혔어요. 그 과정에서 서양의 크라우드 펀딩 시스템을 알게 됐고, 이거다 싶었어요. RPG 자체가 '모두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잖아요. 크라우드 펀딩의 시스템과 같았어요.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Dawn of FATE'군요.

정재민 : 당시 소설을 쓰던 건민 형에게 "거래를 하자, 캠페인만 써주면 돼!", 그리고 펠군에게 접근해서 "니가 룰만 만들면 돼" 라고 말하면서 둘 다 낚이게 됐죠.

곽건민 : 그렇게 마지막까지 손을 거친 사람이 저고요.

김효경 : 일 년 동안 조사했다지만 실제로 해보니까...

정재민 : 많이 다르더라고요(웃음).

김효경 : 처음으로 제작한 룰북 '던 오브 페이트(Dawn of FATE, DoF)'는 페이트(FATE)라는 룰을 기반으로 했어요. 국내에서는 유명하지도 않고 주목도 못 받던 물건이죠. 이걸 메인 엔진으로 잡고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도중에 페이트의 엔진이 새로 나왔어요. 살펴봤더니 너무 좋아요. 문제는 우리가 완성 직전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했죠. "미안한데... 전부 뒤엎자".

룰북이 늦어진 주범이 저예요. 하지만 해외도 새 엔진 방향으로 움직일 거다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어요.

정재민 : 그때가 제 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0'에서 다시 시작하는 그 암울함이란...

곽건민 : 최종 편집과 교정을 하던 입장에서도 죽을 맛이었죠.

김효경 : 겪을 수 있는 트러블은 모든 걸 다 겪었어요.


으, 어떤 고생이 있었을지 상상하기도 힘드네요. 그렇게 완성된 첫 번째 룰북은 반응이 어땠나요?

정재민 : 현재 1판은 거의 소진됐어요. 조만간 업데이트 예정도 있습니다.

김효경 : 정말 놀라운 일인데, 해외 쪽에서도 오퍼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까지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플레이까지 영어로 보여줬어요. 만족하더라고요. 그런데 뜻밖에도 세계관이 '서울'이라는 점이 걸림돌이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는다는 거였죠. 애니메이션이나 RPG로 익숙한 도쿄 같은 곳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어왔어요. 물론 거절했죠. 그래서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어요.

▲ 뱀파이어: 마스커레이드 20주년 기념판




■ 우여곡절, '월드 오브 다크니스' "전세계에 찢어진 판권을 하나하나 전부 찾았어요"



그후 '새비지 월드' 번역 유통을 거쳐서, 이제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Vtm)' 20주년판을 정식 출간하게 됐어요. 엄청난 쾌거인데, 아직 국내에는 'Vtm'을 모르는 분들도 많잖아요. 설명을 조금 부탁할게요.

김효경 : '월드 오브 다크니스(WoD)'의 시스템에서 나온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죠. 'WoD'는 화이트울프 스튜디오에서 1991년에 처음 출판했고, 지금의 모던 판타지 열풍의 근간이 된 작품이에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Werewolf) 등의 틀을 제시한, 핫했던 코어 규칙이죠. 요즘 다시 핫하고요.

그전까지 RPG는 던전을 탐험하는 내용 위주였어요. 처음으로 "그게 중요하지 않다. RPG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다"고 말한 게 바로 WoD예요. 스토리텔링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열었어요. 규칙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라는 거죠.

그중 'Vtm'은, 내 안에서 공포를 느끼는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일반 호러게임은 뱀파이어가 등장해 내가 놀라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내가 뱀파이어예요.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두려워하고, 또 고뇌하게 되는 스토리에요. 처음 출시했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켰어요.

현대 모던판타지 설정을 총망라한 만큼 설정은 당연히 매력적이고요. 허점을 계속 보완하기도 하면서 20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죠. 화이트울프 쪽에 한국인 직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소개가 안 됐지만, 해외에서는 큰 반향이었어요.

정재민 : 그래서인지 설정에서 엽기적일 정도로 한국이 세요.

김효경 : 동해가 East Sea라고 표기되다 보니 문제도 없고(웃음). 최근 20주년 기념판(V20)을 만들었더니 이제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규칙을 많이 고치고 문제점도 해결했는데, 기념판이라 내용도 아낌없이 넣었어요. 580페이지를 꽉꽉 채워버린 거예요. 풀 컬러로! 그래서 외국에선 룰북 하나가 99.99달러예요.

이 반응을 업고 펀딩한 웨어울프 20주년 기념판은 해외에서 무려 4억 원이 모였어요. 클래식 WoD가 지금 다시 시작된 거예요.

▲ 'WoD'를 요즘에 맞게 설명하자면, 트와일라잇의 조상님 정도


개인적으로도 오래 궁금했던 건데, WoD 시리즈가 그동안 국내에 들어오기 힘들었던 이유는 뭘까요?

정재민 : WOD는 판권이 엄청 심하게 꼬였거든요. 여러 이유로 저작권이 찢겨나갔어요. 가장 많이 입수한 곳은 '이브온라인'으로 유명한 게임사 CCP에요. WoD 세계관으로 MMORPG를 만들 계획이었거든요. 지난 4월에 엎었지만... 룰북 저작권은 파트마다, 혹은 각 부분마다 별의별 회사가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열두 군데던가?

그 수많은 회사를 하나하나 수소문하고, 컨택했어요. 이 사연을 전부 말하려면 오늘 밤을 새야 할 거예요. 결국 라이센스를 얻어서 출간하는 데 성공했죠. 세계에서 두 번째였어요. 해외에서 축전이 날아올 정도였어요.

김효경 : 첫 번째는 스페인이었는데, 거기도 코어 룰북만 갖고 있어요. 우리는 서플리먼트(추가 룰북) 판권도 다 가졌고요. 이건 세계 최초죠!


한글 번역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뭔가요?

한꺼번에 : 용어요!

김효경 : 지금도 우리끼리 싸우고 있어요.

정재민 : 이 문제 때문에 스페인에서도 1년 동안 출간을 못하고 있죠. 우리는 용어 빼고는 의외로 진행이 많이 됐는데 이 문제가 어려워요. 영어 원문으로 할지, 뜻을 번역할지, 한자로 할지 한글로 할지... 용어 번역의 기준은 있긴 있어요. 처음 등장하는 외래어는 반드시 병행표기. 사람들이 많이 쓰는 건 억지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따라가고요. 그래도 제일 힘들죠.

곽건민 : 지금 예상으로, 9월 말에서 10월 초쯤 번역 자체는 완료될 것 같아요.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예요. 무한 교정, 그리고 문장 잡기가 기다리고 있죠. 추가 규칙을 합하면 1천 페이지가 넘는데!

정재민 : 그래서 WoD를 번역해본 전원과 컨택해서 스페인이나 유럽, 미국 본사 관리자들까지 피드백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축전이 날아오는 거기도 하죠.

곽건민 : 그러고보니 이전에 번역한 '새비지 월드'도 아시아권 출간은 처음이에요. 일본에도 안 나왔어요. 축전에 보면 그런 내용도 적혀 있고요.

정재민 : 전략이 주효했다고 생각해요. 창작자가 다른 창작자를 인정하려면 독보적인 창작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든 룰북인 DoF가 필요했죠.

김효경 : 새비지 월드 판권을 협상할 때는, 시차가 안 맞아서 새벽에 방 한구석에서 스카이프 틀어놓고 PPT까지 했어요. 처절했죠.


현재 Vtm V20의 텀블벅 펀딩 금액이 5천만 원을 돌파했어요. 이 정도의 성공을 예상했나요?

정재민 : 건방질지 모르겠지만, 네(웃음). 내부에서는 적자만 보지 말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이 룰북은 터무니없이 손익분기점이 높아요. 분기점이 5천 5백만 원이에요.

김효경 : 많이 이해를 해주시더라고요. 너무 비싸다고 누가 그러면 다른 분이 "이거 미국에서 99달러야" 라고 말해주시고. 누가 "미국에서 33달러에도 판다"고 해서 보면 PDF 파일이고 이래요. 전자책조차도 가격이 그 정도죠.

곽건민 : 이번 프로젝트 자체는 WoD를 보급하는 목적이 가장 크죠. 무엇보다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도 하고.

김효경 : TRPG의 거대 시스템이 우리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고 싶었어요. 20년 동안 불모지였잖아요. 한국에서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 이런 일러스트, 아주 바람직합니다


클랜북 발매도 예정에 있나요?

정재민 : 네, 이걸 구입하는 분들이 왜 이익인지 또 말씀드릴 게 생겼네요. V20 코어만 해도 클랜북 12권 분량입니다. 핵심만 넣었고, 부족한 건 컴패니언 북에 다 들어가서 내용이 백 퍼센트 포함됐어요. 총 16권 분량의 핵심을 두툼하게 넣었죠. 현대 모던판타지는 WoD 룰북 하나면 모든 근간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표절시비가 미국이나 일본도 많아요.

김효경 : 언더월드도 그래서 표절시비가 나기도 했고, 조용히 합의했지요.


'트와일라잇' 등 수많은 뱀파이어물의 근간이 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런 작품들 중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정재민 : 저는 역시 '월희'죠! 배경세계도 많이 영감을 받은 작품이고요.

곽건민 : 고전이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요.

김효경 : 저도 그냥 영화 '드라큘라'. 그 작품은 다시 봐도 개리 올드만의 연기가 정말 멋있어서요.


이 다음으로 진행할 프로젝트도 정해져 있나요?

정재민 : 다음은 '패스파인더'를 들여오는 게 목표입니다. 현재 미국 RPG 시장에서 5년 동안 1위를 하고 있는 게임이에요. 2위가 D&D고요.

곽건민 : 이런 농담이 있어요. 메두사가 나타나면 'D&D'에서는 때려잡고, 패스파인더에서는 끌고 가서 결혼한다는. 그 정도로 일러스트가 아주 예뻐요.




■ TRPG의 현재와 미래 "게임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개발하는 데 TRPG는 굉장히 중요해요"



텀블벅을 통해 나온 TRPG 관련 펀딩들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고 있어요. 그 원동력은 뭘까요?

정재민 : 2013년에 우리를 포함해 다섯 개 프로젝트가 텀블벅에 나왔는데, 대부분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이에요. 처음에 우리가 성공한 뒤 많은 분들이 조언을 물어왔고, 최대한 도와드리려고 했어요. 그 결과 우리 DoF 이후 프로젝트들은 금액이 더 높아졌어요. 처음에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첫 성공을 봤으니 그 뒤로는 후원자와 기획자가 서로 믿음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김효경 : 우리도 실수란 실수는 다 했는데, 이후 사람들도 그 실수들을 똑같이 밟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피드백을 열심히 줬어요. 사실 무엇보다도 우리 믿어준 후원자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래서 감사해요. 작업이 늦어졌는데도 믿어준 분들 덕분에 나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WoD는 돈을 못 벌어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니아 분들에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고. 빚을 갚는 거죠.

정재민 : 그동안 실수가 많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거예요.


비디오 게임이 발전할수록 TRPG가 사장될 것이라는 관측도 예전에 많았는데, 세계적 추세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보세요?

정재민 : 게임이 가장 활성화된 미국과 일본은 여전히 TRPG 시장도 큽니다. 아직도 창작자가 많고, 그 창작자가 곧 소비자기도 하죠. 필요한 게 뭔지를 사회 저변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봐요.

반면 한국은 "티알피지가 뭐냐"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상황이고요. 저는 게임이나 만화 등을 창작할때 TRPG의 개념이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효경 : 유명한 개발자인 황상훈님이 옛날 '소드월드' 번역도 하셨던 분인데. 한 강연에서 게임인들에게 "TRPG를 해보라"고 권하신 적이 있어요. 일본은 아예 기업에서 TRPG를 후원해주기 시작했어요. 소셜 게임 형태로 만들기도 하고, ORPG 매칭을 시켜주기도 하고요.

일본의 어떤 게임제작 전문학교들은 직원들에게 TRPG를 시키면서 룰북 하나를 던져주기도 해요. "하루 동안 읽고 규칙을 파악해와라"라면서요. 처음 하는 사람들이 마스터와 플레이어를 나눠 진행하는 과정을 녹화하죠. 시나리오를 혼자 짤 때, 그리고 함께 만들어갈 때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거예요.

'디아블로2'가 나왔을 때, 북미 한정판에 TRPG용 룰북이 포함되기도 했어요. D&D 기반의 간단한 분량이었지만. 아직도 전체 게임에서 TRPG는 빠질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 뱀파이어: 마스커레이드 코어 룰북의 하드커버 및 가죽 양장본 샘플


인터넷이 보급된 뒤 온라인에서 여럿이 모여 TRPG를 진행하는 일명 'ORPG' 팀도 많이 생겨났잖아요. 현황이 궁금하네요.

정재민 : 생각보다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TRPG는 만나서 하기 때문에 피드백을 적극 수용하고 팀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즉석에서 빠르게 캐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장소 문제에서 큰 단점도 있어요. 그래서 ORPG에 접근을 많이 하는 거고요.

사실 RPG는 굉장히 접근성이 낮아요. 책만 읽으면 되거든요. 개인이 책만 읽으면 바로 ORPG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통신을 이용해서 하기 때문에 채팅만 지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해요. 반면 웹에서 하기 때문에 집중도가 극도로 떨어진다는 점이 첫 번째 단점이고, 마스터 역할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두 번째 단점이에요.

RPG는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상대한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던지고 끝내는 마스터가 많아요. 아는 사람들끼리 하면 오히려 괜찮은데, 아니면 ORPG는 가볍게 하기도 좋은 반면에 헤어지기도 쉬워요.

김효경 : ORPG 시스템은 'ROLL20'이나 맵툴 같은 프로그램에서 많이 발전했어요. 미국에서 많이 쓰는데, 덕 중의 덕이 왜 양덕인지 알게 됐죠. 이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막 SRPG를 만들어버려요. 뭘 하나 클릭하면 파이어볼을 날리고 적 체력이 깎이는 경지까지 왔어요.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IRC 채팅 프로그램을 많이 썼지만, 지금은 이런 쪽으로 많이 넘어왔어요.


TRPG를 기반으로 한 RPG게임들도 많이 할 것 같은데, 어떤 걸 가장 좋아하나요?

곽건민 : 저는 역시 Vtm을 기반으로 나온 '블러드라인'.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디시플린을 아주 잘 묘사해놨어요. 지금도 스팀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요. 당시에는 뛰어난 그래픽이었고, 지금 봐도 못 할 수준은 아니죠. 한글화 작업에 참여해보고 싶긴 한데, 프로그램 영역이다 보니 우리 능력이 닿지 않아서 아쉬워요.

김효경 : '폴아웃2', 강력추천합니다. 해외에서는 1편과 2편을 토대로 룰북도 나왔어요. 3편도 명작이지만 액션 장르고요.

정재민 :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마찬가지로 이 게임을 기반으로 나온 '누메레라'라는 룰북이 있어요.


최근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TRPG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도 생길 것 같은데요. 손쉬운 입문법이나 주의할 점 등을 알려준다면?

김효경 : 두 가지 코스가 있어요. 영어를 할 줄 알면 D&D로 입문하는 게 제일 좋아요. 이거 괜히 30년 넘게 만든 게 아니거든요. 책만 읽으면 바로 게임할 수 있게 되어 있고, 초심자에게 필요한 것과 RPG의 중요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놨어요. D&D 하나만 읽으면 판타지 관련 게임은 뭐든 할 수 있어요.

한국어만 된다면, 룰북도 좋지만 일단 팀에 들어가보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룰이 있으면 그 룰을 플레이하는 팀에 들어가서 경험해보면 되거든요. 과장이 아니라, 우리 카페에서 활동하는 GM 분들은 초심자가 한 번만 해달라고 쪽지 보내면 무조건 해드릴 거예요.

곽건민 : 거기 분들은 전부 일일플레이 행사의 마스터들이거든요. 초보자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를 7년 동안 체험한 사람들이죠.

정재민 : 지방에 거주하실 경우는 이런 모임이 많이 힘든 게 사실이에요. 결국 룰북 사서 탐독하고 친구들과 할 수밖에 없는데, 조심할 점은 친한 친구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 안 하고 장난을 치게 되는 일이 많다는 거예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해요. 지금 게임을 할 거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 거라는 마인드를 심어주어야 해요. 처음은 반쯤 스터디하는 느낌으로 하시는 게 좋아요.

▲ TRPG클럽에서 번역 출간한 새비지 월드 한글판


진심으로 즐거운 인터뷰였어요. 가장 진부한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질게요. 세 분에게 TRPG는 어떤 존재인가요?

김효경 : 언제나 인생에서 가장 큰 반환점이었던 것 같아요. 전 형제가 없어요. 가장 친형 같은 형을 만나게 해준 존재가 또 마침 'WoD'였어요. 극단 캠프에서 만났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그 뱀파이어의 판권을 들여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웃음).

평생 같이 가고 싶은 여자친구를 만나게 해줬기도 해요. 그래서 제 일을 이해해주려고 많이 노력해줘서 언제나 고맙죠. 저에게 TRPG는 우정과 사랑을 함께 준 존재네요.

정재민 : 본격적으로 서브컬처를 연구하기 시작한 게 중학교 1학년부터였고, 학문적인 측면에서 많이 노력했어요. 저는 인생에서 10년 주기로 뭘 진지하게 매진하자는 개인적 지표를 세워요. TRPG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4년쯤 됐고요. 이 집단에서 6년 내에 가시적인 결과를 내보고 싶습니다.

저에게 TPRG는 목표점이에요. 궁극적인 목표라면, "한국에서 창작하려면 TRPG를 해보라"는 말이 나오는 것 정도겠죠.

곽건민 : '토대'예요. 저는 창작자라서 TRPG를 한 케이스지요. 이걸 통해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됐죠. 12년 전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예요. 좋아하는 취미가 일이 된 게 슬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즐길 건 아니니까요. 대부분의 토대가 TRPG에서 왔기 때문에 저변을 늘리는 게 저한테도 의미있는 일이에요.

어쩌다 보니 대표가 된 건, 프리랜서 신분이라 입장이 편해서기도 하고요. 여기서 최종적인 책임은 모두 제가 집니다. 그래서 전 이 바닥을 못 떠나요. 뭐, 죽을 때도 마지막으로 주사위 한 번 굴리고 죽어야죠.

정재민 : D&D를 만든 TRPG의 아버지 게리 가이각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베스트 댓글에 "천국에 가서 톨킨과 C.S 루이스와 셋이서 주사위를 굴리고 있을 거야" 라는 게 있었어요. 그 말이 생각나네요.

▲ 창운당 칠판에 적힌 많은 방문자들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