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 69. 배우 명계남 “정치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한 것,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배우로 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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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대통령 생전엔 용기 있게 나서질 못했는데... 이제 연극과 문화농사를 짓게 됐어요.”


△연극을 섬기는 농부로 봉하마을로 귀농한 배우 명계남.

“아직도 만나지 못했던 관객들을 봉하극장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명계남(明桂湳·67)선생은 “배우는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사람이고, 정치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한 것”으로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노사모’는 대한민국 시민사회 한복판을 움직였고 정권 탈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뒤 대선 세 번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격동의 정치사(史)를 기록했다. 흐르는 시간의 ‘말’은 침묵이 됐고, 정치인 옷에서 무대의상으로 갈아입는 야인(野人) 생활은 길었다. 격렬하게 자신과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연극 <황혼>에서는 70대 맹인 역을 소화하기 위해 과감한 몸 연기(노출)도 마다하지 않았고 <노숙의 시>에서는 정확한 대사를 무기로 송곳 같은 시적표현을 쏟아내면서 배우 ‘명계남’ 을 각인시켰다.

늦깎이로 제54회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아들고 “이제 진짜 명(明)배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인·광고회사·TV영화배우·정치인을 돌아 배우로 돌아온 인생은 그가 맡았던 등장인물보다 드라마틱했다. 무거운 옷을 털고 배우로 돌아와 봉하마을 인근에 100석 규모 극장을 지었다. 지인들이 보탰다. 공사비가 모아지면 공사를 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렸다. “돈이 생기면 짓다보니까 넉 달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마무리 지어야 할 공사가 남아있지만 공연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9년 전 서울을 떠나 봉하마을로 집을 옮겼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도 봉하마을에 계시고요. 고향은 아니지만 살자고 왔어요. 고향이 평안북도입니다. 갈 수 있는 고향이 없는 겁니다. 여기가 고향인 겁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생전 여러 이유로 용기 있게 나서질 못했는데 이제 연극과 문화농사를 봉하에 짓게 됐어요.” 연극을 섬기는 농부가 된 것 처럼 보였다. 주변은 공장지대다. 공장 창고를 극장으로 만든 외벽에는 ‘명배우, 봉하극장. 콜로노스’ 라고 간판을 달았다. 짧은 머리 백발(白髮)로 극장 서재 의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봉하마을 인근에 ‘연극전용극장’을 열었다. 연극을 짓는 농부로 ‘귀농’을 한 것처럼 보인다. 말을 던지면 모노드라마를 하는 독백대사처럼 긴 말로 답이 돌아왔다. ‘말’은 끊고, 쉬고 하면서 대화리듬을 살려냈고 음절하나 버리지 않고 감정을 담아 정확하게 전달했다.





“연극하면서 살자고 왔어요. 친구 태수와 어릴 때 꿈이 극장 가지는 게 꿈이었어요, 극장에서 연애도 하고, 애도 낳고,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배우로 살고 싶었어요. 연극배우, 제작, 영화도 해봤고 정치도 했습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정신없이 살았어요. 난 정치인이 아니잖아요. 무대서 죽는 게 꿈 이었어요.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거죠. 노무현 대통령 생전에 “당신은 고향으로 가면 농촌을 살리는 운동도 하고 친환경 농사를 하면서 살 테니 저보고는 시골마을에서 연극도 볼 수 있는 문화환경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이곳이 공장지대고 농촌마을이라 문화 환경이 취약하죠. 대통령 생전에는 못 내려왔어요. 그런 것도 이룰 겸 내려왔죠. 봉하마을과 옛 기억, 노사모도 있고요. 천상 난 배우니까 지인들이 무대에서 살라고 ‘터(攄)’를 마련해 주신 겁니다. 지인들이 도와주셔서 용기내서 정착하게 됐고 극장도 짓게 됐어요.”

-‘배우 명계남’을 강조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얘기 할 때는 ‘노사모’를 이끌었던 회장으로 봉하마을을 생각하는 온기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극장이 공장지대다. 연극으로만 성공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인들이 “미쳤나. 저 나이에 연극이 되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걱정스러운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배우는 작가의 글로 세상에 말을 거는 직업이잖아요. 배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잘하는 것이 배우고요. 그런 장소로써 극장을 선택 한 겁니다. 공부하는 마음, 하고 싶은 말을 세상을 향해 배우로 걸어보고 싶은 거죠. 이 나이에 극장 짓고 연극을 한다고 해서 무슨 영광을 바라겠습니까. 봉하마을과 인연이 크고, 20대 때 대학 연극반에서 태수와 연극 하면서 전율을 느꼈던 무대를 다시 발견해 보자는 마음인거죠. 노무현 대통령 일대기를 연극으로도 만들어 보고 싶고요. 다양한 연극과 기획공연, 문화이벤트도 지리적 특성과 연계해 특성화 시킬까도 고려하고 있어요. 아직도 만나지 못했던 관객들을 봉하극장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정치무대’가 아니라 ‘연극무대’에서 세상을 향해 할 얘기가 많은 것처럼 보였다. 참여정부에서는 정치인‘ 명계남’이 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정권이 시민사회 ‘노사모’가 바꾼 주역처럼, 뒷얘기를 그의 말을 통해 뉴스를 쏟아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은 배우 말이 아니라 정치인 ‘수사’가 됐다. 그가 맡았던 극중 인물의 삶보다 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느꼈다. 명계남 역할이 더 극적이고 파란만장해 보였다. “이제는 정치무대가 아닌 연극무대로 이곳에서 정착 하시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는 단호한 말로 표현했다.

“정착합니다. 고향이 없어요. 이북이고 피난통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향이 없습니다. 이곳(봉하)이 고향이 된 셈입니다. 가족들하고 집 사람하고 여기서 사는 겁니다. 가족이래야 아내뿐입니다. 서울에 사는 것도 어렵고요. 지방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아야 되고요(웃음) 일도 잘 없고, 체질에 딱 맞아요. 배우라는 재주로 재능도 기부하고, 연극도 만들고 하면서 ‘봉하’에 있으면 못 다한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 같고요. 마을에 문화 온기가 돌면 좋고요. 그런 마음으로 정착한 겁니다.”




-<노숙의 시>를 준비할 무렵, 그와 마주 칠 때가 있었다. 표정과 시선은 ‘수도승’ 같아 보였다. 날카롭고 무거운 말은 삼켰다. 현실로 뛰쳐 들어갈 배우의 언어로 숨을 쉬기 위해 연습무대에서 땀을 흘렸다. ‘노숙의 시’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으면서 “이제부터 진짜 명배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연기를 해온 분이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어색했다.

“사람들이 날 배우로 생각을 안했어요. 배우로 본적이 없는 거죠. 연극판 주류와 평가에서는 떨어져 있었던 사람이잖아요. 나이도 먹었고, 젊고 열심히 하는 후배들도 많아요. 방송·영화·정치로 외도 했던 놈인데... 상을 받으면서도 연극판을 지켜온 연극인들한테 미안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숙의 시>를 하면서 대학시절 연극할 때처럼 전율을 느꼈어요. 상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명배우 넌, 이제 진짜 배우야. 연극 열심히 해” 작품을 준비하면서 본령(本領)으로 돌아가 연극을 만나려고 생각한 것이 결실을 맺은거죠. 연극으로 말을 거는 처음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가 연극으로 세상을 향해 처음 말을 건 것은 1973년도 대학(연세대)에서 연극하던 시절 원작 <동물원이야기>가 데뷔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배우 인생 반세기를 돌아 연기상도 받았다. 연극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처음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아직도 연극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처럼 들린다.


“연극은 ‘몸’과 ‘말’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겁니다. 우리말은 고유함이 담겨 있어요. 전 연극을 통해 우리말을 배웠어요.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제대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명계남이 연극을 한다는 것은 종교죠. 정치적인 행위는 잊히더라도 희곡의 언어와 배우 말은 영원합니다. 바이올린, 작곡가는 혼자서 예술적 고통을 담아내잖아요. 연극은 보람과 고통을 동시에 줍니다. 연극을 만드는 팀이 되어서 허구의 삶에 도달 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고통과 불편함을 이겨내고 무대를 통해 삶을 비추는 것이 연극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인간으로 배울 수 있는 대단한 것들이 연극에 담겨 있어요.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할 수 밖에 없는 게 연극이고, 말로 세상에 소리를 낼 수 있는 곳도 연극인 것이죠.”

-어려서부터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고 했는데, 대학생 시절은 ‘유신시대’로 당시 사회분위기도 있었다. 전공이 ‘신학’인데 연극으로 방향을 튼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호기심이 많았어요. 신학은 연극과도 통하겠구나 하고 들어간 거죠. 세상에는 가족과 헤어져 따로 사는 사람들도 있고 부자와 가난, 배움과 못 배움, 전쟁, 기아, 이산가족 등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누나 둘이 이북에 계십니다. 전쟁 때 헤어 진 겁니다. 고민 많던 시절 연극을 본 겁니다. 객석은 사람들도 채워지잖아요. 직업, 사연이 다릅니다. 충격 이었어요. 고민도 다르고, 배속 내용물도 다른 사람들이 연극에 집중해 하나가 된 다는 것은 전율로 왔어요. 무대인생과 삶에 관객들이 집중하고 사유하고, 웃고 운다는 것에 엄청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종교보다 더 잘 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 한 거죠(웃음). 피난 때와 대구에서 초등학교 다녔어요. 고향도 그렇고 사는 지역이 사투리를 쓰니까 이때부터 말을 정확하게 하면서 살았어요. 말에는 정말 자신 있었던 시절에 그 연극을 보고 배우는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한 겁니다.”



-명계남 선생과 첫 만남은 연극무대였다. 92년 ‘불 좀 꺼주세요세요’(남자) 와 이듬해 학전소극장에서 올린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에서 정확한 대사와 맛스러운 연기로 집중시켰다. ‘배우 명계남’을 입력했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대사가 정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41세에 모노드라마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친구 태수가 콘트라베이스 대본을 가지고 왔는데 둘이 한 번 해보자고 시작 했어요. 낭독만 2시간 30분이 걸렸어요. 2미터에 육박하는 몸체에 4개현으로 가장 낮은 음으로 연주되는 콘트라베이스 이야기가 가슴에 닿았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음이죠. 세상이 그런 겁니다. 보통사람들이 주목 받지 못해도 그런 분들 때문에 세상을 버티는 겁니다. 한마디로 소시민들 애환을 역설하는 겁니다. 콘트라베이스는 지휘자를 향해 “낮은 음이라고 무시 하지마! 내가 있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연주가 될 수 있는 거야”라고 얘기 합니다. 낮지만 소리 울림이 큽니다. 숨어있는 존재죠.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 중에 콘트라베이스 같은 존재가 왜 소중한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정치사의 큰 파동도 시민들에 의해서 변화 됐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도 살아있는 얘깁니다. 모노드라마를 40대 초반에 해보니까 연기술에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콘트라베이스’ 작품 얘기 할 때 그가 말한 “정치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한 것”이란 말이 스쳐갔다. “ 콘트라베이스 연극으로 명계남 연기술에 도움이 됐다고 하셨다. 연습을 어떻게 하나.


“제가 발음과 말(화술)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있었거든요. 대사의 문장과 단어를 음악 악보처럼 만들려고 했어요. 콘트라베이스는 연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작품이에요. 무대에서 햄릿을 한다고 하면 덴마크 왕자가 아니고 명계남이 하는 거잖아요. 상상력으로 인물을 만들고 표현하는 겁니다. 안성기 선배가 그 역할을 맡아도 텍스트는 같지만 두 사람이 다른 ‘햄릿’을 그리겠죠. 배우가 가슴을 친다는 것은 배우의 전달이 중요해요. 배우 발음에 있어서는 대사의 전체적인 흐름, 리듬, 템포를 가지는 게 중요해요. 대사가 음악이 되지 않으면 표현이 지루해 집니다. 단조로워지는 겁니다. 대사의 문장과 단어에 감정과 말하기 음표를 그려서 말에 리듬을 살려내는 게 중요 합니다. 리듬감을 살린다는 것은 감정의 요소들을 다양하게 변화 시키고 몸과 말로 체득시키는 겁니다.”

- 명계남의 연기와 화술 방법은 다를 것 같다.




다른 건 없습니다. 다만, 배우 발음은 원칙을 지키며 연습하는 겁니다. 볼펜 입에 물고 ‘아에이오우’ 하면서 연습해요. 단순한 하지만 효과가 큽니다. 두 번째는 배우가 되려면 책을 가까이 해야 해요. 끼와 재능을 갖추고 예쁘고 잘생겼다고 배우가 될 수 없어요. 상상력의 크기가 배우를 결정한다고 생각해요. 인생을 깊이 있게 살아가야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어요. 직·간접 경험이 다 중요 한 거죠. 여전히 저한테 치매환자 연기를 시키면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힘들잖아요.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 합니다. 배우는 경함과 인생에 비례하는 것 같아요. 배우는 때로는 해보지 않은 것들을 연기하고 정서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 고통스러운 ‘배우창조’의 과정을 어떻게 극복 하셨어요?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독서와 경험, 상상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읽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돼요. 전 아직도 EBS에서 방송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즐겨봅니다. 그 안에 수많은 캐릭터들을 연구하고 고민해요. 과정에서 연기도 정서도 쌓여지는 겁니다. 빚쟁이들하고 싸우다가 무대에 올라간 경험도 있어요. 매번 관객이 다르다는 것은 연극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늘 새로운 관객과 만나면서 공연과 연기도 달라지는 겁니다. 200번 넘게 했던 공연도 매번 희곡과 대사에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면 연기가 새로워집니다.

-​<황혼>과 <노숙의 시>를 보면서는 이전 작품 연기와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구현해 내는 대사(화술)와 감정을 몸으로 감아서 연기하는 것이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체를 단단히 하고 상체는 이완시키려고 노력해요. 하체가 흔들리면 감정을 잡고,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아래가 강해야 가슴으로 나오는 연기가 달라져요. 내 연기는 어려서부터 책을 소리 내서 읽는 습관이 도움이 됐어요. 배우가 소리를 내서 대본을 읽지 않으면 배우가 안 됩니다. 자신의 대사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무대 전체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거죠. 연기표현 방식은 정답이 없어요. 전 인물의 대화에서 감정의 리듬을 찾으려고 해요. 상대 배우의 눈에서 빛이 나고 가슴을 쳐줄 때 배우로서 느끼는 강렬한 쾌감은 대단합니다. 그 감정을 쫒아가려고 집중하는 겁니다. 연기는 감정을 유지하면서도 순간 집중의 연기테크닉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무대 전체가 다 보입니다. 객석이 보이고, 자신의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거죠.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는 경지면 배우 깊이가 다른 겁니다.”

-배우라는 직업보다는 수식어가 많다. 카피라이터, 영화제작사, 영화배우, 정치인, 연극인 등 명계남 선생한테 중요한 것은 여전히 다음세상을 위한 현실정치인가. 그는 단호하게 말을 받았다.



“연극이다. 정치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했습니다. 사회변화에서 시민 소리를 낸 것이 뉴스가 되고 정치인 옷을 입으며 이미지가 그렇게 된 겁니다. 70년대는 프랑스 연극, 외국번안극 연극들을 많이 했어요. 우리의 토종 철수와 영희 연극이 없었던 시절입니다. 태수와 친구들이 우리연극을 해보자고 어린 나이에 극단을 만들었어요. 22살에 기획과 예술경영을 하면서 배우와 연극인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그런데 몇 편 연극을 하면서 빚을 지게 되면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광고카피는 한마디 설득의 힘이 있어요. 매력이 있었습니다. 광고하면서 빚을 다 갚고 무대로 돌아와 ‘늙은 창녀의 노래’도 제작해서 큰 성공을 했어요. 이듬해 강영걸 선생님하고 ‘불 좀 꺼주세요’ 공연도 했어요. 그때 배우 문성근이가 와서 영화하자고 해서 인연이 된 것이 ‘그 섬에 가고 싶다’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와 TV방송도 하게 된 겁니다. 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 각본을 가져왔는데 영화로 만들면 되겠더라고요. “이 작품 영화로 만들자 내가 해볼게” 하고서 돈을 끌어다가 영화사를 차렸어요. 영화 초록물고기가 흥행하면서 박하사탕, 오아시스도 제작하게 된 겁니다.”

-​그때 인연들은 ‘노사모’까지 이어지게 됐고 정치사(史)에 중요한 장면들을 만들어 냈다. 극장이름이 ‘봉하마을 콜로노스’다. 마을 숲으로 들어간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게 된다.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다.


“콜로노스는 오이디푸스 왕이 들어간 아테네 숲 이름이잖아요. ‘노숙에 시’에서도 숲에서 일류의 문명사와 역사가 시작된다는 얘기를 합니다. 제가 나무와 숲을 좋아해서 봉화 숲에 사는 겁니다. 어쩌면 노대통령도 그 마음으로 콜로노스 숲으로 걸어 들어간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어요. 이름이 재미있고, 오이디푸스 책을 다시 읽어 보니까 멋있을 것 을 것 같아서 짖게 된 겁니다.”

-​극장 운영과 공연을 하게 될 극장이 ‘봉하마을’ 인근이다. 연극이 지난 역사의 향수를 자극하고 시민들이 꼭 봐야할 작품이 있다면 농촌마을도 관객은 몰릴 것 같다.

“지역 특성을 고려하고 편안한 대중극을 하고 싶어요. 개관 작품은 서두르지 말자고 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 일대기를 연극으로도 만들까 생각중입니다.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을 만들면, 극장도 특성화 되지 않을까요.(웃음) 젊은 연극인들한테도 개방하고 싶어요. 단, 한 달은 공연을 하는 조건으로 말이죠. 연극을 무조건 길게 하고 싶어요. 작품을 이해할 쯤에 끝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치열하게 연극을 생산하는 친구들한테 공간을 내주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훌륭한 연극인들과 연계해서 극장운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극장 인근이 공장지대라 이주노동자분들도 많아요. 이분들을 위한 연극도 할 생각입니다. 영화와 다양한 문화도 체험하고, 연극도 볼 수 있는 극장 운영을 계획 중입니다. 개관작품은 의논중인데요. 2∼3개 작품을 가지고 태수와 읽고 연습을 하고 있어요. 신작도 있고, 작가한테 의뢰도 하고 보내 온 작품도 있습니다. 공연 날짜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연습만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명계남 선생은 극장 조명을 켜고 흩어져 있던 소품들을 설명하고는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봤다. 마음껏 소리 낼 수는 극장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무대에서 해야 할 말과 현실을 교차하면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저는 그렇게 살지는 못했는데요. 배우는 삶의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많은 배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배우가 돼야죠. 불확실한 세상을 향해 연민과 열정으로 무대를 지켜내는 배우도 중요하지만 어디 배우만 그런 가요. 인간이라면 다 그래야죠. 이 지점에서는 아직 먼 것 같아요. 더 배우고 나서 그때 다시 인터뷰를 할게요.(그는 이 말을 하고 침묵을 가졌다) 연극현장에서 알바를 하면서 무대에 서는 젊은 연극인들, 나이 먹은 선배로 도와주지 못하고 든든한 터를 만들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보자, 기운내서 버텨보자. 나도 나이 들어서 저지른다. 연극으로 한번 세상을 향해 소리쳐 보자고 말하고 싶고요. 젊은 연극인들이 ‘봉하마을 콜노로스’ 극장을 많이 찾아주고 연극도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극장과 봉하마을(고(故)노무현 대통령 생가)는 2㎞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차로 3분 거리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이 오이디푸스 왕이 콜로노스 숲으로 걸어 들어간 길 처럼 느껴졌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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