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를 찾아서]교육자 김상숙 "글씨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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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6.18. 오후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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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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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의 천재가 신세계를 연다. 0.9%의 비범한 사람이 통찰력을 가지고 그 길을 쫓아간다. 나머지 99%는 평범한 우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W’라고 칭한다]
교육자이며 서예가인 김상숙 선생
[스포츠서울 배우근 기자] “찰나였어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이 깡통의 뚜껑을 찍어내는 프레스에 절단됐습니다. 끊어진 손가락에서는 두 줄기 피가 뿜어져 나왔어요. 마치 소방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작업반장이 급히 달려와 걸레를 찢어 내 팔을 동여맸어요.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분수처럼 쏟아지던 피가 멈추며 고드름처럼 응고됐습니다. 끊어진 부위의 살이 말려 들어가며 뼈가 코끼리 상아처럼 허옇게 돌출되어 보였죠.”

“나는 낮에는 직공, 밤에는 야간 고등학생이었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 어렵게 입사한 깡통 만드는 공장에서 그만 사고를 당한 거였어요. 사장 운전수가 차를 내어주지 않아 20분 정도 기다렸다가 물탱크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6.25 전쟁때 군의관으로 복무한 의사가 뼈를 깎고 살을 잡아당겨 실로 기웠습니다. 부상군인을 수없이 수술한 의사는 ‘팔다리를 잃은 사람에 비하면 그래도 낫지 않니, 마음을 크게 먹어라’며 위로해 주었어요. 그날 밤, 마취가 풀리자 미칠 듯이 아팠습니다. 뼈가 끊긴 부상을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통증이죠. 밤새 입원실 복도를 엉엉 울면서 오갔어요.”

혹독한 일제 강점기와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그 이후를 살아온 이들의 삶은 힘겨웠다. 특히 그 시대는 빈곤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당시를 살아낸 이들의 삶은 ‘고난 이력서’와도 같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가정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짚신을 삼을 형편이 안 되어 맨발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가난은 숙명과도 같았죠. 중학교 진학은 못했어요. 대신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노역으로 원조품인 옥수수 가루를 타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옆마을에 학비가 면제되는 중학교가 생겼어요. 남들보다 1년 늦게 중학생이 됐어요. 등하교를 하며 영어단어를 외웠고 성적이 좋아 반장도 했습니다. 도시락을 싸다닐 형편이 안됐어요. 그래서 하굣길에는 동네가 빤히 보이는데도 배가 고파 걷지를 못해 주저앉곤 했죠.”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더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틈틈이 흙바닥에 한자를 쓰며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여기선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외삼촌을 통해 부산에 있는 단추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어요. 그 공장이 망하자 목공소에서 일을 했어요. 그렇게 학비를 마련해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이… 하지만 통증이 차차 가라앉자 마음도 안정되었어요. 붕대를 감은 오른손에 연필을 끼워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요. 포기하고 싶었지만 ‘배움’이라는 두 글자와 손가락 두 개를 맞바꿨다고 마음에 새겼어요. 고등학교는 마쳐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교육자 외길을 걸어온 김상숙 선생(80)의 이야기다. 그는 빈곤, 노동, 억압 속에서도 끝 간 데 없는 학구열을 불태웠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약지의 끝마디가 잘리는 사고를 또 당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공장생활을 병행하며 동국대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원까지 마친 뒤 중고교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다. 자신처럼 힘들게 공부하는 학생을 위해 헌신했다. 40년 교직생활을 마친 뒤에도 학당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김상숙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그의 인생 자체가 ‘W’로 다가온다.

김 선생의 삶을 알 수 있는 단면이 있다. 고교시절 손가락이 잘린 후, 그는 다짐한다. “손이 성한 사람보다 더 글을 잘쓰는 사람이 되자. 어떤 고난에도 절대 좌절하지 않겠다”라고. 이후 불편한 손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정진한 그는 총 41회의 전시회를 연 서예의 대가가 된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공백만 있으면 화선지를 펴 놓고 글을 쓰니 주변에서 “돈이나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열심히 쓰나”라며 빈정거림도 많았다. 그러나 김 선생은 축의금 봉투에도 자처해서 붓을 들어 수 없이 써 주었다. 전부 연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씨는 사람입니다”

김 선생은 글을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서법, 일본에서는 서도, 한국은 서예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예술쪽을 조금 더 강조하는 거 같아요. 글을 쓸 때는 진지해야 합니다. 먹을 갈 때부터요. 마음이 흐트러지면 글씨에 티가 확 나요.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사람들의 글을 보면 어떤 상태에서 썼는지 첫 눈에 보여요.”

김상숙 선생은 단 1분도 허투로 인생을 낭비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후회되는 게 있을까.

“자랑은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간을 아껴쓰고 부지런히 살았어요. 그래도 후회는 있어요. 교직생활을 하며 학생들에게 너무 엄했어요. 왜냐하면 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어렵게 공부했는데, 학생들이 나처럼 따라오지 않으면 속이 답답했어요. 그래서 회초리를 들었어요. 집에서도 원리원칙을 강조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았죠. 외골수로 앞만 보고 살았던 거 같아요. 폭넓고 여유로운 사람이 못된 게 후회스러워요. 다시 과거로 돌아가 교단에 선다면 잘못이 있어도 용서해주고 토닥토닥 해주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교장까지 역임하며 40년 넘게 교육자로 살았던 김 선생은 자신의 글씨처럼 올곧음을 추구했다. 교직생활 20년 만에 서울 돈암동에 13평짜리 오래된 한옥을 겨우 장만했다. 집이 작아 명절을 맞아 수 십 명의 제자들이 찾아오면 앉지도 못하고 서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돌아갔다. 녹록치 않은 인생사 때문인지, 김 선생은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엔 역설이 숨어있었다.

“고대 연극을 봐도 희극보다 비극이 많습니다. 인생이 즐거움 보다 괴로움이 많기 때문이죠. 내가 고되게 살아온 탓도 있겠지만, 산다는 건 힘든 거예요. 지금 학생들도 엄청난 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역설은 진리’라는 말이 있어요. 반대되는 곳에 진리가 있다는 의미죠. 다시 말해 산다는 건 괴로움의 연속이지만, 역설적으로 즐거움도 있어요. 세상은 양면이 있습니다. 불 밝힌 초는 시간이 지나면 녹아 없어집니다. 하지만 의미없이 불을 밝히지는 마세요.”

김상숙 선생이 즐겨쓰는 문구 ‘양계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그 닭들의 산란율은 정비례한다’ ‘노력한 대가는 헛되지 않다’라는 의미.
김 선생은 인터뷰 중,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유하게 후학을 지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평생 살아온 성품으로 볼 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글씨처럼 분명 엄격하게 할 것 같다. 그 말에 김 선생은 “네, 생각해보니 그럴거 같네요”라며 껄껄 웃었다.

한편 김 선생은 기자에게 단단히 부탁한 게 있다. “과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써 달라”고 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잘 보여주기 위해 살아간다. 인터뷰를 한 사람들 대부분은 “좋게 잘 써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래된 책과 종이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김 선생은 “더 꾸미거나 잘 보이게끔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의 부탁에는 연륜과 인생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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