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잘 물든 단풍처럼 살고 싶다…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특선-이완식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이완식] 아들과 두 달에 한번은 꼭 술자리를 같이 한다.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막 회집에서 그간의 궁금한 일들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다. 내 자신의 현재 상황도 얘기해준다. 아들은 중소기업에 다니다 3년 전에 창업을 했다. 업종은 소프트 개발 및 자문업인데 기반을 잘 닦아갔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그 좋아하는 글 마음 놓고 쓰실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술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하던 아들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런 아들이었다. 얼마 전부터 술 한잔하자는 내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심 서운했다. 아들한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저 요즘 힘들어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어요. 아버지 죄송해요. 다음번에 꼭 찾아뵐게요.”
지난 번 내 생일에 온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 날이 돼도 아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후 아들은 구정이 되어서야 집에 왔다. 안 방에서 나와 둘이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아들은 시종 웃는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그 때 치아가 아주 안 좋았다. 치과에 가야겠다는 얘기를 차마 아들에게 꺼낼 수 없었다. 아들은 눈치를 챘는지 내게 치과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묻고 몇 개월만 참아달란다. 몇 개월만 참아달라는 얘기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아들은 주머니에서 용돈이라며 흰 봉투를 내가 깔고 앉았던 방석 밑으로 쓱 들이민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들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미안해했다. 그 날 저녁 아내가 내게 아주 힘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당신, 아들 여자 친구가 폐암이 갑상선까지 전이되어 석 달도 안 남았대요. 그리고 죽기 전에 자기를 우리 집 며느리로 받아달라고 했대요.”
그간 여자 친구의 병간호를 하며 병원과 생활전선에서 온갖 아픔을 혼자 삭여왔을 아들이 아니었던가. 전화로 묻거나 혹 잠깐 집에 들을 때 여자 친구의 건강 상태를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항시 ‘네, 좋아지고 있어요.’였다. 그 여자 친구가 지난 3월초에 힘들었던 삶을 내려놓았다. 서른세 살이었다. 내 형편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진작 결혼해서 재미있게 살 수 있을 나이인데. 변변치 못한 부모를 잘 못 둔 탓인가 싶어 한없이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여자 친구는 두 살 때 낳아준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재혼하여 따로 나가서 살았다. 철이 든 이후부터 직장생활을 해오며 쭉 혼자 지내왔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는 회사의 경리직원이었던 여자 친구는 굶주린 정을 아들과 함께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설계하며 채우려고 했을 것이다. 장례식장은 참 을씨년스러웠다. 상주 부(夫) 이 00.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혼인신고 까지 한 상태고 실제적으로 7 여년을 같이 살아왔다. 그런 아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문상객을 받고 있다.
아들 여자 친구 할머니의 한 맺힌 통곡이 끝이질 않는다. 하루 종일 그렇게 울음이 계속되었다. 그 다음날도, 또 화장터에 가는 날도. 마침내 상조회사 담당직원이 무거운 말을 꺼낸다.
“너무 그리 우시면 손녀딸이 편히 저승길을 못 떠납니다. 그만 그치세요.”
불쌍하고 힘들게 세상을 살아오며 죽는 순간까지 가족은 물론 주변에 일체 자신의 병든 모습을 알리지 않았던 아들 여자친구, 고통을 홀로 삭히며 주어진 운명을 몹시 원망했음이라. 이렇게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빗줄기까지 세게 퍼부으니.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들어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오는 시간은 1시간 30분. 냉각 중, 진행 중,종료.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아들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들 가족이라고는 나 혼자. 아들 친구 셋. 여자 친구의 영정을 안고 있는 아들. 여자 친구의 친척들. 내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 이었다.
“아들아, 인생은 시련이 있기 마련인 것이야. 그 시련을 좀 더 일찍 맞이했다고 생각해라.”
아들이 여자 친구의 흔적을 지우기까지는 한 달쯤 걸렸다. 초췌한 얼굴에 그늘진 모습. 얼마간의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고 내 집에 들어온 아들은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온 듯 했다. 내게 치과치료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묻고 빨리 치료를 시작하라고 한다. 적지 않은 돈인데. 아내의 세심하고 지극한 보살핌으로 차츰 건강을 회복해가는 가 싶었다. 저녁은 병상을 지키고 낮엔 일터에서 휴일도 없이 그간 몸을 혹사해왔을 아들이었다. 그 공허를 술로서 채우며 매일 매일을 보냈던 그 여파가 드디어 아들에게 찾아왔다.
한 달이 채 되기 전이었다. 복통을 동반하고 피부에 붉은 반점이 여기저기 돋았다. 한 두 번 들어서는 기억하기도 힘든 흔치않은 병이었다. 병원에서 한 달 가량 입원해 있다가 지난 6월 중순에 퇴원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들은 각오를 새롭게 한 듯 철저한 자기관리와 체력회복을 위해 진력했다. 이렇게 해서 같이 시작한 운동이 아침 산행이었다. 마침 집 옆, 00산은 숲이 정겹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오르기에 제격이었다. 아침 9시에 출발한 산행은 가는 길 중간에서 되돌아온다.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 땀은 비 오듯 하고 숨은 몰아쉬기 일쑤다. 산행이 아닌 체력단련코스라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처음엔 무척 힘들었다. 45도의 가파른 경사를 오를 때마다 이를 악문다. 평평한 길도 중간 중간에 있다.  이 때는 아들에게 한자와 문학을 알려준다. 선비사(士)자의 의미, 아들자(子)자의 의미, 불치하문(不恥下問), 백두여신(白頭如新), 등.
"문장을 잘 쓰는 삼대원칙이 뭔지 가르쳐 줄까."
“첫째로 짧게 써야 하고, 그러면 즐겨 읽으니까. 둘째 쉽게 써야 하고, 그러면 이해하니까. 셋째 그리듯이 써야 하고, 그러면 기억하니까."  
"네, 문장의 삼 원칙이 어쩌면 프로그램의 원리와 똑 같지요?"
며칠 있다가 나는 산행에서 가르쳐준 내용을 다시 묻는다. 아들은 좀 부족하지만 얼추 비슷하게 풀어놓는다. 다시 나는 정확하게 알려준다. 이렇게 아침마다 한 시간 씩 같이 서로 대화하며 산행을 할 수 있는 것, 부자지간의 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라 여겨졌다.
아들이 병원에 있었던 지난해 6월 중순에 내 남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나보다 열 살 아래인 동생은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형제들은 참 기구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이던 해,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인 어머니가 위암으로 삶을 마감했다. 나는 학교도 결석하고 거의 석 달 가까이 어머니 병간호를 했다. 통증을 가라앉게 하기 위해 계속 배를 문지르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오강을 비우고 배를 문지르고 나는 그 당시 힘든 매일을 보냈다. 그 힘듦을 만화책을 통해서 극복하려했다. 만화방에서 빌려온 괴도 루팡, 엄마 찾아 삼만 리 같은 만화책에 푹 빠졌다. 나를 눈여겨본 어머니가 병간호를 게을리 한다며 만화책을 빼앗아 뒤란에 던졌다. 돌아가시던 그해 여름 그 무덥던 날, 새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옥색치마에 흰 저고리, 비녀를 꽂은 새 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온 그 시점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두 번에 걸친 어머니의 수술비로 산과 논을 다 팔았다. 쌀 항아리는 텅텅 비었다. 새로 들어온 어머니는 무척 열심히 삶을 일구셨다. 우리 형제들에 대한 정성은 남달랐다. 그 당시 정신 미숙아인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두 번째 수술 받을 때 칠 개 월 만에 낳아서 그런지 다섯 살이 지나고도 똥, 오줌을 못 가렸다. 밥상머리에서 항시 뚝뚝 떨 구어 대는 똥 덩이에 식구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 동생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 역시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에 복직한 후 채 2년도 안 되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나이 쉰둘이었다.
작년 일 년 동안 아들 여자 친구의 죽음과 그리고 아들의 면역력 결핍과 관련된 희구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일, 거의 같은 시기에 남동생의 죽음이 있던 그 당시 나는 최악의 상태로 온 몸이 흐느적거렸다. 나는 위아래로 부실한 치아를 무려 여섯 개나 뽑고 임플란트 두 개를 해 넣어야 하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거의 팔 개월 가량의 치료기간을 정하고 시작한 그 즈음 내 몸무게는 무려 5키로나 빠졌다. 하루하루가 지독한 인내의 한계에 부딪쳐 비틀거리고 있었다. 칠월 초부터 치료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온 아들의 강한 권유를 받고서였다.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시고 제가 부양할게요. 그리고 이빨 빨리 치료받으세요. 치료비 걱정은 마시구요.”
나는 지금껏 헛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하다가도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까 그래도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해 12월 초순부터 아침에 산행할 때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이제 올해도 며칠 안 남았네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아들은 D-15일 되는 때부터 일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도 어서 빨리 이 지옥 같은 한 해가 지나가기를 원했다. 나는 올해에 접어든지 일주일째 되는 날 제수씨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님 잘 계시냐고. 그런대로 잘 계신다는 그 말을 들은 지 이틀이 가기도 전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재작년에도 화장실 가다가 넘어졌는데 또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다니. 강남 0000병원에 입원해서 왼쪽 대퇴부 수술을 받은 후 그런대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해온 어머니, 그 때 수술비로 인해 형제들 간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다. 나는 그 당시 형제간에 나누어내는 수술부담금을, 사채를 얻어 해결했다. 남자들은 더 내야한다며 30%를 더 부담하게 한 여동생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 옛날 논 팔아 나와 남동생에게만 나눠주었다. 당연히 여동생들에게 상속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에게만 준 그 논에 대한 서운함과 그간의 차별에 대한 원망이 가슴속에 맺혀있을 것이었다. 불쌍한 동생들을 배려하고 더 잘 대해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세월을 되돌릴 수 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장남만 가르쳐놓으면 집안을 다 책임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어머니는 푹 젖어있었다. 내가 취직한 이후 또박 또박 매월 얼마씩 생활비는 물론 남동생 대학교등록금도 대야 했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 한 후로는 또 취직까지 시키라고 성화가 대단했던 어머니. 결국 내가 다니던 직장 거래처에 취직도 시켜줬다. 결혼도 내가 다니는 동료 여직원의 동생인 은행원과 했다. 그 은행원이 지금의 제수씨다.
조카가 사는 집 근처 J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애초 왼쪽 대퇴부수술을 했던 병원에서 다시 수술을 받는 게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며 강남 0000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남동생의 딸들은 어쩌면 어머니의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남동생과 같이 살면서 조카들을 길렀다.
나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수술비 어떻게 해야 할까. 여동생들도 나도 서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밖 에 없었다. 정이 갈라 질대로 갈라진 어머니와의 관계, 그간의 복합적이고 일방통행식인 짓눌림에 이제는 이런 일마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 갈게, 오빠가 알아서 해.’하고 가던 수술하기 하루 전 병원에 온 바로 밑 여동생. 어두운 표정을 하고 뒤늦게 온 둘째 여동생. 간병은 조카가 했다. 수술한 지 꼭 2주후인 그 날, 아침은 엄청 춥기도 하고 눈까지 흩뿌렸다. 병원에서 퇴원수속을 받는 날,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에 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수술비가 삼백이십 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여동생 둘과 내가 나누면 각자 백칠 만원이 된다. 오늘 퇴원하니 아침 일찍 각자 부담금을 넣으라고 조카를 통해 조카 통장번호를 여동생들에게 문자로 보내게 했다. 오전 열한시가 되어도 입금이 되질 않는다. 나는 여동생들한테 재촉 전화를 했다.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 아빠가 백이십 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백만 원씩 보내겠대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퇴원하기 전 친구한테서 요양병원을 소개받았다. 경기도 000에 있는 000재할 요양병원이었다. 요양비와 간병 비 합해서 팔십 만원이란다. 멀리 느껴지는 00암이지만 분당선 00역에서 강경선으로 갈아타고 네 정거장만 가면 된다. 역에서 내려 병원까지는 택시로 십 분이 소요된다. 분당구 중심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갔으면 하는데 무려 병원비가 백칠십 만원이라는 것이다. 2년 전에 왼쪽 다리 대퇴부를 수술했을 때는 막내 동생이 월 이백만 원이나 드는 재활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동생은 그 병원비 마련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혼자 인내하며 속을 태워온 남동생의 죽음도 위암에서 폐암으로 전이가 된 것도 혹 그런 어려움에서 오지 않았을까.
퇴원수속을 마쳤다. 129환자 이송 단 차를 처음 타본다. 위험을 타고 물결치는 뱃전에 앉은 느낌이라고 할까. 곡예를 하는 듯 기막히게 길 사이를 뚫고 나간다. 환자이송비가 십일 만원이었다. 그 돈을 치르니 지갑은 아주 훌쭉해졌다. 영수증을 받았는데 운전자가 아들이름과 똑 같다. 월 팔십 만원의 요양병원, 어딘가 경영이 어려운 느낌을 받았다. 내 자신이 풍족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을 내가 부담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내가 어머니를 모셨을 것이다. 아내는 내게 불만이 많을 수 밖 에 없었다. 돈의 귀중함을 깨달아 철저하게 재테크를 하고 도박이나 술에 덜 빠졌더라면 오늘 날 이런 씁쓸한 모습은 아닐 것이었다. 출이반이(出爾反爾)라는 고사성어,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인과응보의 다른 표현이다. 인생은 너무 짧다. 봄이 한 번 왔다 가면 일 년인데. 백 살이라 해 보았자 봄이 백번 왔다 가는 것. 좀 더 일찍 가고 늦게 가는 것 뿐 인데. 조카는 큰 아빠가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나는 사실 빈 껍질에 불과하다. 나도 지공의 나이를 넘어 얼마 안 있으면 칠순이 된다. 아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 누구를 부양할 나이가 아니고 부양받을 나이시잖아요.”
“지금까지 질질 끌려오셨잖아요. 이제 그만 하세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꼭 전화해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시퍼런 날이 선 칼 같은 목소리로.
“야, 돈 좀 보내, 돈, 돈 말이야.”
그 말만 하시고 ‘찰칵’ 전화를 끊는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는 오만원이고 십 만원이고 조카 앞으로 송금했다. 그 흔적, 내가 힘들여 보낸 돈, 그렇게 나는 아들 말처럼 질질 끌리며 살아온 지난날이었다. 도리에 맞는, 좋은 사람이고 효자라는 말, 잘 한다는 말, 경우가 밝다는 말, 그런 말들을 듣기위해 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흐릿하게 살아온 자신이 분명 잘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이제야 든다. 어쩌면 그리 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더욱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주역에도 임난무구면(臨難无咎免)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당히 맞서라. 그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하고 모든 것을 감수한 채 싸우지 않고 숨어버리는 것이다. 아직 병을 떨치지 못한 아들에게 그 대신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다. 정말 아들에게 미안하다. 큰 아빠의 도리를 주장하며 전화하는 조카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내 자신의 잘못이니까. 막내 동생을 취직시켜준 뒤 동생은 무척 열심히 일했다. 처음엔 잘 되는 듯 했다. 백화점에 납품도 하고 은행에서는 당좌도 개설하고 할인어음대출도 쓰고 그렇게 동분서주했지만 기우는 자금사정은 극에 달해 아파트담보의 한도를 넘어서 융자를 뽑을 수 없었던 동생은 개인사채까지 끌어들였다.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아마 어음도 서로 바꿔치기하며 융통어음을 돌려 할인해서 자금을 끌어댔다. 그 사업, 사향산업인 의류사업. 아니라고 생각되면 빨리 전환해서 다른 사업을 했어야 했다. 결국 부도로 연결되어 동생은 잠적을 하게 된다. 강남에 소형아파트를 잘 사서 몇 억 벌었다고 입 꼬리를 달던 동생의 모습이 아니던가. 은행 빛 하며 개인 사채, 카드 빚 모두 십오억이 넘는 듯 했다.재고물품은 채권자들이 밤에 와서 다 가져가버렸다. 부도를 예상했으면 일부 재고를 빼돌렸을 만 하건만 동생은 그런 요령도 없었다. 어쩌면 해결의 실마리가 도저히 없었을 것이었다. 동생에게 내가 해준 일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건, 대학교 등록금 대준일, 취직시켜 준일, 은행원인 제수씨를 소개시켜준 일. 남동생에게 건넨 은행퇴직금도 적지 않아 두고두고 속상할 때면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고정메뉴가 되었지만. 아파트 경매가 진행되었을 때 부부공동소유라는 점을 들어 경매를 일차 연기하면서 까지 해서 삼천육백만원을 받을 수 있게 한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아슬아슬한 법정 안에서의 가슴 조렸던 일이.
“판사님, 조금 기다려주실 수 없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수씨가 경매가 진행되고 그 순서 바로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안 나타나기에 사정해서 겨우 몇 분을 벌었다. 허겁지겁 들어온 제수씨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왜 그렇게 늦었어요. 자, 빨리 나갑시다.
“사건번호 0000타 경 00000 000씨 배당에 이의 없으시죠?”
살펴보니 세금 및 교부 청구 권자에 대한 지급과 근저당권자에 대한 배당 그리고 압류권자에 대한 배당을 하면 한 푼도 안 남는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부부공동소유다. 그렇다면 근저당권 설정 시 제수씨가 연대보증인으로서 서명치 아니한 세금체납에 대한 부분은 현재의 배당금액에서 제외해야 된다.
“아닙니다. 판사님, 이의 있습니다. 이 아파트 공동소유입니다. 때문에 000의 부인의 공동소유부문에 대해서 세금체납압류부분에는 배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배당이의를 제기합니다.”
“당신 누구요?”
“저는 물건 소유자의 형이고 옆에는 제수씨입니다.”
담당판사는 옆의 경매계장과 상의한다. 잠시 후 결론을 내린다.
“아, 이번 이 사건은 채무자의 배당이의에 대해 이유가 있으므로 다음 달 23일로 배당기일을 다시 정합니다. 다음.”
다시 배당기일이 되었다. 이 날은 제수씨가 시간을 지켜주었다. 나눠준 배당표를 보니 무려 삼천육백만원이 제수씨 앞으로 배당되었다. 어쩌면 부부간의 재산을 공동소유로 해놓으면 이렇게 위급할 때 도움이 된다. 그 후 명도 시에도 약간의 이사비용을 받아 그 옆 동으로 반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지금 그 아파트는 십이억을 넘는다.
동생이 종적을 감춘 후 나는 심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실 형편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적지 않게 쪼들리고 있었다. 아내와는 당시 부부관계는 물론 모든 게 최악의 상태로 까지 치닫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내와 십여 년 전에 이혼을 했다. 하지만 아들과 딸이 결혼할 때까지만 같이 사는 조건이었다. 둘만의 암묵이었다고 할까. 차라리 속이 편했다. 서로에게 자유스러움, 평화, 해방감이 포말처럼 밀려들었다. 비록 도덕적 의미를 망각하려는 위험이 따르는 자유도 있겠지만. 은행을 나온 후 나는 증권용어로 표현하면 상장폐지를 앞 둔 관리 종목 같은 위치에 놓여있었다. 한 동안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신통치 않았다. 보험설계사도 해보고 투신사에 들어가 바이코리아를 외쳐대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안겨주었다. 직장생활에서의 이미지를 시궁창에 내다버린 씁쓸하고 어두운 날들이 지속되었다. 돈 좀 벌어볼까 하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언제나 뒷북이었다. 대박이나 바라고 사들인 주식이 더러 휴지조각이 되기도 했다. 그놈의 투신사에 들어간 일이 흡사 지옥문을 두드린 격이었다. 주식에 대한 자격증을, 선물거래사 자격증을 딴 게 내게서 돈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 원인이었다. 선물, 옵션으로 적지 않은 돈을 잃어 한동안 폐인이 될 뻔했다. 개인과 기관의 주식투자는 소총과 대포의 전투와 비교한다. 기관에게 무수히 얻어터지고서야 물러서는 개인들의 행태는 지금도 계속된다. 한 방에 모든 것을 터뜨리겠다는 대박심리가 있는 한 개인은 언제나 처절한 패배자가 될 수 밖 에 없다.
지난해 남동생이 암 덩이에 눌려 세상을 떠났을 그 때가 스크랩된다. 수원 000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몹시 괴로운 호흡소리, 원망이 가득 차 흘렀다.
“형, 이게 뭔 일이여. 이게. 어,”
“형, 나가 있어.”
제수씨가 대소변을 받아 내려하자 내게 불쑥 힘들게 말을 던진다. 위암에서 폐암으로 전이되어 그 상태가 정말 심각한 상태였다. 제일 고통스러운 암이라는 흡혈귀. 그 흡혈귀가 동생 몸 안 구석구석의 성분들을 남김없이 흡수했다. 뼈만 남았다.동생이 숨을 거두자마자 얼굴은 바로 검어져버렸다. 아, 처절하고 악독한 폐암덩이의 시퍼런 비수는 그렇게 동생을 난도질 했다.
“큰 아빠,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위암 이었다면서요. 아빠가 그 할머니의 유전인자를 이어받아 암에 걸렸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전문대 영양학과를 나와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작은 조카가 내게 말했다.
새해 들어 발생한 어머니의 두 번째 쓰러짐은 정말 내겐 혼동과 막막함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었다. 큰 아들 노릇도, 큰 아빠노릇도, 오빠 노릇도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가진 돈도 없고 하는 일도 없고. 아들의 눈치만 바라보며 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내게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결국 필요한 돈은 아들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일자리센터 두 군데에 연락해놓고 있지만 나이가 많아 쉽지 않다.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데나 가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밑바닥부터 가야하는 것은 아닌지. 소개를 받아 두 군데 지원서를 넣었으나 모두 불합격이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농장에서 일하고 싶어 벼룩시장에 나와 있는 구인란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이렇게 나온다.
“토마토 오이농장, 농장에서 일하실분, 베트남인 환영(침식가능) 양주000면 (농장),
“농장일 하실 분(남녀) 내, 외국인 환영, 급여 상담 후 결정, 00농장”
“농장일 하실 분, 내, 외국인 부부도 가능 08시~18시 주6일 근무 숙소제공 월160만 (포천000농장)
전화해보면 하나같이 내국인은 안 쓴다는 것, 어쩌다 있다면 나이제한이 50대 이하다. 거의 외국인 환영에다가 아예 베트남, 네팔이나 미얀마 같은 나라를 못 박아 놓은 곳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내국인은 이제 외국인에게 밀려 마음대로 일할 수 도 없게 됐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은 젊은이나 나이든 내국인도 많은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사실 외국인에 대한 급여도 적은 편이 아니다. 최저 임금을 훨씬 상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내국인에게도 문제는 그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양질의 일자리만 찾는다든가 힘듦을 이유로 기피를 한다고 한다. 힘든 일도 하고 싶어 하고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실업에 대한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도 외국인은 일자리가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시피 하다니. 노동법에 조금만 어긋나면 이를 문제 삼는 내국인이어서 그럴까. 이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지 않은 외국인에 대한 급여, 그 급여도 못 버는 내국인이 허다하다.
어느 분의 새겨볼 만한 글이 떠오른다.
“국가의 기본적인 일자리 임금(기본임금)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는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 기본임금은 학력이나 경력 등 어떠한 조건도 없이 그 나라 국민이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말 함이다. 소위 3D업종의 일자리가 바로 기본적인 일자리이며 이들에 대한 급료수준이 그 국가의 부강과 행복지수를 결정한다.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일자리는 현재 약 200만개 정도 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근로자가 200만 명 이상 들어와 이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은 현재 지옥이나 다름없는 사회가 지속되고 있다. 자살률 세계 1위, 산업재해 사망률 OECD 1위, 출산율 세계 최하위의 상황이 10년 가까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한국이 이처럼 지옥 같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원인은 첫째도 열 번째도 외국인 노동자를 무모하게 받아들인 결과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소 국민 10%가 지옥에 빠져있다.
둘째, 국민 60%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
셋째, 매수 시장이 몰락했다.
넷째, 국민의 일자리 씨가 마르고 있다. “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65세가 넘어가면 거의 할 일이 경비, 미화원, 건물철거, 택배, 복권판매, 등이 대부분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무직구인은 없다. 모아놓은 돈도 없는 나이든 사람들. 재앙이고 불행이고 어두움의 연속이 될 수 밖 에 없다. 나이를 떠나 일할 의욕이 있고 건강하면 일자리는 당연히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전시효과에 불과했던 지금까지의 중장년 일자리 창출에 대한 정책들. 3개월에서 길어야 10개월인 일자리. 급여도 40만원에서 최저 임금까지다. 나는 지난 달 초에 일자리센터에 신신당부했다. 내 나이에 사무직이란 엄두도 못 낸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마침 00산 국립공원에서 녹색순찰대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이 떴다. 월급은 143만원이고 주 5일 근무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최저 임금수준이지만 나는 그 금액이면 만족한다. 지원자가 많아서 그런지 서류전형합격자 발표가 이틀이나 지연됐다. 아쉽게도 불합격이었다. 사실 생활비는 아들이 부담하니 내가 필요한 돈은 월 보험료와 이발료, 고혈압약값, 휴대전화 요금, 신용대출 삼백만원에 대한 원리금상환금, 공허감이 밀려오거나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막걸리 값, 비상금 해서 오십 만원이면 된다. 문제는 동호회모임이나 동창모임, 직장동료 모임에 들어가는 회비다. 결국 월 60 만원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어머니가 쓰러지신 것이다. 형제들이 서로 협조해 부담한다는 전제하에 적어도 내가 짊어져야 할 돈은 최소 매월 30만원은 된다. 그 돈까지 감안하면 최소 월급 백만 원은 받아야 한다. 일자리 센터를 세 군데나 찾아가 부탁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제 처지가 꼭 돈을 벌어야 할 지경이라, 아무 일도 상관없습니다.”
부탁하고 난 후 네 차례에 걸쳐 연락이 왔다. 그 하나는 000주민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세탁업소에서 세탁물 분류하는 업무인데 월급여가 백삼오만원이라는 것이다. 계속 서서 일해야 하는 점만 빼고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나이는 육십 대 후반도 상관없다고 한다. 정성들여 이력서를 써가지고 방문했다. 회사 분위기도 깔끔하고 그런대로 근무환경은 좋게 느껴졌다. 역시 연락이 없다. 전화해보니 채용이 끝났다는 것이다. 또 나이가 많아서인가. 두 번째는 00수목원인데 육십 대를 찾는다고 한다. 집에서도 멀리 있지 않고 게다가 급여도 백사십 만원이고. 묘목을 옮겨 심고 가꾸는 일인데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서 얼마 근무하지도 않고 그만 둔다는 것이다. 바로 전화를 했다.
“사람, 채용했습니다.”
아니, 채용여부도 확인 않고 일자리센터에서 연락이라도 한 것인가.
세 번째는 산불감시인 자리인데 구청 공원 녹지 과가 그 주관으로 봄 산불방지를 위해 삼 개월 계약기한으로 모집한다는 것이다. 급여는 일 52,160원이고 월차지급 해서 월 백삼 오만 원 정도 된다. 주 5일, 4대 보험 의무가입이고 주요업무는 산불방지계도, 홍보 및 산불 요인 사전 제거 등 예방과 산불위험지역 순찰, 산불방지와 관련된 현장업무(뒷불감시)의 보조 등이다. 제출서류 중에 운전면허증, 이륜차 면허증 및 본인 명의의 차량등록증, 이륜차 사용 신고필증이 있다. 나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운전면허증과 차량등록증이 없어도 지원의 가능여부를 확인하자 일단 지원해보라고 한다. 애매한 답변이다. 필기시험도 있다. 필기시험이야 산불에 대한 개요와 원인과 방지대책과 이와 관련된 법적 제재에 대해 훑어보면 되지만. 혹여 나이가 문제가 아닌지. 전화상으로는 나이에 제한을 안 둔다지만. 일자리센터에서 전화가 온다. 네 번째 소개다.
“이 선생님, 비공식으로 연락이 왔어요. 00주공0단지아파트관리사무소에서 외곽청소원을 모집하는데요. 월 급여는 백구만원이고요. 근무시간 오전 7시 30분에서 오후 2시 30분까지이고요. 이력서 가지고 내일 가보셔요.”
나는 이제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소개해준 일자리, 붙으면 좋고 아니면 다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할 수 밖에 없다. 인연이 닿으면 되는 것이니까.
이력서를 들고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생각보다 단지가 넓고 크다. 모든 걸 내려놓는다고 하지만 막상 그걸 실천에 옮기려니 망설여진다. 심호흡을 하고 관리사무소문을 열었다. 창구에 여직원 3명이 있다. 외곽청소원 모집을 안내받고 왔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란다. 잠시 후 사십대 중반의 과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리에 앉더니 내게 이력서를 요구한다. 이력서를 훑어보고 묻는다.
“외곽 청소원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이야 별로 힘든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 청소 담당도 했으니까요.”
“급여는 얼만지 알고 계시죠?”
“네, 월 백구만원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전, 한자 5천자 알고 있습니다.”
과장이 한자를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다니 놀라웠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 나는 이력서 자격증사항에 한자1급, 한문지도 사 2급이라고 적어 넣었다. 갑자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3,500자도 겨우 알고 있는 수준이다. 늘 다시 보고 또 보고 한자 1급 교재를 가까이 하건만 쉽게 외어지지 않는다.
과장은 근무조건은 괜찮은 편이며 건강에도 좋을 거라는 등 내게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 같았다.
“저, 결과는 오늘 오후 6시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관리사무실을 나오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 와서 막걸리를 마셨다. 오후 6시까지 연락이 없으면 어떠랴. 면접을 보고 합격여부를 기다리는 기대감도 즐길 만 하다. 떨어져도 연락이 안 와도 좋다. 다음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몰두 하는 것, 그것도 일종의 즐거움이니까. 안 되면 가장 쉬운 명분, 그건 인연이 안 닿았으니까.
인연이 없었다. 오후 6시가 넘어 7시가 되도록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지 않은가 싶었다. 내게 맞지 않은 인연. 가슴 한 쪽에 새겨진 쓸쓸한 상처 한 조각.
00상가 프라자 청소원모집도 있다는 것을 또 일자리센터에서 소개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일자리센터에서 소개받고 전화 드렸는데요. 나이가 육십 대 후반이고 청소경력 없어도 되는지요?”
“아,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상임감사님이 안 계시고 내일은 계시니까, 내일 11시까지 이력서 가지고 상가관리사무실로 나오십시오.”
군복무 시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훈련도 받고 배우고 도전했던 그 용기를 다시 찾아야 한다. 신병교육대에서 기관병으로 근무당시 강도 높은 조교교육을 받던 일하며 훈련병을 상대로 정훈업무를 신명나게 진행했던 일이 항시 가슴 밑자리에 깔려있다. 이제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해도 착실하게 배우며 열심히 할 각오를 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낙엽을 가볍게 날리는 날, 나는 산림감시원 지원서 접수를 하러 발걸음을 돌렸다. 000시청 공원녹지과 사무실, 들어가니 담당직원이 친절하게 맞이한다. 가지고 간 서류를 점검하더니 신청서를 주며 작성요령을 알려준다. 내용 중 이동수단에 자동차, 이륜차, 자전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단다. 나는 자전거를 택했다. 다음 주 월요일 오전 9시 40분 까지 지하 식당으로 필기시험을 보러오라고 메모지를 건넨다. 나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들이 산림감시원을 지원하러 들어온다. 응시자들이 제법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선생님, 월요일 필기시험은 대개 어떤 식으로 나오나요?”
“네, 산불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만 나옵니다.”
필기시험 시간이 1시간인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나오기에 그렇게 긴 시간일까. 마음 한편으론 모든 게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할 처지가 아니던가. 무슨 일이 내게 주어지든 최선은 다하리라.
다음 날 나는 일자리센터에서 알려준 00상가 프라자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상가라지만 그리 잘되는 편은 아닌 듯싶어 썩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상가관리사무소를 물어물어 찾아가니 상가관리 총무인 듯싶은 남자가 나온다. 일자리센터에서 연락받고 왔다고 하니 잠시 기다리란다. 얼마 후 어느 여자 분이 들어온다. 회장님이시란다. 또 한 분이 들어온다. 상임감사님이란다. 내 이력서를 본다.
“이런 데서 근무만 하셨는데 이렇게 궂은 일 할 수 있으세요. 힘드실 텐데요.”
“아닙니다. 모든 걸 내려놓았습니다. 알고 왔습니다.”
“아, 00은행에 근무하셨네요. 혹 000라는 사람 아셔요?”
“네, 제가 잘 알지요. 같은 지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요.”
“제 외사촌 동생이에요.”
“은행에서 무엇까지 하셨어요?”
나는 지점장까지 지냈다 는 것과 부동산 중개업 등도 하고 기타 최근에는 중소기업에서 생산보조와 관리업무도 했다는 것을 얘기했다. 회장되는 분은 머리를 갸웃거린다.
“여기는 내부 청소 뿐 아니라 화장실청소도 만만치 않은데 괜찮겠어요?”
“개방된 화장실이라 더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
회장은 내가 험한 일을 하는 청소원으로서는 적합지 않다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 총무는 자신이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울 때 대신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면서 내게 호감을 보였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는 것과 이 나이에 어디 가서 과거와 같은 일을 찾을 수 있느냐는 내용을 강조했다. 기회를 주면 한번 해보겠다는 뜻을 비치고 상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착잡하다.
상가 관리사무실을 빠져나와 예전에 부동산중개업을 하며 알게 된 J 사장을 만나러 갔다. 휴대전화를 보니 며칠 전 이력서를 제출한 00주공아파트 관리사무소 전화번호가 찍혀 있다. 무슨 전화인가. 전화를 하니 계속 통화중이다. 세 차례에 걸쳐 전화를 해보았지만 역시 통화 중이었다. 그 날 오후 6시까지 연락해준다고 해놓고 연락이 없어 아, 안되었구나 하고 포기한 것이 아니었던가. 의아해 하고 있는데 다시 그 아파트 관리사무소 비슷한 전화번호가 뜬다.
“네, 000입니다.”
“이력서 제출하셨지요?”
“내일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합격이었다. 그 날 밤새 나는 뒤척거렸다. 밥맛도 없었다. 마치 신병교육을 받기위해 훈련소에 입소하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과 전혀 반대의 일, 무슨 일이든 못하랴 하고 내심 작심을 해봤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서니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대충 하고 운동화와 장갑, 모자를 챙겨들고 관리사무실에 가니 아마 당직을 서신 분 같은 직원이 맞이한다. 외곽 청소원으로 근무하러 왔다고 하니 영선 반장을 소개해준다. 청소에 필요한 리어카, 통, 집게, 비를 꺼내 건넨다. 조금 있다가 미화반장이라며 육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분을 소개한다.
“잘 부탁합니다. 새로 온 외곽청소원 000입니다.”
“아, 제가 부탁드려야죠. 미화반장 000이예요.”
그 여자 분은 내게 있어서는 직속상관 인 셈이다. 영선 반장은 그냥 자기 이름을‘0씨’라 불러달란다. 영선반장은 아파트 사이 길을 가면서 휴지, 담배꽁초, 종이컵 등을 줍는다. 경비실을 이곳에선 보안관리초소라 부른다. 제1 보안관리초소에 들어가 경비반장이라며 000반장을 소개한다. 나는 머리를 푹 숙이며 깍듯이 인사를 했다.
“이번에 새로 온 외곽청소원 000입니다.”
눈썹이 유난하게 짙은 육십 대 중반의 남자, 성격이 무척 활달해보였다. 같이 간 영선반장이 갑자기 내 나이를 묻는다. 0띠라고 하자 불쑥 손을 내민다.
“아, 우리 서로 동갑이네요. 반갑네요.”
경비반장이 커피를 타 준다. 또 손수레에 얹혀 진 통이 분리되지 않도록 끈으로 동여매준다. 먼저 계시던 분은 경비원들이 해야 할일 까지 도맡아 했고 낙엽도 쓸고 그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과거에는 여자 미화원 열한 명이었는데 외곽의 청소가 미흡해 아마 단지 내 주민한테서 민원이 자주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여자 미화원을 남자미화원으로 교체한 것 같았다. 금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는 것이다. 전임 남자미화원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72세였는데 평소 경비반장에게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두 달도 안 되어 그만 둔 것일까.
“낙엽 같은 건 쓸지 않아도 되는데 비로 구석구석 쓸고 항시 포대 자루에 가득가득 담아 처리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네, 정말 지치고 견디기 어려워서 그만 둔 것 같군요.”
“좀 요령 있게 하세요. 외곽지역과 정문에서 후문 사이 길, 관리사무소 주변 등에 있는 휴지, 담배꽁초, 비닐 등 눈에 띠는 것 만 치우시면 될 거예요.”
생각해보니 남자미화원으로 교체 한 이유가 외곽을 여자가 청소하는 것도 한편 위험하기도 하고 보기에도 안 좋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미화반장이 준 장갑을 꼈다. 영선반장이 준 손 수레에 통을 싣고 아파트 주변을 돌았다. 잡념들이 서서히 머리와 가슴에 와 파편처럼 박히기 시작했다. 과연 내 자신이 이를 견뎌낼 수 있을까. 내 자신을 아직 덜 내려놓은 것인가. 미화반장한테서 전화가 온다.
“아저씨, 아파트 관리소장님한테 인사하셔야 되는데 퇴근하기 전에 꼭 하셔요.”
“네, 000반장님, 그리고 점심 전에 한 번 2층 휴게실에 들를게요.”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가는데 과장이 여자분 과 같이 얘기를 나누며 가는 게 보인다. 과장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 저희 소장님이세요.”
그 여자 분이 아파트관리소장이라니. 사십대 초반 쯤 되어보였다.
“네, 000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파트와 주변 청소를 위해 여자 미화원 10명에 남자 미화원 1명, 어떻게 생각하면 아기자기하고 경우에 따라서 재미도 솔솔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일체 유심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지. 자신과의 어려운 싸움이 복병처럼 계속되리라. 불쑥불쑥 일어나는 어지럽고 가다듬기 힘든 고초.
퇴근 무렵 과장이 아파트 안내도를 꺼내 주요 부문을 표시하고 특히 내가 주로 담당해야할 청소지역을 붉은 줄로 짙게 해서 내게 건넨다. 도면 숙지, 그리고 효과적인 청소방법 등을 나름대로 찾아야 한다. 첫 날 퇴근 시간이 2시 30분 인 데도 하루 종일 일한 것 보다 더 무거운 중압감이 등 뒤와 머리전체를 누르고 있었다.
오늘은 사흘째 되는 날, 애초 청소원 이력서를 제출 한 날, 그 날 과장이 오후 6시까지 약속한 연락이 없어 다음 날 산불감시원 지원을 했었다. 오늘은 산불과 관련된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에 대해 필기시험이 있는 날이다. 어제저녁부터 고민했다. 급여는 월 140만 원 가량 되고 주 5일 근무다. 문제는 너무나 짧은 근무기간이다. 최대 3개월인데 경우에 따라 45일도 있다고 한다. 휴일도 근무해야 되고 눈, 비가 오면 쉬게 된다. 근무일수에 따라 급여가 나온다. 오전 9시 40분까지 지하 식당에 입실을 하라고 안내문을 받았다. 미화반장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반장님, 잠시 사정이 생겨서 자리를 비웁니다. 죄송합니다. 000 드림”
택시를 타고 000시청에 내리니 9시 18분이다. 잠바를 걸친 내 또래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일흔이 넘은 사람도 여럿 보인다. 옆에 있던 분은 벌써 정보를 입수한 듯 35명을 뽑는다며 예전에는 이런 필기시험도 없이 그냥 해줬는데 사람이 많이 지원해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나는 갈등이 일었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택시를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아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시험이나 보고가야지. 나는 다시 000시청으로 갔다. 담당자가 나온다.
“산불감시원 시험 보러 오신 분들,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9시 40분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들어옵니다.”
담당직원 3명이 정리를 한다. 먼저 접수한 사람들이 왔는지 확인하고 인원을 30명씩 나누어 고사장을 배치한다.
“지그재그로 앉아주세요. 한 쪽으로 그렇게 몰려있으면 안됩니다. 문제지가 A형, B형으로 되어있어 옆에 사람 것 봐도 틀립니다.”
잠시 후 담당직원이 주무담당관인 팀장을 소개한다.
“팀장, 000입니다. 먼저 35명뿐이 못 모시게 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시 예산이 더 이상 배정이 안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 모두 98명이 지원해서 거의 3:1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시험을 보게 된 것도 산불감시원의 변별력을 확인해봐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시험에 승복을 못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개별로 오시기 바랍니다. 1:1로 상담해드리겠습니다. 1점 차이로 떨어지는 사람이 나올 거예요. 시험에 떨어지시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하시면 고맙겠습니다. 자, 그럼 정각 10시에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입학시험이나 자격증 시험을 보는 것 같다. 문제지를 받아보니 A형이고 문제는 모두 20문제에 4지 선택형이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문제지를 한번 쓱 훑어봤다. 문제의 난이도가 보통이 아니다. 심지어 000시청의 시화(市花)가 무언지 묻는 문제도 있다. 개나리, 진달래, 장미, 황매화 중에 어떤 것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 장미를 좋아한다. 장미를 선택했다. 다음 중 산불 진압 장비가 아닌 것은 등짐펌프, 불 갈퀴, 윤척, 막 삽. 산불의 발생빈도가 가장 높은 달은, 공기 중에 습도가 몇 %이하 일 때 산불이 발생하기 쉬운가. 낙산사 소실을 빚어낸 산불은 다음 중에 어느 산불인가, 고성산불, 양양산불, 동해안 산불, 숭례문소실. 산불의 원인 중에 가장 많은 사례는?
시험 시간은 30분을 주었지만 10분도 안 돼 다 썼다. 제출하고 나가려 하니 20분이 지나면 나가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시험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시험에 붙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장을 나올 때 내 어깨는 축 늘어지고 씁쓸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지금껏 시험보고 이런 떫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치른 시험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판단 착오였다. 당연히 산불에 대한 기초 지식은 예상하고 익혀두어야 했었는데. 지원서를 접수할 때 담당직원이 전해준 상식적인 문제가 나온다는 그 말을 믿은 게 실수일까. 사실 시험 볼 때 문제의 답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무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답을 골랐다. 합격자 발표는 익일 오후 5시에 문자로 넣어준단다.
다음 날이었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친구 사무실에 가고 있는데 휴대전화에 소식이 온다. 000시청 주관담당부서에서 보낸 문자메시지가 뜬다. 오후 5시 16분이다.
“산불감시원 합격을 알려드리며, 일정은 추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산림 팀.”
그래 시험은 상대적인가. 나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나보다. 떨어졌다고 생각한 시험에서 이렇게 합격하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달라진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담배꽁초, 비닐, 종이컵, 등을 집게로 통에 담으며 나날을 보내느냐, 그것도 혼자 외곽을 수시로 돌면서 확인, 또 확인 하며 걷다보면 팔과 무릎도 삐걱거리고 묵직한 중압감이 머리를 짓누르는 듯하고 공허함이 불쑥 내미는 상황을 그냥 인내해야 해야 하나. 아니면 과감히 접고 산불감시원으로 전환해야 하나. 물론 금전적인 면을 떠나 산불감시원이 아파트 외곽청소원 보다 무언가 재미도 생길 것 같고, 같은 나이또래의 동료들과 우정을 새롭게 맺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자꾸 산불감시원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얼마 전 같이 소주를 마시던 0형에게 넌지시 산불감시원에 대해 물어보니 자신도 산불감시원을 한 적이 있다며 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불도 직접 진화작업에 투입되는 것도 아니고 진화 후에 잔불 정리를 하는 게 맡은 업무라는 것이다.
언제부터 일정이 잡혀져 진행될까. 합격자 발표 후 이틀이 지났는데.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아파트 외곽청소를 하다보면 담배꽁초는 물론 때로 00 막걸리 병도 화단에 몇 개 씩 떨어져 있는 게 보인다.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다가‘휘익’창 밖으로 던져버리면서 고달픔과 공허함을 잠시 나마 털어내겠지. 갈 때마다 같은 동 같은 위치에 막걸리 병이 떨어져있다. 아마 똑같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가 싶었다. 우유 빈 팩, 비닐봉투, 담배 갑, 콜라나 사이다 병, 담배꽁초, 과자 기타 먹을거리를 포장했던 비닐껍질 부스러기 등. 때로는 떡볶이를 먹다가 버린 빈 종이컵, 애완견의 배설물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 고양이 먹으라고 내놓은 라면이 흰 꽃이라도 핀 듯 나무 밑에 펼쳐져 있는 것도 보인다. 사골 뼈 사다 고아먹고 내 버린 뼈도 있다. 비닐 봉투에 담아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한 바퀴 돌아오는 길에 영선반장을 만나 이런 얘기를 하니 시익 웃는다.
“그것, 조심하세요. 재수 안 좋으면 소주병에 맞을 수 가 있어요. 사람이 지나가는데 위에서 소주병을 사람을 향해 던지는 것을 봤다고요.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하여튼 조심하세요.”
“참, 거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잘못 하면 비명횡사 할 경우라도 있겠네요.”
외곽을 빙빙 돌다 다리가 아파오고 허리에 약간 아픔이 온다 싶기에 000동 지하 휴게실을 찾았다. 지하실 휴게실, 의자 두 개, 전기난로, 선풍기 한 대가 전부다. 책이라도 읽어보려 펴보지만 얼른 내키지 않는다.
나는 산불감시원합격자에 대한 일정이 궁금하고 근무기간은 어찌되는지 알고 싶어 용기를 내 담당부서에 전화를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겨우 2개월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가을철은 산불감시원제도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휴일 근무가능 함을 지원서에 기재한 터라 토, 일요일도 근무하여야 한다. 점심문제, 교통편 문제 등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담당자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산불감시원 합격자인 000 입니다. 이번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갈 수가 없을 듯합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담당자는 간단하게 처리해버린다. 전화로 매듭을 짓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이제 아파트 외곽청소원으로 취직이 되어 어머니 병원비 부담에 대해 한 시름 덜었다. 오랜만에 휴대전화를 열었다. 조카한테서 문자가 와 있다. 내 친구가 소개한 요양병원이 제대로 물리치료도 하지 않아 조카들이 어머니를 물리치료도 하고 씻기는 일을 대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더 견딜 수가 없어 요양병원비를 정산하고 분당에 있는 00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요양병원비와 환자이송 비에 대한 분담금 30만원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제수씨에게 요양병원이름과 위치, 입원한 호실을 물었다. 삼일절, 그날은 일하는 곳이 쉬는 날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요양병원까지 가려면 거의 세 시간이 걸린다. 어머니와 관련되어 여동생들과는 일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조카한테서 문자가 온다.
“오늘 시간되시면 오셨으면 해요. 아무도 안 오시고 할머니가 큰 아빠 보고 싶어 하세요.”
그래, 그러지 않아도 가고 싶었는데. 나는 일전에 보내달라는 30만원을 송금했다. 요양병원은 00역에 내려서 5 분 거리에 있었다. 역시 돈이 말해주는가 싶었다. 병원입구부터 깨끗한 모습하며 간병인들의 복장도 산뜻하다. 입원실을 들어가는데 딴 세상에 온듯했다. 간병인 2인이 정성껏 돌보고 있고 분위기가 아늑한 안방 같다. 여덟 명의 환자 들 사이에서 백팔십도로 달라진 어머니가 나를 향해 한 마디 한다. 앉은 자세의 어머니가 큰소리로,
“야, 이제 오냐. 아들이 되어갔고 어찌 그런 병원에 나를 입원시켰었냐.”
옆에서 다른 환자가 나를 보고 싱긋이 웃으며 한마디 거든다.
“아, 아들이고만, 어쩐지 그러고 봉게 닮았네그려.”
아니, 누워서 정말 아무 말도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계실 줄 알았는데. 더구나 머리도 검게 염색까지 해서 그런지 칠십대 중반으로 보였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기가 넘쳐흐르시고 단지 거동만 못할 뿐 정신은 말짱한 분이 아닌가. 목소리도 우렁우렁했다. 간병인은 내게 어머니가 이곳에서 왕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넘버원을 그렸다. 한편으론 마음이 누그려졌다. 문제는 돈이었다. 입원실 담당직원에게 물어보니 병원비가 70만원이고 간병비가 하루에 3만원이라는 것이다. 그럼 한 달에 백육십 만원이다. 하지만 일단 안심이 되어 마음은 그런대로 홀가분했다.
나는 간병인에게 작은 성의표시를 했다. 못난 아들을 둔 어머니. 우리 형제들을 길러주신 불쌍한 어머니. 우리를 위해 한평생 자신을 희생시킨 분이 아니던가. 그러나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과 모든 걸 돈으로 만 생각하는 그런 분이었기에 가끔은 서운한 감정을 우리형제들에게 심어주시기도 하신 분. 그 서운함이 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갔다 온지 거의 열흘 가까이 된다. 토요일 근무는 오전 7시 30분에서 10시30분까지다. 여동생들도 발걸음을 끊은 것 같고 아들 된 도리로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갔다 오려면 적어도 일곱 시간은 걸린다. 부지런히 서둘렀다. 00역에 내렸다. 요양병원은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이제는 재가급여를 받던지 아니면 요양원에 모시어야 될 것 같아 노인장애등급신청을 하면 좋을까 싶어 제수씨에게 전화를 했다.
“제수 씨, 지금 어디계세요? 저, 지금 요양병원에 어머니 보러 가는데.”
“어머니 퇴원해서 집에 계셔요.”
지난 달 24일에 그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벌써 퇴원했다니. 한편으론 금전적인 문제가 우선 해결되는가도 싶었다. 노인장애등급을 받아 재가급여신청을 하면 간병인이 하루에 3시간에서 4시간씩 방문하여 돌봐준다. 그 비용이 이십 만원도 채 안 된다. 만약 시설급여로서 요양원에 입원할 경우라도 본인 부담이 20%가 되어 삼십 만 원 가량 부담하면 해결된다. 집에 가서보니 벽을 기대고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층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자유스럽지 못하여 화장실 출입을 스스로 못하신다. 기저귀를 차고 있단다. 이틀 전에 퇴원했다는 것과 요양등급신청도 했다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그간 문자메시지로 여러 차례 보냈다. 이제 더 이상은 내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카들은 어머니에 대한 일들을 처리했다. 가려고 일어서자 어머니가 한 마디 한다.
“돈 좀 주고가.”
나는 부끄러웠다. 지갑엔 달랑 00천 원 뿐.
0만원을 드렸다. 내 자신이 생각해봐도 너무 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 발생한 내게 주어진 금전과 운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알 수 없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이상한 일들.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은 필연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어머니가 병원을 퇴원할 때 내가 부담해야 할 병원비를 마련하기위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팔아야 했다. 애초에 매수한 가격보다 주당 25원 정도 올라있는 상태인데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열배도 더 될 것 같았다. 그 때 판 주식이 점점 가랑비 옷 젖듯 빠지기 시작했다. 그 후 판 가격보다 무려 백팔 십 원이 떨어진 연중 최저가로 되더니 하루 전인 금요일 시세를 보니 그 금액 그대로 있고 옆에 빨강글씨로 ‘매매정지’로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상장폐지절차를 밟기 위한 사전 단계다. 이유는 전액자본잠식, 물론 관리종목이라 그런 건 알고 있었으나 제3자 매각을 통한 경영정상화를 기대했었다. 아마 어머니의 수술비가 아니었더라면 그 때까지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리라. 병원비로 들어간 돈, 어머니 병원비에 흘러간 그 돈은 본연의 역할을 다한 것이었구나. 비록 비상금이 사라져 운신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나는 전혀 생소한 이 직장에 들어와서 모든 걸 내려놓고 밑바닥에서부터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찾아서 할 각오를 했다. 처음 일하러 온 날 내게 무척 친절하게 해준 영선반장을 기억한다. 전에 일하던 사람이 쓰던 물건 등을 내주며 무척 살갑게 대해주었다.
“저, 요령껏 하시면 돼요. 먼저 있던 사람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러면서 손수레와 조그만 노란 통을 내준다. 가볍고 다루기 편하다. 영선반장에게 친근함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한자 1급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한자 1급이라고 하니 무척 호기심을 가진다. 한자 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다음 날부터 한자를 하루에 세자 씩 가르쳐주기로 약속했다. 한자는 8급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고사성어, 사자소학 등 앞으로 차츰 가르쳐줄 수 있음을 넌지시 비쳤다. 아, 이 사람 배움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구나. 어떻게든 잘 가르쳐주고 싶었다. 나는 집에 와서 8급 한자 50자에 대해 별도로 두꺼운 종이를 오려 일일이 썼다. 첫 날 날일(日), 달월(月), 하늘 천(天)을 가르쳤다. 따라서 읽고 써보고 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다음 날은 나라 국(國), 가르칠 교(敎), 여섯 육(六),을 그 다음 날은 백성 민(民), 학교 교(校), 형형 (兄),을 다음 날엔 아비 부(父), 흑토(土), 군사 군(軍)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날은 좀 이상했다. 갑자기 내게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 한다.
“너무 많이 기억하면 불행해져요. 잊어야 되요.”
“그래, 맞아요. 기억하면 불행해진다는 것, 좋은 말이네요.”
나는 자꾸 그 말을 되뇌었다. 다음 날, 나는 그가 안 보이자 전화를 했다. 내게 온 영선반장에게 그간 배운 한자를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술술 잘 한다. 나머지 안 배운 글자도 물어보니 일사천리로 말한다. 아, 이거 뭔가 한참 잘 못 되었구나. 가르치지 않은 글자를 척척 말하는 것 하며 써보기까지 한다. 분명 한자는 전혀 모른다고 했는데. 알면서 한 번 떠보려고 한 것인가. 나는 그에게 한 마디 했다.
“공자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안다는 것에 대해 가르쳐주마. 그것은 바로 안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요,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가 是知也시지야니라.).진실한 것이 중요하지요.”
내가 한자 1급이라고 했을 때 영선반장은 ‘어떻게 하나’ 시험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겨우 한자 8급을 운운하며 가르친다고 하니 얼마나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까. 세상 이치가 확연하게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말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설령 안다 해도 그 뒷면은 모르고 겉으로만 아는 그래서 깊이 들어가 보면 하나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안다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안다는 것. 그래서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두루뭉술한 자기 방어의 방편은 아닐는지. 그 후부터 영선반장은 나를 피했다. 나 역시 그를 만나도 한자에 대해 일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아파트 단지엔 경비원이 총 16명이다. A조와 B조로 나뉘어 있는데 조별로 반장이 있다. 반장 두 분이 성격이 모두 무난해 보였다. A조 반장은 나 보다 네 살 아래로 서글서글한 눈매 하며 음성이 편안함을 안겨준다. 옆을 지나가면 일부러 경비 초소 문을 열고 나와 그를 부른다.
“여 어, 이리와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네?”
아파트 경비원이지만 하는 일은 경비 업무 외에도 맡은 동 주변 청소며 택배전달, 이사 등에 따른 부수업무와 재활용과 쓰레기 분리 작업 등 만만치 않다. 경비하는 분 대부분의 나이가 육십 대 중 반을 훌쩍 넘는다. 공무원, 경찰관, 군인, 회사원 등 사무직 출신이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직이 대기업 부장, 금융기관 지점장, 학교 교장 출신들도 있다. 전직이 무엇이었던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어쩔 수 없이 경비라도 해야 삶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B조 반장은 우리나이로 일흔 셋이다. 나이에 비해 몸 관리를 잘 해서 그런지 균형 있는 체격에다 의욕 또한 대단해 보였다. 내가 평소 입는 상의(上衣) 크기는 95인데 받은 잠바는 110도 넘을 것 같은 XL(엑스라지)이었다. 나는 그냥 전임자가 체격이 대단히 커서 그런가보다 하고 입고 다녔다. 작은 키에다 잠바가 엄청 크니 꼭 포대자루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 같았다. B조 반장은 그런 나를 안쓰럽게 생각했는지 커피 한 잔하러 갔을 때 경비원이 입는 잠바 중에서 여분으로 있는 95크기의 옷을 내준다.
“아, 그거 원, 잠바가 엄청 크고만, 사람에게 맞은 옷을 주던가 해야지.”
경비원이 입은 적이 있는 헌 잠바를 받아가지고 와서 입으려 하니 왠지 꺼림직 하고 기분이 안 좋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절기 복장으로 새 잠바가 나오니 그때 까지 참기로 했다. 며칠 지나 나는 다시 그 헌 잠바를 돌려주었다. 고마운 마음은 이해할 수 있으나 후줄근한 경비원 헌옷을 입는다는 게 도저히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 날도 나는 B조 반장에게 커피 한잔을 마시러 갔다. 그 반장은 좁은 경비실 공간에서 스텝을 밟는다. 춤에 대해 술술 풀어놓는다.
“춤이란 실전이 강해야 해요. 아무리 문화센터에서 배워 받자 콜라텍에 가면 전혀 안 맞아요. 밀고, 당기고, 돌리고를 아주 자연스럽게 배워야 하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면 한 달, 아니면 삼 개 월은 배워야지요.”
그 반장은 춤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춤 배우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개인교습이라니,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데다 단지 내에 소문이라도 나면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더구나 다음 날 그 반장이 불쑥 내 놓은 한 마디가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기, 우리 B조 경비원 전체가 단합대회를 가지려는데 사이다 한 박스 좀 사줘”
이제 입사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사이다 한 박스를 사달라니. 뭐가 한 참 잘못되었구나. 단합대회면 동 주민자치회나 부녀회한테서 협조를 받으면 되지 않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A조 반장한테 이런 얘기를 하니 펄쩍 뛴다.
“아니, 그런 일이, 이 선생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어이가 없네요. 그냥 묵살하세요.”
나는 그 반장과 당분간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그 반장이 근무하는 날은 일부러 그곳 지역은 피해 다녔다. 아, 그래. 경비원보다 못한 위치의 외곽청소원. 직원 출퇴근카드 서열 제일 밑.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그 반장과의 씁쓸함은 해결되었다. 갑자기 나이 만 칠 십 세가 넘은 경비원을 해고한다는 방침이 내려졌다. 경비원은 당초 삼 개 월 계약을 한다. 지금까지 칠십 세 이상 경비원도 근무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어 삼 개월 지나더라도 자동으로 재계약해왔다는 것이다. 그 반장을 비롯한 세 명이 이유가 뭔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재계약 불가로 결정이 났다. 주민들한테서 일 잘한다는 평판도 있는데. 그러나 일부 민원인들로부터 강력한 제의가 들어오면 거절 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삼 개 월 시효 인생. 나이 들어 돈이 없으면 이럴 땐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다. 2개월 산불감시원이나 4개월 공공일자리나 최저 임금을 받으며 짧은 기간 일하는, 불안한 삶을 일궈가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사이에 내 자신도 끼어있다고 생각해왔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중앙통로를 청소하고 주변 외곽을 도는 중이었다. 갑자기 관리실 전화번호가 뜬다. 아침 회의 시 내게 지시사항이 있으니 참석하라는 사무실 여직원의 전화였다. 매일 아침 9시에 하는 소장주재 회의인데 소장과 관리과장, 각 담당별 반장, 주임급 직원이 참석한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소장이 말을 직선적으로 꺼낸다.
“외곽 아저씨, 너무 못하십니다. 놀이터가 낙엽으로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어요. 모래에 섞인 낙엽도 걸러내시고 좀 잘하세요.”
갑작스런 질타에 어이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와 같은 말을 들으니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서두에 고생한다, 수고한다, 이런 일 처음이니 참 힘드시지 않는지, 그렇게 말하다가 말미에 그런데 놀이터에 조금 신경을 써주시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해주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소장이 말을 잇는다.
“아파트 동 주변의 화단 담배꽁초 등 휴지는 경비에게 담당하라고 지시해놓겠어요.”
“네, 놀이터청소를 전담하라는 말씀이시죠?”
“네.”
사실 놀이터라는 개념이 공원도 포함된다. 그 넓디넓은 00공원, 6개나 되는 놀이터 게다가 중앙통로, 정문주위, 관리 동 주변의 청소까지 하려면 내게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낙엽을 쓸어 모으고 자루에 주어 담아 리어카로 나르고 해야 되는 힘든 일이다. 다른 아파트 단지에 비해 턱없이 많은 단지 내 아파트 동, 무려 열일곱 개나 되는 방대한 청소구역을 애초 염두에 두지 못한 게 내 자신의 잘못이었다. 우선 당장 취직을 해서 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그 일념 때문에 빚어진 판단착오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제대로 된 첫 월급도 안 받은 지금 그냥 사표를 던지고 나가야 되나 어쩌야 되나. 하지만 당분간은 참아야 한다.
오늘은 첫 월급 받는 날이다. 목마름으로 힘들어한 내 자신의 통장에, 오랜 만에 안겨오는 땀과 피의 대가. 일금 일백오만 팔천사백 칠십 오원. 비록 육신은 지치고 쑤시고 아프더라도 통장에 결과라도 들어오게 되면 마음은 달라진다. 00공원의 낙엽을 쓸고 또 쓸었다. 다른 곳에 갔다 오면 그 사이 바람이 살짝 불었는지 또 다시 낙엽은 떨어져 얄밉게 뒹굴고 있다. 저 놈의 대왕참나무를 싹둑 잘라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왜 다른 아파트처럼 가지치기라도 안했을까. 그 대왕참나무만 없어도 일은 반으로 준다. 공원 옆 모래 깔린 놀이터의 낙엽을 갈퀴로 긁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온다.
“외곽 아저씨, 저, 소장이에요. 00공원 청소하셨어요?”
“네, 했습니다만, 다시 바람이 불어서 낙엽이 쌓였나봅니다.”
“저, 앞으로 아침 9시 10분에 저에게 와서 업무지시를 받고 가세요. 그리고 오늘 퇴근 할 때 제게 들리세요.”
또 무슨 지적사항이라도 생긴 건가. 일단 전화만 오면 지적사항이나 또 다른 사안이 생긴다. 그래,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참자. 갈퀴와 빗자루, 쓰레기 통, 낙엽 담는 자루. 집개를 제자리에 갖다놓고 소장 실에 갔다. 주민과 대화 중이다. 소장은 그 분과 대화를 잠시 멈추고 내게 지시한다.
“저, 요즘 그거 하시고 계시죠?, 각 동 1층 화단 안쪽 빈 공간에 돌 있는 것 치우는 것 말이에요.”
“아, 저는 그것 경비원들이 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제 일이라면 제가 해야지요.”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업무에 대한 과중도 변명도 낙엽이 달려있는 대왕참나무 가지에 대한 전지작업얘기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며칠 안에 그만 둘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00아파트 단지 미화원으로 들어올 때 용역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체결 시 작성한 그 계약서는 바로 근로기준법 제17조에 의해 당연히 사본을 내게 교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받지 못했다. 나는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초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 금년 말까지 근로계약기간을 정했다. 보내준 근로계약서를 살펴보니 제2조에 이렇게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제2조(수습기간) “을”은 입사 후 최초 3개월간의 수습기간을 거쳐 직원으로 임용되며, 이와 관련한 사항은 취업규칙에 따른다.(취업규칙위반 및 배치단지의 민원 등으로 교체 요구 시 수습기간 중에 퇴직할 수 있다.) 채용 후 고용주의 마음에 안 들면 3개월이 되는 날 해고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조문이었다.
이제부터 단지 내 아파트 1동부터 17동까지 1층 화단 안쪽 공간에 있는 벽돌조각과 돌등을 치우려면 리어카를 가지고 다니며 실어 날라야 한다. 중앙통로와 정문 주변의 청소, 공원을 포함한 7개 놀이터의 청소, 각 동의 돌 치우기 작업을 하는데 도저히 나 혼자 힘으로 해낼 엄두가 안 난다. 2명이 해도 겨우 할 법한 외곽청소업무다. 사직서를 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추가 이유도 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에 불만을 품은 소장이 아침 회의 때 영선 반장과 직원에게 주변 낙엽 수거를 지시한 듯 했다. 아침에 내가 00공원을 열심히 쓸고 있을 때 그 반장과 직원이 부지런히 낙엽을 자루에 쓸어 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장님, 이거 저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반장과 직원의 표정을 살폈다. 얼굴이 심히 일그러져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이 분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과장님, 제가 도저히 힘에 겨워 더 이상 근무할 수 없네요.”
“일 잘하시는데 갑자기 그만 두시다니요.”
그래도 과장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장은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한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역시 인정 없는 냉담한 대꾸였다. 과장에게 4월 12일자로 사직서를 건넸다. 사무실을 나오는데 가슴이 허전하고 무언가 시원하면서도 약간은 아릿한 뭉클함이 몰려온다. 영어 명언이 문득 떠올랐다.
"Dont't stress over the things you can't change."
‘그대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마세요.’라는 영어 금언(金言)이.
막상 그만 두고 나니 가슴 한 구석은 허전하다. 하지만 개운하기도 했다. 양 무릎이 쑤시고 아파서 당분간은 푹 쉬어야겠다. 해마다 사월이면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시니어사원을 모집한다. 급여는 육십 만원을 약간 웃돌고 근무시간은 주 5일에 하루 4시간 근무한다. 아들이 생활비를 부담한다는 전제하에서 지금의 나는 월 50만원은 최소한 있어야 한다. 친구들과 술 한 잔 하거나 경조사 같은 일이 갑자기 생길 것을 대비하면 월 70만원은 되어야 안심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토지주택공사 시니어 사원의 월급이면 내가 살아가는 데 충분하다. 드디어 고대하던 모집 공고가 4월 17일자 신문에 났다. 예년과 다른 점은 월급여가 67만원이라는 점, 채용대상 연령이 만 60세 이상 이라는 점, 그 외는 같았다. 1,000명 모집, 근무기간 5개월이고 주5일 근무에 하루 4시간 일하면 된다. 지역별로 임대아파트에 안배된 모집인원, 내가 사는 D시에는 모집이 없고 인근 Y시와 E시에서 각각 6명과 14명 씩 뽑는다. 지원서 양식을 보니 학력 란도 없고 자기소개 란도 없다. 단지 맨 하단에 지원동기와 경력과 특기사항만 있다. 그렇다면 포인트는 바로 이 내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시니어 사원 접수기간이 지난 4월 24일부터 26일까지었다. 나는 4월 24일에 의정부 시니어 클럽에 가서 지원서 접수를 했다. 지원서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정성껏 썼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임대아파트 관련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삶의 역동 감을 느끼고 자녀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지원함.
-00은행 명예퇴직
-00공인중개사 사무소 운영(7년)
-한국0000공사 서울북부지사 근무(6년)
*00연금 상담, 아파트 거주자 실태조사 업무담당
-공인중개사, 한자 1급(한국어문회), 한자·한문 지도사 2급(대한검정회)
합격자 발표는 오는 5월 25일이다. 경쟁이 심하리라 생각된다.
육십 대 후반의 이 나이,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육체적으로 아무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얼마 전 외곽청소원을 해보니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무릎이 쑤시고 아프고 게다가 온 몸이 마치 무엇에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래도 잠시라도 무엇엔가 미치지 않고는 몸과 마음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 한문도 한시도 계속 배우고 싶고 영어도 능숙하게 하고 싶고 중국어도 하고 싶고 부엌을 점령할 수 있는 요리도 배우고 싶고, 그리고 사교춤도 완벽하게 배우고 싶고. 어쩌면 알 수 없는 타락 같은, 방랑 같은 늦바람이 내게 불어온 것일까. 인생의 황혼기에 불어 닥친 늦바람. 잠시라도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내게 빈 공간을 가득 메 꿔 줄 수 있는 춤. 도화지에 별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깊은 추억을 그리고 그렇게 마루 바닥을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춤을 배우고 싶었다. 이 지역에 이사 와서 약초관리사 수강과정을 통해 알게 된 칠십대 후반의 L이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은 나이에 비해 동안(童顔)이시고 서예, 그림, 음악 등 못하시는 게 없었다. 서예 분야는 종로 인사동 화랑에서 전시도 여러 번 한 듯했다. 그 분이 사교춤을 구성지고 현란하게 추셨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사교댄스 강좌에 취미삼아 일주일에 두 번 나가 배운다며 은근히 부추긴다.
“아우님, 나는 정(靜)적인 것보다 이젠 동(動)적인 게 더 좋아.”
나는 그 분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00동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댄스 과정 반에 수강신청을 했다. 만65세 이상이면 3개월 강습료가 일반회원 수강료 6만원의 반인 3만원이 된다. 한 달에 만원인 셈이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9시30분부터 11시 30분 까지 정식으로 접해본 적이 없는 춤을 배운다. 슬로우, 슬로우, 퀵퀵,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서투르고 어색하지만 재미가 솔솔 붙는다. 나보다 나이든 분들이 대부분이다. 건강하고 즐거운 이런 생활, 하루에 4시간만 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공공근로나 시니어 사원제도 이외에도 더욱 많은 4시간 일자리가 생겼으면 한다. 노인 일자리 급여가 월 40만원으로 인상되면 지금보다 많은 분들이 그런대로 최소의 경제적인 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공무원, 군인, 교사, 은행원, 회사원 등은 은퇴 후 전 직장과 같은 일자리는 생각도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대책의 일환으로 나이별 취업할 수 있는 자리를 일정 구성비로 해서 사무직채용제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사회서비스업이든, 안내나 상담 등을 필요로 하는 금융업이든, 정부나 지자체든, 공공기관이든. 이런 의미에서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시니어 일자리는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비록 그 기간이 5개월일지라도. 건강하고 일 할 수 있는 마음가짐 만 있다면,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단기간이 아닌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소망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날이 오리라 기대해본다.
이제 나도 한 고비는 넘긴 듯 했다. 아들의 건강회복, 나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의 건강함. 어머니가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온함, 조카들이 조금은 힘들지만. 내게도 주민 센터에서 성인들을 상대로 한자와 한문을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질 날이 올 수 있을까. 한문 지도사 1급 자격도 어떻게든 따야한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일인 5월 25일, 아침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발표시점이 오후 4시 이후다. 드디어 그 시간이 되었다. 긴장이 된다. 그러나 무려 50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다. 아, 떨어졌구나.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D시 5일장이 서는 00 시장이나 둘러보려고 집에서 나왔다. 혹시나 하고 가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문자가 와 있는 게 아닌가. 기다리던 합격통보였다.
“안녕하세요. 000님, 2017년도 LH시니어사원으로 선발되신 것을 진심을 축하드립니다. 근무 개시 전 준비사항, 근무지 등 자세한 내용은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빠른 시일 내 유선으로 개별 안내 예정입니다. 자세한 문의는 한국토지주택공사 0000본부로 문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MMS오후 4:59
내 기분은 훨훨 끝없이 날아갈 듯 했다.
그 후 사흘이 지난 5월 29일에 문자메시지가 또 왔다.
“LH시니어 사원 합격을 축하드리며, 6월 1일(목)오전 9시까지 해당관리소에 본인신분증, 본인 명의 급여통장 사본을 구비하여 출근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LH서울지역본부 임대공급운영부. ”
건강도 주고 노후문제도 해결해주는, 많은 일자리가 하루빨리 생겨났으면 좋겠다.

태어나서 25세까지를 봄, 50세까지를 여름, 75세까지를 가을, 100세까지를 겨울로 치는 ‘백세시대’를 인생의 사계절이라고 한다. 나이 육십 대와 칠십 대는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晩秋)가 된다. 법륜스님이 말씀하셨던가. ‘잘 물든 단풍은 봄꽃 보다 아름답다’고.

나도 잘 물든 단풍처럼 살고 싶다.(♣)


ⓒ매일신문 - www.imaeil.com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사회,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