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덴스티커의 고뇌··· "그래도 나는 설국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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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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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허연의 일본문학 기행-24] 설국의 첫 문장은 모두 알다시피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國であった."로 시작한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는 독특한 점이 하나 있다.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주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내가 주체가 되어 터널을 통과해 나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기막힌 소설적 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주어 없이 영어로 옮기는 것은 힘들다. 사이덴스티커는 이렇게 영역한다.

"The train came out of the long border tunnel into the snow country."

(열차는 국경의 긴 터널을 나와 설국으로 들어섰다.)

주어로 'The train'을 내세워 객관적인 사실을 강조한 번역이다. 이렇다 보니 책을 읽는 사람이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는 힘들다. 그저 기차가 터널을 나와 설국에 도착하는 상황 묘사에 가깝다. 그 다음 문장은 "夜の底が白くなった(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이다. 이것을 사이덴스티커는 이렇게 바꾸었다.

"The earth lay white under the night sky."

(땅은 밤하늘 밑으로 하얗게 펼쳐져 있다.)

이 역시 아름다운 정경 묘사에 불과하다. 원문에서는 '밤'이라는 시간적 개념이 '밑바닥'이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변환되는 기막힌 표현이겠지만 영어 번역은 이를 표현해내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영어 번역의 매력도 있다. 땅을 의인화했다는 점이다. 이런 '신의 한 수'를 통해 사이덴스티커는 영어판의 문학성을 구현해냈다.

영어판 전체의 분위기를 놓고 보면 사이덴스티커는 '설국'의 미학을 전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한 문장씩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이처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이덴스티커가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고심을 한 부분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경우가 이런 부분이다.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집게손가락을 이리 저리 움직이며 들여다보았다.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중략) 불확실한 기억 속에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지금도 젖어 있어서 자기를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다가 문득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 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마무라가 코마코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만지작거리던 중 반대편에 있는 요코의 눈이 비치는 걸 묘사한 장면인데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닌 듯 하면서도 매우 에로틱하다. 선정적일 수도 있는 장면을 동양적인 간접 묘사로 감추고 있는 것이 압권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특유의 화법이 절묘하다.

사실 이 부분은 영어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듯하다. 직역을 할 경우 지나치게 도색적으로 비춰질 수 있고, 의역을 할 경우 그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사이덴스티커는 '손가락'을 'hand'로 묘사한다. 손가락을 강조할 경우 직접적인 포르노그래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한 듯 보인다. 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 부분도 "손을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He brought the hand to his face)" 정도로 표현하고 끝을 낸다.

사이덴스티커의 이런 선택을 놓고는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서양인들이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얻었는지도 우리는 정밀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건, 사이덴스티커가 이 번역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번역은 '설국'이 세계인들에게 다가가는 첫 번째 길이 되었다.

필자 생각에는 결과적으로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이 서양인들에게 본래의 미학과 다른 오독(誤讀)을 제공하지는 않은 듯하다.

"자연과 인간의 운명이 가진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선정 이유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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