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 총명하던 기억력도 퇴직 무렵에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시간도 보낼 겸해서 중국 고전을 보게 되었다.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젊어서 왜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내어 많은 책을 구해 읽어 보았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이릉지화(李陵之禍)’ 때문에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하고도 혼신의 힘을 쏟아 130권 526,500자에 이르는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후한 시대부터 ‘사기(史記)’라고 불렸다. 태사공서에서 사마천은 ‘서백(西伯)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周易)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春秋)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國語)를 남겼다.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兵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전했으며,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남겼다.’ 라고 하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 총명하던 기억력도 퇴직 무렵에는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시간도 보낼 겸해서 중국 고전을 보게 되었다.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젊어서 왜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내어 많은 책을 구해 읽어 보았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이릉지화(李陵之禍)’ 때문에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하고도 혼신의 힘을 쏟아 130권 526,500자에 이르는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후한 시대부터 ‘사기(史記)’라고 불렸다. 태사공서에서 사마천은 ‘서백(西伯)은 유리에 갇혀 있으므로 주역(周易)을 풀이했고,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춘추(春秋)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이 멀어 국어(國語)를 남겼다.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림으로써 병법(兵法)을 논했고, 여불위(呂不韋)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전했으며,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혀 세난(說難)과 고분(孤憤) 남겼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