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어른은 없고 노인만 있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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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대던 주말 저녁, 가수 양희은씨가 자신의 신곡 ‘늘 그대’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로 시작하는 첫 소절에 끌려 유튜브에서 노래를 검색했다.

그런데 뮤직비디오보다 정작 더 집중해서 보게 된 것은, 작곡자인 후배 가수의 ‘지시’에 따라 양희은씨가 노래를 녹음하는 모습을 찍은 메이킹 필름이었다.

포크가수인 양씨에게 발라드를 부르는 일은 도전이었다. 한 소절 익히느라 1시간을 넘게 반복 연습한 끝에 잠시 쉬는 시간을 얻은 양씨는 한참 어린 후배들 앞에서 “창피하다”며 웃었다.

“쉽지 않다는 걸 알았어. 재미있네. 이런 날도 있네. 칠순 되기 전에 한번 이렇게 호되게 레슨 받으면서 가야지.”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하나만으로 이름 석 자를 한국 가요사에 남길 양씨가 후배 가수들과 함께 신곡을 발표하는 도전을 해온 게 다섯 해째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의 나이 66세. 전설이 된 그의 과거 노래들만큼 화제를 모으거나 유행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출간된 산문집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강원도 양양에 사는 1922년생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 모음이다. 이 할머니가 ‘도라지 팔아서 산 공책’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65세가 되던 1987년부터였다.

친정부모는 어린 이옥남 할머니에게 삼 삶고 김 매는 것은 가르쳤어도, 여자가 글 배우면 시집가서 친정에 편지질이나 해서 부모 속상하게 한다며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빠 어깨 너머로 몰래 글을 배웠지만, 시부모에 남편까지 세상을 떠나고서야 책잡힐 두려움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 보내고 홀로 살며 ‘봄내 여름내 한 철 쉴 사이 없이 아침 다섯 시부터 일어나면 밭에 가서 한 포기 풀 뽑는 일이 첫인사’인 할머니는, 너무 재미있어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늦게 배운 책 읽기에 빠진다.

“사람마다 잘사는 사람도 많건만 고생으로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본다. 책 읽는 내가 살던 생활과 비슷해서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자꾸 앞을 가리기도 하고 너무 비극이라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구나.”

1만5000원은 받아야 할 손수 만든 삼태기 3개를 7000원에 빼앗기다시피 팔고는 분해서 일기를 썼던 할머니는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가 나자 유가족들이 “사는 게 사는 거 같겠나”라며 아껴 모은 10만원을 주저없이 성금으로 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면 멀쩡하지’라며 이웃의 고통을 품는다.

두 어른의 삶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나는 어떤 어른으로 늙어갈 것인가를 생각해서였다.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새로 익히는 것이 가능할까. 위축되지 않고 세상의 다른 삶으로까지 자신을 확장하는 너그러운 노년이 될까. 나이 먹으면 지혜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스스로의 삶으로 알게 되니, 잘 늙은 어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교과서가 된다.

지난해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4%를 넘는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지금 50대인 386세대가 노년이 될 때면, 한국 사회는 이미 고령을 넘어 초고령사회다.

그러나 내가 속한 이 세대에게 노후 대책은 여전히 경제적인 의미로만 풀이될 뿐이다. 젊은 시절, 기득권과의 투쟁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이 세대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갖지 못했다. 어른 노릇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386세대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노인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어른 없이 노인만 있는 사회에 품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노인의 존재는 ‘사회적 재난’이 될 수 있다.

작가 박완서씨는 “늙음조차도 어떻게 늙느냐에 따라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잘 늙어가는 일을 생각할 때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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