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그때도 '안 하던 짓'… 지금 해야겠어

입력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삶의 한가운데]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안병현

결혼은 영원한 2인 3각 경주입니다. 속도보다, 방향보다, 각자의 다리 길이보다, 호흡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하나의 끈에 묶여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엇박자가 나는 순간, 멈춰 서 옆 사람과 눈 맞추세요. 다시 하나 둘 셋, 첫발을 디뎌 보세요.

홍여사 드림

"오늘 밤에 우리 영화 한 편 볼까?"

"그러든지…."

"오케이. 영화 뭐 있나 내가 알아볼게~"

말끝에 눈에서 하트를 발사하는 이모티콘까지 곁들여 보냈지만, 그는 더는 답이 없습니다. 그래도 싫다고는 안 했으니, 예스로 봐도 되겠죠. 서둘러 예매를 했습니다. 심야 영화관 커플 티켓. 영화도 실은 미리 골라놨습니다.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우리 시대의 청춘 스타가 나온다니 반갑기도 했지만, 액션물 외에는 좋아하지 않는 그의 취향을 우선 고려했지요.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무상합니다. 한때는 나도 콧대를 세우며 도도하게 굴던 아가씨였는데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자존심도 없이 남자에게 매달리는 여자의 영락없는 모습이니까요. 그것도 25년째 한 이불 덮고 살아온 '남편'에게 말입니다.

아직도 눈에서 콩깍지가 안 떨어져 이러는 거라면 저는 행복한 여자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랍니다. 저도 남편도 상대에게 반해 있던 시절은 딱히 없었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만난 사람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무난한 사람이라 서로 선택했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가깝지요. 그때 우린 이심전심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한때의 열렬한 감정보다는 안정감과 신뢰감이 중요하다고. 무슨 근거로 남편을 믿음직한 사람으로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말이 없고, 덩치가 크고, 행동이 느긋해서?

결혼하고서야 알았습니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재미없고 멋없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요. 저 자신에 대해서도 뼈아픈 단점을 알게 되었지요. 애교도 센스도 낙제점인 여자라는 것을요. 무미남과 건조녀로 만난 우리는 콩깍지 한번 제대로 씌어보지 못한 채 용케도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지요. 아직은 달달해도 좋을 때에 일찌감치 권태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달까요? 협소한 공간에서 서로 스치지 않고 사는 기술만 나날이 늘어가다 보니 어느새 서로의 감촉을 잊었고, 차라리 그 편이 마음 편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허전했지만, 나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상대방 탓은 하지 않았죠. 마흔 살 문턱을 밟을 때쯤, 우리는 또 한 번 이심전심 생각했습니다. 다들 이렇게 산다고요. 이게 결혼의 본모습이라고, 그러니까 우린 괜찮다고요.

하지만 우린 정말 괜찮은 걸까요? 젊은 시절엔 오히려 달관한 듯 굴던 제가, 나이 오십에 이르러 때늦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돈보다, 자식보다, 부부 사이가 다정한 사람들이 요즘은 제일 부럽습니다. 서로 눈 맞추고 보듬으며 날마다 일상의 추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무뚝뚝한 여자도 바라는 건 똑같습니다. 정을 주고받고, 느낌을 나누고 싶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먼저 시작하길 기다릴 뿐이죠. 그렇다면 무딘 남자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요. 불룩 나온 배 위로 김치 국물을 흘려놓고, 연방 트림하며 리모컨만 만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내의 눈에서 하트를 보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을지도요. 그래서 저는 얼마 전, 큰 결심을 했답니다. 나부터 달라지기로 말입니다. 인제 와서 180도 다른 여자가 될 순 없지만,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해보려고요. 이 나이에 차마 애교는 떨지 못하지만, 칭찬에는 후해지려고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것도, 제 나름의 작전입니다. 민망함과 어색함을 무릅쓰고, 남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우리 이제 좀 친하게 지내보자고….

그러나 남편은 영 눈치를 못 챕니다. 요새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의아해하지도 않습니다. 원피스에 립스틱을 바른 아내를 보고도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따라나섭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더니 혼자 내리고 앞서 걸어갑니다. 뒤에서 따라가며 보니, 그새 정수리 머리숱이 더 줄었네요. 영감님처럼 뒷짐은 또 왜 지고 가는 걸까요? 그 모습이 영 보기 싫어 자기야 부르며 따라붙었습니다. 팔짱을 답삭 끼니 남편이 하는 말, "가족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하지만 싫다고 빼 버리지는 않으니 그게 어딥니까? 자존심도 없이 저는 웃으며 매달려 갑니다.

영화관에 들어가서도 남편의 무심함은 그대로입니다. 아내에게 티켓 교환을 맡겨놓고 본인은 휴게 의자에 앉아 눈감고 있습니다. 피곤하다네요.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좌석을 찾아들어 갈 때도 혼자서 직진, 직진입니다. 누구도 우리가 부부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겁니다. 남편이 늘 말하는 '가족끼리'의 매너란 이런 걸까요?

하지만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아우성치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더군요. 어찌 됐든, 남편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화면에는, 주름진 옛 청춘 스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저는 그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언젠가 이런 똑같은 장면 속에 우리가 있었다는 느낌. 그러고 보니 우리의 짧았던 데이트 기간에 유일하게 같이 본 영화가 바로 톰 크루즈의 영화였습니다. 제목도 줄거리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땐 배우도 젊었고 우리도 젊었죠. 불이 꺼지고 얼마 후 남편이 제 손을 슬며시 잡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묵직한 온기 때문에 제 눈에는 톰 크루즈가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남편 손에 제 손을 포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은 그새 고개를 모로 꺾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 손길에 퍼뜩 눈을 뜨더니 시치미 뚝 떼며 중얼대는 말.

"저 친구 대역 쓴 거 아니야? 어떻게 우리 나이에 저렇게 팔팔해?"

"그보다 내가 궁금한 건 저 상대 여배우는 몇 살쯤일까야. 설마 우리 또랜 아니겠지."

우린 어둠 속에서 소리 죽여 웃었습니다. 그렇게 웃고도 5분을 못 버티고, 남편은 다시 졸기 시작했지만, 저에게 잡힌 손은 아직 그대로였죠. 저는 말없이 남편의 조는 모습을 지켜보다 웃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어쩌면 나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악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권태로부터 결혼을 구하는 것일지도요. 헬리콥터에 매달리는 것보다 더 지치는 것이, 무심한 남편 팔에 매달리는 것일지도요.

우리 편인지, 악당 편인지 도무지 헷갈리는 남편에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30년은 더 호흡을 맞춰야 할 숙명의 콤비라고요. 비록 뜨거운 러브스토리는 우리 시나리오에 없었지만, 차진 연기력으로 30년을 이어가야 할 러브 라인이 아직 살아있다고요.

여보, 어때? 우리도 한번 제대로 보여줄까? 당신이 대역 없이 몸을 던져 준다면, 나도 과감한 애정 연기를 펼칠 자신 있는데…. 그러기엔 당신 너무 피곤하지?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조선닷컴 바로가기]
[조선일보 구독신청하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