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우아함, 그리고 옷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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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내 생에 지불해야 이처럼 모든 남루한 디테일을 제거해 버린 고급하고 단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정미경의 소설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 여자는 지금 “물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의 가슴께를 손등으로 가만히 쓸어보”고 있다. 그녀는 진열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과도한 장식을 배제한, 우아한 옷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731벌의 고급 부티크 옷을 남긴 채 죽은 여자가 등장한다. 가격표도 뜯지 않은, 아름다운 옷들을 남긴 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희한한 이름을 가진 토니 타키타니는 키 165, 발 사이즈 230, 옷 2사이즈를 입는 여성을 구해 아내의 옷을 입고 지내주길 요청한다. 그렇게 옷을 입어보던 여성은 갑자기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한다. 토니가 이유를 묻자 여자는 대답한다. “옷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비슷한 장면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등장한다. 아름다운 색을 가진 영국산 셔츠에 파묻혀 있던 데이지가 불현듯 눈물을 쏟는다. 당황한 개츠비가 이유를 묻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데이지가 대답한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 너무 슬퍼!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촉감을 가진 옷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데이지,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급스러운 옷들은 왜 눈물을 흐르게 할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는 그 눈물의 원인을 조금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자신이 만드는 옷에 강박에 가까운 집중을 보이는 고급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의 이야기이다.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집념으로 옷을 만드는 그는 장인이다. 팬텀 스레드는 보이지 않는 실로 만든 옷, 이음새나 재봉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옷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실로 지은 옷은 우드콕에게는 옷이지만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작품을 소망한다. 소설가, 조각가, 영화감독, 작곡가 등 모든 예술가들은 재봉선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작품을 꿈꾸는 것이다.

하필, 옷이다. 옷은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해도 상품이다. 쓸모가 정해진 것이다. 건축물처럼 옷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용처가 있고 거래되며 그래서 가격이 있다. 어쩌면, 우드콕의 맞춤옷은 20세기에도 현존하는,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아우라를 가진 거의 유일한 원작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드콕은 단 한 사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드니 말이다.

마치 벨라스케스에게 ‘시녀들’을 요청했던 필리페 4세처럼, 우드콕에게 옷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왕족들이다.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원본성을 가진 옷, <팬텀 스레드>의 옷은 그래서 누구나 다 같은 돈을 지불하면 가질 수 있는 대중예술과는 정반대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사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중이 사용하고, 용처가 분명한 것들은 결코 우아할 수 없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우아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는 무려 1만8000t에 달하는 지붕의 무게를 이고 있는 강철 기둥을 보며 거기서 우아함을 발견한다. 강철 기둥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극복한 어려움을 내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이 기둥들은 목 위에 400m 길이의 지붕을 이고 있는데, 마치 아마포 차일처럼 가볍게 느껴지도록 서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어마어마한 고통과 수고를 다했음에도 타인에게 그 수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안정감이다. <팬텀 스레드>에서 거의 완전한 우아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아함이다. 옷을 입은 자와 옷 사이에 이물감이 전혀 없는, 원래부터 존재했었던 것 같은, 입은 자에게 용기를 주는 드레스. 사실 이 문장에서 옷은 영화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우아함은 우리의 일상에 의해 감춰지는 경우가 많다. 우아한 일상은 완벽한 도덕적 삶만큼이나 실현하기 어렵다.

<팬텀 스레드>는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영국의 현실이나 사회상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사랑의 아이러니와 우아함에 대해 130분의 구체적 장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팬텀 스레드>가 사치스럽고, 무의미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힘에 침윤되어 마모되어 가는 지극히 예민하고, 세련된 어떤 미적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영화는 사회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무심해도 된다. 히드로 공항의 기둥처럼 그렇게 우리 삶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영화는 그래야만 한다. 모든 작품들이 눈에 보이고, 피부에 감촉되는 그런 삶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우드콕의 옷처럼 아주 예민한 감성과 오래된 역설, 심오한 고뇌를 다루는 예술도 필요하다. 어머니, 고향, 결함, 사랑, 아이러니와 같은 추상적이지만 완강히 존재하는 단어들, 일상이 지우는 완벽한 추상어를 만나는 것. 영화는 그렇게 가끔 일상을 정제해준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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