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길의 사진공책] 명함판 사진이 이룩해낸 ‘초상의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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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13. 오전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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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 <소셜 네트워크>, 2010.

너드(nerd)를 아시나요?

“너드? 너드라면 모피로 유명한 그 불쌍한 동물 아니냐?” 책 <너드>를 쓴 독일 작가 외르크 치틀라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쓴 책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nerd’ 발음은 독일어로 족제비과 동물 밍크와 비슷하다. 치틀라우는 세대 차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벌써 80세가 넘었으니까. 그는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더부룩한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별난 주제로 족히 한 시간은 ‘썰’을 풀 수 있는 녀석들 있잖아요. 어머니가 학교 다닐 때도 그런 녀석들이 있었을 텐데.” 그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 때는 그런 애들 없었어.”

워런 버핏을 제치고 세계 3위 부자에 오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는 너드였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컴퓨터만 알고 사회성이 부족한 괴짜들. 곱슬머리 하버드대 신입생 저커버그는 여자 친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 어떤 동아리에 들어야 상위 1%에 속할까? 루스벨트 대통령도 가입했다는 엘리트 클럽? 수능 만점을 받았으니 하버드에 왔지. 쉴 새 없이 지껄이던 그 너드는 드디어 말실수를 하고 만다. “너는 보스턴대에 다니니까 공부할 필요 없어.” 참다못한 여자 친구가 폭발했다. “너는 네가 괴짜라서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믿고 싶지? 아니야. 재수 없는 자식이기 때문이야!” 여자 친구에게 차인 저커버그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프로그램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사진 속 여자가 섹시한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클릭하세요.”

페이스북 창업 이야기를 다룬 영화 <소셜 네트워크(The Social Network)>(2010)를 감독한 데이비드 핀처는 대학생 마크 저커버그를 전형적인 너드로 묘사했다. 저커버그는 영화 주인공의 모습이 자신과 다르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버드대 단과대학의 컴퓨터를 해킹한 여학생들의 사진으로 장난 삼아 만든 인기투표 프로그램 페이스매시가 페이스북의 전신이었다는 것. 세계 최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말 그대로 얼굴(face) 사진들을 모은 혼합물(mash)에서 시작됐다.

<오만과 편견>을 쓴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실루엣

실루엣씨는 알고 있나요?

정보화 시대에 너드라는 신인류가 모습을 드러내듯 17세기경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인류가 등장했다. ‘성 안에 거주하는 부유한 자’ 부르주아다. 지배계급인 귀족도, 피지배계급인 농민도 아닌 도시의 유산계급인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하고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표현 욕구만 있었지 아직 방법을 몰랐다. 부르주아 사회의 상부구조는 아직 구축되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 파리 저잣거리에는 새로운 초상화 기법이 등장했다. 검정색 광택지에 프로필(얼굴의 측면상)을 오려내는 실루엣이다. 실루엣은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 루이 15세 때의 재무장관 에티엔 드 실루엣(1709~1767). 그는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기발한 세금을 발명했다. 사람이 숨 쉬는 공기에도 세금을 물린다는 공기세다. 명분은 루이 15세의 은혜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통할 리 없었다. 실루엣은 장관이 된 지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실루엣, 그의 이름은 짧은 임기를 상징하며 ‘지나가는 그림자’를 뜻하게 됐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림자 모양의 프로필 초상화를 실루엣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스 클라우드의 자동전사식 초상사진

어린아이들의 그림자놀이 같은 실루엣이 부르주아 계급의 허영심을 채우기에는 좀 부족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부 부르주아들은 궁중의 화가들 앞에서 귀족을 흉내 내며 지배계급의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기존 귀족 초상화 기법은 점점 높아가는 부르주아들의 자기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화가들은 새로운 초상화 형식인 미니아튀르(miniature)를 개발했다. 분갑이나 펜던트 뚜껑 모양의 작은 초상화 미니아튀르는 급부상 중인 신흥계급의 요구에 부응했다. 미니아튀르는 귀족 초상화보다 가격이 저렴했고 제작기간도 짧았다. 부르주아는 이 작은 초상화에서 개인을 표현할 수단을 최초로 발견했다.

실루엣 초상화가도 그들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미니아튀르 초상화가들이 사이즈와 제작기간을 줄였다면, 실루엣 초상업자들은 새로운 기계장치를 고안해냈다. 사도기(도형을 축소하거나 확대하는 데 쓰는 도구)를 이용해 인물의 윤곽을 그리는 ‘자동전사식 초상제작기(physionnotrace)’다. 판화가 질 루이 크레티앙이 1754년 처음 제작한 자동전자식 초상제작기는 단 1분이면 실루엣을 완성했다. 기계 장치가 만들어 내는 초상화는 수학적 정확성까지 겸비했다. 부르주아들은 초상화 자동기계에 열광했다. 판화가들, 미니아튀르 화가들도 자동 초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필립과 나 사이에 차이점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는 시민으로서의 왕이고, 나는 왕으로서의 시민이다.”(지젤 프로인트, <사진과 사회>, 눈빛). 파리의 한 시민이 자신의 초상을 루이 필립왕의 초상과 나란히 전시했다. 바야흐로 부르주아 시대다. 자동전사식 초상제작기는 초상화의 민주화를 촉발시켰다. 지젤 프로인트의 표현처럼 그것은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선구자’였다. 그리고 곧이어 완성된 사진술은 본격적인 초상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화가 토마스 할러웨이가 묘사한 자동전사식 초상제작기의 원리. 1792.

디스데리의 명함판 사진

최초의 사진은 ‘르 그라 창문에서 본 조망’(조셉 니옙스, 1826)이란 풍경사진이었지만, 시민들이 열광했던 사진은 초상이었다.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박람회는 사진을 특별부문으로 전시했다. 전시회는 아직까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한 사진의 중요한 홍보 장소가 됐다. 사진 전시장은 북새통이었다. 시민들은 풍문으로만 듣던, 아니면 아주 먼발치에서만 구경할 수 있었던 유명 인사들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대면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다. 조각가 아당 살로몽, 화가 아돌프 베르느 벨쿠루, 풍자화가 카르자, 펠릭스 나다르 등이 찍은 유명인들의 초상사진이었다. 나다르의 사진은 지금까지도 초상 사진의 백미로 손꼽힌다. 나다르는 다재다능했다. 문예지에 글을 기고했고, 1847년부터는 신흥 장르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캐리커처에도 손을 댔다. 다음은 캐리커처 앨범 <나다르, 1857년 살롱전의 심사위원>에 게재된 화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에 대한 평가다.

“프랑스 화단에서 가장 진지한 화가들 중 한 명이며 그의 예술은 아주 독창적이며 본질적으로 민중적이다.”(최봉림, <서양 사진사 32장면>, 아카이브북스). 나다르는 밀레를 정치적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카메라를 통해 사진에 포착됐다. 나다르가 찍은 초상사진 속의 밀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단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밀레의 진지한 눈빛에서 그가 어떤 시선으로 시골 풍경을 바라보았는지 느껴진다. 나다르의 밀레 사진은 그래서 밀레의 그림을 닮았다.

펠릭스 나다르, 장프랑수아 밀레, 1856-58년경. (출처 : 위키피디아)

나다르가 초상사진으로 이름을 알려가던 시기에 듣도 보도 못한 디스데리라는 사람이 파리 중심에 사진관을 열었다. 나다르는 그의 나이 80세에 쓴 <내가 사진사였을 때>라는 회고록에서 디스데리의 사진술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때의 성공은 정말 엄청났는데, 그 성공은 명함판 사진이라는 꾀바른 착상 덕분이었다. 그의 사업가로서의 후각이 적절한 시기에 발동했다. 디스데리는 단번에 모든 사람을 열광케 할 진짜 유행을 만들어냈던 것이었다.”(<서양 사진사 32장면>)

디스데리의 명함판 사진술은 혁명이었다. 그는 오늘날 사용하는 명함판 사이즈보다 조금 큰 6×9㎝ 크기의 사진 제작기법을 고안해 냈다. 사진은 네 개의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찍었다. 고정식 홀더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장면 4장, 이동식 홀더는 다른 장면을 4, 6, 8장 찍어낼 수 있는 카메라다. 한 번에 여러 장을 찍기 때문에 사진값이 쌌다. 당시 초상사진 1장의 5분의 1 값이면 디스데리의 명함판 사진 12장을 얻을 수 있었다. 운도 좋았다. 1859년 5월10일 프랑스 총사령관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로 출정하면서 디스데리의 사진관 앞에 멈추었다. 출정 기념 명함판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이 홍보해준 명함판 사진 덕분에 디스데리는 백만장자가 됐다.

디스데리의 명함판 사진은 초상의 민주화를 쟁취했다. 총사령관이든, 실세 정치가든, 이름 없는 공무원이든 카메라는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진을 차별했다. 명함판 사진에 대한 용도는 계층별로 달랐다. 나폴레옹 3세, 빅토리아 여왕, 링컨 대통령은 그들의 명함판 사진들을 정치적 이미지 홍보용으로 사용했다. 인기가 필요했던 예술·연예계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민층은 명함판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거실에 걸었다. 중산층의 거실에는 실물 크기의 대형 초상사진이 걸렸고, 명함판 사진은 그들의 앨범이나 지갑 속에 저장됐다. 하층민은 여전히 명함판 사진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디스데리, 동일 원판에 여섯 개의 명함판 초상, 1858. (출처 : 위키피디아)

셀피족을 겨냥한 또 다른 너드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사진을 도로 갖고 와서 사진가에게 자기는 서른 살이 아니라 예순 살이며 이마와 턱에 주름이 있고, 코의 생김새는 당신이 만들어 준 그리스인처럼 오똑한 코와는 전혀 관계없는 주먹코라고 따지고 든다면, 그는 틀림없이 아래와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아, 닮은 초상을 원하셨다고요! 그걸 말씀해 주셨어야죠. 우린 그런 사진을 원하시는 줄 짐작할 수가 없었거든요!”(지젤 프로인트, <사진과 사회>, 눈빛)

초상사진에 열광했던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들을 향해 나르키소스 같다며 비아냥거렸던 시인 보들레르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들은 매끈한 용모에 탐닉했다. 뮌헨의 사진가 함프스탱글이 발명한 사진 수정기법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수정사와 사진 위에 덧칠하는 채색사진 전문화가는 유망한 직업군이 됐다. 그것은 수지맞는 장사였다.

멋진 자기 모습을 소유하고 싶은 부르주아의 나르시시즘은 150여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수지맞는 장사다. ‘세상의 순간을 포착하고 공유한다’는 인스타그램의 창시자 케빈 시스트롬은 2010년 사진 중심의 SNS를 세상에 내놓았다. 사진을 통한 SNS는 이미 하버드대생 마크 저커버그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케빈 시스트롬은 실패 원인을 알았다. 사람들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 모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스마트기기 유저들은 실제 자기 얼굴과는 다른 멋진 가면을 원한다. 시스트롬은 ‘뽀샤시 가면’을 만들어내는 필터링 기능을 인스타그램에 탑재했다. 필터 기능은 성공했다. 사진 중심의 SNS를 탐냈던 저커버그는 2012년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다. 저커버그는 시대의 흐름을 알았다. 2013년 옥스퍼드대학은 올해의 단어로 ‘셀피(selfi, 한국에서는 셀카)’를 선정했다.

“그늘과 중간 색조와 밝은 빛이 잘 표현되어 있어야 하며, 특히 후자는 빛이 나야 함.” 명함판 사진술 창시자 디스데리가 쓴 150여년 전의 사진 이론서 <사진미학>에 나오는 좋은 인물 사진의 요건이다. 시대는 바뀌어도 ‘뽀샤시 자화상’에 대한 나르키소스의 욕망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아름다워야 한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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