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 잘려 순절했건만, 실록에는 '도망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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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 꾸짖으며 전사한 신길원, <선조실록>에는 '도망가 숨었다'고 기록돼 있어

[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박혜경]

 문경새재 제1관문이다. 별 생각없이 이 길을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은 임진왜란 당시 문경새재에 이 관문과 같은 류의 성벽이 있었는데 신립 등 조선군이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으로 짐작하겠지만 그 당시 새재에는 성이 없었다. 그만큼 조선 정부의 왜적 침입 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 정만진

문경새재는 국내 유명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조선 시대에도 이 길은 영남대로의 관문이었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과 장사꾼들은 한결같이 이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문경새재 입구에는 옛길박물관이 건립되어 있고, 박물관 왼쪽에 보따리를 진 보부상 좌상, 오른쪽에 도포에 갓을 쓴 선비 입상이 서 있다.

문경새재 입구로 들어서면 선비 동상보다도 먼저 '신길원 현감 충렬비'가 나타난다. 유형문화재 145호인 이 충렬비는 비각 안에 들어 보호받고 있다. 이곳의 주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340-1번지.

문경새재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신길원 충렬비'

비각 앞 안내판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문경현감 신길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비는 화강암으로 된 가첨석(加?石, 지붕돌), 비신(碑身, 비의 몸), 방형(方形, 네모꼴) 대좌(臺座, 받침대)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높이 23cm, 폭 148cm, 비신은 높이 191cm, 너비 89cm, 두께 28cm, 가첨석은 높이 46cm, 너비 123cm'라고 비석의 구성과 규모에 대해 말해준다.

 현감 신길원 충렬비
ⓒ 정만진
이어 안내판은 신길원이 문경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경로와 그의 순절 장면을 보여준다. 안내판에 따르면 '신길원은 명종 3년(1548)에 출생하여 선조 9년(1576)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동왕 23년(1592)에 문경현감으로 부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그는 현의 군사 수십 인과 더불어 왜적에 대항하다가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왜장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그에 굴복하지 않고 꾸짖으며 항거하다가 사지를 절단당하여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전하고자 숙종 32년(1706)에 이 비를 세웠다. 원래 이 비는 문경읍 문경초등학교 옆에 있던 것을 1976년 문경새재 제1관문 안의 비석군에 옮겼다가 1998년 현 위치에 비각을 세워 새롭게 단장했다.'

그런데 이 알루미늄 안내판 왼쪽에는 돌로 만든 안내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알루미늄 안내판의 제목이 '신길원 현감 충렬비'인데 비해 빗돌 안내판은 '현감 신길원 충렬비'로 되어 있다. 1706년(숙종 32)에 세워진 빗돌에 '縣監申侯吉元忠烈碑(현감신후길원충렬비)'라고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빗돌의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신후(侯)길원'의 '후'는 공작, 후작…… 할 때 쓰는 작위의 명칭이다. 후작은 충무'공'의 '공'보다 한 등급 낮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23호인 '李公堤碑(이공제비) 郡守(군수)李侯範善(이후범선)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이다. 대구판관 이서(李?)가 사재로 제방을 쌓아 수재 피해를 막아주자 감동한 백성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비를 세웠고, 그 후 그 둑이 조금 무너지자 대구군수 이범선이 다시 공사를 잘 처리하여 수해를 예방하자 재차 비를 세웠다. 이때 이서에게는 '공', 이범선에게는 '후'의 존칭을 사용했다.

 신길원 충렬비와 비각
ⓒ 정만진

돌로 된 '현감 신길원 충렬비' 안내판을 읽어본다. 안내판은 '충신은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한다더니 신길원 현감의 경우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공은 어려서 이미 효성이 지극하여 자기 손가락을 자른 피를 약에 섞어 어머니를 연명하게 하였고, 열네 살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피 울며 삼년상을 마치니 보는 이가 눈물을 흘리었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선조가 효자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로 시작한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 벼슬 등을 거쳐 문경 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여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하더니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은 이가 없고 홀로 종 하나만이 가지 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하고 관인을 차고앉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가리키라고 협박하였다.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마지않으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때는 4월 27일(26일의 오기)이오 나이는 마흔다섯이었다.

사람이란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물거늘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공이야말로 충렬의 선비이다. 좌승지로 추증된 공의 자는 경초(慶初)요, 본관은 평산(平山)인데 장절공 신숭겸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 국량(國樑)이다.'

 신길원 충렬비 옆에서 보는 선비 동상. 새재를 넘어 한양에 과거를 보러 다닌 당시 선비들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세워둔 것이겠지만 필자의 눈에는 동상의 주인이 신길원 현감으로만 보였다.
ⓒ 정만진

신길원은 문경현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었지만 <선조실록>에는 그의 장렬한 죽음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가 '도망가서 숨었다'는 당시 경상감사 김수의 보고서만 수록되어 있다. 김수의 당일(1592년 6월 28일) 치계 중 신길원 관련 부분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원균은 수군(水軍) 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내지(內地)로 피하고, 우후 우응신을 시켜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여 2백 년 동안 저축한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리게 하였습니다. (중략) 웅천현감 허일은 적이 경내를 침범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도주하였으며, 성주목사 이덕렬은 왜적이 성주성에 웅거하고 있는데도 성주의 지경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판관 고현은 젊은 무부로서 홀로 먼저 도피하였으며, 개령현감 이희급, 선산부사 정경달, 상주목사 김해, 판관 권길, 문경현감 신길원 등은 모두 다 도망가 숨어 적이 가는지 머무는지를 일체 치보(馳報)하지 않았습니다.'

김수는 상주 북천전투에서 전사하는 권길도 도망쳤다고 보고하고 있다. 역시 북천 전투에서 전사하는 김종무도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29일자에 도망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길원, 권길, 김종무 등의 의사들이 이 사실을 만약 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북천 전투에서 순절한 권길과 김종무도 '도망자'?

조선 중앙군이 일본군과 최초로 접전을 벌인 곳은 상주 북천이었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이일은 문경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문경에도 일본군과 대적할 만한 군대는 없었다. 그는 새재를 지킬까 생각하다가 이윽고 충청도에 있는 신립 장군을 찾아갔다. 

문경에는 신길원과 수십 명의 군사들만 남았다. 소서행장의 일본군 1군은 문경 남쪽 10리 지점의 고모산성에 조선군 복병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정찰을 해본 결과 조선군은 없었다. 일본군은 마음 놓고 읍성 안으로 진격해 왔다.

성내에 적 대군이 조총을 반사하면서 밀어닥치자 수십 명의 조선군 병사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슬금슬금 조선군 병사들은 뒤꽁무니를 쳐서 제 각각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적군들은 동헌 건물 앞까지 밀려왔다.

 문경 남쪽 10리쯤에 있는 고모산성,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의 일본군 1군은 이곳에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정찰을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 정만진

결국 현감 신길원과 스무 명도 안 되는 수하들은 문경새재 아래로 밀려갔다. 그것도 신길원이 칼을 휘둘러 적병 셋을 참살한 덕분에 간신히 북문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산 아래에 당도했을 때 이미 신길원의 말은 여러 발의 화살에 맞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신길원은 늙은 소나무에 몸을 의지한 채 추격해오는 적들을 향해 계속 활시위를 당겼다.

신길원이 시위를 당길 때마다 적병이 쓰러졌다. 열 번 쏘아 열 명의 적병이 죽었다. 이에 적의 선봉장이 조총 부대를 전면에 내세워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총탄이 창공을 늦가을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마른 나뭇잎처럼 새재 아래를 뒤덮었다. 마침내 신길원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아직 살아 있는 채로 적들에게 붙잡혔다.

팔과 다리 하나하나 잘려가며 죽은 신길원

적장은 신길원에게 항복하라고 했다. 신길원은 "섬나라 오랑캐들아!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일본군에 빌붙은 조선인 통역이 손짓발짓으로 신길원의 꾸짖음을 왜장에게 전달했다. 왜장은 신길원의 네 팔과 다리를 하나하나 자르면서 계속 항복하라고 했다. 끝내 신길원은 왜장을 꾸짖으며 그렇게 죽어갔다.

 문경새재를 넘으면 충청북도에 닿는다. 사진은 충청북도 쪽 새재 입구.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이리로 나와 한양으로 북진했다.
ⓒ 정만진

신길원과 소수의 조선군을 죽인 일본군은 새재 앞에서 멈춰섰다. 하늘이 만들어준 천하의 요새 새재를 조선군이 복병을 깔아놓고서 철통같이 지킬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재에는 조선군이 없었다. 일본군은 유유히 새재를 넘었다. 

오늘도 문경새재를 찾은 관광객들은 그대로 신길원 충렬비 앞을 지나간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바람처럼 이곳을 지나갔듯이…… 신길원 충렬비 앞으로 발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길원 충렬비와 옛길박물관 사이에 김만중(1637∼1692)의 시 '새재(鳥嶺)'를 새긴 시비가 서 있다.

백두산은 남으로 삼천 리를 달려와서
큰 고개 가로질러 칠십 고을 나눴네
예부터 제후들 할거할 곳 있었거니
지금까지 그 요새 흔적이 있다네

짓푸른 봉우리 거듭거듭 솟아있고
눈부신 단풍은 나무마다 아름답다
공명을 세우기엔 내 이미 늙었거니
가던 길 멈추고 갠 하늘 볼밖에

김만중은 '요새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김만중이 말하는 요새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문경새재 제1관문, 제2관문 등이 아니다. 김만중이 살아 있던 때에도 새재에는 산성이 쌓이지 않았다.

새재에 성 쌓아 왜적의 침입 대비하자는 요청도 묵살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89년, 조헌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새재에 성을 쌓는 등 영남 지방의 방비 태세를 강고히 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묵살당했다. 지금 남아 있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문경새재 관문들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여 년도 더 지난 1708년(숙종 34)에 수축되었다.

문경새재 좌우 가파른 능선에는 연개소문, 온달 장군 등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를 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여겨지는 성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김만중은 '요새'가 아니라 그 '흔적'을 노래했던 것이다.

 신길원 충렬비를 지나면 이내 옛길박물관이 나타난다. 제1관문으로 가는 길 입구 지점이다.
ⓒ 정만진

우리나라의 옛길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역도(驛道)가 조성되었다. 이 교통통신망은 조선 시대에 들어 더욱 발전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영남대로, 의주대로, 삼남대로 등의 9개의 간선도로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사방을 연결했다.

옛길을 개설한 목적은 본래 통치에 있었다. 그 후 산업이 발달하자 도로에는 다른 기능이 생겼다. 특히 중부와 남부 지방의 도로들에는 차차 민간 교역로의 기능이 부여되었다. 반면, 북부 지방의 도로는 변방의 경비나 사신 왕래 등을 위한 군사적, 외교적 기능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인구와 산업이 주로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 치우쳐 있었다. 당연히 중부와 남부의 도로망이 북부 지방에 비해 더  조밀하게 짜여 있었다.

9개 간선도로의 대표적 길은 영남대로(大路)였다. 영남대로는 한양과 동래 950리, 27개 간로(間路, 샛길)를 이었고, 68개 읍을 통과했다. 이 길은 유곡역(문경) 아래에서 갈라져 통영대로가 되면서 550리, 10개 간로를 이엇고, 25개 읍을 지났다. 또 충청도에서 갈라져 경북 봉화로 가면서 5개 간로를 잇고 14개 읍을 통과하는 봉화대로 500리도 영남대로에서 나뉘어졌다. 영남대로 중 한양에서 수원까지는 특히 수원별로(別路)라 했는데, 100리, 1개 간로, 통과 읍 2개였다.

해남대로는 충청남도와 전라도를 관통하는 970리, 27개 간로, 통과 읍 65개로 이루어졌다. 해남대로 중 천안에서 갈라진 충청수영(충남 보령)별로는 210리, 9개 간로, 통과읍 18개였다.

이에 견주면 국경으로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단조로웠다. 강화대로는 160리, 2개 간로에 7개 읍을 통과했다. 경북 평해로 가는 평해대로는 890리, 7개 간로, 통과 읍 19개소였다. 한양과 (압록강)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는 1,065리, 32개 간로를 이으며 71개 읍을 지났다. 한양과 (두만강) 경흥을 잇는 경흥대로는 2,190리, 14개 간로를 이으며 41개 읍을 통과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로를 중요도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누었다. 이들은 도로 폭이 달랐다. 대로 12보, 중로 9보, 소로 6보였다. 물론 지방마다 지형 여건에 따라 다소 다를 수도 있었다.

일정한 거리마다 돌무지를 쌓고 장승을 세워 사방으로 통하는 길의 거리와 지명을 기록해 둠으로써 도로 표지 기능을 했다.  주요도로에는 얇은 돌판을 깔거나 작은 돌, 모래, 황토 등으로 포장도 했다.

도로변에는 대략 30리마다 관리들을 위해 관(館), 역(驛), 원(院) 등의 숙박 시설을 설치했다. 또 여행자와 상인들을 위해서는 점(店), 주막(酒幕), 객주(客主) 등을 두었다. 현재 '원'이나 '점' 등이 들어 있는 지명을 쓰는 곳이 있으면, 그곳은 과거에 도로에 인접한 마을이었음을 나타낸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 시대의 교통통신 제도가 폐지된다. 또 철도를 비롯한 새로운 교통 수단이 등장한다. 이제 옛길과 길가 마을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말았다.

- 참고 : 옛길 박물관 내부의 여러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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