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실세와 허세 / 민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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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동 영화감독
[한겨레] 빨리 늙지 않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늙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말로 내뱉지 않더라도 자신이 노화의 덫에 빠진 걸 알 수 있는 몇몇 방법이 있다. 기필코 맛있는 음식을 찾을 때, 변덕스런 날씨에 민감해질 때, 여행지에서 숙소가 중요해질 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나이를 줄이고 있을 때 등이다.

언젠가 이민기·김효진과 함께 한 테이블에 앉은 적이 있다. 막 안면을 튼 이민기가 김효진에게 자신은 빠른 85년생이니까, 서로 말 놓자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84년생 김효진은 그냥 누나라고 부르라고 버티었다. 얼마 전 한효주·유아인과 한 테이블에 앉았을 때, 빠른 87년생 한효주가 화통하게 서로 말 놓자고 제안했다. 86년생 유아인은 시큰둥하게 ‘왜?’ 하고 되물었다. 물론 이들은 아직도 나이를 높이려 애쓰는 젊은이들이기에, 몇 달 차이로 누나 오빠로 존대하는 것이나 한살 어린 동생과 말 트는 것 모두 억울할 것이다.

사실 한국은 나이의 힘이 너무나 결정적인 곳이라, 새 관계를 맺을 때, 일단 나이를 묻고 보게 된다. 억압과 굴종 중 하나를 택해야 말도 시선도 편해지기 때문이다. 한데 신기하게도 셈법은 엉터리다. 12월31일에 태어난 A는 나자마자 한살, 다음날 두살, 365일 후에 세살이 된다. 또 1월1일에 태어난 B는 하루 차이로 A의 연하 동생이 되는데, 연말에 태어난 C는 1년 차이라도 B와 동갑 친구가 된다.

원래 동갑은 육십갑자의 일치, 곧 음력 기준으로 같은 해 출생을 의미한다. 과거 주민등록에 대부분 음력 생일을 적던 시절엔 2월에 찾아오는 설날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이 더해졌다. 결국 관습에 법을 맞추느라 3월 시작으로 학년을 편제했고, 같은 년생, 같은 나이, 같은 학년이라는 삼박자 공식의 부작용으로 빠른 년생이 생겨난 것이다. 그 탓에 7살에 학교에 들어간 내 경우엔 친구와 동기와 선후배 사이에 존대와 하대가 마구 뒤섞여 있다.

표준 명칭이 ‘세는나이’인 이 셈법은 지금은 사라진 중국의 허세(빈 나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북한을 포함해 아시아 전역이 실세(만 나이)를 택했고, 한국만 세계 유일의 허세를 고집하고 있다.

보면 돌잔치의 케이크에는 초가 하나 꽂히지만, 그 이후 생일잔치는 한국 나이에 맞춰 초의 개수가 하나 슬쩍 늘어난다. 처음엔 왠지 뿌듯하지만, 만 29살에 서른 잔치를 하며, 왜 제 나이보다 많은 초를 꽂는지 갸우뚱하다가, 61개의 초가 꽂힌 회갑연에선 냉큼 초를 하나 뽑아버린다. 어렸을 땐 나이를 늘리고 싶지만, 만 나이를 환산하는 데 애먹는 시점이 되면, 한두살씩 올려 먹고 산 걸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실생활의 빈 나이가 공식적인 만 나이에게 끝내 자리를 양보 못하고 있는 것인데, 왜일까. 나이가 어린 걸 확인하면 다짜고짜 반말을 해도 된다는 기이한 나이 권력 집착 탓 아닐까.

상하의 반듯한 질서를 종교화한 장유유서가 진정 나이 든 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면, 노인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가짜 나이 말고도 진짜 존중을 불러낼 비책이 고프다면, 나이를 처음 먹어보니 잘될지 어떨지 솔직히 자신은 없다던 하루키의 넋두리처럼, 나이를 잘 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돌아보는 게 순서다.

그러니 조삼모사에 불과한 혜택밖에 없으며, 고유의 관습도 아닌 것에 천착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뱃속 태아의 세월을 존중해 한살을 반올림한다는 가설이 못내 아쉽다면, 그냥 생일맞이 때만 한 살을 더하면 어떨까. 허세 다툼이 없어지고, 연말 때마다 또 한 살 먹는구나라고 탄식하지 않아도 될 터이니, 좋지 아니한가!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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