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짙어가는 정동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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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1.06. 오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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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서울학교는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을 찾아서> [프레시안 알림]
 

*강의 마감됐습니다^^

가을빛 짙어가는 10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역사지리전문가) 제69강은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 전까지의 유적들을 더듬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높낮이가 거의 없는 평지로, 도심의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네거리, 덕수궁돌담길, 정동길, 그리고 서대문사거리에서 독립문에 이르는,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휘 돌아보는 듯한 부담없는 ‘마실길’ 코스로 잡았습니다.

▲가을을 맞은 덕수궁. 대한제국 역사무대의 중심지였다.Ⓒ덕수궁

서울학교 제69강은 2018년 10월 14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세종로 교보빌딩 정문 옆에 모입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세종로)-황토현-성공회성당-흥천사터-원구단-덕수궁-정동교회-배재학당-정릉터-손탁호텔터-중명전-이화학당-러시아공사관터-상림원터-경희궁-점심식사 겸 뒤풀이-서대문사거리(고마동)-김종서집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경교장-서전문터-서지터-영천시장-모화관터-영은문 기둥-독립문

▲서울학교 제69강 답사로Ⓒ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의 유적들>에 대해 들어봅니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탄생
19세기 말엽 조선의 정치상황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여흥민씨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그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며 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어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게 딥니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였고 서구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행사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들은 조선이 사대한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켜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으나 ‘삼일천하’로 실패하였고, 다시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인 건양(建陽)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 후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가까워지자 일본은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니 고종은 경복궁의 건청궁을 과감히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됩니다.

고종은 1년 정도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후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들의 지원으로 청나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사대의 동아줄을 끊어버리려고 칭제건원을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을 세우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려 비로소 대한제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세종로 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碑殿).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이다. Ⓒ서울학교

경운궁이 덕수궁이 되기까지
그러나 열강들에게 핍박받는 국제정치적 상황은 이들 열강들이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영토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관철시키려는 여러 가지 조약들을 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법궁인 경운궁(덕수궁)은 서구열강들의 공사관 또는 선교사들의 숙소와 교회로 잘려져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아예 경운궁을 복원이 어렵게 철저히 훼손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칭제건원의 황제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종이 어떤 노력을 했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며, 더하여 일제강점기 때 경운궁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圓丘壇)을 만들고 그곳에서 1897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라고 했습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을 이르며 천단, 원단이라고도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는 삼국시대부터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 때부터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비로로 천자로서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둥근 모양의 원구단과 신위판을 봉안하는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을 세웠으나 조선을 침탈한 일본은 원구단에 경성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어 그 원형을 훼손시켰는데 원구단은 없어지고 황궁우와 정문인 삼문과 석고단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보령 51세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지금의 교보문고인 기로소 앞에 세웠는데 이를 비전이라 합니다. 비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로 황태자 순종이 전서체로 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지 40년이 되며 보령은 망육순(望六旬)이 되어 영수각(靈壽閣 기로소 안 어첩보관소)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기념비전’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殿)’ 자를 사용하였으며 기념비전 앞에는 도로원표를 세우고 조선의 도로 기점으로 삼았으나 지금의 도로원표는 조선일보사 앞에 있습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인 계림군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도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거처인 시어소(時御所)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길가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목책을 세운 뒤 문을 내고 다시 담장을 둘러치고 북쪽에 별전을 새로 영건하여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불렸습니다. 선조는 행궁에서 16년간 지낸 후 승하하고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새로 지은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이라 불렀고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을 성공한 인조는 이곳에서 등극하고 바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때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궁궐로서의 격이 무너졌습니다.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을 머물면서 경운궁에 많은 전각들을 다시 짓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강력한 퇴임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태상황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덕수궁돌담길의 유적들
덕수궁돌담길을 끼고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전환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대부분 경운궁의 일부가 훼손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의 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성공회성당, 구세군 본관 등 종교시설과 배제학당, 이화학당 등 개화교육의 시설들이 그것입니다.

이 지역을 특히 정동이라고 하는 것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태조가 즉위한 후에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는데, 태조가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하여 왕후가 죽자 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가까운 곳에 왕비의 영혼을 달래줄 흥천사(興天寺)라는 사찰을 170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의 묘를 도성 밖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고 방치하여 일반인의 묘와 다름이 없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묘가 옮겨 갔으니 흥천사도 함께 옮겼는데 170여 칸의 사찰 목재들은 중국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의 부속건물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흥천사 동종은 영조 때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겨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고종 때 덕수궁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왕후의 묘에 세워졌던 석물들도 병풍석은 광교를 중건하는 석재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땅에 묻었다고 하니 옛 정릉의 자리인 미국대사관저가 옮겨갈 때 그곳을 파보면 석물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명전(重明殿)은 미국대사관저와 옛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건물로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이었으나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어할 때 주변의 땅들을 경운궁 권역에 포함시키고 그 터에다가 ‘궁궐도서관’으로 중명전을 세웠습니다.

고종은 중명전을 짓고 도서관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외국 사신도 알현하고 때로는 연회장으로도 이용하였으며,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한 헤이그밀사를 파견하였던 장소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이또 히로부미의 소실이면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던 사교계의 여왕 배정자가 한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궁궐도서관이었던 중명전.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덕수궁

광해군이 경희궁 지은 사연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해 1620년에 완성된 조선 후기의 이궁으로 숙종과 경종이 태어났고 숙종, 영조, 순조, 인헌왕후, 인선왕후, 인경왕후, 선의왕후가 승하했으며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한 곳입니다. 이궁 임에도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왕들이 당시의 정궁인 창덕궁과 경희궁을 번갈아 오가며 정무를 보았던 곳입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이자 차남으로 우여곡절 끝에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존재하고 있던 1608년에 당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에서 불안한 등극을 하였고, 즉위 후 파괴된 종묘와 창덕궁의 중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1615년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합니다.

정궁인 창덕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1616년(광해군 8) 이궁 건립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져 인왕산 아래 인경궁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때 몇몇 술사들은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그곳에 이궁을 지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왕기가 서려 있다는 곳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옛집으로, 항상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광해군은 이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어 마침내 그 집을 몰수하여 궁을 짓게 되니 이것이 경덕궁(慶德宮), 훗날의 경희궁입니다.

1617년에 시작된 경덕궁 공사는 인경궁과 동시에 역사를 진행하였던 까닭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어서 1619년에 인경궁의 공사를 중지하고 경덕궁 공역에 집중토록 하여 이듬해 10월에는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광해군은 결국 경덕궁으로 이어를 준비하던 중, 1623년 3월 12일에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새 궁궐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는데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바로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었으니 ‘새문동 왕기설’은 어느 정도 적중된 셈입니다.

경덕궁은 1693년(숙종 19)에 중수가 있었고 1760년(영조 36)에는 원종으로 추존된 정원군의 시호에 쓰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 하여 궁의 이름을 ‘경희’로 고쳤으며 1829년(순조 29)에는 큰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이듬해 서궐영건도감을 설치하여 전각의 복구에 나서 1831년 4월에 공사를 마쳤습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으며 1820년대 경희궁 전경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당시 120여 채가 넘는 경희궁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여 그곳을 정궁 삼아 이어하면서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경희궁은 훼절의 수난을 겪게 되는데, 1910년 일제는 경희궁의 전각 대부분을 헐어내고 일본인 학교인 총독부중학교를 세우는데 이 학교는 1915년 경성중학교로 개칭되었으며 이때부터 경희궁의 면적은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정전인 숭정전은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되었고 지금은 동국대학교로 옮겨져 정각원(正覺院)이란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한반도 침략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1932년 남산 자락에 세운 절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졌고 궁궐 영역에 관공서의 관사를 짓거나 그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키기도 했으며, 남아 있는 건물들은 모두 외부로 매각처분하였습니다.

지금의 경희궁은 정문인 흥화문과 외전을 이루던 주요 전각들, 숭정문, 숭정전, 자정문, 자정전과 이들 건물을 연결하는 회랑을 비롯한 태녕전 등 숭정전 구역만 복원되어 있는데, 그 북쪽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변을 보면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상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새문[新門]으로도 불린 돈의문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에는 서대문사거리로 넘어가는 얕은 고갯마루가 있는데 이곳이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이 있었던 곳입니다. 처음에는 운종가와 일직선상에 있는 지금의 서울교육청 어름에 서전문이란 이름으로 서 있었습니다만 지대가 높아 백성들이 다니기에 불편하여 약간 아래로 내려온 곳에 새로 문을 내고 돈의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의문을 새로 낸 문이라고 새문[新門]이라고도 불렀고 지금은 새문안교회 또는 신문로 등 교회 이름과 도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돈의문터 바로 위에는 백범 김구 선생께서 살았던 경교장이 강북삼성병원에 파묻혀 왜소하게 남아 있습니다. 경교장은 원래는 금광업자 최창학의 소유였으나 친일행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환국한 백범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으며 백범 선생은 이곳에서 반탁운동과 통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탄을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거처가 공교롭게도 동쪽과 북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백범은 서대문의 경교장(京敎莊)에서, 김규식은 삼청동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이승만은 동대문의 이화장(梨花莊)에서 길은 다르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경기감영은 달리 기영(畿營)이라 하며 종2품인 경기도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관청으로 한성에 설치되었습니다. 소속 노비 450명, 공장(工匠) 1명, 관둔전 20결, 늠전 80결, 공수전 15결을 감영의 비용으로 사용하였으며 1896년 수원으로 옮기기 전까지 경교장 아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었으며 옮긴 후 감영의 건물은 군영(軍營)으로 되었다가 1903년(광무 7)에 한성부가 이전해 와 사용하였습니다.

조선시대 팔도의 감영은 경기도 한성, 충청도 충주(1602년 공주로 이전), 경상도 상주(1600년 대구로 이전), 전라도 전주, 황해도 해주, 강원도 원주, 함경도 함흥(1600년 영흥으로 이전), 평안도 평양 등에 있었습니다.

▲안두희의 총탄에 스러진 백범 김구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경교장 집무실Ⓒ서울학교

함경도 안위가 걱정돼 성 밖에 살았던 김종서

경기감영터 건너편 농협박물관 자리는 김종서 장군의 집터로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습격을 당한 장소입니다.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이 데리고 간 임운의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졸도했고 양정의 칼을 맞은 아들 김승규는 절명하였습니다. 4군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여진족이 출몰하는 함경도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성 밖에 살았다고 합니다. 만약 김종서가 도성 안에 살았으면 계유정난은 성공했을까요.

조선시대는 사대를 한 중국으로 통하는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의주대로'가 국토의 대동맥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한 곳이 경복궁과 서대문사거리인데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파괴한 것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고 서대문사거리를 파괴한 것은 조선이 중국을 사대한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찻길을 낸다는 명분으로 사대문의 하나인 돈의문을 헐어버렸는데, 같은 사대문인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우회하였습니다.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경기감영도 헐렸고 만초천에 놓여있던 홍예가 아름다운 경교(京橋), 반송정, 서지 그리고 모화관도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서대문사거리는 한양에서 대륙으로 가는 길의 들머리로 사신으로 떠나는 사람, 공부하러 가는 유학생, 개성·평양·의주를 비롯한 관서지방에 관직을 명받아 떠나는 관료들이 이곳에서 출발하여 연서역을 지나 개성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길 떠나는 관리들이 자기 말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말을 빌려주는 고마청(雇馬廳)이 있어 이곳을 고마동이라 하였습니다.

사행(使行)을 떠나는 역관들에게는 녹봉을 주지 못해 조정에서 인삼 10근을 주며 팔아서 쓰라고 했는데, 점점 그 분량이 많아져 병자호란 이후에는 80근으로 많아졌습니다. 보통 인삼 10근이 1포이므로 80근은 팔포에 해당되므로 이를 일러 팔포무역(八包貿易)이라 하였습니다.

무역의 집하장이자 밀수시장이 섰던 서대문사거리
사행을 떠나는 이들이 팔포인삼이나 백은으로 북경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고 중국사신도 백은이나 기타 물품으로 서울에 와서 교역하였는데 인삼 한 근이 은 25냥으로 환산되었기 때문에 인삼 8포는 은 2,000냥에 해당됩니다. 인삼은 중국에서 고가로 팔리기 때문에 사행원들은 인삼을 팔아서 경비로 쓰는 대신에 그 돈으로 중국에서 비단과 귀중품을 사와 200배 이상 남는 장사를 하였는데 이러한 사무역의 집하장임과 동시에 밀수시장이 서대문사거리입니다.

조선시대 고위층은 당나라가 망한 지 오래된 조선 후기까지 중국제를 계속 '당화'라 부르며 중국에서 온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중국제 장신구, 화장품, 귀금속, 귀한 약재, 구하기 어려운 책, 질 좋은 붓을 구할 수 있는 가게들이 성시를 이룬 곳도 서대문사거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을 일본으로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이 이뤄졌는데 오늘날로 치면 '보세창고'가 즐비했습니다. 왜관에서 샘플을 보고 흥정이 끝나면 부피가 작은 물건은 육로 문경새재를 넘었고 부피가 큰 것은 삼개나루로 보내 부산으로 해상운송을 했습니다.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조선 초 ‘서지’(西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가에 지은 정자 이름이 천연정이라 ‘천연지’라고도 하였습니다. 한양의 3대 연못 중 남대문 밖 ‘남지’(南池)는 별칭이 없고, 동대문 밖 ‘동지’(東池)는 ‘연지’라고도 하였습니다. 남경(한양의 고려 때 이름)으로 행차하던 왕들이 비를 피하거나 쉬어가던, 우산 같이 생긴 소나무가 있었기에 ‘반송’(盤松)이라 하였고 이곳에 지은 정자를 반송정이라 하였습니다.

<태종실록>에 보면 왕이 내시 출신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파게 하였는데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모화루에서 150보 남쪽에 있고, 연못 길이는 100m가 넘었으며 깊이도 두세 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연못에는 개성 숭교사의 연꽃을 배로 실어 옮겨 심었으며 한 달에 쌀 열 말을 먹어치울 만큼 잉어가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중국 사신 접대 장소나 중국을 오가는 이를 마중하는 장소로 애용되었던 곳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경기감영 소속 중군 병력이 주둔하던 경기중군영이 연못 위쪽에 들어섰고 개항 이후에는 일본에 제공되었던 최초의 외국공관 건물인 청수관이 들어섰는데 청수관은 원래 천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한 경기중군영이었으나 고종 17년 11월 하나부사가 공사로 부임하면서 공사관으로 쓰였고, 임오군란 때 하나부사가 도피하면서 불을 질러 소실되었습니다.

경기중군영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도성을 점령한 반군이 주둔한 역사적 장소인데 이때 북방을 지키던 1만 정예군이 반란군으로 와해되면서 이후 청나라의 침공을 제지할 국방력을 상실하여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독립문에 새겨진 대한제국 황실의 오얏꽃과 태극기
독립문은 중화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과 책봉의 체제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미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한 것입니다. 필립 제이슨(서재필)이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사바틴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였습니다.

1896년 4월 7일 정부의 재정지원금 4400원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이 창간되고 1896년 7월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은 독립협회의 모체가 됩니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 것이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입니다.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에는 당시 정부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고 독립협회는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고문 필립 제이슨 그리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관료와 명사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정동구락부는 구미외교관과 선교사 그리고 조선인 관료들로 구성된 친교클럽으로 손탁호텔에서 모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압력을 받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구미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세력을 물리치고자 배일 성향의 정동구락부에 시종을 보내어 호의를 베풀고 신하들에게도 정동구락부를 통한 구미인들과의 친교를 권장했습니다.

미국공사 H. B. 실, 프랑스영사 C. V. 플랑시 등의 외교관과 M .디, C. 르장드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가 멤버였고 조선인으로는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 등이 회원이었으며,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한 인사들의 상당수가 정동구락부를 드나들던 이들이었습니다.

독립문 건설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으며 이 시기에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는데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이를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으며 현판은 정부 관료인 이완용이 썼고, 현판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과 태극기가 새겨졌는데,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입니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랐기 때문에 경성 거주민들은 독립문으로 가서 그곳의 태극기를 보고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독립문의 편액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대해선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첫째는 이완용이 썼다는 것과 둘째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나온 객관적 기록과 방증자료만 가지고 판단하면 독립문 편액은 이완용이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유일한 기록은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에 게재된 <내 동리 명물>이란 고정 연재물에 실린 글이며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에도 독립문의 글씨는 이완용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화관은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돈의문 밖 서북쪽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라 하였다가 1429년(세종 11)에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하였습니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다고 합니다. 1538년 명나라 사신 설연총이 영은문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었는데 1896년(건양 원년)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면서 독립관이라 개칭하고, 모화관 앞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 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으며 한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모화관에 머물며, 이때 조선의 왕세자와 백관이 그의 앞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고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예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10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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