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만 앞세운 패가망신 리더십 ‘송 양공 宋襄公’…한 그루 나무에 집착하면 숲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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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양공은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하나는 예, 인, 의를 중시해 평화 시는 물론이고 전쟁을 할 때도 이를 실천한, 존경할 만한 제후였다는 평가와 명분만 앞세우고 실리 면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무능한 제후라는 혹평이다.




▶‘인의’와 ‘무능’의 극단의 평가

주 무왕의 큰 덕과 그를 보좌한 주문공의 역량으로 은나라를 멸하고 건국한 주나라. 주나라는 봉건제를 채택했다. 이는 천자가 주나라를 다스리고 천자에게 봉분을 받은 각 제후국들이 지방자치와 독립채산제를 이루는 형태였다. 주나라 천자는 각 제후국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5등급 작위를 주었다. 이들 제후국은 평상시에는 주나라에게 세공을 바치고, 전시에는 병사를 보내 주나라를 보호해야 했다.

주 무왕은 은나라의 후계를 잇는 명분을 송나라에게 주고 가장 높은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 강태공, 태공망의 후손에게는 후작의 지위를 주고 제나라를, 당시 오랑캐라고 천대한 초나라에게도 자작의 지위를 주었다. 기원전 1046년 건국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이후 수백 년간 잘 유지되었다. 그것은 주나라 황실이 권위와 실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기원전 770년경부터 주나라 천자의 명령이 제후국에 통하지 않았다. 제후국의 힘이 세지고 상대적으로 주나라가 약해진 탓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약 300년간 수많은 제후들이 각기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춘추시대는 모든 것이 열린 시대였다. 춘추패자가 되기 위한 각 제후국의 치열한 경쟁은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의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중요시 된 것은 인재였고 그들에게는 물론 출신성분도 중요했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우선이었다. 중국의 실사구시 학풍이 이때부터 싹튼 것이다.

300여 년 간 지속된 춘추시대는 이른바 ‘춘추오패 春秋五覇’를 탄생시켰다. 역사는 이들을 제齊 환공, 송宋 양공, 진晉 문공, 진秦 목공, 초楚 장왕이라 불렀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배력과 힘에서 송 양공을 제외하고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을 번갈아 넣기도 한다. 송 양공을 춘추오패에 합류시킨 이는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이다. 주자는 남송 시절 금나라를 물리치기 위한 북벌을 주장했다. 또한 남송의 한족 정통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추시대 당시 오랑캐 취급했던 초, 오, 월을 제외하고 송 양공을 의식적으로 춘추오패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즉 삼국시대 한나라 정통론에 의거, 촉의 유비를 위나라 조조보다 앞에 놓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렇다면 예와 인을 숭상하고 유학의 경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실천한 주자가 칭송한 송나라 양공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양공은 한마디로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첫째로는 예, 인, 의를 중시하고 평화 시는 물론이고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이를 실천한, 존경할 만한 제후였다는 평가이고 두 번째는 명분만 앞세우고 실리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무능한 제후라는 평가이다. 이 양극을 달리는 두 가지 평가를 받는 그를 한 가지 잣대로 ‘송 양공은 이렇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는 주자에게서 예의 상징적인 인물을 존경과 칭송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미련하고 돼지 같은 군주’라며 경멸할 정도로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의 仁義’는 송 양공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점과 군주로서 존경할만한 업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진면목을 알수록 그가 내세웠던 ‘인의’ 역시 진실된 것인가라는 의문마저 생긴다. 아무튼 송 양공은 중국 역사에서 독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목이의 양보로 왕위에 오르다

송 양공은 춘추시대인 기원전 7세기 경 송나라 환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보였다. 당시 주나라는 이름뿐이었지만 그래도 황실의 권위가 조금은 남아있었다. 그것은 춘추시대 제1대 패자인 제 환공 덕택이었다. 명재상 관중의 보좌로 패자가 된 제 환공은 ‘존왕양이 尊王攘夷’ 사상에 입각해 각 제후국으로부터 주황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주나라 양왕 원년, 송 환공의 병세가 위중해졌다. 송 환공은 후계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목이, 자보 둘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목이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란 지혜로운 장남이었다. 하지만 후궁의 자식이라 명분에서 위 문공의 여동생이며 송 환공의 정비가 어머니인 자보에 뒤쳐졌다. 자보는 적장자였다. 송 환공은 먼저 자보를 불렀다. 왕이 되라 했다.

“저는 왕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목이는 현명하고 어질고 또한 장남이라 목이가 왕이 되는 것이 예와 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송 환공은 목이를 불렀다. 그리고 왕이 되라 했다.

“저는 왕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서자가 적자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은 법도가 아닙니다.”

목이와 자보는 서로 양보했다. 아예 목이는 위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목이는 생각했다. ‘자보가 백번 양보해 내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자보를 중심으로 뭉친 권신들의 세가 워낙 강해 그들이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자보 역시 겉으로는 겸양을 보이지만 이는 내가 양보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고 그 검은 속은 알 수 없다’는 것이 목이의 판단이었다. 자보가 환공을 이어 송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송 양공이다. 이때가 기원전 651년이다. 송 양공은 목이를 불러 재상의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권한을 목이에게 주었다. 목이는 비록 송 양공이 동생이지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양공의 명을 받았다.

당시 춘추패자는 제나라였지만 송나라는 수많은 제후국 중에서도 명분상 가장 높은 서열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조상의 뒤를 이어주기 위해 세워 준 나라이며 봉작도 가장 높은 공작의 지위였기에 송나라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늙고 병든 제 환공에게는 여섯 부인에게서 난 여섯 아들이 있었다. 제 환공은 관중과 상의해 공자 소를 세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소를 불러 계책을 알려주었다.

“세자는 내 후계이지만 손쉽게 왕위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다. 나머지 다섯 형제들이 각기 세력을 모아 저항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있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지만 나와 관중도 떠나면 다섯 공자를 물리치기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라. 힘과 지략에서 저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송 양공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라라. 내가 송 양공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송 양공은 인, 의, 예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 너를 도와줄 것이다.”

환공이 죽자 제나라는 환공의 예측대로 후계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빠르고 단호하게 송 양공이 개입해 공자 소를 제나라의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가 바로 제 효공이다. 이 같은 성공에는 송 양공의 결단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제 환공의 방책, 송나라 재상 목이, 공손고의 치밀한 계책과 활약이 컸다. 하지만 송 양공은 우쭐했다. 자신이 춘추패자의 나라, 제나라 왕을 만들고, 임명했다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착각의 시작이었다.




▶증나라 제후를 죽인 송 양공의 이중성

송 양공은 회맹을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이 제 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패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 목이와 공손고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렸지만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회맹은 각 제후국에 전달되었다. 회맹일이 되었다. 초라하게도 작은 제후국인 조, 주나라 제후들만 와있었다.

송 양공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때 등나라 제후가 늦게 도착했다. 화가 난 양공은 등나라 제후를 방에 가두었다. 자신의 위엄을 보이려는 의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증나라 제후가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다. 이들 조, 주, 등, 증 등은 사실 나라라기보다는 한 고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들은 송나라 인근 지역이라 송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송 양공은 증나라 제후를 가두었다. 그리고 대신들을 모아 어떤 처벌을 내릴지 물었다.

송 양공의 질문에 간신 공자 탕이 나섰다.

“이번 기회에 군주의 위엄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마침 오랑캐들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공자 목이가 반대를 했다.

“제사는 사람의 복을 비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리고 증나라 제후가 늦었지만 사정이 있었는데 이를 보지 않고 작은 일에 큰 희생을 치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풀어주시지요.”

송 양공은 공자 탕의 의견을 받았다. 증나라 제후는 산 채로 펄펄 끓는 물에서 삶아진 후 제물로 수장되었다. 이를 보고 등나라 제후는 공자 탕에게 뇌물을 주고 겨우 풀려났고 조나라 공공은 겁에 질려 도망가고 말았다. 송 양공의 회맹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오히려 증나라 제후를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송 양공은 제후들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평소 인과 예를 앞세우는 그가 등나라 제후를 가두고, 증나라 제후를 삶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겉과 속이 다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만큼 송 양공은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송 양공은 회맹 자리에서 도망갔다 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공격군의 대장은 공자 탕이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강력한 수비에 막혀 전투는 큰 성과가 없었다. 이 무렵 송 양공을 자극하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나라 문공이 자진해서 초나라를 찾아 머리를 숙였다는 것이었다. 송 양공은 초조해졌다. 춘추패자의 자리를 초나라, 노나라, 제나라에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다. 이때 공격군을 이끌던 공자 탕이 돌아와 송 양공에게 얕은 계략을 올렸다.

“초나라를 이용해 군주께서 춘추패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각 제후국 중에서 그래도 힘과 권위가 있는 제후국은 제나라, 초나라입니다. 하지만 제나라는 국내정치가 불안정해 패자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초 성왕은 욕심도 많지만 힘도 갖추고 있습니다. 초 성왕을 온갖 재물로 유혹해 그가 제후들을 모으도록 한 다음에 그곳에 모인 각 제후들의 힘을 이용해 초 성왕을 누르고 군주께서 패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공자 목이는 이번에도 반대했다. “안됩니다. 초 성왕을 일시적인 속임수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나중에 초 성왕과의 싸움이 불가피합니다. 지금 송나라의 힘으로는 초나라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송 양공은 공자 탕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온갖 금은보화를 들고 송나라 사신이 초 성왕에게 가 송 양공의 뜻을 정했다. 욕심 많은 초 성왕은 일단 승낙했다. 이윽고 제나라 녹상에서 송 양공, 초 성왕, 제 효공이 모였다. 모이자마자 앉는 순서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주나라에게 받은 봉분 기준에 따라 공작인 송 양공, 후작인 제 효공, 비록 왕호를 쓰지만 자작인 초 성왕 순서대로 앉았다. 송 양공은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올라 한 달 뒤에 모든 제후들이 모여 패자를 뽑는 회맹을 갖자고 제안하고 이를 문서로 가져왔다. 문서 맨 앞은 송 양공, 초 성왕, 제 효공 순서였고 이미 송 양공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제 효공은 “두 분께서 각 제후들을 부르는데 무슨 서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송나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저의 서명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라며 사양했다. 제 효공의 속마음은 초 성왕 뒤에 있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송 양공은 초 성왕에게 “정나라, 진나라, 허나라, 채나라는 초 성왕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이 나라들은 성왕께서 꼭 불러주시지요”라고 부탁했다. 이 날 모임은 이렇게 끝났다.

▶쓸데없는 예의로 초나라의 포로가 되다

본국으로 돌아온 초 성왕은 대신 자문, 장군 성득신을 불러 상의했다. 그는 이미 송 양공의 얕은 수를 다 읽고 있었지만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자문과 성득신은 “송 양공의 제안대로 회맹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각 제후들을 힘으로 제압해 그 자리에서 주군께서 역으로 패자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저희들이 준비를 다 해놓겠습니다”라고 성왕의 분노를 달랬다. 자문과 성득신은 군사들을 매복시켜 송 양공을 납치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송 양공 역시 신하들과 상의했다. 이번에도 목이가 나서 회맹에 참석하는 자체를 반대했다. “우리는 예와 인을 앞세우지만 초 성왕은 다릅니다. 그는 오로지 이익과 힘만 좇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주군께서 회맹에 참석하시려면 군사를 이끌고 가십시오.”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모두 시종만 거느리고 오기로 한 약속인데 어찌 군자답지 않게 행동하느냐’가 이유였다. 그러자 목이가 다시 제안했다. “그렇다면 제가 전차 100대를 거느리고 삼 리 밖에 진을 치고 있겠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송 양공은 이 제안도 거부하고 문관과 시종들만 데리고 회맹의 자리에 참석했다.

회맹의 날, 제 효공과 노 희공을 제외하고 모든 제후들이 다 모였다. 특히 초 성왕도 많은 수의 시종을 거느렸지만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았다. 송 양공은 “이것보라. 초 성왕도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목이의 말을 들었다면 소인배 소리를 들을 뻔 했다”하고 혀를 찼다. 맹주를 추대하기로 한 날이 왔다. 송 양공은 조바심에 나섰다.

“과연 누가 맹주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까. 초 성왕은 비록 왕호를 쓰지만 자작이고 주나라 천자로부터 가장 높은 예우를 받은 공작의 나라인 송나라의 군주가 맹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 성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를 이곳을 초청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여기 있는 여러 제후들은 과연 누구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인가. 나 때문인가, 아니면 송 양공이 무서워서인가?”

그러자 제후들이 일제히 초 성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붉은 깃발이 올라가자 초 성왕 옆에 있던 성득신이 예복을 벗었다. 안에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초 성왕을 따라온 시종들도 일제히 겉옷을 벗자 갑옷이 드러났다. 그들은 초 성왕의 정예병으로 모두 시종으로 위장한 것이다. 송 양공은 성득신에게 잡혔다. 초 성왕은 모든 제후들 앞에서 송 양공에게 6가지 죄를 물었다.

“송 양공은 함부로 제나라 내정에 간섭해 후계를 정하였고, 등나라의 왕을 감금해 욕을 보였으며 또한 증나라 왕을 잔인하게 수장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나라의 수도를 포위에 공격하였고, 힘도, 권위도 없으면서 패자를 꿈꾼 것도 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초나라의 힘으로 제후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맹주자리를 탐낸 것도 죄이다. 이제 송 양공을 감금하고 송나라 수도 수양으로 진격해 천하의 명분을 세우겠다.” 초 성왕이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초나라 군대는 일제히 송나라 수도 수양으로 진격했다. 송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를 수습한 이는 재상 목이와 장군 공손고였다. 목이는 공손고와 중요 대신을 불러 자신의 계책을 설명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송나라의 왕으로 취임했다. 초 성왕의 선봉대장 투발이 공손고와 마주했다.

“너희 왕이 지금 우리에게 인질로 잡혀있다. 모두 항복하라.”

“우리는 새 왕이 있으니 아무 상관없다.”

“송 양공을 돌려주면 너희는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알 바 아니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초 성왕은 송 양공을 죽이라 명령했다. 그때 성득신이 나서 반대했다. “증나라 왕을 죽였다고 죄를 물었는데 그를 똑같이 죽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풀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명분이 없다. 아무 소득도 없이 송 양공을 풀어주란 말인가?”

“노 희공이 이번 회맹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송 양공을 풀어주자는 말을 나오게 하면 됩니다.”

노 희공은 정 문공의 제안으로 초 성왕을 맹주로 추대하는데 서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건을 달았다. 송 양공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초 성왕은 송 양공을 풀어주고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풀려난 송 양공은 부끄럽고 더구나 목이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나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그때 도착한 목이의 사신에게 송 양공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은 목이의 계책이었다. 인질로 잡힌 송 양공에게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왕을 빨리 세워야 오히려 송 양공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목이의 판단이었다. 덕분에 양공은 다시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송 양공은 초 성왕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초나라의 세가 워낙 강해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다.

송 양공은 대신 정나라를 공격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송나라 대신 초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이번에도 초 성왕이 맹주가 되는데 공을 세운 정 문공을 처벌해야 한이 풀릴 것 같았다. 공자 목이는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반대했지만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송나라의 공격을 받자 정 문공은 초 성왕에게 구원을 청했다. 초 성왕은 곧바로 군대를 보내 송나라 본토를 공격했다. 송 양공은 정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대를 돌려 초나라와 마주했다.

목이와 공손고가 송 양공에게 간언을 올렸다.

“초나라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정나라에 대한 구원 명분입니다. 이제 포위를 풀었으니 양쪽의 체면은 세웠습니다.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는 “제 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되려면 비록 강한 적이지만 초 성왕과 싸워야 합니다. 주 무왕도 3000명의 군사로 주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송 양공은 자신을 제 환공은 물론이고 주 무왕에까지 비유하며 패자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군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망각한 무모한 신념가인 셈이다.




▶‘인의 仁義’ 때문에 목숨도 잃다

‘홍수 泓水’를 마주하고 송나라와 초나라 군은 마주했다. 성득신이 지휘하는 초나라 군은 대군이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송나라 군이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 목이와 공손고는 계책을 냈다. 초나라 군이 강을 반쯤 넘는 순간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는 계획을 송 양공에게 냈다. 하지만 송 양공은 이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로 보면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활을 쏘지 않고 늙은 병사는 잡지 않으며 험한 지세를 이용, 적을 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비록 군사의 수가 적지만 인과 의리에서는 우리가 앞서고 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이에 목이는 반발했다. “전쟁은 서로 죽이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인의를 찾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목이와 공손고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성득신은 송 양공은 물론 송나라군 전체를 깔보고 있었다. 이윽고 초나라 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반쯤 건너왔을 때 목이와 공손고가 다시 한 번 공격을 청했지만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초나라 군이 모두 강을 건넜다. 성득신은 옥으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비단 전포를 입고 군대를 지휘했다. 초나라 군은 마치 소풍을 나온 군대처럼 웃고 떠들었다. 공손고는 초나라 군의 진세를 보고 송 양공에게 청했다. “초나라 군이 강을 다 건너왔지만 아직 진세가 완전치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공격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송 양공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인의대기 仁義大旗’가 펄럭이고 있었다. 송 양공은 “답답하구나. 일시적인 승리에 취해 역사에 남을 인의를 저버리려 하는 것인가”하고 공손고를 야단쳤다. 공손고는 속으로 답답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초나라 군의 대오가 정비되었다. 그때서야 송 양공은 자신의 시종과 호위병을 이끌고 초나라 군의 정면을 공격했다. 공손고의 부대도 같이 진격했다. 전투의 결과는 뻔했다. 병력과 사기, 전투 경험에서 송나라는 초나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송 양공이 그토록 자랑하던 ‘인의대기’도 이미 초나라에게 빼앗겼고 송 양공도 초나라 군이 쏜 화살을 허벅지에 맞았다. 송 양공을 뒤따르던 시종들은 모두 죽었다.

공손고는 부상을 입은 송 양공을 전차에 태워 수도 수양성으로 보냈다. 수양성에 도착한 송 양공은 수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지아비, 아버지, 아들을 잃은 백성들이 송 양공에게 “그 잘난 인의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다 죽었다”며 송 양공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홍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송 양공은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목이에게 다음 왕위를 계승하라 했지만 목이는 송 양공의 아들을 왕위에 올렸다. 이때가 기원전 637년으로 송 양공은 15년간 재위했다.




▷# 실패의 리더십 | 나무에 집착하면 숲을 보지 못한다

역사가들은 송 양공을 빗대 ‘송양지인 宋襄之人’이란 불렀다. 이 말은 송나라 양공처럼 쓸데없는 예의를 차리는데 신경을 써 정작 나라와 본인은 큰 고초를 겪는다는 뜻이다. 물론 좋은 소리는 아니다. 실속 없이 격식만 차리거나, 남에 대한 지나친 배려, 비굴할 정도의 겸손 등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고 예, 인, 의리도 장소와 상황과 상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송 양공에게 ‘예 禮’는 그의 명분이었고 전부였다. 어쩌면 그는 송나라의 국력과 군사력으로 초나라, 노나라, 제나라를 제압하고 맹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은나라 후손을 잇는 명분과 제후국 중 가장 높은 공작의 작위를 받은 것으로 다른 제후국을 압도해 맹주가 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그가 홍수 전투에서 초나라 군이 도강하는 도중 공격하거나, 도강을 완료하고 진영을 세우는 중에 공격하자는 목이와 공손고의 당연한 건의를 거부한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송 양공이 홍수 전투에서 목이와 공손고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지나치게 예를 숭상하거나, 군사를 지휘하는 기본조차 없어서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즉 송 양공이 원한 것은 기습으로 인한 일시적인 승리가 아니라 명분과 대의에서 승리하고, 전투에서도 승리해 얻는 완전한 맹주자리였던 것이다. 목이와 공손고의 작전대로 했더라면 송나라군은 승리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은 그 같은 질문에 ‘어렵다’는 답을 한다. 당시 송나라와 초나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과 군사력에서 차이가 나 순간의 승패는 있을 수 있어도 결국에는 초나라의 승리가 확정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송 양공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만대에 남을 역사에 일시적인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명분인 예를 버리는 것보다, 우직하고 답답하지만 전투에서도 예와 인을 지키는 원칙을 선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송 양공의 이같은 고답적이고 융통성 없는 리더십으로 송나라는 춘추시대의 전면에서 뒤로 물러났고 송 양공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가치관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한 국가의 군주가 취할 리더십은 아니었다. 송 양공이 학문을 연마하는 학자였다면 그는 위대한 학자와 성인으로 이름을 남겼겠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한 국가의 사직과 만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군주로서는 의무와 책임을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인 것이다.

비록 성리학의 대가 주자에 의해 그의 행적과 결정들이 미화되고 합리화 되었지만 춘추시대, 즉 양육강식의 시대를 살아가기에 그는 너무나 작은 심장과 나약한 심성 그리고 그릇된 신념으로 송나라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군주라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직장에서의 아름다운 동거

직장인이 싫어하는 ‘밉상 상사’는 누구일까.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실수는 부하 직원에게, 성공의 달콤한 열매는 자신에게’ 돌리는 상사가 분명 상위권일 것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직장인은 ‘겸양지덕’과 ‘장유유서’에 입각,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대신 소주 한 잔으로 쓰린 속을 달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장님이 이번 내 공은 잊지 않겠지’ ‘자기도 사람이면 언젠가는 은혜를 갚겠지’라고 중얼거려도 소용없다.

공과 실수는 이미 기록으로 남겨지고 칭찬과 책임의 딱지가 붙여지면서 ‘그 프로젝트’는 끝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공과 실수가 직장인을 기다리는 것이다. 말해야 한다. 예전 드라마 대사처럼 “왜 너의 공이라고 당당하게 말을 못해!”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을 양보하는 쓸데없이 미련하고 겸손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상사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처음에는 약간의 ‘익스큐즈’한 마음도 들겠지만 반복되면 인간은 그것을 당연하게, 권리처럼, 자기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속성이다. 시간이 흐른 뒤 이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학창시절 성적표를 고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것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직장은 학교나 가정이 아니다. 내가 잊어도,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챙겨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공도 빼앗아가는 곳이다.

우리가 왜 드라마 <미생>에 공감했을까. 드라마 속에 구구절절 직장생활의 애환과 비정함 그리고 냉정한 양육강식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필요한 것은 양보보다는 겸손이, 예의와 의리 보다는 공동의 이익추구라는 명분이 더 필요하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발톱을 세우는 싸움닭이 되라는 것은 아니라 ‘꺼내지 않은 발톱’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있다.

물론 공을 나누었을 때 실수도 나눌 수 있는 명분과 기회가 한 번쯤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나누어준 공이 훨씬 더 크다고 상대가 느낄 때이다. 사람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서 당연히 자신이 준 것을 더 기억하는 법이다. 기록하고 기억하자. 내가 준 것도, 또한 받은 것도. 그것이 동료들과 직장에서의 동거를 아름답게 하는 방법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47호 (16.10.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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