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술 한 잔, 권총 한 자루···호방한 여성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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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09.07. 오후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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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커버스토리 : 탐정

여성 탐정이 주인공인 추리 소설도 많아

주인공을 통해 본 여성 탐정의 세계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탐정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는가? 셜록 홈스나 코난, 김전일? 여기 근사한 여성 탐정들이 있다. 작가 피.디.(P.D.) 제임스가 창조한 탐정 코딜리아 그레이부터 새러 패러츠키의 브이.아이.(V.I.) 워쇼스키, 케리 그린우드의 프라이니 피셔,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알렉산더 매콜 스미스의 음마 라모츠웨,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까지. 여섯 주인공의 가상 대화로 여성 탐정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코델리아 그레이(이하 그레이) 나는 런던 옥스퍼드 서커스역 킹 리가에 있는 낡은 건물 4층 프라이드 탐정사무소에서 일해요. 내 파트너였던 버니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탐정이었지만, 때로 그와 마주앉아 사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시간이 그리워요. 버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탐정사무소와 그가 가진 가장 버젓한 물건이었던 권총 한 자루를 나에게 넘겼죠. 아들이 자살한 이유를 알아봐 달라는 첫 의뢰 덕에 사무소에 쌓인 세금고지서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어요.

브이.아이. 워쇼스키(이하 워쇼스키) 난 세 번 이상 독촉장이 온 세금고지서만 처리하지.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니까. 난 브이.아이. 워쇼스키. 풀 네임은 빅토리아 이피게니아 워쇼스키. 이 부담스러운 이름은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날 비키라고 부르진 마. 미국 시카고 먼로 스트리트 옆 풀트니 빌딩 4층 동쪽 복도 끝이 내 사무실이야.

프라이니 피셔(이하 피셔) 부모들이란! 내 이름은 님프 프시케를 프리네로 착각한 어머니가 지었지. 그리스의 고급 창부 이름이지만 괜찮아. 프리네는 나처럼 아름답고 호방한 젊은 여성이었으니까. 먼 친척인 작위 계승자들이 연달아 죽는 바람에 귀족이 되었지만 춤추고 게임을 하고 진이나 마시면서 지내는 건 시시했어. 고국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돌아와 멜버른 최고의 여성 탐정이 되기로 했지. 우리 만남을 위해 건배할까. 샴페인 뵈브 클리코 어때?

여성이 주인공인 탐정 소설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워쇼스키 좋은 와인은 환영이야. 그렇지만 내가 늘 마시는 조니워커 블랙 더블 샷으로 부탁해. 내 사무실 건너편 ‘아니 스테이크하우스’에 가면 주인이 잘 구운 고기와 함께 내가 원하는 술을 내주지.

그레이 나도 버니가 살아 있을 때 사무실 근처 골든 페전트 술집에 가곤 했어요. 여주인 메이비스는 사무실을 나 혼자 운영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죠.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면서요. 절대 다시 갈 일은 없을 거예요.

하무라 아키라(이하 아키라)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피.디.(P.D.) 제임스의 소설이지.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서 포근한 담요를 뒤집어쓰고 제임스의 신작을 펴들어 가구에 관한 묘사로 머릿속을 꽉 채워야 하는 법이야. 나는 하무라 아키라. 20대부터 쭉 아르바이트로 살아왔어. 신주쿠의 하세가와 탐정사무소의 프리랜서 계약직 탐정이 그나마 제일 오래된 일이랄까?

여성이 주인공인 탐정 소설 <제한 보상>의 책 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그레이 가구와 건축 양식에 관심이 있다면 당신과 두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책도 무척 좋아하죠?

아키라 날씨가 무척 화창하군. 그리고 내가 읽는 건 주로 장르 소설이야.

음마 라모츠웨(이하 라모츠웨) 나는 프레셔스 라모츠웨. 음마는 아프리카에서 여성의 이름에 붙는 호칭이지. 나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소를 팔아서 보츠와나에 첫 여성 탐정사무소를 냈어. 개업을 준비하면서 변호사에게 여자가 탐정이 되는 게 가능하냐는 소리를 들었지. 여자들이야말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할 줄 알지. 보는 눈이 있고. 애거서 크리스티처럼 말이야. 그 변호사는 자기 바지 지퍼가 열린 것도 모르고 있었어.

여성이 주인공인 탐정 소설 <코카인 블루스>의 책 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워쇼스키 멍청한 자식 같으니라고! 나도 국선 변호사로 잠깐 일해서 잘 알고 있지. 탐정이 되고 주로 화이트칼라 범죄를 맡고 있지만, 시카고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자들이 깡패들을 고용하는 곳이야. 날 납치하려는 그 자식들과 한바탕 격투를 벌였다니까. 돈 잘 버는 깡패들이 왜 이렇게 옷을 후지게 입는지 모르겠어.

무라노 미로(이하 미로) 내가 살았던 신주쿠도 못지않아. 양아버지인 무라노 젠조가 야쿠자 일을 받아서 하는 탐정이었고. 나도 야쿠자들에게 납치된 적이 있지. 주짓수 유단자인 당신처럼 무모하게 싸우지는 않지만.

아키라 신주쿠에서 당신 소문을 들었어. 위조 여권을 가지고 부산으로 도피했다면서?

여성이 주인공인 탐정 소설 <다크>의 책 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미로 나이 마흔이 되면 죽을 생각이었어. 서른여덟하고도 두 달을 살았지. 어쩌다 보니 재일교포 3세 박미애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아키라 아무하고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무미건조한 인생을 사는 나지만, 무라노 미로 당신 인생은 나와 다른 지독한 어둠이 있어.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잘하게 된 것이 하나 있지. 기억에 뚜껑을 덮는 거야.

그레이 뚜껑을 덮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우물과 관련된, 좋지 않은 경험이 있거든요.

워쇼스키 22살 풋내기인 줄 알았는데 우물 사건은 정말이지 감격했어. 코딜리아 당신은 싸움하지 않아도 나만큼 강인한 여자야. 날 빅이라고 불러도 좋아. 내 친구들은 모두 날 빅이라고 부르지.

여서잉 주인공인 탐정 소설 <음마 라모츠웨의 비밀-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의 책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그레이 워쇼스키. 당신은 둔감하지는 않네요. 무례란 언제나 의도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둔감하단 뜻이니까요.

아키라 무례하단 소리야.

피셔 음마 라모츠웨를 제외하면 여기 모인 여자들 모두 냉소적인 면을 갖고 있죠. 이 중에서도 하무라의 냉소는 나를 즐겁게 해요. 당신이 삶에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지만요.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면은 나와 워쇼스키가 가깝겠군요.

워쇼스키 독립적인 여성이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혼을 했다가 곧 이혼했어. 나는 나를 구속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거든. 누굴 보조하는 역할보다 내 일이 중요해. 오래 알고 지낸 의사 로티는 그런 나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지. 그녀는 여자를 돕는 사람이기도 해.

피셔 편의상 남성용 옷을 입고 다니는 내 친구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맥밀란 박사와 무척 비슷한 분인 것 같군요.

여성이 주인공인 탐정 소설 <어두운 범람>의 책 표지. 사진 <한겨레> 자료 사진
그레이 당신들이 셜록 홈스라면 그 두 분은 왓슨 같은 존재인가요?

피셔 글쎄? 나는 왓슨 말고도 동료가 아주 많아. 나와 함께 산다면 아마 홈스의 하숙집 주인인 허드슨 부인까지 모험에 휘말릴걸?

미로 가깝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나와는 다른 처지군요. 신뢰했는데 배신한 인간과 다시 신뢰를 쌓느니 새로운 사람과 신뢰 관계를 쌓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아키라 그래도 마흔 살에 죽겠다는 생각은 버린 모양이네.

미로 나하시의 고쿠사이 거리에서 반시뱀을 본 일이 있어. 그 뱀은 낮에는 꼼짝 않다가 밤 9시가 지나면 나온다더군. 앞으로도 그렇게 모습을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내 안에도 독사는 분명히 있어.

라모츠웨 아프리카에도 뱀이 있어요. 사내아이들은 뱀을 괴롭혔어요. 뱀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어린 시절 지독한 결혼으로 배신을 당했지만 지금 나는 악어를 총으로 쏘고 그 배를 가를 수 있죠. 종종 탐정 일을 하면서 겪은 가슴 아픈 사건에 관해서도 생각해요. 하지만 생각을 멈출 때를 알죠. 냄비에 올려놨던 호박 요리가 다 되면 그땐 호박을 먹어야 하는 법이에요. 그것이 우리에게 삶을 계속할 이유를 부여해요. 호박 한 덩이가.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참고 및 인용도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제한 보상>, <프라이니 피셔 미스테리1: 코카인 블루스>, <얼굴에 흩날리는 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다크>, <네 탓이야>, <의뢰인은 죽었다>, <어두운 범람>



탐정 (detective.探偵)

국어사전의 탐정은 드러나지 않은 사정을 몰래 살펴 알아냄,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직 우리나라 법은 탐정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2000년도 초반부터 탐정을 대신하여 민간조사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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