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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朴(밀양박씨)

 

 

본관(本貫): 밀양(密陽)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유래(由來):

 

 밀양(密陽)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이다.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제 54대 왕, 재위기간: 917 ∼ 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朴彦枕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彦孚: 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짐)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8세손 언상)·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8세손  언인)·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8세손

양언)·판도공파(版圖公派: 8세손 천익)·좌윤공파(左尹公派: 8세손 을재)·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원)·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척)·동정공파(同正公派 :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박언부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 고려 인종 때 공부상서를 역임)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 의신의 맏아들)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의신의 현손)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박의중(朴宜中)

1337(충숙왕 복위 6)∼1403(태종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실(實). 자는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화(華)이며, 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郎) 인기(仁杞)이다. 이색 ( 李穡 )의 문인이다.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의직장(典儀直長)으로 등용되었다. 그 뒤 헌납 ( 獻納 )이 되었고, 우왕 때 문하사인 ( 門下舍人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대사성 등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그들이 옛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설치한 철령위 ( 鐵嶺衛 )의 철폐를 교섭하여 성취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창왕 때 공신에 봉하여졌다. 공양왕 때 서운관 ( 書雲觀 )에서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소를 올리자, 음양에 의한 지리설의 허황됨을 역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그 뒤 예문관제학 겸 대사성이 되었고, 1392년(태조 1)에 조준 ( 趙浚 )· 정도전 ( 鄭道傳 ) 등과 함께 ≪고려사≫를 수찬할 때,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뒤 태종이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이 우아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로는 ≪정재일고≫ 3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박거겸(朴居兼)

1413(태종 13)∼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중공(仲恭).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경빈(景斌)이다. 1432년(세종 14) 문음으로 별시위 ( 別侍衛 )에 속하였다.

내금위 ( 內禁衛 )로 옮겨 호군 ( 護軍 )으로 있다가 1442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호군으로 세자우익위(世子右翊衛)를 겸하였다. 그 뒤 지훈련관사(知訓鍊觀事)를 거쳐 1443년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를 지냈다.

1449년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어 새로 설치된 육진 ( 六鎭 )을 수비하여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다. 문종·단종 때 대호군·경상도처치사(慶尙道處置使)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승진되었고 같은 해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어, 주민의 청에 따라 임기만료 뒤에도 계속 유임되어 4년간 재임하였으며, 146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 佐理功臣 ) 4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경상우도 및 충청도의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무예에 뛰어났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박중미(朴中美)

고려 충목왕(忠穆王)때 문과에  급제한 중미(中美: 의신의 7세손)는 공민왕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성(朴惺)

1549(명종 4) ∼ 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학자 · 의사(義士).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성림(成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순(純)이고, 아버지는 생원 사눌(思訥)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이다.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정구 ( 鄭逑 )를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 ( 金誠一 )의 참모로 종사했고, 정유재란 때 조목 ( 趙穆 )과 상의해 의병을 일으켜서 체찰사 ( 體察使 ) 이원익 ( 李元翼 )의 막하에 들어갔다. 그 뒤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다가 공조좌랑을 지내고,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전쟁 때는 명나라 군사를 접응하고 장정(壯丁)을 동원해 군인에 충당하며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뒤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고, 청송(靑松)의 주왕산 아래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공조정랑 ·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과 임천 ( 林川 ) · 영천(永川) · 익산(益山) 등의 군수 ·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 청송부사 등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격물치지 ( 格物致知 )와 성심정기(誠心正己)의 학문을 추구했으며, 과거시험에 뜻을 버리고 공맹(孔孟)의 글을 읽었다.

만년에는 더욱 ≪ 논어 ≫ 를 좋아해 거처하는 집에 학안재(學顔齋)의 현판을 걸어놓고 동료(東寮)를 사물(四勿), 서료(西寮)를 박약(博約)이라 부르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이에게는 먼저 ≪ 소학 ≫ 을 가르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깨닫게 하였다.

처음 정인홍 ( 鄭仁弘 )과 교류해 사이가 좋았으나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결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다.

더군다나 정인홍이 ≪ 남명집 南冥集 ≫ 의 발문에서 이황 ( 李滉 )을 배척한 어구를 보고 “ 세상에 선정(先正)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 ” 라 하고 절교하였다.

또한, 김성일의 참모가 되었을 때 적세가 사나워져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김성일에게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경상 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자, 김성일은 “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은 신하는 봉강에서 죽을 뿐이다. 그대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라. ” 라고 했으나 끝내 떠나지 않았다.

김성일이 역질에 걸렸을 때 다른 막료들은 모두 피했으나 그는 끝내 옆에서 간호하는 등 의리를 지켰다. 교우는 최영경 ( 崔永慶 ) · 김우옹(金宇 裵 ) · 장현광 ( 張顯光 ) · 권호문 ( 權好文 ) 등으로 서로 내왕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저서로는 ≪ 대암집 ≫ 이 있다.

 

박종남(朴宗男)

임진왜란 때 상주(尙州) 싸움에서 순절한 호의 아들 종남(宗男)은 선조 때 상주와 광주(廣州)의 목사(牧使)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냈다.

 

박영신(朴榮臣)

1578(선조 11) ∼ 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인보(仁輔). 할아버지는 부사과 ( 副司果 ) 호(虎)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종남(宗男)이며, 어머니는 군수 이세준(李世俊)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거쳐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광해군이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을 죽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후금과 가까운 지역인 데다 그가 힘센 무장이라 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다시 진도로 이배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경원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가까운 고을로 가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제수하도록 했으나 그것도 거리가 멀어서 왕의 배려로 풍천부사( 淵 川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고군(孤軍 : 수가 적고 도움이 없는 외로운 군대)으로 평산의 기탄( 較 灘)을 방어해 반란군의 서울 직행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모든 장수들이 반군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했고 저탄수장(猪灘守將) 또한 도주해 숨었다.

그는 홀로 반란군을 맞이해 언덕을 의지하면서 싸워 많은 반군을 살상했으나 화살이 다하고 활이 꺾어져 사로잡혔다. 이괄은 평소 그의 용맹을 알고 있어 생포한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함께 반란에 협력할 것을 백방으로 설득했으나 실패하였다.

반군의 장수 이수백 ( 李守白 )이 살려두면 후환이 두렵다 하여 칼로 내리쳤는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반군의 장수들을 꾸짖었다.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정문을 내렸다.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박정원(朴鼎元)

조선 정종의 부마(駙馬)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역임했다.

 

박신규(朴信圭)

1631(인조 9)∼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봉경(奉卿), 호는 죽촌(竹村). 할아버지는 참판 진원(震元)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계영(啓榮)이며, 어머니는 유명남(柳命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경술(經術)과 문학에 힘을 많이 기울여, 1652년(효종 3)에 진사가 되었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주판관을 지낼 때 선정을 베풀어, 임기가 끝난 뒤 백성들의 유임상소로 재임되기도 하였다.

뒤에 좌부승지를 거쳐, 1679년(숙종 5)에는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역시 선정하여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680년에는 형조판서로 특진되었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재직중에 아들인 성의(性義)가 범한 죄로 인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좌천되었다가 1685년에 호조판서에 다시 승진하였다.

서예로 이름이 높았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편저로는 ≪밀양박씨족보 密陽朴氏族譜≫가 있다. 시호는 청숙(淸肅)이다.

 

박이서(朴紛敍)

1561(명종 16) ∼ 1621(광해군 13).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문서(文敍). 자는 서오(敍吾), 호는 비천(泌川) · 동고(東皐). 오(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덕로(德老)이고, 아버지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율(栗)이며, 어머니는 영양수(永陽守) 이춘복(李春福)의 딸이다. 아들이 참판 노(魯)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승문원주서(承文院注書)가 되어 사관을 겸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분조(分朝 : 유사시에 일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두 왕실 체계로 나눠진 기능)를 배종(陪從)하고,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해서의 군량을 담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 예조좌랑을 지내고, 1596년 해서독운어사(海西督運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1599년 이이첨 ( 李爾瞻 ) · 홍여순 ( 洪汝諄 ) 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탄핵했다가, 도리어 남이공 ( 南以恭 ) · 김신국 ( 金藎國 )과 붕당을 만든다고 탄핵받아 관작을 빼앗기고 여주에서 8년간 은둔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이 되고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 · 호조참의 · 부제학, 다음 해 형조참의 · 이조참의 ·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담양부사 · 이조참판 · 동지성균관사 ( 同知成均館事 ) ·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13년 폐모론이 대두하자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1615년 “ 국법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당파인 소북파만 감싸고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 ” 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뒤에 서반직(西班職 : 무신)으로 복직, 영광군수로 나갔으나 전라도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에 실망해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다시 복직되어 1620년 진위사 ( 陳慰使 )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었다. 이덕형 ( 李德泂 )과 친교가 깊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박로

1584(선조 17) ∼ 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노직(魯直), 호는 대표(大瓢). 덕로(德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율(栗)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이서( 紛 敍)이며, 어머니는 이사율(李士栗)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임된 뒤 홍문관수찬 · 교리를 거쳐 사헌부지평 · 성균관직강을 역임하였다.

그 때 이조정랑에 추천되었으나 이이첨 ( 李爾瞻 ) 일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61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고, 이듬해 안동부사로 나갔다가 곧 사퇴하였다.

1620년 의정부검상이 되고, 청나라 병사가 요동(遼東)을 점령해 명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돌아오지 못하자, 수리부사(修理赴使)에 임명되어 해로의 항해를 독치(督治)하게 되었다.

일행이 선천에 이르렀을 때 진위사 ( 陳慰使 )로 명나라에 갔던 그의 아버지 참판 이서가 배의 전복으로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초혼 ( 招魂 )해 의장(衣裝)을 거두어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 이괄 ( 李适 )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피난할 때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호종했고, 가을에 기용되어 전적 ( 典籍 )을 거쳐 장연부사(長淵府使)가 되었다.

당시 감사의 모함으로 옥에 들어갔으나 무죄가 밝혀져 풀려났고, 1626년 무고(誣告)로 또 옥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자 순검사종사관(巡檢使從事官)으로 대가 ( 大駕 )를 호종했고, 김류(金 濫 )의 신임을 얻어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었다.

환도(還都) 후 신천군수가 되어 황해감사와 함께 구월산성 ( 九月山城 )을 수축해 치적이 있었다. 1630년 판결사 ( 判決事 )가 되었다가 곧 파주목사가 되었고, 얼마 뒤 장단부사가 되었다.

후금(後金)이 변방을 공략하는 등 조선을 괴롭히자,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한성우윤으로 옮겼다.

1633년 회답사(回答使)로 심양에 다녀와서 이조참판에 부총관 ( 副摠管 )과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를 겸하였다. 1635년 추신사(秋信使)로 심양에 다녀왔다.

1636년 조정의 의론이 척화(斥和)로 돌아서 청나라 사신이 성내어 돌아갔을 때 반드시 화가 일어날 것이라 하며 전비를 수습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겨울에 청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자, 강화를 주선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가서 적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힐책하였다. 40일 동안 잡혀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풀려났다.

이듬해 소현세자 ( 昭顯世子 )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따라갔다가 신병으로 3년만에 귀국하였다. 그 뒤 좌승지 · 도승지를 거쳐 1642년 병조참판을 지냈다.

 

박현(朴鉉)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로 나가 임지(任地)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淸白吏)로 세간(世間)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박사경(朴思敬)

규정공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 좌랑 문유의 아들)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典法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되었다.

 

박침

사경의 아들 침이 공민왕  때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開城)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박강생(朴剛生)

1369(공민왕 18) ∼ 1422(세종 4). 고려 말 조선전기의 문신. 자는 유지(柔之), 호는 나산경수(蘿山耕 馬 ).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침(沈)이며,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 8) 진위사 ( 陳慰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자에 대하여 보고를 잘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게 하고 돌아와 태종으로부터 미두 ( 米豆 )를 하사받고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2년 앞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있을 때의 부정사건으로 연루되어 태형 ( 笞刑 )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1417년 수원부사로 재임중 한양으로 교체되어가는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하여 죽음으로써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1424년(세종 6) 딸이 세종후궁인 귀인박씨(貴人朴氏)가 됨으로써 찬성 ( 贊成 )에 추증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 배불론 俳佛論 ≫ 을 지었다.

 

박심문(朴審問)

1408(태종 8) ∼ 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靑齋). 할아버지는 침( 甚 )이고, 아버지는 강생(剛生)이며, 어머니는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 倍 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 ( 記注官 )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 ( 金宗瑞 )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 ( 從事官 )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 ( 成三問 ) · 하위지 ( 河緯地 )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 ( 質正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 ( 顧命 )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박중손(朴仲孫)

1412(태종 12) ∼ 1466(세조 12).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 침( 甚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 ( 贊成事 ) 강생(剛生)이고, 아버지는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절문(切問)이며, 어머니는 왕고(王高)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가 되고, 홍문관의 부수찬 ( 副修撰 ) · 지제교 ( 知製敎 )를 거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 지병조사(知兵曹事) · 동부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 金宗瑞 )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 ( 靖難功臣 )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로 영빈 강씨(令嬪姜氏) 소생인 사위 화의군 영(和義君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으나, 이어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 뒤 대사헌, 공조 · 이조 · 형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초에 좌찬성에 승진되었고 세 차례에 걸쳐 고시관이 되어 많은 인물을 등용시켰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박미(朴楣)

중손의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 참의를  거쳐 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했으며 시문(詩文)에 현달했다.

 

박건(朴楗)

1434(세종 16)∼1509(중종 4).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계(子啓). 강생(剛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서관정자 절문(切問)이고, 아버지는 정난공신 ( 靖難功臣 ) 중손(仲孫)이며, 어머니는 공조정랑 문성조(文承祚)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부교리를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거쳤다. 예종이 즉위하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 한성부우윤, 호조참판을 거쳐, 1472년(성종 3) 진하사부사(進賀使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473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옮겨 공조참판·첨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7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해인사 소장의 대장경 판목을 봉심했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3년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관방 시설과 군자 확보에 힘썼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부임하자 임금에게 시폐(時弊)에 관한 시무책 ( 時務策 )을 올려 받아들여졌다. 이어 동지중추부사·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1489년 사헌부대사헌에 재임되었다. 이 때 재이(災異) 방지책 등 시무책을 제시하였다.

1492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정조사 ( 正朝使 )에 지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회피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동지중추부사로 강등되었다가, 연산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올랐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어 일처리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승진하고 의정부좌참찬에 이어서 우찬성에 올랐다.

그 뒤 좌찬성으로서 지경연사(知經筵事)·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고, 군기시제조(軍器寺提調)가 되어 군기 개선에 노력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반정에 동조해 정국공신 ( 靖國功臣 ) 3등에 책록, 의정부좌찬성에 임명되었으며,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박영(朴英)

1471(성종 2) ∼ 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 ( 讓寧大君 ) 지(祗)의 딸이다. 선산 ( 善山 )에서 대대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 ( 李世弼 ) 막하(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 ( 李克均 )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 ( 兼司僕 )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 宣傳官 )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 ( 鄭鵬 ) · 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 대학 ≫ 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 ( 格物致知 )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 ( 三浦 )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 ( 同副承旨 ) ·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 ( 己卯士禍 )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유인숙 ( 柳仁淑 )의 모함으로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났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 ( 松溪書院 ), 선산의 금오서원 ( 金烏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송당집 ≫ · ≪ 경험방 經驗方 ≫ · ≪ 활인신방 活人新方 ≫ · ≪ 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 ≫ 등이 있다.

 

박훈(朴薰)

1484(성종 15) ∼ 1540(중종 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형지(馨之), 호는 강수(江 馬 ). 좌찬성 중손(仲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미(楣)이고, 아버지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증영(增榮)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영달(朴英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06년 천거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를 거쳐, 보은현감에 임명되어 외지로 나갔다. 그러나 어진이를 임금 곁에 두지 않고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에 따라 사헌부감찰로 바뀌었다가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 ( 賢良科 )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 사간원사간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까지 올라 ‘ 국기(國器 : 나라에 인재가 될만한 그릇) ’ 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 趙光祖 )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의주로 옮겨졌다가, 13년 뒤에 안악으로 옮겨졌다. 3년 뒤인 1533년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향리인 청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주노릇을 너무 슬프게 하다 병을 얻어 일생을 마쳤다. 효심뿐 아니라 성품과 자질이 순수하고 덕행과 기량이 자연히 이루어져 행동에 지조가 굳고 법도가 있었다. 또 마음에 있지 않아도 관대하고 화합하는 도량도 갖추었다.

당대 큰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조광조와는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가 도목정사(都目政事 :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던 제도) 때 그의 의견에 따라 승진시키거나 내칠 정도였다 한다.

청주의 신항서원 ( 莘巷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 강수유고 ≫ 2권 2책이 전한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박충원(朴忠元)

1507(중종 2) ∼ 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 · 정관재(靜觀齋). 조(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찬( 邵 )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 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 ( 檢閱 )이 되었고, 이어 설서 · 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 ( 典籍 )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 이조정랑 · 사간원정언 · 이조좌랑 · 헌납 ·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

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 ( 直講 )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 사성 · 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좨주 ( 祭酒 )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 · 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 사헌부로서 호남 · 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 ’ 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 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 寧 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 ( 奇大升 ) · 이후백 ( 李後白 ) · 이산해 ( 李山海 )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 낙촌유고 ≫ 가 있다.

 

박계현(朴啓賢)

1524(중종 19) ∼ 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옥(君沃), 호는 관원(灌園). 광영(光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藻)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충원 ( 忠元 )이며, 어머니는 이인수(李 漏 壽)의 딸이다. 조성(趙晟) 형제의 문인이다.

1543년(중종 38) 진사가 되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고 곧 예문관검열과 정자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 사가독서하고, 곧 부수찬을 지냈다.

그 해 을묘왜변으로 경상도평사(慶尙道評事)가 되어 유장(儒將)을 기르는 책임을 맡았다. 이어 수찬을 거쳐 병조와 이조의 좌랑을 지내고, 1556년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동지사 ( 冬至使 )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8년 이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 · 의정부검상 · 사인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장령 · 교서관교리를 겸하였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지내고 승문원참교가 되었다. 1559년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어 치적이 많았다.

그는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현사(賢士)로 인정되는 사람만 기용하고 척신(戚臣)들의 추천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권신(權臣) 윤원형 ( 尹元衡 )이 그를 포섭하고자 혼인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560년 만포진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를 시켜 변방으로 내몰았다. 1563년 사간원대사간에 올랐다가 성균관대사성으로 옮겼고, 이어 예조 · 형조 · 병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565년 도승지, 시약청제조(侍藥廳提調)를 거쳐 한성좌윤이 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겨울에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곧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67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권벌(權撥) · 이언적 ( 李彦迪 ) 등의 신원을 계청했고, 이듬해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73년(선조 6) 예조참판을, 1575년 호남관찰사를 지냈다. 1577년 지중추부사와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동인 · 서인의 당쟁이 심해지자 이를 걱정해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편서로는 ≪ 밀산세고 密山世稿 ≫ 가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박승종(朴承宗)

1562(명종 17) ∼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충원 ( 忠元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계현(啓賢)이고, 아버지는 안세(安世)이며, 어머니는 황림 ( 黃琳 )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89년 봉교 ( 奉敎 ), 이어 지제교 ( 知製敎 ) · 병조정랑을 역임하고, 1600년 동지사 ( 冬至使 )로 명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 ( 副提學 ), 1607년 병조판서,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1618년 우의정으로 도체찰사 ( 都體察使 )를 겸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라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상위(相位)에 오르자 항상 차고 다니는 주머니 속에 오리알만큼 큰 비상을 넣어두고 말하기를 “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느냐. ” 하고 번번이 진정하지 못하고 고요한 방안에 한가히 있으면서 흐느껴 울고는 하였다.

앞서 1612년 이이첨 ( 李爾瞻 )의 사주로 윤인(尹 婦 ) · 이인경 ( 李寅卿 ) 일당이 경운궁에 난입,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일신의 위협을 돌보지 않고 수위(守衛)하기를 한결같이 하여 불측한 변을 방비하였으며, 정청(庭請)하는 날에도 끝까지 불참하였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하였다.

늘 나라일을 생각하며 폭음을 하고 말하기를 “ 내가 술을 즐겨함이 아니고 속히 죽기를 원하여 그러는 것이다. ” 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짓기를 “ 한 말로 임금을 깨우칠 수 없고, 만번 죽어 은혜에 보답하여도 오히려 남음이 있겠네. ” 하였는데 이 시가 한때 전송(傳誦: 입으로 전하여짐)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미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황급히 성문을 나갔으나 군사를 모으려는 아들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아들 자흥(子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서 그 일족이 오랫동안 요직에 앉아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하여, 아들과 같이 한낮에 목매어 자결하였다. 반정 뒤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시호는 숙민(肅愍)이다.

 

박성원(朴聖源)

1697(숙종 23)∼1757(영조 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 ( 李縡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 ( 持平 )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 ( 南海 )에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 ( 李柬 )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 ( 韓元震 )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 그는 또한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 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돈효록 敦孝錄≫·≪보민록 保民錄≫·≪돈녕록 敦寧錄≫·≪겸재집≫ 등이 있다.

 

박근원(朴謹元)

1525(중종 20) ∼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일초(一初), 호는 망일재(望日齋). 할아버지는 참판 광영(光榮)으로, 아버지는 빈( 笭 )이며, 어머니는 한백(韓伯)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진사시에 합격, 155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봉교가 되었으나 1554년 친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1555년 예조좌랑이 되었다가 1558년 사간원정언으로 옮겼고, 곧 시강원사서가 되었다. 이듬 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수찬이 되었고, 다음 해 홍문관부교리에 승진하였다. 곧 이어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이조좌랑이 되었다.

1560년 홍문관부응교가 되었으나 이듬 해 임백령 ( 林百齡 )의 시호사건(諡號事件)에 연루되어 파출(罷出)되었다. 1562년 다시 의정부검상 · 사인을 거쳐 사헌부장령으로 옮겼고, 이듬 해 홍문관부제학 윤의중 ( 尹毅中 )과 함께 재이(災異) 방치책에 대한 소를 올렸다. 이어서 집의 ·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64년 호조참의 ·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566년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이듬 해 대사간 · 병조참지를 지냈다. 1569년(선조 2)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예조참판 · 대사헌을 번갈아 지냈으며 이듬 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576년 경기감사를 지내고 1583년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동서 분당으로 한창 논쟁이 심할 때 동인의 중진으로 송응개 ( 宋應漑 ) · 허봉(許 燈 ) 등과 함께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 뒤 1585년 영의정 노수신 ( 盧守愼 )의 상소로 풀려났다. 그는 사관 ( 史官 )으로 있을 때 권신(權臣)인 윤원형 ( 尹元衡 )의 악행을 직서했으며, 처결 수완이 뛰어나 대사헌을 여덟 번이나 지냈다.

 

박연(朴堧)

1378(우왕 4) ∼ 1458(세조 4).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음악이론가.

〔생 애〕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태어나 81세로 고향의 고당리(高塘里)에서 죽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을 시조로 하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서, 중시조는 고려조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던 언인(彦仁)이고, 할아버지 시용(時庸)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아버지 천석(天錫)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김오(金 默 )의 딸이었으며, 부인은 정경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판서를 지낸 송빈(宋贇)의 딸이었다. 자녀는 3남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을 지냈고,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막내아들 계우(季愚)는 박팽년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막내아들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박연도 화를 입을 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걸쳐서 봉직한 공으로 연좌의 화를 면했다. 1405년(태종 5)에 생원, 1411년 진사에 등과했으며 그 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봉상판관 겸 악학별좌(奉常判官兼樂學別坐) · 관습도감사(慣習都監使) · 공조참의(工曹參議) · 중추원사(中樞院使) · 보문각제조(寶文閣提調) ·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율관제작을 통해 편경을 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음악을 완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업 적〕 세종 때에 어느 정도 음악이 정비되었던 이유는 위로 임금의 뜻이 확고하고 아래로는 박연같이 악리에 밝은 사람이 있었으며, 더욱이 해주 ( 海州 )에서는 거서( 橄 黍 : 검은 기장)가 나고 남양 ( 南陽 )에서는 경돌(경쇠를 만드는 데 쓰이는 돌)이 나는 등 시운(時運)이 들어맞았다고 표현하는 글들이 있듯이, 박연의 음악적 공헌은 시대 상황과도 적지않게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순(舜)임금 시대의 유명한 음률가인 기( 尻 )에 비견되기도 하는 박연은 편경의 음정을 맞출 정확한 율관(律管)을 제작하기 위하여 수삼 차에 걸쳐서 시험제작을 했는가 하면,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십 회에 걸친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정확한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문 ‘ 請制律管疏 ’ 을 위시해서 제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글 ‘ 請正祀享雅樂疏 ’ , 축의 제도를 개정하자는 주장 ‘ 請改正 氏 制疏 ’ , 악현의 제도를 옛 법대로 고치자는 주장 ‘ 請樂懸復古制疏 ’ , 그리고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문 ‘ 請印行樂譜疏 ’ 에 이르기까지 무려 39편의 상소문이 ≪ 난계유고 ≫ 에 실려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박한주(朴漢柱)

1459(세조 5)∼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 돈인(敦仁)의 아들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 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자진해서 창녕현감으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 ( 敎書 )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直諫)하였고 또 임사홍(任士弘)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 ( 箚子 )를 올렸다. 연산군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자 외직을 청하여 평해군수·예천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 붕당을 지어 국정을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 평안도로 이배되었는데, 이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 ( 金淨 )· 조광조 ( 趙光祖 )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다. 밀양 예림서원 ( 禮林書院 ), 함안 덕암서원 ( 德巖書院 ), 대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

 

박진(朴晋)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인수(麟壽)이다. 무신 집안 출신으로 비변사 ( 備邊司 )에서 근무하다가 1589년 심수경 ( 沈守慶 )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왜적이 침입해 부산·동래 등이 차례로 함락되는 와중에서 작원(鵲院)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패해 포위되자, 밀양부(密陽府)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고, 군사를 나누어 소규모의 전투를 수행해 적세를 저지하였다.

같은 해 8월 영천의 민중이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永川城)을 근거지로 해 안동과 상응하고 있는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별장 권응수 ( 權應銖 )를 파견, 그들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여러 장수들과 회동하고 16개 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慶州城)을 공격했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한달 뒤 군사를 재정비하고 비격진천뢰 ( 飛擊震天雷 )를 사용해 경주성을 다시 공략해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하였다.

이 결과 왜적은 상주나 서생포로 물러나야만 했고, 영남 지역 수십 개의 읍이 적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전공으로 선조로부터 양피의(羊皮衣)가 특별히 하사되었고,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랐다.

당시 피난 중에 행재소 ( 行在所 )의 호위 문제를 중시하던 선조는 그의 전과를 감안해 불러 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신들이 그가 각 도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할 때 불가하다고 상주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적과 싸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의 하나였다. 1593년에 독포사(督捕使)로 밀양·울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1594년 2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같은 해 10월 순천부사, 이어서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올랐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736년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박효남(朴孝男)

1553(명종 8) ∼ 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호는 일암(一菴). 좌찬성 열(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 세정(世貞)이고, 아버지는 장단부사(長湍府使) 옹( 裵 )이며, 어머니는 생원 최여집(崔汝楫)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당시 무고를 당한 재상을 구해줄 것을 상소하였다. 160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용되었다.

이때에 그를 아끼는 자가 사원(史院)에 있으면서 그를 힘써 천거하였으나, 그의 주장한 바가 시론(時論)에 크게 어긋난 점이 있어 그를 천거한 자는 파직당하고 그는 성환찰방(成歡察訪)이라는 외직으로 나아갔다.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전보되었다. 이때 그는 크게 선정을 베풀어 현민들이 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9월 병조좌랑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호조 · 형조 · 공조의 정랑직을 역임하였다. 1610년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아갔으나 수로공사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태천현감 재직시에도 선정을 베풀어 이 지역의 현민들도 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고 한다. 그의 성격은 외화내강(外和內剛 :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은 강함)하였다.

 

박대덕(朴大德)

1563(명종 18) ∼ 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사화(士華), 호는 합강(合江). 성천(成川) 출신. 아버지는 내자시주부 자진(自 召 )이며, 어머니는 적량만호(赤梁萬戶) 김린(金璘)의 딸이다.

강동(江東)에 유배된 조호익 ( 曺好益 )을 찾아가 문하에 들어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스승 조호익이 유배에서 풀려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게 되자 앞장서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임중량(林仲良)과 함께 선봉장이 되어 중화 ( 中和 ) · 상원 ( 祥原 ) 등지에서 싸워 이겼다.

특히, 조호익과 동료의병장 이희직(李希稷)이 위급하게 된 것을 구원하였다. 평양 부근에서 여러번 승전한 조호익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할 때는 다시 김상익(金商翼) · 윤근(尹瑾) 등과 함께 여러 곳에서 위세를 떨쳤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70세의 노령으로 가족을 따라 산중으로 피난하였으나, 양덕(陽德)에서 적군을 만나자 같이 피난하던 20여명을 지휘하여 싸워 이겼다.

이러한 공로로 김육 ( 金堉 )의 천거를 받아 통정대부 · 가선대부에 올랐다. 당시 피폐한 성천의 학령서원 ( 鶴翎書院 )을 중건하여 정구 ( 鄭逑 )와 스승 조호익을 제향하였으며, 뒤에 그도 여기에 배향되었다. 시문집과 ≪ 군중일기 軍中日記 ≫ 를 남겼으나 전하지 않는다.

 

박권(朴權)

1658(효종 9) ∼ 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성(衡聖), 호는 귀암(歸庵). 희남(希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 侏 )이고, 아버지는 목사 ( 牧使 ) 시경(時璟)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인량(金寅亮)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윤하제(尹夏濟) · 조사기 ( 趙嗣基 ) 등의 잘못을 소로 통박했다가 도리어 평산 ( 平山 )에 유배되었다. 1692년(숙종 18)에 풀려나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서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다.

이어 정언 ( 正言 )이 되어 장희재 ( 張希載 )를 정법(正法)대로 처리할 것과 영의정 남구만 ( 南九萬 )을 공격한 유생들의 정거(停擧 :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것)를 완화해줄 것을 상소했다가 다시 체직되었다. 곧 다시 서용되어 부수찬 · 교리를 거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삼사의 여러 직을 역임하였다.

이어 1697년 외직으로 나갔다가 이듬 해 파직당하였다. 이어 예조참의가 되어 과장(科場)의 폐습을 일소해보려고 상소했다가 구설에 휘말려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황해 · 영남의 감사를 거쳐 이조참의 때 교리 박필명(朴弼明)의 탄핵을 받고 은거하였다. 대사간 등의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다가 경기감사 · 강화유수(江華留守) 등에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171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 해 한성우윤이 되었다. 이 때 청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의 접반사로 백두산에 올라가 지형을 답사한 뒤 조 · 청 두 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증거로서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판 · 동지의금부사 ( 同知義禁府事 )를 거쳐 호조와 공조를 제외한 4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굳세고 과감해 별로 친히 지내는 사람이 없이 사람들로부터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부름을 받았고 또 맡은 일도 잘 처리하였다. 영암의 죽정서원 ( 竹亭書院 )에 제향되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영조 26) ∼ 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차수(次修) · 재선(在先) ·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 정유(貞 否 ) · 위항도인(葦杭道人). 율(栗)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승지 평(坪)이다.

〔관직 경력과 개혁론〕 소년 시절부터 시 · 서 ·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해 박지원 ( 朴趾源 )을 비롯한 이덕무 ( 李德懋 ) · 유득공 ( 柳得恭 )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 李書九 ) 등과 함께 ≪ 건연집 巾衍集 ≫ 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 ( 蔡濟恭 )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 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 북학의 北學議 ≫ 내 · 외편을 저술하였다. 내편에서는 생활 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 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한편, 정조는 서얼들의 누적된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의 하나로 1777년 3월에 서얼허통절목(庶 椧 許通節目)을 발표했으며, 1779년 3월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그를 비롯한 이덕무 · 유득공 · 서이수 ( 徐理修 )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13년 간 규장각 내 · 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기도 하였다.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수 있는 〈 구폐책 救弊策 〉 을 올리게 하였다. 이 때 그가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1790년 5월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절에 정사 ( 正使 ) 황인점 ( 黃仁點 )을 따라 두 번 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元子 :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정조는 한낱 검서관인 그를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해 별자(別咨) 사절로서 보낸 것이다.

1793년 정원에서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 비옥희음송 比屋希音頌 〉 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왕에게 지어바쳤다. 1794년 2월에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를 보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98년 정조는 선왕인 영조가 적전 ( 籍田 )에 친경한 지 회갑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하였다. 이 때 그도 ≪ 북학의 ≫ 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 응지농정소 應旨農政疏 〉 를 올렸으며, ≪ 소진본북학의 疏進本北學議 ≫ 는 이 때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 윤행임 ( 尹行恁 )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 째 연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으로서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예능 활동〕 그가 죽은 연대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다. 그런데 그의 스승이며 동지인 박지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 곧 죽었다는 기록과, 1805년 이후에 쓴 그의 글이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1805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아들은 장임(長稔) · 장름(長 鹿 ) · 장엄(長 目 ) 등 셋인데 막내아들 장엄은 유득공의 아들 본예(本藝) · 본학(本學) 형제와 함께 순조 때 검서관이 되었다.

시 · 그림 · 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청대(淸代) ≪ 사고전서 四庫全書 ≫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 ·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 대련글씨 〉 · 〈 시고 詩稿 〉 · 〈 목우도 牧牛圖 〉 · 〈 의암관수도 倚巖觀水圖 〉 · 〈 어락도 魚樂圖 〉 · 〈 야치도 野雉圖 〉 등이 있다. 저서로는 ≪ 북학의 ≫ · ≪ 정유집 貞 否 集 ≫ · ≪ 정유시고 貞 否 詩稿 ≫ · ≪ 명농초고 明農草藁 ≫ 등이 있다.

 

박세화(朴世和)

1834(순조 34)∼1910. 조선 말기의 의병.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함경남도 고원 출신. 경상(景祥)의 8세손이며, 어머니는 우씨(禹氏)이다.

정통의 위정척사(衛正斥邪)계열 학자로서 서학 ( 西學 )의 전파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태백산으로 피하였으며,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1895년 영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는 등 개혁정치에 반대하였다. 또한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문경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의논하던 중 문경병참소에 붙잡혔다. 곧 한성으로 압송되어 8개월간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남현(南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풍 ( 淸風 )에서 교전 중 붙잡혔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절식(絶食)하다가 23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중빈(朴重彬)

1891(고종 28)∼1943. 원불교 교조. 자는 처화(處化), 호는 소태산 ( 少太山 ). 원불교에서는 대종사 ( 大宗師 )라고 부른다.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 영촌(永村)에서 아버지 박성삼(朴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범상하지 않았으며 신의가 있고 탐구적인 소년이었다. 박중빈은 7세 때에 청명한 하늘을 보고 우주·자연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인간의 생사와 존재문제에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11세 때 시향제(時享祭)에 참여하였다가 산신의 권능에 대해 듣고,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상으로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렸다.

15세 때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의 양하운(梁夏雲)과 혼인하고, 이듬해 정월에 신년 인사차 처가에 갔다가 고대소설 ≪조웅전 趙雄傳≫ 등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20세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20세에 구도행각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구도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음 깊이 자리잡은 숱한 의문들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한 가지 생각으로 뭉쳤다.

25세 때부터는 이 생각마저 잊고 모든 것을 떠나 삼매의 경지로 가는 일체 돈망(頓忘)의 대정(大定)에 들었다가,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 새벽에 대각(大覺: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날을 ‘개교일(開敎日)’로 정하고 있다.

그는 대각의 안목으로 당시의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관조한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교단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그를 따르는 아홉 제자와 함께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금연·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거기서 모아진 자금으로 1918년에 간척사업에 착수하였다.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시작한 간척사업은 교단창립의 정신력 결집과 함께 민중들에게 생활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간척사업의 성공으로 교단의 경제 기초확립과 빈곤한 인근주민에게 농경지를 마련하게 함으로써 생산증대를 가져다 주었다.

간척사업 기간 중에도 밤에는 종교적 인격수련을 계속하여 영육쌍전(靈肉雙全) 이념을 구현시켰다. 사업이 완료된 1919년에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공익정신을 다지기 위한 특별기도를 실시하게 하여 법계(法界:진리의 세계)의 감응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이를 ‘법인기도(法認祈禱)’라 부르는데 이기심으로 가득찬 인간에게 대아실현(大我實現)의 표본을 보여준 정신적 자각운동이었다.

기도를 마친 그는 몇몇 제자들을 대동하여 봉래산(蓬萊山: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변산 소재)에 들어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교법을 제정하였다. 1924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에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내걸고 종교 교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원 ( 禪院 )을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과 신도훈련을 병행 실시하였으며, 상조조합을 개설하여 근검저축정신 고취, 상호협동을 통한 생활안정, 주경야독의 공동생활을 펼쳐나갔다. 전통적인 예법을 혁신하여 ‘신정의례(新定儀禮)’를 제정하는 등 교화의 기틀이 될 여러 가지의 법규도 제정하였다.

1937년에는 대각한 진리를 일원상 ( 一圓相 )으로 상징하여 신앙과 수행의 표본을 삼도록 하는 일원종지(一圓宗旨)를 선포하였다.

1943년 3월에는 기본경전인 ≪불교정전 佛敎正典≫을 친감하여 발행하고,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과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만대에 전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1943년 5월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6월 1일에 열반하였는데, 세수(世壽)는 53세, 법랍(法臘) 28년이었다. 열반 후에 교단의 결의에 따라 그의 법위를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로 받들고, 유해(遺骸)는 원불교 중앙총부의 대종사 성탑에 안치하였다.

그는 교단 창업의 기본계획을 36년 1대로 잡고 이를 다시 12년씩 3회로 나누어, 제1회는 경제기반확립, 제2회는 교서정비, 제3회는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다.

일제 말기에 불법연구회가 민족단체로 지목받아 극심한 탄압 속에서 교단 존폐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위기를 넘게 하는 계기를 삼도록 하였다.

 

박영철(朴永哲)

한일합방 후 의병을  모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朴赫居世(박혁거세)공의 전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느 날 朴赫居世(박혁거세) 왕이 임금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 와서
<임금님, 이웃나라 마한의 왕이 막 죽었습니다. 마한을 쳐들어가는 것이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박혁거세왕은
<남의 불행을 나의 다행으로 만드는 것은 仁이 아니다. 인이 아니면 행하지를 말자. >
라고 하시며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한은 그 뒤 왕이 없어 스스로 박혁거세에게 귀화하여 싸움 없이 통합이 되었다고 한다.

 

朴堧(박연)선생의 전설.

박연은 지극한 효자였다.
그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시묘를 하는데 언제나 호랑이가 지켜주었다.
어느 날 그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구원을 청하는 꿈을 꾸어 쫓아가 보니 이미 호랑이는 죽어 있었다. 박연은 어머니 무덤 아래 장사 지내주고 함께 제사지냈다고 한다.

 

朴仁老(박인로)선생의 전설.

 

박인로의 사후에 자주 영험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례로 공의 제삿날이 가까워져서 뫼밥을 지으려고 벼를 말리려 멍석 위에 널어 두었더니 새들이 이를 쪼아 먹었는데 이상하게도 벼를 먹은 새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부(宗婦)가 제수를 마련할 때 깨끗하지 못한 의복을 입었으면 갑자기 병이 나서 제사 참례를 못하게 되므로 제수를 장만하는 종부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한다.

서원에 오를 때에도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데 하인들이 나막신을 신고 서원 뜰 축에 오르면 반드시 축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또한 3년상이 끝날 때까지 달밤이면 공이 군복차림에 창을 거꾸로 들고 서원 앞뜰을 배회하는  박인로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왜적 섬멸의 염원을 사후에도 간직했다는 애국 충절의 표시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朴堤上(박제상) 선생의 전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 : 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몰래 고구려에 숨어들어 가서, 왕제를 구해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 : 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구하러 가서, 일본 사람들이게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거짓으로 말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해를 탈출시켰으나,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 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 ” 라는 말로 계림 사람임을 주장하니, 악독한 왜놈들은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태워 죽었다.

 

朴晋(박진) 선상의 전설.

삼강행록에 실린 효자 박진(朴晋) :전주시(全州市)

전주 교동에 있는 향교 서남쪽 모퉁이에 초라한 비각이 하나 서 있다. 이가 유명 박진(朴晋)의 효자비각이다.
박진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서 호를 죽정(竹亭)이라 하였다. 그의 선친인 종수(從壽)는 정포은(鄭團隱)선생의 외손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이 고장에 내려와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의 길을 택하다가 아들인 죽정공이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 일에 봉사키로 하여 영암(靈岩)․청도(淸道 )등의 군수를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3년) 8월 영암군수로 있을 때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자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 길에 올랐다.
때마침 큰 장마가 져서 전주 남천(南川)은 냇물이 불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위독한 부친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던 공은 앞뒤를 사릴 겨를도 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거센 물살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랬더니 하늘도 공의 효성에 감동하였음인지 갑자기 물길이 열려 무사히 건널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공의 정성스런 간호도 보람 없이 섣달이 되자 부친의 병환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공은 부친 앞에 울면서 말했다.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게 계시면 말씀하십시오. 어떠한 일이라도 소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음! 내야 무슨 소망이 있을까마는 진달래꽃을 다려 먹어보고 싶구나.」
눈이 가득 쌓인 동지섣달 엄동설한에 진달래꽃이 피어 있을리 만무하였다. 그래도 얼마 여명이 남지 않은 부친의 소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 !. 소자가 꼭 구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
공은 목욕재계하고 남산에 올라 눈을 감고 아버님의 소원을 풀어 주도록 천지시명에게 간절히 기원하였다. 눈을 떠보았을 때 놀랍게도 눈 속에 진달래가 피어나 있었다. 즉시 꽃을 꺾어다가 다려서 올렸다.

 

 

 

朴中美(박중미)선생의 전설.

사패지 표말

선생의 묘소가 있는 마을 입구에 왕이 선생의 공훈에 하사한 사패지가 수천 평에 달했는데 이 토지를 경계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사패지 표석이 지상 6칙 정도의 높이로 세 개가 장승처럼 나란히 우뚝 서 있다.
그 가운데 한 개를 「밀직부사부원군 사패지 표석」이라고 음각으로 깊이 새겨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쓸려고 그 중 한 개를 파서 뽑아내 눕혀 두었는데 그 이튼 날부터 졸지에 온 마을 안에 이름 모를 병에 걸리고 온갖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나 마을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다 누구인지 사패지 표석을 뽑은 것이 화근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표석을 원래의 자리에 도로 갖다 세웠다. 그랬더니 마을에 일어났던 액운이 말끔히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한다.

지금도 그 사패지 표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朴赫居世(박혁거세)의 왕비.

 

알령왕비

박혁거세 임금의 왕비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 알령정이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그 날 사량리 알영정(閼英井)에서도계룡(鷄龍)이 나타났다. 한 노파가 가보니 계룡이 왼쪽 옆구리로 부터 여자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인물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런데 입술이 닭의 부리처럼 생겼으므로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벗겨져(퉁겨져) 떨어 젖음으로 그 냇물을 발천(撥川)이라 하였고, 알영정에서 나왔으므로 아이의 이론을 알영이라 하였으며,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모셨다.

박혁거세와 알영 두 사람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낳자는 즉위하여 신라의 왕이 되고, 여자는 그의 왕후로 삼았다고 하였다.

<출전: 땅은 이름으로 말 한다.>

 

 

 

朴昌輔(박태보)선생의 정섷설

 

장사 박 창보(朴昌輔)

 

구한말 고종 때의 일이다.

간석동(間石洞)에 박 창창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으나, 힘이 센 장사였으며 담도 컸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샛골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때 간석동 일대에는 소문난 무서운 도적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가에서 설령 이 도적을 잡아도 감히 처형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이 도적의 졸개들이 보복을 할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도둑을 체포하여 목을 베기로 작정하였으나, 관가에서는 후환이 두려워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백성을 다스려야할 관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박 창보가 자진해서 그 도둑을 처형하겠노라고 관가에 나갔다.

 

박창보가, 장사인데다가 자진해 나왔으므로 관가로서는 여간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박창보는 마침내 그 도둑 괴수의 목을 잘랐다. 그러나 괴수가 처형을 당하자,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에 도둑의 졸개들이 떼를 지어서 박 창보네 집으로 쳐들어 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박 창보네 집안사람들은 간이 콩알 만해져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제 영락없이 도둑의 졸개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박 창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실로 놀랄만한 용한 꾀 하나를 생각해 냈다. 이리하여 박 창보는 자기 부인의 옷을 달래서 여인으로 변장을 했다. 그러고는 쇠도리깨를 가지고 도둑의 졸개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쳤다. 장사의 억센 힘으로 치는, 쇠도리깨를 맞고 어느 누구가 견디겠는가?

 

삽시간에 몇 놈이 땅 바닥에 쓰러졌다.

에이, 이놈의 집은 여편네까지 동삼을 삶아 먹었는지 모두 장사로구나. 그대로 싸웠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는 걸이렇게 투덜대며 생명을 보존한 놈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 싸움에 도리깨를 맞아 죽어 나동그라진 도둑이 열 명도 더 되었다. 이런 변을 당하자 도둑들도 겁을 먹고 그 후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임오군란 때의 일이다. 일본인 하나부사(花房義質)가 문학동으로 피난을 가던 때였다. 그 때 장사골에 살던 최 춘택(崔春澤)이란 사람이 왜병들의 총을 열다섯 자루나 빼앗아, 한 아름에 안고 간 일이 있었단다. 분노에 찬 왜병들이 이를 갈며 그 최 춘택을 쫓고 있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우리의 장사 박 창보의 의협심이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비호같이 날아 지붕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단단한 기왓장을 걷어서 왜병들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이 난데 없는 날벼락을 맞자, 왜병들도 기겁을 하고는 그 이상 최 춘택을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출전: 인천직할시지 1982년판>

 

 

閼英(알령) 왕비

朴赫居世(박혁거세) 임금의 왕비 알영이 태어난 우물이 알영정(閼英井)이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 그 날 사량리 알영정(閼英井)에서도계룡(鷄龍)이 나타났다.

한 노파가 가보니 계룡이 왼쪽 옆구리로 부터 여자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인물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런데 입술이 닭의 부리처럼 생겼으므로 월성 북쪽 냇물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벗겨져(퉁겨져) 떨어 지고 아름다운 여자 아이가 되었음으로 그 냇물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그리고 아기가 알영정에서 나왔으므로 아이의 이론을 알영이라 하였으며,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모셨다.

박혁거세와 알영 두 사람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되자 낳자는 즉위하여 신라의 왕이 되고, 여자는 그의 왕후로 삼았다고 하였다.

                                                                                                   <출전: 땅은 이름으로 말 한다.>

 

 

 

朴堧(박연) 선생의 일화

 

피리를 잘 부는 전도양양한 청년

박연은 고려 우왕 때 삼사좌윤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현재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이다. 본관은 밀양, 초명(初名- 아이 때 부르던 이름)은 연()이고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인데 그의 집 정원에 난초가 유난히 많아서 이런 호가 붙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고려시대부터 관료를 지낸 가문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앙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박연은 어렸을 때 한양이 아니라 영동에서 자라면서 영동향교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 시절 박연은 좋은 가문의 전도양양한 수재로 소문이 났고, 더불어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산소를 오랫동안 지킨 효자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효성에 대해서는 호랑이도 어린 박연의 시묘살이를 지켜주었다는 민담이 전해질 정도이다.

 

이 시절부터 박연은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특히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한다. 한편으론 그가 가야금을 연주할 때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그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는 다소 과장된 민담이 전해지기도 한다.

박연의 음악적 재능은 조선 초기 학자인 成俔(성현)[용재총화]에도 나오는데, 특히 그가 피리불기를 배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대제학(大堤學)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다. 젊었을 때에 향교(鄕校)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제학은 독서하는 여가에 겸하여 피리도 배웠다. 이에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名手)로 추중(推重)하였다. 제학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 왔다가 이원(梨園 장악원)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校正)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 리듬)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고 하였다.

제학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광대가 제학의 연주를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規範- 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처럼 박연은 어렸을 때부터 피리를 불며 음악에 심취하였고, 더욱이 음악적 성취를 위해서는 신분이 미천한 광대에게도 배움을 청할 만큼 소탈한 성격에 음악적 열망이 가득 찬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피리뿐 아니라 비파, 거문고 등도 익혀서 매우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인용: 인물 한국사>

 

 

 

 

朴堧(박연) 선생의 일화

 

朴堧(박연)이 살던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상, 음악적 재능은 관료로 나아가는 데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연은 음악적 재능과 열망을 누그러뜨린 채 관료의 길을 걷고자 하였고, 이는 28세의 나이에 과거 급제라는 성과를 내면서 순탄하게 시작되었다.

 

관직에 오른 박연은 음악적 재능은 잠시 접어두고 관료로서 승승장구한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출세가도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섭렵하던 박연이 다시금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길을 찾은 것은 당시 세자 자리에 있던 세종의 세자시강원 문학직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박연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뒤 박연을 관습도감(조선 초기 음악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은 개국 초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성군이면서 각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가득하던 세종은 각종 국가 행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고려 때까지 국가행사에서 사용하던 음악은 정형화된 바 없이,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이용되었다. 그래서 궁중음악은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향악과 당나라의 당악, 송나라 때 전해온 아악 등등이 혼재되어 있었다.

 

세종은 박연에게 명하여 이들 음악을 일관성 있게 정리하도록 하였고, 송나라에서 시작된 성리학을 국가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던 조선이었던 만큼 국가 행사에 이용되는 공식 음악의 기본을 아악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세종의 명령과 배려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박연은 우선 이전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악보를 편찬하고 필요한 악기를 만들어 제각각이던 악기의 음을 제대로 조율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譜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어 악서(樂書)를 만들었다. 또 많은 아악기를 제작하였는데, 석경을 비롯하여 생포, 방경, 훈축, 토악, 대고, 영고, 뇌고, 노고, 죽독, 건고, 편종 등을 모두 옛 제도에 맞도록 제작, 혹은 개조하였다. 그리고 이 악기들의 음을 모두 정확히 조율하여 연주 시에 깨끗한 화음을 낼 수 있도록 하였다.악기 조율에 대해서는 역시 성현의 [용재총화]에 박연의 절대 음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종이 일찍이 석경(石磬)을 만들고 제학(박연)을 불러 교정하게 하였더니...제학이 말하기를, “어느 음률(音律)은 일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이 일분 낮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보니 음률이 높다고 한곳에는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종이 찌꺼기의 일분을 떼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또 음률이 낮다고 한곳에는 다시 찌꺼기 일분을 붙였다.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 음률이 바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묘(神妙)함에 탄복하였다.

 

여러 악기의 조율에 필요한 것은 편경이란 악기였다.

이 편경은 돌로 만든 것이어서 쇠로 만든 종같이 더운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아 음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편경의 소리는 다른 여러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이 되었다.

편경은 중국의 악기였고, 당시에는 편경을 만들 돌이 우리나라에 없다고 생각해 쇠로 편경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음의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세종 시기 편경을 만들 경석이 화성에서 발견되었고, 또 편경을 조율할 율관 제작에 필요한 거서(곡물의 일종으로, 도량형기 제작에 쓰임)가 웅진에서 나 박연은 조선의 실정에 맞은 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박연의 감독 하에 세종 8년 가을부터 세종 10년 여름까지 종묘와 영녕전 및 제사에 쓸 편경과 등가에 쓸 편경, 특경 등 528매가 만들어졌다. 이 편경은 중국의 경보다 음이 더 잘 맞았다고 한다.

<인용: 인물 한국사>

 

 

朴堧(박연) 선생의 일화

 

악보와 악기가 마련되자 박연은 본격적으로 궁중음악으로 아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1431(세종13) 박연은 아악에 맞는 악기를 제작하여 왕에게 올렸고, 이 악기로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세종은 국가 공식 행사에 쓰일 음악의 기준을 만든 박연에게 안마(鞍馬- 안장을 얹은 말)를 하사할 정도로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후 박연은 옛 문헌 등을 참고하여 잘못된 부분을 점차로 고쳐나갔고, 마침내 세종 20년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으로 정통적인 아악을 확립하였다.

 

조선의 음악을 성리학에 입각하여 정리해가면서 왕의 총애를 받던 박연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것은 어쩌면 왕과 밀착된 그에 대한 세간의 질투와 경계로 인한 사건이었다. 박연은 승문원(承文院) 자리에 대해 호걸이 날 자리라고 별 의미없는 말을 하였다가 큰 모함을 받기에 이른다.

왕조에서 호걸이 왕가가 아니라 다른 데서 난다는 것은 역성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말을 들은 자가 이를 고해바치자 조정은 들끓었다. 결국 박연은 유언비어 유포 죄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은 누구도 따라 올 자가 없었기에 음악 정리 사업은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마저도 곧이어 복직되었다.

 

이후 박연은 음악과는 다소 거리가 먼 관직을 거치게 되는데,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으며 1445년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까지 올랐다.

 

세종이 죽고 난 뒤 박연은 문종과 단종을 모시며 고위직 관료의 길을 걸었지만 말년에 상당히 큰 불운을 겪게 된다.

그것은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때문이었다.

그의 막내아들 박계우가 세조에게 반대하다가 처형된 것이다. 아들은 잔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며느리는 정난공신 홍윤성 집안의 노비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박연 또한 연루되어 죽을 위기가 닥쳤지만, 그가 3조에 걸친 원로라는 점이 인정되어 파직으로만 그쳤다.

 

막내아들을 잃고 관직마저 박탈당한 박연은 고향인 영동으로 낙향하였다. 임금의 총애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던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박연은 하인 한 명만을 거느린 채 한양을 떠났다. 그가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작별인사 차 나온 지인들을 위해 불어준 피리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일 정도로 슬펐다고 한다.

낙향한지 4년 만에 박연은 81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등졌다.

<인용: 인물 한국사>

 

 

 

 

朴齊家(박제가) 선생의 일화.

 

박제가는 1750(영조 26) 승지(왕의 비서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후에는 어머니가 바느질 품삭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박제가가 평생의 학문적 통지인 李德懋(이덕무) · 朴趾源(박지원) · 柳得恭(유득공) 李書九(이서구) 등과 시귄 것은 18세 때의 일이었다.

이덕무의 집은 박지원의 집 북쪽에 있었고, 서쪽에는 유득공의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이서구의 집이 있었다. 이들은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 함께 어울려서 공부하고 토론하고 시도 짓고 술을 즐겼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 같이 가난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조선 사회는 서자를 농민보다 천하게 여기고 있었다.

박제가는 가슴이 답답하고 서러웠다. 그때마다 시를 짓고 글을 읽었다. 시가 , 편 늘어갔다. 해가 지나갔다. 박제가는 시집을과 무역의 이로운 등 국가 정책이나 제도 개선에 관해 것이다.

 

박제가의 중심 주장은 독특한 상업과 재정에 대한 생각에 있었다. 실학자들은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은 기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박제가는 상업의 효용과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기반이 되는 생산의 진흥을 역설했다.

생산은 우물과 같은 것이다. 이를 줄곧 쓰지 않으면 우물물이 말라붙듯이 만드는 법을 모르게 되어 모든 기술이 없어지고 만시가 다 거칠어진다.”고 말하면서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이 가능하니 덮어 놓고 소비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생산을 늘리는 힘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민 · 수공업자의 생산 의욕마저 위축시생산 그 자체를 마르게 하것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양반의 수효의 과잉에 있다고 말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朴齊家(박제가) 선생의 일화.

 

박제가는 국내의 상업 발전뿐만 아니라 해외무역을 실시할 것도 주장했다. 나리를 부유하게 하는 첩경은 외국과의 무역을 주장했다. 우선 청나라와 무역을 하고, 널리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무역을 할 것을 제시했다.

1779(정조 3) 정조가 규장각에 검서관직을 설치하여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 · 유득공 등의 서자 출신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박제가는 13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그곳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정조를 비롯한 유명한 학자들과 사귀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1801(순조 1) 박제가는 사은사 尹行恁(윤행임)을 따라 이덕무와 힘께 4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사건에 관련된 혐의가 있다 해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805(순조 5)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죽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朴在榮(박재영)공의 효행.

 

 

순리에 좇아 피는 꽃

 

성주군 수륜면 남은 2동 작천 마을 앞에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거기에는 앞면에 처사 밀성 박 공 표효비 (處士密城朴公表孝碑)라고 크게 새겨 져 있다. 이 비석은 6 년간 아버지의 병간호를, 그리고 또 2 년간 어머니 의 병간호를 위해 온 정성을 다한 효자 박 재영(朴在榮)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이다.

 

효자 박 재영은 밀성 대군 언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박 하규(朴 夏奎)이고, 어머니는 서산 유씨로 유 현모(柳賢模)의 딸이다. 5대조 박 만 의(朴萬義)가 병조 참의의 벼슬을 하였고 고조 때부터 아무도 벼슬하지 아니하였으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기로 소문난 집안이며 마을 어른을 대하는 것 하나도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지금도 그 후손들이 선 조의 훌륭한 행적을 기리며, ‘효도와 우애를 박씨 종가의 가훈으로 삼고 살아오고 있다. 효자 박 재영은 1851(조선 철종 2) 음력 2월 초하룻날 성주 작천 마을에서 났으니 바로 지금의 성주군 수륜면 남은 2동이다. 박 재영의 자는 근여(根汝)이며, 처음에는 영석(榮錫)이라 했다.

 

효자 박 재영은 어릴 때부터 효도와 우애가 남달라서 어른들은 한결같이 혹 하늘이 가르치지 않고서야 저 어린 것이 어떻게 저토록 행실이 바를까? 하고 칭찬하였다. 부모의 말씀에 한 치의 어김이 없이 행하였다고 하니 어찌 그토록 순종할 수 있었을까?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께 가는 곳을 아뢰고 집에 돌아와서도 꼭 인사 드리니 바로 출필곡 반필면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어린이들과 놀았던 일도 하나하나 다 부모께 말씀드려 옳고 그른 것을 어릴 때부터 판단하게 하였다. 혹 마을 어른들로부터 맛있는 과일이라도 하나 얻으면 다른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먹어버리는데 먹고 싶은 마음이야 없었을까마는 입에 대지도 아니하고 부모님께 드려 잡수시게 했다. 이토록 유년 시절부터 마을 어른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었으니 부모님 마음 또한 얼마나 기쁘게 해 드렸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한 박 재영은 커서는 몸소 농사일에

부지런하였으며 더욱 부모 봉양에 소홀하지 않았다. 농사 지어 맛있는 음식 을 드리며, 부모님 뜻을 헤아려 늘 밝은 얼굴 표정을 하여 부모님 앞에 섰다.

어떤 때는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어린 아이의 소리도 내고 엉금엉금 기면서 아이들의 장난도 서슴지 아니하여 배를 움켜 잡고 환히 웃으시며 즐거워하는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손으로 등과 가슴을 어루만져 시원하게 해 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드리면 손자들에게 주려고 남기시는 걸 눈치채고 부모님이 한 번 잡수시면 자기도 한 번 먹으며 어느 사이 다 잡수시게 하여 건강하시도록 일심으로 받들어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없게 해 드렸는데 우연히 아버지가 병이 나셨다.

 

효자 박 재영은 불행하게도 전신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앉고 눕기를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낫기 어려운 병이 든 아버지를 위해 그 날부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효자 박 재영은 밤낮 웃옷 한 번 벗고 앉아 있은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께 음식을 드릴 때는 입을 잘 벌리지 못해 손으로 수저를 대신해서 드렸다. 몸 을 기울이고 싶으면 효자가 몸으로 침구처럼 구부려 그 위에 의지하게 하였 고 찬 이불도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여 덮어 드렸다.

 

아버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머리 짐작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다 주선을 하니 이에 더한 효자가 하 늘 아래 어디 있으리오. 혹시 아버지가 시키신 일일지라도 그대로 다 했으 나 마음에 드실까 염려하여 몇 번이고 알아보고 조심하였다.

 

반찬 한 가지라도 입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여 백방으로 귀한 음식을 구해 드리되 집안 살림이 어렵고 구차한 모양을 절대 보이지 아니하 여 심기를 편하게 해 드렸다. 대소변을 효자의 손으로 받아내면서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아니하고 깨끗하게 치우고 씻어 다른 사람 눈에 뜨이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구하러 집을 비울 때나 부득이한 일로 출입을 하게 되면 동생들에게 몇 번이고 부탁을 하여 조금이라도 자기가 모신 것과 다르지 않게 하였다.

 

동생들도 효심이 형과 같아서 봉양하기를 극진히 했다. 효자 박 재영의 부인 배씨도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음식과 약시중에 소홀하지 않고 공경 하니 마을 안은 물론 이웃 고을에까지 칭송의 소리가 높아 갔다.

박씨 집안에 어릴 때부터 효자로 이름난 형이나 동생, 가장, 아내 모두가 놀랍고 갸륵하다 아니 할 사람이 없었다. 마을의 누구 하나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마을 어른들이 의논하여 잔칫상을 차려 효자에게 칭송하여 드리니 효자가 오히려 부끄러운 안색으로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자식이 어버이 섬기는 것은 떳떳한 이치요, 마땅한 일인데 사람이 누가 아니 할 이 있으리오. 제가 한다고 자랑할 것 없고, 다른 사람이 한다고 칭찬할 것이 없거늘 오늘 마을의 여러 어르신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오히려 저의 불효한 죄만 더할 뿐이오니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사양하고 먹지 아니하였다.

 

마을 어른들이 그 음식을 싸서 효자의 부모에게 자시도록 보내고 치하를 했으며, 그 날로 이와 같은 효행 사실을 군수에게 등장하였으며 향교에서도 따라 군수에게 품정하여 임금님에게까지 아뢰어서 효자 정려를 세우도록 하였었다.

 

뒤늦게 이 소문을 들은 효자 박재영이 눈물로 한사코 만류하니 임금님에게 아뢰는 것은 일단 중지가 되었다.

이 때 효행 사실을 알고 행장을 써서 품정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사창 서당, 회연 서당, 대구 칠계, 도동 서원, 남강 서당, 이로정, 달성 향교 등 각 유림의 통문과 이름난 선비들의 글이 오가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꾸만 퍼져 효행의 귀감이 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유림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효자 정려를 세우게 하려 했으 나 한말(韓末)의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으매 어쩔 도리가 없음이 안타까 울 뿐이었다.

6 년을 고생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하늘이 무너지는 통곡을 하며 싸늘 한 아버지 시신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지나가던 나그네까지도 그 비통한 효자의 울음소리에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하니 그 이상의 효행을 사람으로 어찌 행할까? 6 년간 대소변을 받아 내며 아버 지 곁을 떠나지 않고 봉양하던 효자 박재영은 물 한 모금, 밥 한 톨 입에 넣지 아니하고 애통해 하였다.

 

향나무 삶은 물로 시신을 정결하게 씻기는 습과 염도 모두 친히 살펴 조금도 예절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니 그 뉘 자식인들 그렇게 정성을 다 쏟을 수 있으리오.

장사를 지낸 뒤에도 매월 세 번씩 바람이 부나 눈비가 오나 성묘를 하였으며 지성으로 명복을 빌어 복을 마치자 어머니 유씨가 병져 누우시니 나이 많고 근력을 보전하기 어려우나 효자 박 지영은 아버지 병 간호와 조금도 틀리지 않게 봉양하니 또한 2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니 상주가 애고애고하며 몹시 애통하게 통곡하는 소리는 2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나 다를 바 없었다. 예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제삿날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며 정성 드려서 제사를 지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효자 박 재영은 세 동생과 더불어 한 상에 겸상해서 밥을 먹고 늘 대화를 하였으며, 한 이불을 같이 덮고 잠을 자기도 하여 우애를 더욱 다져 화목한 기운이 집안에 가득하게 하였다. 비록 배운 것은 적으나 자식들에게 늘 효도와 우애를 가훈으로 여기고 실천에 소홀함이 없게 가르쳤으며 자손들도 순종하여 따랐다.

 

1910(융희 4) 이 해는 나라에서도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는 한일 합방 조약을 강제로 맺은 해다. 이로써 조선은 27519년을 끝으로 우리 민족은 독립을 잃고 36 년간의 쓰라린 식민지 생활을 겪게 된다. 효자 박 재영이 나서 60 평생을 지내는 동안 나라가 가장 어려운 때였으니 나라와 어버이에게 대한 충효 정신이 더욱 요구된 때였는지 모른다. 효자 박 재영이 2월에 돌아가니 향년 예순이었다. 우연히도 나신 날도 21일 이요, 돌아가신 날도 21일이니 하늘이 정한 운명처럼 느껴진다. 자손들은 사셨던 음력 정월 그믐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낙천의 후손인 성산 배 도병 (裵道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음은 효자에게 그 이상의 배필이 있을 수 없다 하겠다.

가난한 살림에 부모님 병 간호를 8 년이나 했던 세월 동안 부덕을 지키고 시부모 봉양, 남편 받들기에 정성을 다했으며 6 형제를 낳아 튼튼히 길렀으니 맏이부터 희인(禧寅), 기인(璣寅), 병인(秉寅), 호인(昊寅), 개인(玠寅), 종인(宗寅) 이다.

 

효자 박 재영이 농삿일에만 전념하여 일찌기 학문을 배우고 익히지를 못하였으나 사람의 도리를 다하였고 순리로 살아왔으니, 만약 효자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소학 선행편에 올린다면 어느 효자의 이야기가 더한 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효자가 세상을 떠났어도 나라에는 임금이 없어 효자 정려를 세워 후세의 귀감이 되게 못 한 것이 한스럽다면서 효자를 칭송하던 많은 유림의 이름난 선비와 마을 어른들이 박씨 문중을 자주 찾았다.

처음에 세울 수 있었는데 효자의 극구 사양으로 미룬 것이 이렇게 되었다 면서 원통해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8 년의 병간호에 가세는 기울어 지고 가족들은 살 길이 막막하여 동서남북 뿔뿔이 떠나고 말았다.

조상을 여읜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만주와 일본으로 하나씩 고향을 떠났다.

 

조국 광복이 되었어도 효자 박 재영의 후손들은 선조의 행적비 하나 세울 여건이 되지 않았었다. 재물은 비록 없어도 오순도순 우애 있는 집안으로 선조의 얼을 받들어 부모님께 효행하는 일이 많았다.

 

1982년 음력 815일 효자 박 재명의 뜻을 기리는 많은 분들의 뜻과 박씨 집안의 힘이 합쳐 비석을 세우니 바로 처사 밀성 박 공 포효비인 것이다.

어려서도 효도와 우애가 하늘이 가르친 것 같은 그 효행, 부모님 말씀에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종하는 그 자세,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께 고하고 돌아와서도 보고하는 출필곡 반필면의 생활 실천, 맛있는 과일 하나라도 어른을 먼저 섬기려는 그 효심, 비록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어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순리에 살아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효자 박 재영의 효행기를 더듬어 보면서 오늘에 사는 우리의 배울 점이 너무 많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출전성주군 월남초등학교 박 교감

참고 문헌思則錄

 

 

 

 

朴震煥(박진환)의 효행

 

효자 박진환(朴震煥)1605(선조 39) 820일 구며시 봉곡동에서 뒷날 경주 부윤을 지낸 박수홍(朴守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한은 아버지인 박수홍이 공부하는 선비로서 예절이 바르고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이웃의 존경을 받는 것을 늘 보고 자랐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본을 받을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하나하나 실천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이렇듯 총명하고 효심이 지극한 진환은 아릴 때부터 모시고 살던 할니나께 밤 동안의 문안 인사를 꼭 드리고는 손수 방안을 정돈하며, 아버님, 어머님이 기거하는 방을 찾아 아침 문안을 잊지 않고 드렸으며, 잔심부름을 하고는 그 날의 할 일들을 미리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고 행동하기를 펑생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이난 긴 세월을 이처럼 어기지 않고 실천했다는 것은 여간한 끈기와 효성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가륵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혹 집안의 어른들께서 병환이 나서 약을 달일 때는 약탕관 옆에 앉아서 물이 다 닮지나 않는가, 잘못하여 약이 넘지나 않는가 보살펴서 약이 다 달여 져야만 자리를 일어서서 약을 갖다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얼른 마중을 하고 손님을 인도해서 모셔 놓고 아버지께 여쭙는 등 손님 접대를 융숭히 하여 동네 사람은 물론 이웃 동네에서도 그를 칭찬하는 말이 자지하였다고 한다.

 

진환의 나이 14 살이 될 때 아버지 박수흥은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로 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서울에서, 혹은 시골에서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사를 가기도 하고 서울에 남기도 하였으나 아배지의 벼슬이 높았다고 해서 남에게 뽐내거나 남을 엽신여기는 일이 없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사성 있게 행동하여 예절 바른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집 안에서 늘 공부하는 선비로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절 바른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진환의 아버지 박수홍은 경주 부윤의 임기를 마치고 나이도 많고 하여 관직 생활을 끝마치기로 작정하고 고향인 봉곡동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며 펀안히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진환은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펀안히 모시기 위해 백방을로 노력을 하고 아침저녁 식사나 잠자리, 그리고 의복 등을 위하여 전 가족에게 특별 한 관심을 갖도록 유념시키고 보살폈으며 봄가을에는 늙으신 아버지를 위한 보약 마련 등을 하니 인근 사람들은 진환의 극진한 효도에 감동하여 하늘이 알만한 효자라고 청찬이 자자했다.

 

진환의 가정에 나날이 평화로운 생활이 계속되던 이 무렵 그의 아버지는 16443월 초 어느 날 볼일이 있어서 성주에 갔다가 우연히 병이 들어 여관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의 병이 아주 위중해서 고향인 봉곡으로 기별이 왔다. 진환은 황급히 말을 달려 상주 여관으로 달려가 본즉, 명환이 아주 위독해서 의원을 불러 약을 쓰고, 침도 놓았다. 다급하여 어찌할 줄 몰라 갈팡질팡했으나 백약이 무효라 효심이 지극한 진한은 영겹결에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아버지의 업에 넣어 잠시 소생하게는 했다. 그려나, 역시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극진 한 간호의 보람도 없이 그의 부친 박수홍은 상주의 여관에서 돌아가고 말았다.

 

진환의 애통함은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르나, 고향으로 운구(運柩)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진환은

내가 조금만 일찍 왔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 모프는데......’ 하며 애통해서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상심을 하니 보는 이마다 위로하여 말하기를 지나치게 상심해서 몸이 상하게 되면 어찌 장례를 치를 수 있으며 효도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효도를 못 하게 될 위험이 있으니 몸을 돌보아야 한다고 일렀다. 그래서 억지로 기운을 차려 고향으로 돌아와 그 해 5월에 다복동(多福洞, 지금의 봉곡동)의 양지바른 다봉산(多峰山)에 안장하였다. 산소를 모신 진환은 그 날로부터 3년 동안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를 하였다.

 

시묘란 산소 옆에서 산소를 보살피고 거기서 먹고 자고하면서 살아 계실 때처럼 문안을 드라고 하는 것이다.

 

3 년간 시묘를 하는 동안 스스로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으로 생각하고 옷도 남루하게 입고, 먹는 음식도 반찬없는 험한 것만 먹고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애통해 하다가 병을 얻었어도 굽히지 않고 3년 시묘를 끝냈다.

 

그후 얼마 안 된 1650 12월 진한도 또 한세상을떠나고 말았다. 그 때 진환의 나이 46세였다.

 

이 얼마나 가륵한 효심이었는가! 하늘에서도 알만한 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도 이 효행을 높이 칭찬하여 1692(숙종 18)에 박진환에게 세상 사람들이 본받을 뛰어난 효자라는 뜻에서 효자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또한 박진환이 시묘살이를 할 때, 저녁이 되면 산짐승의 소리가 울릴 때쭘 되띤 소리도 없이, 언제 왔는지 큰 호랑이가 여막(움막) 앞에 앉아서 상주를 보호하듯이 밤새도록 앉아 있다가 새벽이 되어 밝아지기 시작하면 언제 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사라지곤 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 이 아닌 시묘살이가 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금오산 호랑이도 효자 박진한의 애듯한 효심에 감동하여 그랬을 것이라는 전살이 지금도 남아서 그 골짜기를 범 어 골이 라고 부른다.

 

효자 집에 충신 난다더니 박진환의 후손 중에는 나라에 벼슬하고 사회에 봉사한 인물이 많이 나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참고 문헌 <孝烈行誌(효열행지)>

 

 

 

 

龍巖(용암) 朴雲(박운) 선생의 일화.

 

창 밖에는 눈이 부슬 부슬 내리고 있었다.

여남은 살밖에 되지 않은 운()은 사랑방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서 아바지의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사이 사랑에 들락거리는 선비들의 주고받는 말씀들을 들서 너도 짐

작했겠지?”

 

.”

 

운은 아버지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공손히 내답했다.

 

어느 곳의 누구는 누구와 가깝고, 어느 누구는 누구와 가깝다느니 하는 말 말이다.”

 

,”

 

四色(사색)이다, ()이다, ()다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 그런 일은 학문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인 줄 압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 그래서는 학문이 안 되지.”

 

그러 한 줄로 압니다. 당이다, 파다. 하는 사람들은 주로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바로 그렇다. 벼슬을 꿈꾸는 사람치고 당이나 파에 무관심한 사람은 적다.”

 

그러한가 봅니다.”

 

간곡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학문은 하되 벼슬을 꿈꾸지 말라는 말이다.”

, 학문을 갈고 닦을 뿐 소자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리다.”

 

그러면 그렇지, 너는 과연 내 자식이로다.”

 

()은 성이 박()씨요 호는 용암(龍岩)이다.

1493(조선조 성종 24) 경북 선산군 해팽면 고리실에서 나셔 일흔 살에 세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쫓아 평생 벼슬은 하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정성을 다 쏟았으나, 그 때의 큰 학자 晦齋(회재)退溪(퇴계)와도 학문을 토론하고 뜻을 나누었다.

 

그가 지은 책으로 자양성학론(紫陽心學論), 격몸편(擊蒙篇), 경행록(景行錄) 등이 있다. 그가 죽고 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 칭찬하는 비를 세우고,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 지내고 있다.

 

그는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극진이 어버이를 받들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슬픔과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여 어머니의 무덤 옆에 띠집을 짓고 3 년 동안이나 어머니의 무덤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어머니가 먹기를 그만 두었는데, 자식이 어찌 좋은 음식을 먹고 즐길 수 있으리오? 하고 3년 동안 무덤 앞 띠집에 살며 1년은 나물죽만을 먹었다.

 

나물죽 한 그릇을 손에 들었다.

추석의 밝은 달이 죽 그릇에 떴다. 마치 달 갈의 노른자처럼 죽 그릇에 달이 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면 저 달을 보고 노래를 불렀을게 아니냐 싶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 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 내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 삼 간 집을 지어

양천 부모 모셔다가,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노래를 옮고 있자니, 그 죽 그릇의 달을 마실 수가 없었다. ‘

옳아, 이 달을 마신다는 것은 어머니의 생각을 마음 속 깊이 새기게 되는 일이기도 하지.’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 나물죽 한 그릇을 찬찬히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덧 밤은 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하더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달을 가란 것이 아니라, 내가 달을 마신 것이다. 어버이 살으실 때는 어버이 고마운 줄 모르다가 어버이 고마운 줄 알 때쯤에 어버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어버이 살았을 때에 섬기기를 정성껏 하여야 할 일이지, 어버이 돌아가신 뒤 이렇게 무덤 옆에 띠집을 짓고 나물죽을 먹으면서 슬퍼한들 효도가 될 것이랴 생각 하니 어버이 살으실 때 더 마음 편하게 못해 드린 일들이 생각났다.

 

서늘한 바람이 찬 바람이 불고 갔다. 삼베 옷 소매 사이로 스머 든 바람이 약간은 차구냐 하는느낌을 주었다. 추석이 지나면 가을 걷이를 해야 하고, 가을 걷이을 마치면 서리가 오고 얼음이 얼고 추위가 몰아치겠지. 엣 풍속에 효자는 어버이 모신 그 무덤 옆에 띠집을 짓고 나물죽을 마시면서 3 년을 지내야 했다지만 생각하면 그런 일은 다시 생각해 불 일이다.

 

이려다가 콘 병이라도 얻으면 그것도 불효가 아니겠느냐, 머리털 하나라도 부모가 물러 준 것이라 소중히 해야 한다고 했는데 몸을 튼튼히 가지지 못함도 불효가 아니겠느냐?

 

그리나, 3 년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

정신을 모아 어버이 생각에 골돌하면 몸에 병인들 달려들쏘냐, 어떠한 어려 움이 있어도 3 년을 이렇게 지내야 한다. 어머니는 무덤에서 춥게 지내실터 인데 3 년만이라도 옆에 있어 드려야지.

 

시조를 지어 본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고 멀다.

 

천 리 만 리 길은 어스럼 하건마는,

가다가 엎어진단들 가던 걸을 말려야.

 

이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학문에만 힘을 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부모에게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조상들을 섬기는 일에 온 정성을 다 기울었으니 후세에 그의 효행을 기리고, 그의 학문을 길이 기리기 위하여 효자비각을 세우니, 비석의 글씨는 우리나라 명필 한 석봉이 앞면을 쓴 바이며, 마을에 명경당(明鏡堂)을 지어 해마다 그를 기리는 사람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영덕군지출전  .

 

 

 

朴忠國(박충국)의 효행.

 

잉어와 올빼미의 눈물

 

청송군 진보에서 안동 방면으로 국도를 따라 약 6km 가면 청송군과 안동군의 경계를 이루는 가랫재에 이른다. 여기서 텃골로 들어가는 갈림길 국도변에 초라한 정려각(旌閭閣) 하나가 서 있다.

 

고종 288월에 박 충국 공이 동생 龍國(용국), 俊國(준국), 興國(흥국)과 함께 사효 동시 정려 (四孝同時旌閭)를 받고 고종 31년에 세워진 정려각이다.

 

효자 박 충국 공은 진보면 기곡 사람이다· 그는 1808(순조 8)에 출생 하여 1873(고종 10)까지 살았었다. 공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 서 글공부는 하지 못하였지만 효성만은 타고나서 4 세 때부터 밖에서 과일이나 고기를 얻으면 먹지 않고 부모님께 갖다 드렸고, 때로 부모님께서 병환 이 나시면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밤을 지새웠다. 공의 나이 10 세에 아버지 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공은 원근 각지를 분주히 다니면서 의 원을 찾아 묻고 약을 구해 기어이 병을 낫게 했다. 공에겐 세 동생이 있어 모두 효성이 지극했다. 집은 가난하였지만 힘 모아 애써 먼 곳까지 다니면서 끊이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다 봉양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무상해서 어머니께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공과 그 형제들은 백방으로 다니면서 의원을 찾고 영약을 구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공은 초조해 안절부절 하는데 어머니께서 강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공은 기뻐하며 그것이 영약이 되겠구나 하고 강가로 뛰어나갔다.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강은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다.

 

한겨울 밤의 매서운 찬바람만 스쳐 지나간다. 공은 미친 듯이 캄캄한 빙판 위를 밤이 새도록 이리저리 헤맸지만 얼음언 강에서 고기가 얻어질 리 없었다. 이윽고 동녘이 밝아지면서 동이 텄다.

그제야 사방이 보였다. 온 강바닥은 얼음뿐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고기가 살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차디찬 냉기만 천지를 감싸고 공의 뼈마디 속까지 스며들었다. 하도 기가 막혀 공은 그만 얼음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디찬 얼음 속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빌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물속의 고기를 잡아 우리 어머니 병을 고치게 해 주소서·”하고 간절히 빌었다. 바로 그 때다.

쩡 하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에 한 쪽을 보니 바위 옆의 얼음이 갈라지면서 한 자가 넘는 큰 잉어 한 마리가 얼음위로 튀어 올라오지 않는가!

공은 하도 기쁘고 고마워서 뛰어가 잉어를 안고 와서 달여서 어머니께 드렸으나 세상일은 허무해서 이미 때가 늦어 어머니께선 그 약효를 보기도 전에 숨을 거두 시고 말았다.

 

공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공은 며칠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비통한 울음소리만 그칠 줄 몰랐다. 이러한 와중에 하늘도 무심한지 아버지마저 큰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어머니를 여 읜 슬픔도 가시기 전에 아버지 병구완에 정신이 없었다. 원근 각처의 용한 의원은 다 찾아서 묻고 좋은 약이란 다 써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라 공은 초조히 울면서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는데 숨소리가 끊길 듯 말듯 죽은 듯이 눈감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눈을 겨우 뜨면서 잉어 고기를 먹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시면서 눈을 감는 순간 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하면서 단숨에 뛰어 강가에 이르니 마침 소낙비가 쏟아진 뒤라 강물이 넘쳐흐르고 붉은 흙탕물이 강바닥을 메워 흐르고 있었다.

도저히 그물을 치거나 낚시를 던질 수가 없었다. 강 아래위를 미친 듯이 헤맸지만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아버지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 ” 이렇게 생각하니 안절부절못했다.

공은 울면서 하늘을 우러러 잉어 한마리만 저에게 주시어서 저의 아버지 병을 고치게 하소서이렇듯 간절히 애원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을 때 눈물로 잘 보이지 않는 침침한 속에 한 자가 넘는 큰 잉어 한 마리가 붉은 물결을 가르면서 강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공이 너무 기뻐 잉어를 잡아 안으니 움직이지도 않고, 굵은 두 눈망울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지 않는가?

 

공은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려주신 영약일 것이다·’하고 곧 집으로 와서 달여 봉양했더니 차도가 있어서 이웃의 모든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하루는 또 아버지께서 꿩고기를 원하시기에 산과 들을 헤매면서 꿩한마리 잡기를 간절히 바랬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한여름에 꿩 한 마리가 논밭 초막 속으로 날아와 그것을 달여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환이 쾌유되었다.

 

다음 해 겨울 아버지께서 다리에 종기가 나서 위독하게 되셨다. 용한 의원 을 찾아 물으니 올빼미 기름이 아니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여 그것을 찾아 숲 속을 며칠 밤낮을 헤맸으나 얻을 길이 없었다. 애타게 구하려고 헤매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잡자기 올빼미 한 마리가 자기 집 들보에 날아오지 않는가!

공이 너무 기배서 올빼미를 안으니, 굵은 두 눈에 눈물을 흘린다. 그 기름으로 종기에 발랐더니 즉시 나았고, 그 해 겨울 공은 아버지의 기력을 도우려고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으려다 큰 자라가 나왔다. 이를 달여 드렸더니 아버지는 쾌유되시고 백세가 넘도록 장수하셨다.

 

공은 오랜 세월 아버지 병간호로 몸져 눕게 되었다. 병석에서도 부친 보살피기에 정성을 다하고 급기야 운명하니 온 가족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 옆에서 "충국아·”하고 부르니, “아버지, 충국이 여기 살아 있습니다.

 

안심하소서.” 하면서, 죽었던 사람이 몇 번이나 일어나 앉으면서 식구들에게 나는 백세가 넘은 아버지를 두고 가는 불효자식이니 나대신 부모님을 잘 봉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 광경을 보는 사람마다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때 그의 나이 66 세다. 남은 아우들은 형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모시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니 하늘이 내리신 효행의 집안이었다.

 

이리하여 박 충국 형제의 효행은 원근에 알려지게 되었고, 유림에서는 이를 크게 청찬하고 박충국 집안을 표창하도록 조정에 보고 드리니 고종 임금께서는 사효 동시 정려(四孝同時旌閭)의 교지를 내리셨다. 이 교지에 따라, 청송군 진보면 추현동 국도변에 정효각이 세워졌으니 지나는 길손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출전청송군 진성중학교 권 교감

참고 문헌 四孝子實錄, 孝烈行誌,

 

 

 

 

朴遂基(박수기)의 효행.

 

이루지 못한 효도

 

천지신명이시어, 어머니 병환을 하루 속히 낫게 해 주소서 !

어머니 병환이 나을 길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하겠나이다. 제발 제 어머님 병환을....

깊은 산 속의 한 암자에는 쉰을 갓 넘은 듯 한 사람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고, 지긋이 내려감은 두 눈은 무엇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렇게 지성으로 기도 올리기를 수없이 하던 어느 날, 마침 지나가던 늙은 스님이 이 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며, 무슨 소원이 있길래 그토록 간절하게 빌고 있 소?”

, 저는 요 아래 대거리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박 수기(朴遂基)라는 사람인데 저의 모친이 앓아누워 계신 지 7 , 좋다는 약을 다 써 보고 용하다는 의원을 두루 찾아보았읍니다만, 차도가 조금도 없어서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이렇게 빌고 있는 중이올시다.”

박 수기라는 사람은 스님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이어서 자기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박수기는 밀양 박씨로 조선 숙종 때에 청송군 현서면 대거리라는 마을에 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인정이 많았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일에는 굽힐 줄 모르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 그의 친척 중에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혼자 서 외롭게 살아가는 주()씨 부인이 있었는데, 이 부인은 나이가 들수록 적적하고 생활이 어려워져서 마땅한 사람을 골라 양자를 들여 의지하고 대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그래야 지하에서나마 먼저 간 남편을 떳떳이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던 중 박 수기라는 소년의 사람됨을 안 주 씨 부인은 박 수기의 아버지인 박 지목(朴之睦)에게 염치 불구하고 박 수기 소년을 양자로 달라고 간청하였다. 박 지목은 주씨 부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며칠을 두고 밤잠을 못 이루며 생각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박 수기 소년은 외롭게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주씨 부인을 도와 주자는 갸륵한 마음에서 자진하여 양자로 들어가겠다고 조르니 아버지도 할 수 없이 아들 수기의 뜻에 따랐다.

 

열 살이 된 박 수기 소년이 막상 양자로 들어가서 보니, 양어머니는 혼자서 살아 왔던 처지라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수기는 희망을 가지고 양어머니를 모셨다. 저녁이면 부지런히 나무를 하여 어머니 방을 따뜻하게 해 드리고, 부잣집의 심부름 삯으로 어머니 입에 맞는 반찬을 구해 드렸으며 , 어머니를 따라 들로 나가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도왔다.

 

그가 어느덧 나이가 차서 이웃 동네에 사는 평해 황씨의 규수를 아내로 맞았다. 그의 아내 또한 부지런하며, 행실이 바르고 착해서 남편을 잘 받들고 시어머니를 지성껏 봉양하니 새 며느리를 맞은 수기네 가정에서는 웃음꽂이 멎을 날이 없었다. 수기 부부는 손을 맞잡고 열심히 일을 하여, 몇 해 안 가서 살림이 늘어나 살아가기에 남부럽지 않았고, 아들 진안(震安)이도 얻게 되어 손자를 보게 된 주씨 부인은 이 세상의 행복이 모두 자기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어머니가 65 세가 되던 해에 우연히 병을 얻어 앓아눕게 되었다. 두 부부가 7 년을 하루 같이 약과 의원을 찾아다닌 보람도 없이 병은 더욱 깊어만 가기에 마지막 한줄기 희망을 안고 천지 신명께 빌고 있었던 것이다.

 

박수기의 말을 다 듣고 난 스님 이 마을로 내려와서 어머니의 맥박을 짚어 보고는 간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충청도 제천(堤川)골에 김 재구(金在九)라는 의원을 찾아가 만충골 (萬虫骨)이란 약을 구해 복용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며 떠났다. 뛸 듯이 기뻐한 수기는 다음날 새벽 제천 골을 향했다. 제천이라면 의성, 안동, 영주를 거쳐 험준한 소백산맥의 죽령 고개를 넘어 가야 하는 멀고도 험한 길이었으나, 발바닥이 헤어지는 아픔을 참고 며칠만에 약을 구하여 대거리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더운 여름의 숨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멀리 보이는 마을 자기 집 근처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뛰어가 보니 과연 자기 집이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불길을 잡으려는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겨우 불속을 빠져 나왔다는데, 병든 어머니가 불길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을 들은 수기는 미친 듯이

어머니 ! ”

하고, 울부짖으며 불속으로 뛰어 들어 갔으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어머 니를 구하러 들어간 갸륵한 효자에게 나올 틈을 주지 않고 사정없이 집어 삼키고 말았다.

 

다만 마지막 울부짖던 소리만 메아리쳐 되돌렸을 뿐이었다.

불길이 잡힌 후 잿더미 속에서 어머니를 꼭 끌어안고 죽은 박 수기의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누구 하나 목놓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타다 남은 약봉지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였다. 그 해 박 수기의 나이가 52 세고 양어머니는 72 세였으며, 그 해가 1756(영 조 32)이다.

 

이 갸륵한 효행의 이야기가 200여 년 동안 대거리 박씨 문중에 내려오다가 1962년 봄에 은현공(隱賢公 ; 박 수기 호)의 효행을 기리고,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6대 손 박 찬우(朴燦佑)7대 종손이 되는 박 대규 (朴大奎)를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은 것이 지금 대거리에 있는 은효각(隱孝閣)이다.

 

출전청총군 화목초등학교 엄 교감

참고 문헌孝烈行誌, 密陽朴民族譜卷之四, 靑松香氣

 

 

 

朴鍾鎭(박종진)의 효행.

 

오백 리 눈길도

 

박 종진(朴鍾鎭)은 본관이 밀양이며, 통정대부를 지낸 창주(昌周)의 네째 아들로서 문경군 마성면 정리(鼎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자상하여 나이 겨우 5,6 세에 엄전하고 어른스러웠으며, 효심이 남달라 한 번도 부모의 말에 거역하거나 걱정을 끼친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사람을 대함에 늘 겸손하였고, 본인은 새 옷을 잘 안 입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동정심이 많아 어려운 이웃집에 양식이나 음식을 자청하여 나누어 주는 인자함을 보였다.

 

공이 15 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침식을 잊고 애통해 하며 매일 묘소를 찾아 통곡하니 보는 이가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공이 20 여세 되던 해 뒷집으로 살림을 났으나 불행히도 융감(장티프스)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 어머니도 몹시 편찮으셔서 출입을 못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차마 누워서 지켜볼 수 없어 백씨 댁에 무릎으로 기어 가 병을 간호해 드렸다. 어머니가 냉수를 청하니 가져 와서는, 병환에 계신 어머니께 냉수를 드릴 수 없다 하여 숟가락으로 냉수를 떠 공의 입 속에 넣어 따스하게 한 뒤 드렸다고 한다.

 

, 볼 일이 있어 밖을 나갈 때는 꼭 아내에게 침식과 의복 등 생활에 소홀함이 없도록 몇 번이나 당부 하였고, 떠나가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한 번 더 어머니 거처를 돌보고 재차 부탁한 후 떠났다고 한다.

일을 마치면 곧 바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 그 동안의 볼일과 내왕길에서 본 이야기까지 소상히 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 어디에서 좋은 약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하루가 급하게 지어다 드리고, 약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긴 겨울밤엔 어머니가 심심하실까 봐 각종 고담, 소설 책을 밤이 늦도록 호롱불 앞에 앉아 읽어 드리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즐겁게 해 드리는 등 어린아이처럼 응석부리거나 어리광을 부려 평소에도 어머님을 즐겁게 해 드렸다고 한다.

 

공이 27세 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자리에 눕게 되자 공은 여러 곳에서 약을 구하여 드렸다. 약은 꼭 손수 정성들여 달여 양을 조절하여 드렸 고,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약 달이기를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병 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수소문 끝에 강원도 영월에 엄 모라는 이름 높은 의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왕복 오백 리 길을 걸어 가서 약을 짓 고, 밤길을 재촉하여 돌아왔다. 섣달 엄동에 눈이 많이 왔을 때라 손발이 얼부풀고, 손은 터져 피가 흘렀으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으며, 이런 정성이 기어코 어머니를 낫게 하여 장수를 누리게 하였다.

 

뒤에어머니가 69 세로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 하다시피 하여 비통함에 잠겼으며, 마지막으로 좋은 묘터에 모셔야 겠다는 효심은 산의 높고 깊음을 가리지 않고 헤매어 찾아 다녔다. 그 지성에 하늘이 감동 하여서인가 오래 묵은 산삼 한 뿌리를 얻게 되어, 공은 이를 형님인 설초공에게 드리고 복용하시기를 간하였다.

형님께서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십니다. 가사를 돌보시고, 또한 선고 양위분(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장례에 많이 쇠약하셨으니, 이를 복용 하시고 조속히 기력을 회복하시어 양위분의 안장을 마치시기 바랍니다.”

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형은 이를 듣지 않고 아우가 먹도록 돌려 보냈으나, 지성스런 간청에 형이 복용하였다.

 

그러던 중 가은면 왕장리 강복산 기슭에 좋은 묘터를 구하게 되어 무사히 안장하였다. 공은 안장을 마칠 때까지 여섯 달이 넘도록 추운 겨울인데도 방에 불을 넣지 않았으며, 요 대신 거적으로 거처를 하였고, 그 후 평생토록 술과 고기,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안장 후에 형제는 50 리의 험한 산길을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산소를 참배 하고 오니 인근 면민에까지 감동을 주었다 한다. 그리고, 부모 산소 부근에 있는 척첨대(陟瞻臺)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으며, 그 후에 바위에 새겼으니 평소의 효심이 남다르게 지극했음을 엿볼 수 있다.

 

강복산은 높고 완장에 물이 흐르매

아버지, 어머니를 하루라도 잊을소냐.

산이여 물이여 오래 오래 있어 주오.

선산이 여기에 있어 부모를 모셨도다.

山高降福 水流完章

父兮母兮 一日敢忘

 

또한 공은38세 부터 서당(방 두간)을 손수 지어 모곡(수업료)을 일체 받지 않고 마을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경 야독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효행과 경로 정신을 숭상하고 몸소 실천하기를 광복 전까지 15 년간 계속하였다.

공이 1950년 음력 6월에 62 세로 세상을 떠나니 모두가 애석해 하였고, 많은 문상객이 슬퍼했다. 장사를 지낸 후 약 10 개월이 지난 이듬해 4월에 공의 묘분 중앙부가 우연히 갈라져 이를 보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공의 효성이 지극하고 사람에게 인자하여 천상께서 옥경(玉京)으로 공을 데려갔다느니, 신선으로 화신(化身)하여 승천 하였다느니 하였다.

 

공의 효성을 길이 전하여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면민들이 효자각 건립 추 진위원회를 조직하니, 그의 형인 설초공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따름인 아우의 일을 효자각 까지 건립하려는 것은 너무 송구스런 일이며, 또 면민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옳지 않으니 중지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후 면민의 주선으로 19594월에 마을 앞 큰길가에 창효각(彰孝閣)을 세웠으 며, 지금도 보는 이로 하여금 새삼 그의 뛰어난 효성을 일깨우고 있다.

 

출전운경군 희양초등학교 권 교감

참고 문헌 聞慶郡誌, 孝烈行誌, 蘇隱實記,

 

 

 

 

 

항렬(行列)

두정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4

魯(노),性(성)

炳(병)

28

仁(인),柱(주)

相(상)

32

海(해),潤(윤)

漢(한)

25

在(재),信(신)

圭(규)

29

烈(열),容(용)

熙(희)

33

植(식),根(근)

權(권)

26

鏞(용),商(상)

鐘(종)

30

重(중),時(시)

俊(준)

34

然(연),憲(헌)

應(응)

27

浩(호),洙(수)

淳(순)

31

鎬(호),欽(흠)

九(구)

35

堯(요),均(균)

培(배)

 

 

밀성부원군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7

熙(희),休(휴)

31

棅(병),棋(기)

35

洛(락),泳(영)

28

奎(규),基(기)

32

燉(돈),燁(엽)

36

東(동),柱(주)

29

鏞(용),善(선)

33

重(중),南(남)

37

炳(병),炫(현)

30

洙(수),洽(흡)

34

鎬(호),鎔(용)

38

憲(헌),錫(석)

 

판도판각공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9

漢(한)

33

鎔(용)

37

在(재)

30

彬(빈)

34

泳(영)

38

鎬(호)

31

炳(병)

35

東(동)

39

泰(태)

32

圭(규)

36

熙(희)

40

根(근)

 

밀성군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7

善(선),濬(준)

30

裕(유),種(종)

33

淵(연),植(식)

28

泳(영),柱(주)

31

喜(희),鏞(용)

34

和(화),思(사)

29

根(근),然(연)

32

常(상),海(해)

35

炳(병),城(성)

 

밀원부원군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源(원),淳(순)

24

鎬(호),鐸(탁)

29

周(주),喜(희)

21

秉(병),仁(인)

25

潤(윤),海(해)

30

鎔(용),鎰(일)

22

燮(섭),烈(열)

26

東(동),穆(목)

31

滿(만),洛(락)

23

聖(성),堯(요)

27

愚(우),敦(돈)

32

秀(수),根(근)

 

1985년 인구조사 결과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641,821가구, 2,704,6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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