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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차로] 한 판 신명나게 벌리면 될 터

'서당 개 삼년 만에 풍월 읊는다'는 나같은 사람 두고 한 말이다. 서당에서 삼년 동안 매일 글읽는 소리 듣다보면 개 조차도 글 읽는 소리를 내게 된다는 말인데 나야 말로 전문 지식 없이 훌륭한 선생님들 귀동냥 덕분에 '툭 하면 담 너머 감 떨어지는 소리' 눈치 잘 채는 순발력으로 얼렁뚱땅 식자(?) 층에 끼인다.

영문학박사 받아도 미국 태생 어린애 발음 못 따라간다며 국문학 공부해 세계적인 학자나 문인 되라는 국어 선생님 말씀에 홀딱 넘어가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적인(Worldwide)'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 라는 단어는 얼마나 몽매하고 유혹적이며 가슴 뛰게 하는지. 바깥 세상 전혀 구경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일수록 집념을 불 태우기 마련이다.

이름이나 영향 따위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그 분야에 권위자가 되려면 한 우물 파고 연구실 책상에 머리 박고 학업에 몰두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내 청춘은 너무나 아름답고 장렬했다. 잡사에 능하고 김삿갓 방랑끼에 돈키호태식 발상, '오늘 놀고 내일 또 놀자'식의 신출귀몰 손오공 처세술로 수업 빼먹고 남녀 짝 지어 딸기밭 수박밭 현지 답사 가느라 학업에 정진할 시간 없이 보낸 학창시절. 대학 2학년 때 추천 받고 그때 부터는 스스로 세계적인 여류시인으로 등극, 음풍농월(吟風弄月)의 객기로 방황하며 암담한 시대의 비극을 한탄했다.

'대학 가서 4년 내내 졸다 와도 가는 게 낫다'는 말은 나를 보면 일리가 있다. 천우신조는 때때로 나타난다. 내 인생의 첫 번째 하늘이 내린 도움은 무학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유식하신 내 어머니고, 두 번째가 내게 배움을 주신 교수님들이다. 나는 지방대학에 다녔지만 우리나라 국어국문학사에 족적을 남기실 석학 중에 석학이신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큰 영광을 누렸다. 언어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제6대 국립국어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신 남기심 교수님의 촌철살인 날카로운 비교언어학은 무디고 허왕된 내 시적 언어와 난잡한 문법을 깨우치게 했다. 내가 사고를 칠까 말까 하는 순간 마다 선생님의 다정하신 눈길은 내 손을 붙잡으셨다. 저서와 연구활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한국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조동일 교수님의 명강의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타협 및 이유 불가, 한 학기에 거의 모든 학생을 실격시킨 관록이 계신터라 다른 과목은 다 빼먹어도 필히 교실에 입장했다. 그 때 조금만 더 열심히 배웠더라면 이번 소설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기차는 떠나갔다. 아! 그리고 여대생들의 로망, 구비문학 및 한국 고전소설의 석학 서대석 교수님은 총각 선생님. 딱 벌어진 어깨에 주머니에 손 반쯤 넣고 무가(巫歌)나 판소리를 읇조리실 때면 처녀들의 가슴은 녹아내렸다. 그 싱그러운 몸짓, 추억의 언어, 사랑의 말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구비문학(口碑文學)은 구전문학(口傳文學) 즉 '말로 전하는 문학'이다. 구비는 '말로 된 비석', 즉 비석에 새긴 것처럼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말이라는 뜻이다. 이제, 나는 청춘의 말들을 적은 두 편의 장편을 쓰려고 한다. 생의 마지막 비석에 새길 생생한 언어들을 찿아 나설 것이다. 세계적이지 않더라도 세계를 향해 질주하며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는 자들의 아픔과 눈물, 웃음꽃 피는 이야기를 판소리꾼처럼 흥에 겨워 노래하리라. 미친듯 작두 위를 춤추는 선무당이 되면 어떠리. 딱 한번뿐인 인생이니 딱 한 번 신명나게 한 판 벌리고 가면 될 터.




이기희 / 윈드화랑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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